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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 딱 하나만 확인하시는 예수님 (요21:15-17)
가끔 장례식장에 갈 때가 있는데 그때 자주 듣게 되지만 좀 신중하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고인은 좋은 데로 갔을 거예요. 힘을 내세요.’라는 말입니다.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유족에게는 그리 큰 힘이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유족들은 지금 고인이 좋은 데로 못 가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분을 볼 수 없어서 슬픈 거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자기 아버지와 오해로 인해 전화로 큰 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자기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너무 화가 나 서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나는 이제부터 아버지는 없다고 생각하며 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어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없다 생각하고 살기로 했는데 돌아가셨다니 이젠 정말 안 봐도 되겠구나.’라고 했을까요?
아마도 가정 먼저 든 생각이 화를 내며 아버지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후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생전이 이미 그가 아버지에게 했던 말은 되돌릴 수 없기에 아들에게는 아마도 그 일이 아들에게는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그에게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 한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말 뿐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저 역시 목회자로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잘 위로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를 잘 못합니다. 그냥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할 일 다 한다 할 뿐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말로는 ‘Are you OK?’ 곧 ‘괜찮아?’라고 물어 주는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 이상은 할 게 없고, 할 수도 없는 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한계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래서 꼭 해야만 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짐작이 되시지요?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위로와 안식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시고 심정을 잘 헤아려 주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에게는 한계 상황에 부닥쳐 ‘주여!’라고 부르는 이 한마디가 중요합니다. 무심코 한숨을 내뱉는 것은 그걸로 모든 게 끝났음을 의미하지만, 그럴 때라도 한숨 대신 주여라고 할 수 있으면 그때부터가 우리에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대로라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파하는 어려운 현실에서 함께 아파하시며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가장 최선의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중에도 일어설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복음서에 기록되기를 로마 군병에게 잡혀 끌려가는 예수님을 자기는 모르는 사람이라며 세 번씩이나 부인하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뒤늦게 후회하며 통곡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나오는데, 당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달은 베드로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앞서 의를 끊겠다고 했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의 아들의 심정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그렇게 통곡하는 베드로를 보고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잡혀가시고 고초를 겪게 되신 것 때문에 저리 서글퍼 하나 보다 하여 그런 관점에서만 위로를 하려고 한다고 하면, 뭔 말을 한들 그게 베드로에게 위로가 될 것이며 진정이 되겠습니까?
만약 성경의 기록이 이 대목에서 그렇게 끝났다면 베드로는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 죄책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한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지며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시 사신 예수님은 누구보다 먼저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이, 가룟 유다는 그렇다 쳐도 열한 명 제자 중에 예수님은 왜 배드로에게만 개별적으로 찾아와 만나 주신 것일까요?
인간적으로 보자면 단지 현장을 피해 숨어 있던 제자들에 비해 자기 입으로 직접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행위가 더 괘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괘씸죄를 묻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베드로를 찾으셨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좀 순화시켜 말씀드리자면 다른 제자들에 비해 현재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가장 크고 괴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부터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먼저 찾아가신다.’
베드로에게는 다른 제자들에게는 없던 후회와 아쉬움과 뭔가 변명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문제가 있었기에 예수님이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역으로 하면 즉시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즉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이제 곧 나에게도 예수님이 찾아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문제만 끌어 안고 끙끙대지 마시고 문제가 있으니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듯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곧바로 이렇게 물으십니다.
15절을 보세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무어라 대답합니까?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중심과 본심 등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사실 다신 못 볼 줄 알았던 그래서 자기가 한 말과 행동으로 인해 평생을 죄인으로 살았어야 했을 예수님을 다시 만난 베드로였기에 하고 싶은 말이나 변명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에게 질문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서 딱 한 마디만 들기를 원하셨습니다. ‘YES냐? NO냐?’
예수님은 언제든 과거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예수님은 나를 향해서도 단 하나만 물으시곤 딱 하나의 대답만을 듣기를 바라십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 “YES냐? NO냐?”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과 우리 사이엔 이 두 가지 질문과 대답이면 다 됩니다.
당시 베드로의 심정을 다시 보자면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자괴감과 내가 왜 그랬을까에 대한 후회로 늘 가슴에 큰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괴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의 돌을 치우시고 다시 살아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그간 베드로를 억눌러 왔던 온갖 상심의 돌덩이들이 치워졌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으로 인해 베드로는 이전의 실수와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제공받게 된 것입니다.
흔히 엎질러진 물이라고 할 때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물을 다시 담을 수 있다면 이전에 있던 물이 엎질러졌다고 해서 속상해하고만 있을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주시는 기회!’
이 기회가 내게도 있을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시는 물론이고 아직 기회조차 없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분명 내게도 기회가 있게 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읽을 때면 그 뒤엔 꼭 “너는 이런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그런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은 ‘YES냐? NO냐?’ 둘 중 하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당연히 ‘YES!’ 곧 아멘으로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해서 예수님이 주시는 기회가 내게도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베드로의 슬픔뿐만 아니라 우리 슬픔도 치워 주십니다.
혹시라도 여러분들에게 베드로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후회와 뉘우치는 마음의 무거운 돌이 있다고 한다면, 혹여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픈 일을 당한 적 있다면, 아니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나 견딜 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신 적이 있으시다면, 그런 저와 여러분에겐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위로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수 있고, 나아가 놓친 기회라도 다시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가끔 묻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데 왜 하나님을 믿는 나의 삶은 이리 힘들고 어려운가요?’라고.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믿느냐는 질문을 하시고 우리에게서 “YES냐? NO냐?”의 대답을 기다리실 때 우린 ‘YES’라는 생각이 있음에도 나도 모르게 ‘NO!’라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을 때, 그 뒤에 어떤 말이 생략된 것으로 읽으시라 했었나요?
“너는 이런 나를 믿느냐?”라는 물음이 생략되어 있다 했을 때, 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어때야 할까요?
당연히 ‘YES!’여야겠지요.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근심하고 초조해하고 낙심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마음으론 ‘YES’인데, 말과 행동으론 ‘NO’로 살아갑니다.
또 “무엇이든지 너희가 믿고 구한 것은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다음엔 예수님의 물음이 따라온다고 했습니다.
“너는 이런 나를 믿느냐?”라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구했고 어느 정도나 믿고 기도했는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에서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하나님이 선하다는 말은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행복을 위해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일은 매번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이치를 잘 이용하여 처세술이라든가 세상과 잘 타협하고 처신함으로써 이런 것들이 자주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더 잘 살고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점이 있다고 하면 바로 이런 겁니다. 오로지 ‘믿음으로만’ 살려 한다는 거.
그러다 보니 매사에 세상적으로는 손해도 보고 불신자들보다 일이 더 안 풀릴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린 우리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 인생을 행복한 자리로 인도해 가신다는 것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는 중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잠든 영혼을 깨우는 ‘영적 모닝콜’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유는?
첫째, 우리가 마음 상했을 때, 그때 더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낙심했을 때면 바로 그때 우리는 가장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잘나가던 왕궁에서가 아니라 정적에게 쫓겨나 피신해 온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엘리야 역시도 승리했던 갈멜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목숨을 구해 피신했던 동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는데, 문제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대체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려울 때가 드디어 나도 하나님을 만날 때라는 것을 깨닫고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믿음을 통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지금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 엘리야도 낙심할 때가 있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고 싶다고 했었지만 그다음에 보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다가 다들 죽는 죽음조차 겪지 않고 승천합니다.
사람의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미래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우린 현재의 상황 때문에 낙심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믿음을 놓는 순간. 그때는 나만 실패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다시 한번 더의 기회’까지 날려버리는 일이기에 지금이 인생의 썰물 때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밀어 보내시는 내 인생의 밀물의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때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톤은 그런 자신의 삶에 절망하여 자살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인생의 ‘또 한 번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그가 자살했다면 신자는 물론이고 불신자들까지도 눈물로 노래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곧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삶이 힘들고 안 풀려도 실망하지 않는 것.’ 이게 믿음입니다.
삶이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린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주시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잡는다면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구약을 주셨겠습니까?
노아의 얘기, 아브라함과 이삭의 얘기며, 야곱과 요셉의 얘기, 욥과 엘리야와 다니엘의 얘기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재형’으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들의 결국을 보라!”고.
결국엔 그들을 행복하게 하신 하나님이시라면 내게도 기회를 주셔서 나로 행복하고 만족케 하실 것이라는 것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에 우린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찬송가를 부를 때도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업이십니다.
그런데 기업이란 게 뭘까요? 알아야 은혜가 되지요.
사전에는 기업이란 ‘기초가 되는 사업 또는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재산과 사업’이라고 나와 있지만, 원어적인 의미에서의 기업은 ‘상속재산’이나 ‘유산’을 말합니다.
그런데 상속이나 유산이란 게 뭔가요?
부모가 가졌던 모든 것을 자식에게 넘겨 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 전부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는 말로만 그러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 되심을 증명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이 있으신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모든 걸 유산으로 상속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증거 삼아 가장 소중한 독생자 예수님까지 주셨건만 그 이외의 것에선 뭐가 아까워 주시길 망설이시겠습니까?
그렇게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되신다는 것을 몸소 실행해 보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저만 그런지 몰라도 신앙생활 하다 보면 가끔은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우리의 기도, 우리의 믿음이 정말 효과가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만, 곧바로 정신 차려 이 얼마나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생각인가 하여 곧 회개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어렵고 힘들 때면 그런 불신앙적이 생각까지도 들더라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흔히들 세상에선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 반대이십니다.
그간 우리가 비록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랑할 만한 믿음 생활을 하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저와 여러분에게도 ‘다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물으십니다. “너는 이런 나를 믿느냐?”고.
이젠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의 물음 앞에서 ‘YES!’ ‘아멘’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서 이제부터의 삶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고 기도한 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여러분 각자의 축복으로 이어가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