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문화 발전이 여유 있는 부인들의 선한 의지에 힘입은 바 크다는 건 예술사가 증명한다. 뉴욕의 부잣집 딸 페기 구겐하임은 막대한 재산과 탁월한 안목으로 20세기 미술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꿨다. 뉴욕의 세계적 현대미술관 MoMA는 세 명의 부호 부인이 내놓은 땅과 돈으로 세워졌다. 한국에서 이들에 근접한 인물을 꼽으라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부인 홍라희 리움미술관 관장일 것이다.
▶22년 전 홍씨가 재벌 안주인에서 미술관장으로 세상에 나와 처음 언론과 마주했을 때 모습을 기억한다. 그는 "원래 나서는 성격은 못 되는데 남편이 '기왕 할 거면 책임 있게 하라'고 하는 바람에 나왔다"고 했다. 부부는 선대(先代) 이병철 회장 영향으로 일찍부터 미술 보는 눈을 키웠다. 30대 나이에 처음 수집한 것이 서예가 손재형한테 산 겸재의 대걸작 '인왕제색도' '금강전도'였다고 했다. 그는 "21세기 서울에 꼭 있어야 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미술관을 도심에 만들겠다"고 했다.
▶2004년 서울 한남동에 문 연 리움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작품이다.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 등 세계적 건축가 세 사람이 각각 설계한 건물이 로비에서 하나로 만나는 구조다. 리움 전시의 매력은 다양성이다. 고려청자서부터 현대 첨단 미술까지 국내외 명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기획전을 통해 이 순간 세계에서 가장 뜨겁게 활동하는 미술가의 전시를 끌어와 국내 젊은 미술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기도 했다. 며칠 전 끝난 덴마크 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 전시도 그랬다.
▶자기 돈으로 자기 좋아하는 일 하는 게 뭐 대단한 것이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돈이라도 예술에 쓰는 건 다르다. 외국 거장 그림 하나가 들어오면 결국 나라의 소장품이 하나 추가되는 것이다. 그걸 감상하며 국민의 문화생활이 풍요로워진다. 해외에서 손님이 와 한국 문화 현주소를 물으면 리움에 데려간다는 기업이 많다. 괜찮은 미술관 하나가 국가의 품격을 좌우한다. 홍씨는 해마다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 1위로 꼽혀 왔지만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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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공지보기▶ 홍라희 관장이 6일 리움을 물러난다고 밝혔다. 그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이후 3년 동안 거의 매일 병원에 가 간병을 해 왔다고 한다. 아들 이재용 부회장도 얼마 전 구속됐다. 그 심정이 어떨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의 퇴임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무겁다는 사람이 많다. 서울에 리움미술관 하나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