2024년 12월 한 해를 보내며(울산에서) / 정희연
2024년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직업에 특성상 한 곳에 머물지 않고 현장을 옮겨 다닌다. 전남권을 벗어나 울산에 온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이곳의 낮선 환경은 내게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왔다.
울산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산업도시다. 2023년 말 기준 인구 115만 명 안팎의 울산은 수출액 기준으로 전국에서 세 번째 가는 광역시가 되었다. 중화학 공업의 대표 격인 ‘3대 산업’ 이른바 조선·자동차·석유화학으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 산업은 모두 7300여 개 회사와 18만 명에 가까운 인원을 고용하고 있다.
울산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석유 비축기지 건설에서 시작된다. 조선총독부가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바로 제국주의 일본 전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평시에는 교역항 기능을 하다가 전쟁에는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일본 규슈 나가사키에서 배를 타고 우리나라로 올 때 경주로 가는 관문이 바로 이곳이다.
울산은 이케다에 의해 일제 강점기에 영토를 확장하려고 공업 도시이자 석유 비축 기지로 설계했다. 공업항, 어항, 연락항, 무역항, 공항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분류했다. 이것을 엮으면 일본의 태평양전쟁을 이행하려는 병참기지로 그 역할이 중시됐다.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전투기의 급유지가 된 것이다. 기름을 넣고 전투기를 띄워 중국 또는 러시아와 교전 지역인 만주와 연해주 등으로 바로 출격할 수 있는 중간 기착지였던 셈이다. 물자는 배로, 인력은 기차로, 전투기는 바다로 움직일 수 있어 여러 가지 이점이 있는 최적화된 곳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산업도시 울산’의 시작은 1962년 울산공업 센터 지정이다. 1962년 1월 13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같은 달 27일 울산을 특정 공업 지구로 공포했으며 2월에는 울산 공업 센터 기공식을 거행했다. 유월에는 울산군 울산읍,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청량면, 범서면을 통합해 울산시로 승격했다. 이후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진출하여 지금의 3대 산업을 구성했다. 이러한 서사를 단순하게 이해하면 산업도시 울산의 형성이 박정희와 현대그룹이 이룬 성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누적되어 탄생한 것이다.
2010년대 초반까지 대기업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가 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대 자동차나 현대 중공업 생산직 노동자가 되는 길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이러한 과정을 마치지 못했을 때, 회사 내 직업 훈련원을 나오면 되었다. 몇 주 과정을 마치면 곧 대기업의 생산직 노동자가 될 수 있었다. 노동 수요가 큰 시기에는 중졸 이하의 학력을 가졌더라도 채용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공부 못 하면 공장 가면 되지, 취업 못 하면 시집 가면 되지”라는 믿음은 거저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울산도 지금 어려움을 격고 있다. 제조업 발전의 중심에서 말단 생산기지로 추락하는 울산이 되어가고 있다.
연구소가 떠난 도시 / 흔들리는 낙관주의 / 엔지니어의 수도권 선호 / 귀족 노조의 한계 / 정규직을 뽑지 않는 공장 / 생산성 동맹의 파열 / 하청 구조로 연명하는 도시 / 청년이 떠나는 생산 도시 / 생산 도시를 기피하는 여성 / 공부를 많이 시키는 데 사무직을 뽑지 않는 도시 / 젊은이가 외면하는 비정규직 도시 / 노동자의 선택과 트릴레마(Trilemma, 셋 중 둘밖에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 임금 평준화, 임금 극대화, 고용 창출.) / 생산 기지로 전락하는 도시 / 청년과 여성이 일하기 가장 나쁜 도시 / 95 대 5 성비 등
풀어야 할 숙제가 산재하다.
2024년 마지막을 울산에서 보내고 있다. 도시의 변화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일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대한민국 대표 산업도시로 알려진 도시는 안전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보이지 않는 갈등이 뒤엉켜있었다. 도시의 고용 경제는 빨간불이다. 바다에 안개가 자욱하다. 배는 계속해 달리고 있고, 모든 승객은 잘 가고 있겠거니 하고 있다. 도시나 사람 모두가 익숙한 환경에 머무르며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 위기를 맞는다.
도시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철홍성 같았다. 일부 노동조합은 자신의 권리를 강화하고 지키는 데 초점을 맞추며 변화에 대응하지 않았다. 임금인상 고용 안정을 이유로 파업과 충돌이 반복되었고, 기업은 살아남으려고 정규직을 줄이고 그 자리를 하청 업체로 채웠다. 연구소는 수도권으로 이전되고 생산 시설 마저 옮겨가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정체되고, 정체는 곧 후퇴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청년들은 고임금 대기업 정규직의 꿈을 꾸지만, 현실은 만만하지 않다.
안개가 자욱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새로운 길을 찾는다.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안개가 짙을수록 멀리 보려는 노력이 커지고, 더 나아가려는 의지가 생긴다. 도시를 보며 나를 읽는다. 울산의 문제는 나의 문제였고, 도시의 가능성은 곧 나의 가능성이었다. “매일 내딛는 한 발짝이 진짜 삶이다.” 공지영의 에세이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 나오는 글로 내일을 응원한다.
참고자료
- 장벽익, 『울산지역 산업론』, 울산대학교 출판부, 2018년.
- 양승훈,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부키(주), 2024년.
첫댓글 '울산의 근대사' 강의를 듣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 와 울산의 애로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 가나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과 부정은 있는가 봅니다.
매일 새로운 한 발짝을 내딛는 선생님의 삶을 응원합니다. 삶이 지루할 틈이 없겠어요.
맞아요. 주중보다 주말을 더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하하!
'변화하지 않으면 정체되고, 정체는 곧 후퇴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저도 엊그제 이 말을 들었는데 너무 아프더라고요.
울산의 어려움을 모두의 보편적 문제로 잘 푸신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긍께요. 만 편히 놀지도 못하네요. 그래도 편안한 연말 되시길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 아들이 낼 경산으로 면접 보러 갑니다. 왠지 선생님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입니다.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혹여나 시간 있으면 연락해 보라고 하세요. 하하하. 달려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