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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v.daum.net/v/20070309051115973
이게 시냐, 시와 시비붙은 시인
"학교 연구실에서 20년 매일 잡채밥을 시켜 먹는다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빗물 묻은 우비를 걸치고 배달 온 청년이 묻는다 다른 건 잘 못 먹어요 청년이 나가면 연구실 낮은 탁자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맛없는 잡채밥을 먹는다 학생들이 연구실에 앉아 잡채밥을 먹는 걸 보면 실망할지 몰라 문을 잠그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오전 열한시 반 낡은 잠바 걸치고 앉아 고개 숙이고 잡채밥 먹는다 물론 다 먹지 못하고 남긴 그릇을 신문지에 싸서 연구실 문밖에 내놓는다"(<잡채밥> 전문)
이것은 시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승훈(65·한양대 국문과 교수)씨가 새로 낸 시집에 실려 있는, 엄연한 시다. 시집 제목은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집에는 같은 제목을 단 표제작도 들어 있다. 그 작품의 전반부는 이러하다.
"한양대 교수로 직장을 옮긴 1980년대 초 밤이면 김일성이 자신의 집을 폭파하겠다고 전화를 하고 밤새도록 지붕 위엔 낯선 비행기가 떠 있다고 편지를 보낸 제자가 있었다 춘천교육대학을 중퇴하고 결혼에 실패한 그는 대학 시절 서울 집으로 간다며 철길을 계속 걸어간 적이 있지 어느 날은 그의 시집을 영국에서 출판하게 되었으니 선생님이 평론을 쓰셔야 한다는 편지도 보냈다"
이것 역시 시가 아니다. 그런데, 또한 이것은 엄연한 시다. 시집 <이것은 시가 아니다>에는 이와 비슷한 '것'들이 81편이나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시이면서 시가 아니고, 시가 아니면서 동시에 시이기도 하다. 시인이 주장하는바 '불이(不二)'의 경지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는 제목은 물론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따온 것이다. 화폭에 분명 담배 파이프를 그려 놓고 제목에서는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우기는 마그리트의 그림은 존재와 기호, 사물과 회화의 관계에 관한 철학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모더니즘·해체시론 이론가인 시인
<모더니즘 시론> <해체시론> 등의 연구서를 낸 이론가이기도 한 시인은 시집 뒤에 붙인 해설성 시론 '누가 코끼리를 보았는가'에서 마르셀 뒤샹의 설치 작품 '샘'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능가하는 현대 미술의 스캔들로 일컬어지는 작품 '샘'이란 그저 평범한 남성용 소변기였던 것. 마그리트의 그림과 뒤샹의 변기는 미술과 예술에 관한 기존의 관념을 뿌리에서부터 뒤흔든 문제작들이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 까다로운 철학적 화두를 던졌다면, 뒤샹의 변기는 예술과 비(非)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혁명적 도발이었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가리켜 '시가 아니'라고 선언하며 뒤샹의 변기를 거론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시로써 '시라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걸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순수도 서정도 폭력이다 순수는 불행을 모르고 고통을 모르고 타자를 모르고 서정도 서정도 허위다 서정시가 끝난 시대에 서정을 주장하는 건 불순하고 순진하고 천진하고 시가 갈 길은 무수히 많다 갈 데가 없으므로 갈 데는 많고 그러므로 갈 곳이 없고 지금 책상에 날아와 앉는 파리처럼 갈 곳이 없고"(<서정시> 부분)
"이 시는 시의 고민이 사라지고 쓰는 시 아무렇게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시 비가 오면 아무 일도 못하고 비 때문에 비 때문에 이제 시는 끝났다 비가 올 때 끝나고 시의 문제는 철학의 문제로 넘어간다 아슬아슬하게 넘어간다 시와 산문의 전쟁도 끝나고 오늘부터 끝나고 시의 종말은 시의 죽음이 아니야 한 시대가 끝난 거야 이젠 무슨 시론도 본질도 없지 최근 젊은 애들이 쓰는 시를 욕해선 안되지 이게 우리 시의 희망이고 미래야 본질주의자들은 엿이나 먹어라! 또 비가 오잖아? 사흘만 참으면 돼 사흘 뒤에 사흘 뒤에 너를 만나겠지"(<개는 사람을 문다> 부분)
본질주의자들은 엿이나 먹어라!
인용한 시들에서 서정시나 순수시, 또는 시의 '본질'에 관한 시인의 거부감은 격렬하다. 다른 시들에서도 마찬가지. "사유는 결국 미친 짓이죠 무슨 영혼, 진리, 본질 따윈 버리세요"(<우리가 할 일은 웃는 것이다>)라거나 "그저 언어가 있으므로 시를 쓴다"(<언어가 있으므로 시를 쓴다>), "현대시는 끝났어 이젠 모두가 시이고 모든 게 가능해"(<나는 다른 누구일 뿐이다>), "결국 난 시를 쓰지 않으려고 시를 쓴다"(<시론>)와 같은 도발적이고 극단적인 주장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시는 끝났다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쓰여지는 시. 시의 죽음을 먹고 사는, 하이에나 같은 시. 이승훈씨의 시는 그야말로 '반시(反詩)로서의 시'라 이를 법하다. 시인 자신 예의 해설성 시론에서 "내 시의 종말(end)이 내 시의 목적(end)이고 내 시의 목적이 내 시의 종말"이라고 선언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의 '시'들이 주장과 이론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집의 전반부에는 일상에서 마주친 시적 순간을 유머러스하게 포착한 일상의 시편들이 배치되어 있다.
"올 겨울엔 이런 일이 있었다 진눈깨비 치던 오전 난 택시를 타고 공항터미널로 가고 있었다 그날 제주에서 제주대 대학원 박사 논문 심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사 옆에 앉고 그는 50대로 보이는 남자 공항터미널로 가면서 그가 힐끗힐끗 곁눈으로 나를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은 무얼 하십니까? 난 검은 바바리를 걸치고 낡은 밤색 가방을 무릎에 놓고 있었다 글쎄 뭐 하는 사람 같아요? 그랬더니 기사 왈 철학하는 사람 같군요! 네? 철학이요? 왜 있잖아요? 풍수도 보고 예언도 하는 철학 말입니다 진눈깨비 치던 겨울 오전이었다"(<철학> 전문)
이런 것을 시로 보아야 할까. 시인의 주장대로 이제 시는 끝났고 그 주검 또는 부정이 시의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 것일까. "선생님 어떻게 이런 게 시가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시가 싫어서 시를 쓴다. 쓸 것이 없는 시, 시 되기를 거부하는 시"라거나 "나는 무엇을 창조한 게 아니라 그저 기표를 따라 표류했을 뿐이다"('해설성 시론')라고 답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이승훈씨의 새 시집은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 한 보따리를 독자에게 던져 준다.
∏ 문학이론&評論
영도론 / 이승훈 (67) - 3. 영도와 언어 6) 누가 코끼리를 보았는가?
미친 소리는 언어, 상징계, 현실에 구멍이 뚫리는 소리이고 상징계를 거부하는 소리이고 이 소리는 마침내 침묵을 지향한다. 침묵은 언어의 죽음이고 다시 생각하면 언어, 상징계의 본질은 침묵이고 죽음이고 결여이고 부재이다. 언어는 기표들의 연쇄이고, 기표는 다른 기표를 위해 주체, 자아를 생산한다. 기표들의 연쇄는 기의가 탈락하는 연쇄이고, 기표와 기표 사이에 자아가 있다는 것은 자아가 기의에 해당하고, 따라서 자아는 계속 태어나면서 소멸한다. 그런 점에서 언어, 곧 기표들의 연쇄는 부재, 죽음, 침묵을 생산한다. 언어가 지속적인 결여를 본질로 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현실, 언어, 상징계에 구멍을 뚫는 시는 이런 덧없는 자아, 주체도 소멸하는 시이고, 내가 시를 쓰는 것은 언어가 있기 때문이고 언어가 표상하는 결여, 부재, 죽음을 매개로 이 죽음과 싸우는 방식이다. 그러나 시는 언어, 상징계, 현실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의미) 버리기가 요구된다. 그 이론적 근거는 현실이 꿈이고 환상이라면 현실을 구성하는 언어도 환상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강조하자.
이 우아한 밤에
남은 건 언어
언어가 시를 쓴다고
시론을 쓰던 날들도 가고
해체시도 가고
난 힘이 빠지고
머리가 빠지고
그래도 맥주를 마시며
산다
언어가 시를 쓰던
날들도 가고
마침내 마침내 마침내
오오 마침내 언어도
환상이다
그러므로 언어도 버리고
시를 써야지
<언어도 환상이다>의 일부이다. 언어도 환상이다. 부처님도 <금강경>에서 말씀하신다. '너희 비구들아.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다. 따라서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이랴?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尙法應捨 何況非法?' 모든 말, 언어는 뗏목처럼 목표에 이르기 위한 방편일 뿐 아무 본질, 의미가 없다는 말, 언어도 헛된 것이고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언어도 버리고 시를 써야 한다.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른다. 그동안 시쓰기는 언어도 버리고 시를 쓰기 위한 연습이고 훈련이고 시도이고 모험이고 모함이고 아무래도 좋다. 내 인생에 대해 나는 할 말이 없다. 말하자면 내 인생은 의식의 죽음의 역사이고 남은 건 정신분석이 아니면 선(禪)이다. 이 시론을 쓸 때 나는 선이 아니라 정신분석을 매개로 한 선(?)을 생각하고 있었다. 언어를 버릴 때 선과 만난다. 선은 불립문자 이심전심의 세계이다. 라캉이 강조하는 정신분석 역시 상징계 너머 있는 그것, it, 알 수 없는 것의 실현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이 노리는 것은 환상 깨기. 환상 가로지르기이고 이런 행위는 결국 상상계와 상징계에 대한 동시적 파괴를 노리고, 따라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러나 존재하는 그것, 욕동(drive), 실재의 세계를 지향한다. 시의 경우 은유, 상징, 유사성, 동일성의 시학을 파괴해야 하고, 이런 파괴가 상상계 파괴와 통한다. 한편 상징계 파괴는 상징계를 구성하는 문법을 파괴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파괴하고, 기호, 구조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이런 시쓰기는 선과의 만남을 기대하지만 아직은 기대일 뿐이다. 결국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도 착(着)이다. 그러므로 기대하지 말고 기대가 나를 찾아와야 한다. 선도 버리자. 그때 그때 기표들 사이에 소멸하고 태어나는 내가 있을 뿐이다.
선종에는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는 말이 있다. 뒷생각이 앞생각을 바로 이어 중간에 다른 생각이 섞이지 않게 하는 수행법. 생각은 기표가 생산하는 기의에 해당하고 이 기의가 자아가 된다. 왜냐하면 자아는 언어, 사유, 기의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때 그때 기표들 사이에 소멸하고 태어나는 나는 기의, 의미, 생각에 해당하고, 염념상속은 기호학 혹은 정신분석에 의하며 기표와 기표 사이에 기의, 생각, 자아가 태어나지 않게 기표들이 연속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런 사유는 아직 가설의 단계에 있다. 시론 <누가 코끼리를 보았는가?>에서 내가 강조한 것은 상상계 파괴와 상징계 파괴이고, 상상계 파괴는 모든 현상이 환상이라는 선적 사유를 동기로 하고, 상징계 파괴는 언어도 환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바라는 것은 비누 되기이다. 한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시 <비누에 대하여>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다음처럼 노래한다.
언제나 사라짐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라질 때 있습니다. 비누는 사라
지며 시로 소신 공양한다는 한 교수 말도 좋습니다. 그러나 시가 비누이고 시
쓰기는 비누처럼 자아를 버리는 수행이고 연습이고 도 닦기입니다. 목적도 기
원도 없이 흘러가는 시! 과정으로서의 시! 無住의 시! 뿌리도 진리도 과거도
미래도 없는 시! 오오 마침내 시도 없는 시! 모두가 시인 시! 한 교수는 사라지
면서 버리면서 시가 비누를 얻는다고 했지만 시도 언어도 삶도 비누입니다.
비누는 공양을 모르고 공양을 합니다. 우리는 비누가 되어야 합니다.
과연 누가 코끼리를 보았는가? 우리는 코끼리를 사진, 그림, 이미지로 보거나 코끼리라는 낱말, 언어에 의해 생각한다. 마리 야누스도 말하듯이 코끼리는 이미지(상상계)와 낱말(상징계)로 존재하고 이런 존재는 코끼리가 아니다. 상상계도 상징계도 실재의 코끼리를 망각한다. 실재의 코끼리는 코끼리의 현실(reality)로 치환되고 이 치환된 시쓰기, 상상계와 상징계를 동시에 부정하고 파괴하는 시쓰기는 실재 찾기이고, 이 실재는 상상과 언어 너머 있고, 그러므로 자성이 없고 진리가 없고 본질이 없는 과정, 흐름, 변화, 말하자면 비누이다. 누가 비누를 보았는가?
(3. 영도와 언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