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 있는 백용성조사탄생성지白龍城祖師誕生聖地의 탄생 유적지이자 사찰이다.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와 백용성유훈실현후원회의 주도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용성의 유지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독립운동가 백용성 조사 탄생성지 죽림정사
기미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신 백용성 스님의 생가, 백용성 조사 탄생성지 죽림정사(竹林精舍)는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 일대를 1969년부터 생가터 주변의 토지구입을 시작으로 15년간에 걸쳐 대중불교운동과 근세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백용성(白龍城) 조사님의 유업을 계승, 유적을 복원 정비하여 용성기념관과 교육관, 대웅전등 애국사상과 대각사상이 조화를 이룬 시설들로 갖추어 지난 2007년 10월에 준공식을 가졌다,백용성 조사 생가지로서 생가, 대웅보전, 용성교육관, 요사채, 누각, 유물전시관 등이 있다. 백용성 조사는 선종 교당 대각사를 세우고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였으며, 화과원을조성, 선농불교를 일으켰다.또한, 독립운동 민족대표로서 평생을 독립운동과 전통불교 전승에 앞장섰다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이 불교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877년, 14세 때의 일이다. 꿈속에서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고 불교경전을 보기 시작하였고, 남원 덕밀암으로 출가하였으나 부모님의 강한 만류로 집에 돌아와야 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불자들이 많이 외우는 천수경에 나오는 다라니인 '천수대비주'를 외워 큰 경지에 오른 고승이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쓰고, 대처승의 법통계승(法統繼承)을 인정하는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한편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저술에 진력하면서 대각사(大刻寺)를 창건하였다. 백용성 조사께서는 1864년 5월 8일(음) 이곳에서 탄생하셨으며, 1940년 2월 24일(음) 서울 대각사 대각선원에서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세수 77세로 입적하였다.
제행지무상(諸行之無常) 모든법이 떳떳함이 없고,
만법지구적(萬法之俱寂) 만법이 다 고요 하도다.
포화천리출(匏花穿籬出)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한와마전상(閑臥麻田上) 삼밭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
법명은 진종(震鍾), 법호는 용성(龍城), 속명 백상규(白相奎)이다. 우리글 화엄경 등 20여종을 번역하고 각해일륜 등 20여종의 어록을 저술하였다. 1962년에 건국 공로훈장과 1990년에 은관 문화훈장이 추서되기도 하였다.
충의원통문 - 죽림정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에 해당하며, 백용성 조사님의 애국정신과 호법정신을 기르고자 충의원통문(忠義圓通門)으로 명명하였다. 2층에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봉안되어 있다. 일주문에 걸려있는 충의원통문(忠義圓通門), 장안산 죽림정사(長安山 竹林精舍), 범종법고루(梵鍾法鼓樓) 현판
목조건물로 종무소을 겸한 관리사무실, 접견실, 회의실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2층에는 행당(行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연당(蓮塘) - 한반도형 연못을 조성하고 그 위로 피안교가 놓여 있다. 피안교 너머로 용성기념관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다.
용성교육관 - 108평 규모의 목조건물, 조사전인 용성교육관 내벽에는 7여래 벽화와 삼처전심, 69조사, 7대사 벽화가 그려져 있고, 특히 외벽에는 용성 조사 일대기가 그려져 있다.
용성기념관 - 용성교육관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로 백용성 조사의 저술 등 유품을 진열 설명해 놓았으며, 스님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백용성 조사의 오도송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
백용성 조사 친필원고 - '신역 80권 대방광불화엄경'을 번역하여 발간 유포한 뒤 '대방광불화엄경'의 원문을 실고 구절구절을 번역한 원고이다.
백용성 조사께서 근세 불교의 대학자이시고 강원의 대강백인 진진흥 강백에게 보낸 서신의 친필
백용성 조사께서 덕밀암 출가시 법당에 봉안하고 있다가 고암상언대종사, 동언완규조사, 불심도문법사가 이어 봉안하고 있다.
용성교육관 정면 5칸, 측면 4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한 다포식 건물
용성교육관에 봉안되어 있는 노사나부처님 괘불
승방요사 - 스님과 신도들의 생활관으로 활용하는 건물
죽림정사의 본전인 대웅보전33평 규모로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어칸은 사분합빗살문이고 좌우 협칸은 이분합문을 달았으며, 석가모니불을 모셨다.법의는 통견이며 설법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대웅보전의 주존불
생가복원 마을 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목조기와로 본채 20평, 아래채 10평, 장독대 등 생가를 복원하고, 생가 건물에 백용성 조사의 영정을 모셔 놓고 방문객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백용성(1864~1940)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로 활동하였고, 불교의 대중화·생활화·지성화 운동을 전개하는 등 일제의 친일 불교화정책에 저항하였다. 1985년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가 백용성의 생가터와 주변토지를 매입하였고, 그 뒤 국비 및 지방비와 백용성유훈실현후원회 후원금 등을 모아 생가를 복원하고 여러 건물을 세워 성역화작업을 시행하였다. 경내에는 목조로 지은 생가를 비롯하여 7여래탱화와 69조사탱화 등을 봉안한 용성교육관, 3존불보살상과 5탱화를 봉안한 대웅보전, 백용성조사의 유품을 소장한 용성기념관, 충의원통문과 범종법고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