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49
“아직 멀었느냐.”
“저기 앞에 보이는군요. 곧 당도하겠습니다, 황후마마.”
마차 안에서 흔들린 지가 한 식경은 족히 되었을 터였다. 속이 울렁거려 더 이상은 참지 못할 지경이 되자 겨우 행렬은 소용의 장지에 도착했다. 은은 멀미 때문에라도 잔뜩 나빠진 몸 상태로, 마차에서 내릴 때만큼이라도 나쁜 기색을 보이지 말자고 다짐해 보았지만 마음 먹은 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생각해서라도 한번쯤 들러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던 고 환관의 직언을 곧이곧대로 듣고 온 것을 벌써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게다가 설상가상.
“아니 이게 웬-”
행렬들이 도착하기 시작한 때부터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원한을 품고 죽은 여인의 원혼이 행렬을 거부하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간단한 제를 올려 원혼을 달래주려 했던 은의 마지막 친절도 필요없다는 듯, 비는 거세게 몰아쳤다.
“마마, 어찌하오리까.”
난감한 사람은 외려 은인데, 장 상궁은 이미 비에 홀딱 젖은 모습으로 마차 안의 은을 향해 묻는다. 은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어 어지러운 숨을 고른 뒤 명령했다.
“이대로 돌아갈 수야 없지.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제라도 올려야질 않겠는가.”
“분부대로 거행하라 전하겠습니다. 마마께서는 좀 쉬십시오.”
쉬고 싶어도 좁은 마차 안에서 편히 있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끈질긴 고집으로 기다린 보람이 있었는지, 비는 완전히 멎진 않아도 그 기세가 한 풀 꺾여 겨우 행렬이 제를 준비하는 것을 허락했다. 은이 마차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간단한 의식을 지낼 준비가 마쳐지고, 은은 비를 감수하고서 마차에서 내려섰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덧옷도 챙기지 못한 터라 장 상궁을 비롯한 궁인, 환관들이 만류했지만 은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옷이 젖어버리게 되었지만, 저를 바라보는 아랫것들의 경외로운 시선만큼은 달가웠다.
은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사장이 제문을 읽었고, 간략한 절차로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은은 장 상궁의 부축을 받고 서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쓸쓸한 소란의 묘를 지켜보았다. 이 비의 무게로 제 눈물과 마음의 짐을 내게 짊어지게 하려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노라고, 은은 마음속으로 얘기했다. 그러니 홀가분히 내려놓고 떠나라고.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마음 비우고 떠나 그 곳에서 지켜보라고.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것을 장 상궁이 억지로 붙들고 있었다. 은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며 괜찮다고 답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이 정도 비에 주저앉다니. 열이 조금 난다고 해도 중간에 그만두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끝까지 은은 두 다릴 지탱하고 서서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았다. 거짓말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구름이 걷히고 그 사이로 해가 내리는 것을 보며 은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만족스럽느냐고, 소란에게 물었다.
...
“마마, 정신이 드십니까.”
눈을 떴을 때, 장 상궁이 저를 걱정스레 내려 보고 있었고 곁에는 수태의가 제 도구들을 챙겨 넣고 있었다. 어느새 자신의 방, 흥성궁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기진하셨습니다. 그리 오래 비를 맞으시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마마. 죽여주소서.”
“비를 좀 맞았다고 내 사람을 죽인 데서야 누가 남아나겠는가.”
은은 가벼운 농을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은의 등 뒤로 커다란 베개를 받쳐주는 장 상궁의 어깨 너머로 수태의가 지그시 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사이 마음이 많이 자라신 듯하옵니다.”
“그 무슨 불경한 말씀입니까.”
수태의를 향해 차갑게 쏘아 붙이는 장 상궁을 곧 저지시켰다.
“그리 보아주다니 고마운 일이로군요.”
“당치않으십니다.”
“그래, 내 상태는 어떻습니까. 요 며칠 어지럼증이 좀 심하긴 하였습니다만. 단순한 몸살 정도라면 부디 폐하께는 아무 일 아니라고 알아서 전해주세요.”
“그러기는 어렵겠습니다, 황후마마. 마마의 상태는 아주 심각한 지경이라 폐하께 분명히 알려야만 합니다.”
“심각하다니-”
장 상궁이 곁에서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발의 수태의가, 마치 손녀를 대하듯 자애로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마마, 의롭게 살아간다면 하늘은 반드시 상을 내립니다. 이것이 그 증거라 생각하시오소서.”
“도대체 무슨 뜻인지..”
수태의는 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늙은이의 생에, 또 한 번 황제폐하의 혈손을 모실 수 있는 영광에 황감하옵니다. 또한 감축 드립니다, 황후마마.”
//貢女 奇皇后//
은의 회임 소식은 은밀하게 퍼져 나갔다. 이미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회임 말고,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 기쁜 소식은 날개를 달고 퍼졌다. 그래서 이 소식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기 까지는 채 반 식경도 걸리지 않았다.
“경하 드립니다, 폐하! 경하 드립니다, 폐하!”
고 환관은 진심을 다해 황제의 앞에서 같은 말을 읊고 또 읊었다. 방 밖의 궁인들은 대체 뭘 경하해야 하기에 태감이 저리 흥분했는지 아리송해 했지만, 때 마침 그 앞에 당도한 우겸의 귀에는 그것이 무엇을 축하하는 것인지 직감적으로 또렷이 들려왔다. 방 안에서는 뭔가 장황하게 떠들어대는 고 환관의 목소리 말고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스스로도 생애 첫 경험일 황제는 감격에 마지않은 얼굴로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있음이리라.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방문 앞의 노상궁이 우겸을 향해 물었지만, 우겸은 씁쓸한 얼굴로 대강 웃어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돌아섰다. 지금 당장은 저 안으로 들어가 버젓하게 그 남자를 향해 축하한다는 말을 건넬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언젠가는 분명 있으리라 예상했던 일이 조금 더 빨리 다가왔을 뿐인데 마음은 생각만큼 쉽게 다스려지지 않았다.
...
깊은 밤이 되도록 마음 줄을 잡지 못한 우겸은 못내 방을 빠져 나와 조용히 걸었다. 목적을 두지 않고 걸음이 가는 데로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가 다시 돌아와 피곤에 지쳐 잠들 생각이었다. 그 작은, 시간 속에 멈춰 버린 듯한 정자를 발견하기 전 까진.
“아야. 그렇다고 물진 말라구.”
사람의 목소리와 흰 고양이였다. 조용히 돌아가려던 우겸은 정자 지붕아래 쪼그리고 앉은, 낯익은 얼굴에게로 다가갔다.
“이런 시각에 나와 있다니.”
“지원 나으리..!”
언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는다. 우겸이 손을 내밀어 그런 언주를 일으켰다.
“놀란 것은 나인데, 외려 네가 넘어지느냐.”
“어, 어찌 이런 곳에 계십니까.”
“글쎄다. 걷다보니 이런 곳이 나오는구나.”
“........”
“네가 기르는 고양이인 모양이지?”
“아닙니다. 그냥, 여기 왔을 때부터 이곳에 있기에-”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를 잡는다. 흰 고양이는 그런 풍경이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레 두 사람의 사이에 정자세로 앉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은 모든 것이 멈춰진 양 고요하고 밤은 그만큼 깊어 있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
“아니지. 그 소식을 들으셔서 이리 나오신 것일 테지요. 괜한 것을 물어 죄송합니다.”
“지금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텐데.”
“축하해야 할 일이죠.”
언주는 은근스레 우겸의 얼굴을 살폈다. 은의 말대로 그가 친 오라버니와 다름없는 존재라면 응당 은의 회임을 축하해야 할텐데. 어째서 그의 얼굴이 이다지도 쓸쓸해 보이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은 알 수 없는, 숱한 시간과 깊은 감정의 문제일까.
“폐하께서도 사속지망(嗣續之望)을 이루게 되시어 무척 기뻐하셨다고 해요. 지금쯤 흥성궁에 계실 테구요.”
“그렇겠지.”
언주는 자신의 말이 우겸의 생각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흰 고양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손길을 즐기듯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언주는 가끔씩 흘깃흘깃 우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먼 하늘에 무언갈 보고 있는 사람처럼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그런 정직한 얼굴 때문이었을까. 언주는 은에게도 말하지 못한 일들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저, 실은 좌승상 댁에, 다녀왔어요.”
“좌승상.. 진 대인의 저택에?”
“예.”
“그런 곳에 어째서.”
“저를 불러주셨거든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서.”
우겸은 가만히 언주의 얼굴을 본다. 언주는 고개를 들었다가 우겸과 눈을 마주치고는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제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어요.”
“제안이라니.”
“양녀가, 되어주지 않겠느냐고..”
우겸은 놀랐지만 침착하게 언주의 이야길 듣고 있었다. 낮에 정전 앞에서 들었던 소문에 관한 것이 이것이었구나,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 보다는 일생의 고민을 앞둔 언주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제게 많은 것을 주실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이루 말 할 수 없는 부귀와 재물도, 그리고 많은 이들이 부러워 할 이름과 명성도. 아, 아니! 재물이나 영화 때문에 좋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 계속 하거라.”
“그 분의 양녀가, 만약에 양녀가 된다면, 그거야말로 최고의 영예가 되겠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평온한 삶이 될거예요.”
“........”
“더 이상 잡다한 일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아도 되고.”
“........”
“그리고, 아주 훌륭한 분에게 시집도, 보내주실 수 있다고.. 하셨구요.”
언주는 눈치를 보듯 우겸의 얼굴을 살핀다. 언주의 마지막 말에 피식 웃은 그는 애써 참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이 철없는 말들만 한 것 같아 언주는 볼을 붉혔다.
“웃으셔도,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여자는요, 누구나 다 그런 꿈을 꾸고 산다구요.”
“얼굴도 모르는 다른 남자와 혼인하진 말거라.”
얼어버렸다. 돌처럼 굳어졌다. 언주는 우겸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된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미친 듯이 애썼지만 금세 무너졌다. 장난스레 웃어버리는 그의 얼굴에.
“-그런 말은 소용이 없겠지?”
“........”
“솔직히 말이다, 난 네가 그 구렁이 같은 영감의 딸이 된다는 건 그리 탐탁지 않지만.”
그의 말에서 진정이 느껴졌다. 눈을 보며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네 인생이고 네 삶이잖느냐. 다른 누구의 생각보다는, 네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는데.”
울고 싶어졌다. 아무도 이 비천한 삶에 그런 의미를 부여해 준적은 없었다. 스스로 내 삶이 소중하다고 여겨본 적도 없었다. 언주는 자신도 모르게 가득 고여 버린 눈물을 들킬 것 같아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저 자그맣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전했을 뿐이다.
그리고 헤어져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기 전까지 한참을 거기서 달을 바라고 앉아 있었다. 아니, 언주로서는 우겸이 자신을 위해 함께 있어주었다고 느꼈다는 편이 옳았다. 말없이도 말이 오가는 시간. 언주는 저어기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절대자를 향해 조심스레 애원했다. 대 저택의 양녀가 되든, 아니면 이대로 평생 하잘것없는 궁인으로 살아가든. 어느 것이든 좋으니 내 생애, 지금 곁에 있는 이 사람 하나만 허락해주시면 안되겠느냐고. 그건 정말 바라면 안 될 욕심이냐고.
첫댓글 오오 회임 감축드리옵니다 황후님 ㅎㅎ 언주의 애절한 짝사랑은 언제까지 지속이 될지 궁금해요 ㅎㅎ 근데 황제 요즘에 넘 안나와요 ㅜㅜ 보고싶어요!!ㅎㅎㅎ
오~회임이 현실이 되었으니 다행이네요 ㅋㅋㅋ 궁인은..결혼을 못하죠?
젬있게 보고가요~
역시!!은이 회임을 한게 맞았군요!!
그나저나...은이는 어떤 기분이려나..?;;
우겸에게 다가가는 언주에게 약간의 질투를 내비춘걸로 봐선
아직 그 쪽을 놓지 못한듯한데..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