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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7
32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34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36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37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ㄱ.8-15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9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말씀의 초대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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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여,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며, 사람의 아들은 들어 올려져야 하는데,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를 계속 들려주는 오늘 복음은 요한 신학의 골격을 이루는 내용을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곧 하늘에서 내려온 이,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생활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특징 가운데 두 번째 특징을 전해 줍니다. 첫 번째 특징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사도 2,42-47 참조)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 특징은 기적을 일으켜 병자들을 고쳐 주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사도 5,12-16 참조)입니다. 이 특징들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들을 일반화 과정을 통하여 바람직한 공동체 모습의 표상을 제시해 주는 종합적인 틀입니다.
오늘 이 특징들은, 깊게 체험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형제적 사랑으로 완전한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참다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영적이든 물적이든 재물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모든 것 안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민족이나 국가를 뛰어넘어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서 중심으로 삼아야 할 절대적인 이상입니다. 이러한 형제적 사랑은 예수님 가르침의 근본적인 특징입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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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은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 묻습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믿어 왔던 율법 정신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새로운 길을 예수님 안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남들의 눈을 피해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전히 자신의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힌 채,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 같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에게는 가능함을 믿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입은 사도 시대의 신자들은,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를 이룹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기에, 그들은 소유와 집착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고, 나누며 살았기에 궁핍하다고 좌절하지 않고, 타인을 내 만족의 도구로 이용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공산(共産)’의 삶은 본디 교회가 꿈꾼 이상이었고, 비록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로 이념화되어 실패했지만, 여전히 교회 안팎에서 수행의 삶이나 수도원 공동체를 통하여 실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상적인 삶은, 어둠과 탐욕에 덮인 인간의 영이 성령으로 정화되어 하느님의 진리를 향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위로부터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느님께 돌아갈 것임을 알기에, 세상에서 죽고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비록 세상의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성령께서 심어 주신 양심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돌아갈 하느님을 매순간 기억한다면, 어둠이 아닌 빛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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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고통과 시련이 계속되자 불평과 원망이 극에 이릅니다. 진노하신 하느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자, 그들은 회개하며 용서를 청하지요. 이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로 만든 뱀을 기둥에 높이 달아 놓도록 지시하십니다. 그 결과 비록 불 뱀에 물렸어도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민수 21,4-9 참조).
구리 뱀은 장차 십자가에 매달리실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말씀이지요. 또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만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불 뱀을 만나고 있지요. 문제는 불 뱀인지도 모르고 유혹에 빠진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불 뱀과 구리 뱀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양심을 통해 우리를 일깨워 주시고 당신의 말씀을 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핑계를 대며 양심의 권고를 물리친 적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 양심의 소리는 희미하기에 우리는 이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만큼 더욱 잘 들을 수 있도록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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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기도 생활도 중요하고 말씀의 증거도 중요하였지만,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형제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들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들이었기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실천하며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 복음의 이상을 실현하였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도 그리스 말로 같은 단어인 “위로부터”와 “다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또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코데모는 이 말씀을 자기가 육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하늘 일”에 관한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세상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의 인간적인 논리로는 “하늘 일”을 담아내기에는 늘 부족하였습니다. 오늘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또한 예수님의 장례 때에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찾아온 것도(요한 19,39 참조),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3,11). ‘너희’와 ‘우리’의 경계가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니코데모처럼 우리에게도, 진리를 찾는 마음과 그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가 공존합니다. 우리가 현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가 왜 하필이면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을까요? 일부에서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그분을 찾아뵈었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와 진실을 찾아 고뇌하고 방황하는 상황을 밤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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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중부 지방인 토스카나는 많은 사람이 한 번쯤은 가 보기를 꿈꾸는 아름다운 여행지입니다. 토스카나 지방의 보석 같은 작은 도시 가운데 하나가, 전체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시에나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캄포 광장은 흔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은 가타리나 성녀는 바로 이 시에나에서 14세기에 태어났습니다. 이미 어린 시절에 깊은 신비를 체험하고 정결을 약속한 그녀는 16세에 마침내 도미니코 제3회에 입회하여 봉헌의 삶을 시작합니다.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로 병사할 때까지 나병이나 페스트 환자들을 두려움 없이 돌본 가타리나는 거룩한 품성과 영적 식별력을 인정받아 교황들까지도 그녀에게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는 정치적인 변화까지도 이끄는데, 당시의 정세와 교회의 난맥상이 겹쳐 프랑스 아비뇽에 은거해 있던 교황이 그녀의 거듭된 직언에 마음이 움직여 로마로 돌아오게 됩니다.
또한 그녀는 놀라운 수덕과 신비 체험의 삶을 살며 병상에서 그 체험을 『대화』라는 책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이러한 그녀를 교회는 시대를 초월하는 '교회 학자'로 선포합니다. 사백 통 가까이 되는 그녀의 '서한'들 역시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모습을 잘 알려 줄 뿐 아니라 영성 신학의 귀중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성녀의 영성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절대적 진리에 대한 열렬하고 타협 없는 갈망과 헌신을 보여 줍니다. 가타리나는 하느님을 '언제나 불타는 뜨거운 불' 같은 사랑의 하느님으로 만났고, 그분에 대한 사랑에 흠뻑 빠져 살았습니다.
성녀가 체험하고 실천한 불같은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의 신앙 역시 뜨거워질 수 있도록 성녀의 전구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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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신심이 깊어도 ‘삶의 아픔’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과 시련은 늘 별개입니다. 가끔은 심한 실패도 겪습니다. 누가 봐도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주님께서는 멀리 계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깨달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으로 이끄셨다는 느낌입니다. 고뇌를 배우는 것이지요.
내가 아파 보지 않으면 남의 아픔을 잘 모릅니다. 고통을 겪지 않으면 사랑도 못 느낍니다. 인내를 체험하기에 영적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이끄심’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분의 이끄심을 모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법칙坍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은총은 철저하게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봉헌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에게는 ‘봉사’가 필요합니다. 헌신이 없기에 내적 생명은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가까이 가면 느낌이 다릅니다. 밝은 분위기가 전해집니다. 하느님의 기운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구리 뱀’은 바라보는 이들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주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번이라도 그런 사람이 된다면, 예수님의 모습을 실현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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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데모는 예수님께 ‘영적 세계’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그는 진정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깨달아질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갖고 ‘영원한 생명’을 찾아 나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은총의 이끄심이 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서 가능성을 보셨던 것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연이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며 활동한다는 암시입니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찾아 나서야만 살아 있는 ‘영의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가까운 사람과 애정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따뜻함을 깨닫는 것이 영적 체험의 시작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아버지이신 주님과 함께 삽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맡기며 살아야 합니다. 맡기는 생활이 영적 생활의 출발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몇 미터 밖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밝은 분위기가 온몸에서 발산되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가면 행복감마저 느껴집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에게서 그런 분위기를 느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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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를 벗어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를 헤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나는 길입니다. 머무를 집도 땅도 없었습니다. 가축을 먹일 초원도 물도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탈출의 흥분이 가라앉자 백성들은 현실적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찾아듭니다. 앞날의 불안에 눌린 그들은 모세에게 항거합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을 바탕으로 형성된 민족입니다. 그리고 광야의 생활 자체도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집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 없으면 더 이상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보속이 내립니다. ‘사막의 뱀’들이 나타나 불신에 빠진 백성을 물어 죽였습니다. 오갈 데 없던 백성은 모세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합니다. 이렇게 해서 구리로 만든 뱀의 조형물이 광야에 내걸렸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던 것입니다.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그 ‘구리 뱀’에 비유하십니다. 기적의 능력이 당신 안에 있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우리 곁에도 ‘사막의 뱀’은 많습니다. 삶이 두렵고 불안하다면, 예수님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겁니다.
성령 안의 삶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시 보기 드믄 지도자, 그나마 괜찮았던 유다인 니코데모에 대한 특별 교육을 계속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복음 3장 7~8절)
예수님께서는 내친 김에 간단하게나마 ‘성령(聖靈)’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성령이란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기운’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영은 마치도 바람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하게도 그리스어로 영과 바람은 같은 단어, 프네우마(pneuma)입니다. 바람이 자유자재로 부는 것처럼 하느님 영의 움직임도 자유롭습니다.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하느님 영의 흐름도 불가사의하고 신비롭습니다.
성령도 바람같지만, 우리네 인생도 바람같습니다. 우리네 인생 뭐 대단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니 별것도 없습니다. 때로 하느님 영의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속수무책입니다. 마치 뜬 구름같은 우리네 인생,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때로 엄청 어깨에 힘을 주고, 스스로에게 큰 자부심을 갖고, 영원히 여기에 머물 것 같지만, 우리네 인생 잠시 뿐입니다. 숨 한번 끊어지면 그만입니다.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억만금을 모아 하늘까지 이르는 첨탑을 쌓아올렸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끝입니다. “자. 그간 고생 많았지만,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구나. 아쉽지만 다 내려놓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 말씀을 그 누구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자유롭습니다. 때로 미풍같은 바람이기도 하지만, 때로 태풍처럼 불어옵니다. 우리네 인생을 완전 휘저어놓으시고 뒤죽박죽으로 만드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영은 우리를 어디로 날아가게 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하느님의 바람에 우리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이끄시는데로, 그분께서 안내하시는 데로 일어서고 따라가는 수 밖에요.
성령 안의 삶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은 현실에 충실하지만, 결코 현실에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않습니다. 과거를 소중히 여기지만, 언제나 주님께서 인도하실 미래를 향해서도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래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떠나는 데 자유롭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는 참으로 모범적이었습니다. 내면이 성령으로 충만했던 바오로 사도였기에, 하루 하루를 그분 손에 맡겼습니다. 삶도 죽음도, 청춘도 미래도 모두 성령의 역사하심에 내맡겼습니다.
주님께서 일어서라 하면 일어섰고, 떠나라 하면 홀연히 떠나갔습니다. 사나 죽으나, 건강할때나 병들거나, 자유롭거나 옥에 갇혔거나 그 어떤 처지에서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뱀의 피가 가진 생명력
전삼용 요셉 신부님
랙스 박사는 런던의 동부 지역에서 38년간 목회하던 감리교 목사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 노인이 몹시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고개를 돌린 채 말 한 마디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대화를 나누기 위하여 애쓰던 랙스 목사님은 냉랭한 난로와 바닥나기 시작한 식량을 알아챘습니다. 그 집을 나선 목사님은 두 덩어리의 양고기를 그 집에 배달해주도록 주문하였습니다. 며칠 후 목사님은 또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노인은 전보다는 약간 다정하게 대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목사님은 또다시 양고기를 주문하였습니다. 세 번째 심방을 하게 되었을 때, 그 노인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 결과 랙스 목사님은 노인과 함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랙스 목사님은 설교 부탁을 받아 며칠 동안 런던을 떠나 있게 되었습니다. 돌아온 목사님은 그 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랙스 목사님에게 전해주십시오. 이제 나는 곧 하느님께 돌아갑니다. 이처럼 나를 변화시킨 것은 목사님의 설교가 아니라 목사님께서 나를 위하여 사 주셨던 양고기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힘은 ‘은총과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를 충만히 지니고 세상에 오셨습니다(요한 1,14. 17). 네 발로 걷고 말도 못하는 아기가 새로 태어나 말도 하고 네 발로 걸으려면 반드시 부모가 주는 은총과 진리가 필요합니다.
‘은총’이라는 것은 곧 부모의 피입니다. 부모의 희생이 없이는 아기는 자신의 부모에 대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젖을 주는 사람이 엄마입니다. 만약 부모 대신 늑대가 젖을 주면 자신이 늑대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이 믿음이 생기게 만드는 것을 우리는 ‘은총’이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은총을 받아 믿음이 생긴 이가 찾게 되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때부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묻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두 발로 걷고 말을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배운 대로 행동하려 하며 자신의 부모처럼 되어갑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 중 더 중요한 것은 은총입니다. 일단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배워봐야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박식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로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 순서상으로는 진리를 먼저 주셨습니다. 3년 동안의 가르침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당신 목숨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아들이는 순서는 그분의 십자가를 먼저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그분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연구합니다. 그래서 위의 이야기에서 노인이 자신을 변하게 한 것은 목사님의 설교가 아니라 양고기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먼저 성체를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믿음이 생기면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말씀의 전례가 먼저이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체성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마치 모세가 장대에 매단 구리뱀처럼 십자가에서 달리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예수님 자아의 피입니다. 자아는 뱀입니다. 뱀은 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예수님의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느님 뜻이 당신 안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당신 뜻이 죽어 피가 흘렀고 우리는 그 피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새로 태어남이란 그분의 피로 나의 뱀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나 혼자 죽일 수 없고 먼저 나를 위해 죽은 이의 피가 필요합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먼저 죽어야 그 피로 나도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러 갈 때 매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자신이 20년 동안 번 재산과 아내를 비롯한 자녀들을 모두 선물로 보냈지만 그래도 400명을 데리고 오는 형 앞에서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곱은 하느님께 은총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의 골반 뼈를 부러뜨리셨습니다. 남자에게 골반은 생식력을 나타내고 생명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것이 부러진다는 것은 생명을 빼앗았다는 뜻입니다. 그 덕분으로 에사우에게 나아갈 때 일곱 번이나 절을 할 수 있는 겸손함이 생겼습니다.
자신 앞에서 죽은 모습을 보이는 야곱에게 에사우도 마음을 접고 따듯하게 맞아줍니다. 내가 죽어야 타인도 죽는 것입니다. 내 죽은 피가 누군가도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가 변해야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으면 상대도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피를 지니고 다녀야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좋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명력이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나의 죽음은 이웃의 새 생명의 씨앗입니다. 뱀은 살아있으면 남을 죽이는 독을 뿜지만 죽어 피를 흘리면 남을 살리는 약이 됩니다.
높은 데에서 온 아들
곽승룡 비오 신부님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 13)
고대 사람들은 신들이 위로부터 왔고, 또는 산 위에 산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하늘은 상징적이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을 향해 오르는 마음의 행위이다.
플라톤은 하느님은 순수 생각이라고 말했다. 곧 인간의 생각은 하느님의 순수함의 정도단계에 따라 하느님께 도달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은 더욱 높은데 계시는 아버지 곧 무한한 사랑의 신비를 지니고 계신 분이시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사랑) 없이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 곧 아버지의 계시 없이, 사랑 없이 올라가는 목적지인 하늘도 없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요한 3, 13)
3세기 그리스도교의 교부 오리게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아름다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인식하도록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그러므로 지금도 성경에서 계속 우리에게 소리를 내시고 있다. 결국 우리가 매일 읽는 영적독서를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소리를 내주신다.
참 유일한 말씀의 햇빛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아들을 하늘로부터 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진리, 모든 선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진리와 선은 부분적으로 표현되지만, 진실한 방법으로는 그리스도를 늘 지향하고 그분께 안내한다. 따라서 진리의 목소리, 선의 목소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결국 그리스도께로 도달하게 된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 14)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초기교회의 히브리 사람들은 구약에 기초한 유대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셈족의 성경정신에 따라 성찰한 것이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상태로 고통이 가득한 세상 안으로 내려오는 발전과정으로 표현한다. 이 하강, 내려옴은 바로 오름과 결합되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서 하느님께서 내려와 하늘이 열리기 때문이다.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로의 하강은 치욕적인 죽음과 함께 나타난 그리스도의 하강이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늘을 향한 오름이 된다.
시리아 교부들은 그것을 ‘사다리’의 십자가로 부르길 선호하였다. 마치 야곱의 꿈 사다리에 비교한다. 그 사다리에서 천사들이 내리고 오른다. 니싸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교 삶의 모든 신비가 나타난다고 표현한다. 이는 바로 겸손이고 비움인데 이는 바로 높은 곳을 향한 내려옴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 나에게 자유를 선물하시는 구원자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며, 나를 생명에로 이끌어주시는 인도자, 인생의 스승이시다. 하늘에서 내려와 나를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빛으로 희망을 향해 이끌어주시며, 사랑으로 인생을 가르쳐 주시는 스승님이시다. 나는 그분을 통해 온전한 나로 거듭나고 새로워지는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이다. 나는 그분 때문에 그것을 믿고 살아간다. 그래서 행복하다. 그리고 그 행복을 전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제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로 일주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종종 텔레비전에 나오는 자전거 하이킹의 모습은 늘 부러웠고, ‘나도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했었지요. 그러다가 2006년에 큰 맘 먹고 부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첫 날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서 고생고생 하다가 겨우 수원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수원까지 왔을 뿐인데도 온 몸이 쑤시면서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다음 날 그래도 숙소에서 잘 쉬었는지 개운한 마음으로 출발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뒤, 언덕을 오르면서 힘이 부칩니다. 대전에 도착하자마자 어깨에 짊어졌던 모든 짐을 택배로 부쳤습니다. 반드시 필요해서 챙겼던 짐이었지만 마치 바위덩어리처럼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면서 ‘포기할까?’라는 생각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대구를 지났을 때 완전히 녹초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근처 PC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잃어버리면 어쩔 수 없이 자전거 여행을 멈출 수가 있다는 생각에서 말이지요. 자전거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여행을 멈추는 것이 더 나아 보였던 것입니다. PC방에서 한 시간을 채운 뒤에 나왔지만 자전거는 처음 세워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더군요.
결국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완전히 녹초가 되었지만 자신감 하나는 완전히 충만해질 수 있었습니다. ‘죽을 것 같았지만 조금만 더 가자.’라는 생각이 부산까지 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기억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힘내서 더 가자!”라면서 스스로를 북돋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꽃길만 계속되기를 원하지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때로는 가시밭길도 가야만 합니다. 그때 그냥 포기하고 말 것입니까? 아닙니다. “힘내서 더 가자!”라고 가면 충분히 갈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사랑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여기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니코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믿지 못하는 우리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는 것이지만, 지금 현대에도 이 완고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지요. 어쩌면 과거보다도 더 완고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지 않고 불평불만 속에서 힘들게 살 뿐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을 믿고 힘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하라. 실패하라. 그리고 다시 도전하라. 이번에는 더 잘해보라. 넘어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단지 위험을 감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이제 여러분 차례이다. 이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오프라 윈프리).
흉터를 남지 않게 하는 방법
화상이 생겼을 때, 흉터를 남지 않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 번째, 연고를 바릅니다.
두 번째, 자주 바릅니다.
세 번째, 계속 바릅니다.
다른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계속 바르다보면 어느 순간 흉터가 사라집니다. 고통과 시련도 그렇지 않을까요? 계속해서 위로하고 또 꾸준히 나아지려고 노력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고통과 시련이 사라질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움직이고, 회리바람이 불면 잡티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다. 다른 사물의 움직임을 통해 바람을 본다. 사물의 움직이는 방향을 보고 바람의 움직임을 본다.
나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 하느님을 본다. 스승이시고 구세주이심을 본다. 육적인 사람은 육을 떠올리고 육의 세계를 보고, 영적인 사람은 영의 세계를 본다. 공부를 해야 한다함은 영적인 깨달음을 위해서 이다. 과학은 현상계를 보게하고, 철학은 인간의 관계를 보게하고, 믿음을 통한 신앙은 영을 통해 하느님의 세계를 보게 한다. 영의 사람은 인간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기뻐한다. 하느님은 바람과 같아서 실제로 보이지 않으나 다른 사물을 통해 바람이 있음을 보듯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통해 하느님의 실체를 보는 것과 같다. 영의 사람은 바람이 있음을 보는 것과 같이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본다.
죽음을 예견한 사람은 준비를 한다.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예견하지 않은 사람은 그냥 죽음이 갑자기 닥칠 뿐이다. 이런 사람은 남은 사람에게 무거운 짐만 잔뜩 지우고 준비없이 떠나는 사람이다. 죽음을 예견한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떠난 자리가 추할 뿐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3,7-8).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0-15)”
여기서 ‘세상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 또 누구나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일을 뜻합니다.
오순절 날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일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사도 2,2-8).”
몰려온 사람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들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기적’인데, 사람들이 직접 보고 들은 일, 즉 ‘세상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라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고(사도 2,11),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면서 비웃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사도 2,13).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자기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사도 2,15).
이처럼 같은 일을 보았으면서도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늘 일’은 하느님의 신비에 관한 일들과 하느님의 계시나 계획이나 섭리 등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그분이 바로 주님이신 분이고, 메시아라는 설교를 했을 때,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사도 2,37).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사도 2,38).
이 대답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는 권고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바로 ‘하늘 일’입니다.
그날 ‘세상일’을 믿은 사람들은 ‘하늘 일’도 믿었습니다.
즉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서 여러 언어들로 설교를 한 일이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구원받게 된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삼천여 명이 그렇게 믿어서 세례를 받았는데(사도 2,41), 안 믿고 그냥 가버린 사람은 아마도 그보다 더 많았을 것입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 일을 믿으려면 먼저 세상일을 믿어라.” 라는 권고 말씀으로 해석되는데, 뜻으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내가 지상에서 하는 일들과 말들을 먼저 믿고 받아들여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하신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유일한 아드님이시고, 유일한 메시아이십니다.
다른 메시아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1티모 2,5-6).”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우리가 예수님만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메시아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라고 명령하면서 믿음을 강요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이 먼저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 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를 예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믿는 사람”을 뜻합니다.
‘사람의 아들 안에서’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을 뜻합니다.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구리 뱀’ 이야기를 보면, 모세가 들어 올린 뱀 자체가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구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당신이 직접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또 모세가 들어 올린 뱀은 회개와 순종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을 뿐이지만,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18.24).”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 보며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2~15)”
하늘과 세상, 죽음 전후를 자유왕래하신 분은 예수님뿐임 명심합시다.
어떤 종교 교주 신봉대상이라 해도 예수님만한 분 인류사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상식 실력 뭐로든 대결할 자 이 세상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 보며 세상 흙 먼지 털 줄 알아야합니다.
세상이 이런 가톨릭 신자들을 시답잖게 봐도 하늘만은 대 환영합니다.
가톨릭 인들은 십자가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과 하늘고향까지 봅니다.
세상 지식으로는 영원생명 이해 불가능하고 십자가로만이 가능합니다.
죽어도 세상장악 못할 바엔 십자가 보며 영생 기대하자고 선교합니다.
무엇을 알려 하고, 무엇을 보려 하는가?
김규봉 신부님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요한 복음 3장 7ㄱ.8-15)
우리 삶의 형태는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것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보려 하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각자의 의지가 삶의 순도를 결정합니다. 예를 들면 대규모 개발 계획을 알고 있는 이가 그 정보를 자신과 특정인들만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 그들에게는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평범한 소시민들은 그만큼의 비용 상승과 기회 상실을 겪게 됩니다.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만든 칼은 그 칼을 쥔 이의 바른 의도와 의지에 따라 요리를 만드는 이로운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흉기도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앞서 우리의 생각과 의지는 하느님의 뜻으로 순화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과 피조물 모두가 조화롭게 상생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면서, 자신의 능력과 경험, 사회적 지위 등 모든 것을 잘 활용하고 투신해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가 잘 정화된다면 우리가 행하는 일과 직업은 타인에게 봉사하면서도 나의 품위를 높여주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거룩한 일, 바로 성사聖事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은 성사가 되어야 합니다.
* 당신이 행하는 모든 일을 거룩한 일, 성사聖事로 만들고 있나요?
일치와 사랑의 성사
루스페의 성 풀젠시우스 주교가 모니무스에게 전한 저서에서(Lib. 2,11-12; CCL 91,46-48)
베드로 사도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신령한 건물은 사랑 안에서 형성됩니다. “살아 있는 돌들은 그것으로 신령한 건물을 이루고 거룩한 제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시는 신령한 제사를 바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신령한 건물의 형성을 위한 가장 뜻 깊은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바칠 때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잔을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는 것이며, 우리가 빵을 떼는 것은 주님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한 그 똑같은 은총으로써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이 사랑 안에 항구한 일치를 유지하도록 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부와 성자의 한 영이신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청하는 것입니다. 한 분이시고 홀로 참된 하느님이신 성삼위께서는 그 본성상 일치와 사랑으로 당신이 뽑으신 자녀들을 성화시키시고 하나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경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넣어 주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한 영이신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부여받은 이들 안에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 행하신 것과 똑같은 것을 다시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에 관해 사도행전은 “수많은 신자들이 한마음 한뜻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한 하느님이시고 성부와 성자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하느님을 믿는 수많은 이들 안에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성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하신 권고 말씀에서 평화의 유대 속에 영적인 일치를 열렬히 보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부어 주신 그 사랑을 교회 안에 보존하실 때 교회를 합당한 희생 제물이 되게 하십시오. 교회가 성령의 사랑을 보존한다면 거룩하고 합당한 희생 제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땅에서 태어나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사람
하늘에서 내려와 땅 속 깊이
쉼 없이 뿌리 내리는 사람
그러기에 땅을 딛고 하늘을 받치는
하늘과 땅 모두 안은 사람
영원 안에 하루의 의미를
소중히 보듬는 사람
하루의 삶 속에 영원을
곱게 담는 사람
그러기에 하루와 영원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
두 발 넓이 자그마한
땅만을 딛고 선 작은 사람
무한한 마음으로
온 세상을 품에 안는 큰 사람
그러기에 소유와 무소유의
벽을 허문 사람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 안에서
참된 사람을 만나는 사람
하느님이신 아드님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
그러기에 하느님과 사람의
하나 됨 안에 사는 사람
끝이 없는 하느님 영의 품 안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
보잘것없는 몸과 마음이지만
성령으로 가득히 채워진 사람
그러기에 하느님과 자신이
하나 된 사람.
질그릇 속에 담긴 보물
최민석 신부님
“너희의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마태 10,30) 너른 창공을 날던 새 한 마리 나무 가지에 찾아와 잠시 머물러 앉아 있다가 총총 떠나가도 그 만남 또한 하늘의 조우다.
나무와 새 서로 아무 말 없지만 나무는 새의 고단한 날개에 한 숨의 쉼을 주고 새는 나무 가지의 쓸쓸한 외로움에 위로가 된다. 새와 빈 가지의 한 점 풍경화 같은 만남 그냥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굳이 우연이라 하지 않고 그것을 하늘의 조화요, 우리의 바램 이라는 하고 싶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이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 7-15)
하느님의 영으로 태어난 사람, 그러니까 위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모든 만남이 하늘이 주신 선물이다. 만나는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인연인 것은 하늘의 조화이기에 그렇다. 나와 이러저러한 이유로 알게 된 이들이 모두 다 하늘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일도 나의 곁에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있는 그대로 소중한 만남이요 축복이다.
인생은 너무 짧다. 인생은 남기려 한다고 해서 남겨지는 게 아니다, 남기려고 하면 오히려 그 남기려는 것 때문에 일그러진 욕망이 된다, 인생이란 지금 이대로 있는 그대로 은혜의 바다이다. 그 놀랍고 신비한 은혜의 바다가 내게 주어진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최대한 그들의 모습을 즐기고, 시간 있을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 나의 가족, 친구들의 존재를 즐긴다.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 나로서 사는 것이 좋다. 사랑이란 지금 이대로 있는 그대로 나를 사는 일이다. 내 삶의 자부심은 누운 풀처럼 살아있는 다른 생명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우주 생명과 교감하는 삶이 하느님의 현존을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사는 사람은 늘 교만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게 산다.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게 산다.. 역경이 닥쳤을 때나 그것을 극복했을 때도 늘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사는 사람의 모습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유연하되 원칙을 잃지 않고 살며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 하느님에게로 돌아가 하느님의 사랑 가운데서 다시 시작하는 삶이야말로 하느님의 현존을 사는 모습이다.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살아갈 수 있기를 성령께 청해 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온 나, 나 자신을 만날 수 있고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사랑한다.
지금 여기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의미 있는 시간,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시간, 충만한 시간이 되기 위해 마음의 쉼표가 필요하다. 하루가 정신없이 돌아갈 때가 바로 잠시 숨을 고르고 쉬어 갈 때이다.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은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이고, 성찰하며 사유하는 시간이다.
노래도 쉼표에서는 쉬어가야지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있다. 쉼표도 악보의 한 부분이듯이 휴식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생각되어 진다. 아니 쉼표의 여백이야말로 음악의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삶의 휴식도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쉼표에서 쉬어갈 줄 모르면 박자를 놓치게 된다. 쉴 때 쉴 줄 아는 사람이 인생의 박자를 잘 맞추며 가는 사람이다.
왜 사는가.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뭔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살아야 할 그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없다.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있으니 그냥 살뿐이다. 지금 여기 이렇게 그 분 사랑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내 맘대로 온 바가 없기에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내 맘대로 갈 수 없다. 지금 있는 그대로 나일뿐이다.
세상에 왔으면 그 이유를 알겠지만 그렇지 않다. 살아있으니 살 뿐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것도 그 무엇이 없다.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할 그 무엇이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고 듣고 말하고 숨 쉬고 살 뿐이다. 지금 경험하는 지금 이대로 그냥 내가 사는 이유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사람이다. 옹기장이와 옹기가 흙에서 서로 만나지만 그릇은 그릇이고 사람은 사람이듯이,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도 흠 있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영으로 사는 자가 됨을 감사드린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고린 후 4,7)
영으로 함께 사는 형제들 <요한 3, 7ㄱ8-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어제부터 나이가 제일 많은 86세인 저로부터 올해 첫 사제가 된 30대 신부와 중간 50대, 40대 신부들과 함께 몇 달 전에 계획하고 약속한 공동 휴가를 2박 3일로 남해 독일 마을, 바람 흔적 카페, 남해 일주를 돌아 남해읍에 숙소를 정하고 상담자 박정애 율리안나 자매집의 저녁 초대, 가는 곳마다 맞아주는 형제 자매들의 정성을 받으며 하루를 빗 속에 행진하였다. 이런 기쁨, 이런 감동, 나이 든 나를 보호하며 웃고 즐기는 시간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수도원에서 영적 삶을 중심으로 살다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지고 열심히 사는 형제들입니다. 사랑하고 귀한 수도원의 형제, 나는 그들에게 배우며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이곳이 바로 주님께서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미사를 함께 하고 바로 떠나야 한다고 하여 긴 묵상은 못하지만, 어제 비오는 날 자연도 우리를 환영하며 길 가의 가로수가 비를 맞고 우리를 보고 “수고 많이 했습니다. 여기 오신 것 환영합니다.” 인사하듯 모두가 머리를 숙이고 맞이하듯 하여 “감동이다”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리산 구례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 큰 기쁨 속에 오늘 축복받은 날로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주님, 우리의 길을 이끌어주시고 서로 참 사랑을 체험하도록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늘나라 공동체의 꿈과 실현 -목표, 이정표, 도반, 기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이들의 영원한 화두는 아마 공동체일 것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바 이상적 아름다운 꿈의 공동체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꿈도 하늘나라 공동체의 실현일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하늘나라 공동체 꿈의 실현을 위해 평생 최선을 다했고 여기서 탄생된 것이 바로 교회공동체입니다.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완성은 없습니다. 사실 공동체 생활보다 더 힘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여 저는 함께 사는 것이 수도생활이요 함께 사는 것이 수도생활의 어려움이요 함께 사는 것이 도닦는 것이라 수도생활을 정의하곤 합니다. 피정을 다녀가는 모든 분들에게 물어도 공동생활이 쉽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격월 간 수녀원에 가서 2시간 남짓 많은 수녀님들에게 고백성사를 드리지만 거의 모든 죄들이 공동체내 수녀들과의 관계에서 생긴 것들입니다. 수녀님들뿐 아니라 수도원을 찾는 분들의 모두가 공동체 인간 관계에서 파생되는 죄들입니다. 그러니 공동체 생활에는 답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늘 새로운 노력의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보여 줍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하늘나라 공동체의 모델입니다. 교회공동체가 지향하는 이상이요 여기서 영감받아 탄생된 수도공동체입니다. 다음 묘사되는 사도행전 공동체는 얼마나 아름다운 지요. 그대로 하늘나라 공동체의 꿈이 실현된 모습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하느님께서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인 공동체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교의 수도공동체가 이에 근접한 공동체입니다. 인류의 영원한 딜렘마가 해소된 공동체입니다. 영원한 딜렘마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유와 평등, 사랑과 정의입니다. 모두 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자유를 추구하다보면 평등이 훼손되고 평등을 추구하다보면 자유가 훼손됩니다. 또 사랑을 추구하다보면 정의가 훼손되고 정의를 추구하다보면 사랑이 훼손됩니다.
바로 인류의 모든 혁명이 실패한 이유입니다. 평등과 정의를 일방적으로 폭력적으로 추구하다 자유와 사랑의 훼손으로 실패한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입니다. 자유와 평등,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의 은총의 사랑만이 자유와 평등, 사랑과 정의라는 두가지 영원한 딜렘마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의 은총의 사랑으로 자발적으로 자신을 안팎으로 부단히 비워갈 때 비로소 자유와 평등, 사랑과 정의의 조화요 일치입니다. 바로 사도행전 공동체가 그 생생한 모범입니다.
참 아름답고 영원한 이상적 공동체의 모델입니다. 말그대로 한마음 한뜻의 공동체, 공동소유의 공동체, 빈부격차가 없고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모두가 존엄한 품위를 누리는 평등한 공동체, 한마디로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공동체입니다. 또 모두가 가진 소유를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습니다.
바로 위 묘사안에 공동체 원리의 답이 다 들어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 그 공동체의 살아있는 중심이 되었기에 가능한 공동체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공동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원리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우리 노력의 산물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공동체의 성원들이 끊임없이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날 때 비로소 가능한 하늘나라 공동체 꿈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살아계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공동체 삶의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가능한 공동체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공동체의 중심이 같기에 한마음, 한뜻의 공동체가 되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형제들이 언제나 바라봐야 할 영원한 중심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이 이를 증명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살아계신 공동체 삶의 중심인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표지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의 주님으로부터의 선사되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을 체험할 때 비로소 사랑의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제가 여기서 누누이 강조하는 바 하늘나라 순례공동체를 위한 네가지 원리입니다. 참 많이 강조했던 진리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체험과 수도여정체험의 결론입니다. 하늘나라 공동체는 고정불변의 정주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 목표를 향한 순례여정중의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1.공동체의 공동목표인 하느님, 그리고 여정중 길을 잃지 않도록 살펴봐야 하는 2.삶의 이정표, 3.함께 하는 공동체의 도반형제들, 그리고 4.끊임없는 기도라는 네요소입니다. 이런 네 요소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실천이 순례여정중의 하늘나라 교회 공동체 형성을 가능하게 합니다.
영원히 현재진행형의 하늘나라 순례여정중의 우리 교회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완성은 없습니다. 여기서 단연 부각되는 것이 공동체 도반들이 함께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기도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한마음 한뜻의 하늘나라 공동체를 이뤄주는, 또 하느님 목표, 삶의 이정표, 도반, 기도등 공동체 일치의 네 원리가 고스란히 함축된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늘나라 공동체의 꿈이 실현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하늘과 땅이 맞닿은 때'(요한 3장 7ㄱ,8-15)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하느님의 아들외에 어느 누구도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하늘에서 장맛비가 마구 쏟아질때 큰 우산을 써도 젖는것을 피할수 없어 우산을 접고 자유인이 되어봅니다.
발을 내딛기만 하면 땅에서 비가 솟구쳐 하늘과 땅이 비와 함께 춤을 춥니다.
교향곡이 들리는것 같이 아름답지요.
비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지 땅에서 하늘을 향해 결코 오를 수 없다는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빗줄기라도 잡고 하늘로 올라볼까?
우리 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것을 예수님이 해주실테니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때 우리 죽음의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안고 하늘로 오르실 것입니다.
바쁘시면 천국 오르는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라도 놔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믿고 살던 사람들이 육신은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갔어도 이미 영은 하늘로 사뿐이 들어 올려져 한마음 한뜻으로 기쁨중에 사십니다.
세상의 일에만 마음 쓰지말고 하느님의 일에 마음 쓰며 한마음 한뜻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천상 흉내내기라도 하며 산다면 그 삶이 영원으로 이어질것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요한 3, 7)
김웅태 신부님
+ 찬미예수님!
부활하신 주님 자비의 축복을 담뿍 받으십시오.
(저는 이틀 동안 즉 4월 27일과 28일 홍천통나무펜션에서 실시된 서울MR 34차 부부 성경 피정에 봉사하고 왔습니다. 그래서 피정에 전념하느라고 성경 말씀 묵상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서울대교구 구의동 본당 부부들을 중심으로 1박 2일간에 걸쳐 실시했던 부부 성경 묵상 피정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성경 설명을 듣고 마음이 뜨겁게 불타오른 것처럼, 이 부부들에게도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부활 제 2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요한 3, 7~15)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사람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요한 3 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니코데모는 "그런 일이 어떨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요한 3, 9) 하니까,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이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요한 3, 14~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코데모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라고 하는 율법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화는 선문답 같기도 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요한 3, 7~8)
이런 말씀은 참으로 영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잘 알아듣기가 힘든 말씀이지요. 우리 인간은 한 번은 어머니를 통해서 육으로 태어납니다. 몸은 성장하면서 즉 물질적인 것을 섭취하면서 성장하고 그와 동시에 정신적인 영양을 받으면서 마음도 성장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본향을 그리워하며 하늘나라에 가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게 되고, 또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회개하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자신의 삶을 이루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결국 육으로만 살았던 인간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고 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인 욕망과 욕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대로 하늘나라가 있다는 믿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 있는 생활을 하도록 가르쳐 주신 그런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록 육체적 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과 정신은 하늘나라를 지향하면서, 그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으로 사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결론으로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요한 3, 14)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아무런 죄도 없이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달으면서 자기 죄에 대한 뜨거운 눈물로 회개하면서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삶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요한 3, 15)
바로 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며,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나의 삶안에서 영으로 태어난 기억이 있습니까?
• 그때가 언제입니까?
• 그때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아들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잎과 잎으로
꽃과 꽃으로
생명의 봄비가
가득 떨어져
내립니다.
십자가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로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사랑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랑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들어 올려져도
우리를 끝까지
도와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진실된 사랑으로
생명을 살리십니다.
영원한 사랑안에
살고있는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선택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사람이
십자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가 모든
생명의 해답임을
믿읍시다.
먼저 공지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제가 오늘부터 갑곶성지에 있지 않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 되냐고요? 그건 아니고요... 사실 오늘부터 4월 22일까지 유럽 성지순례를 갑니다. 솔직히 가기가 싫습니다. 왜냐하면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거든요. 이번에 가는 성지순례 코스도 세 번째이기 때문에 처음에 가졌던 설렘도 전혀 없고, 오랜 시간을 비행기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참으로 신기한 것은 막상 순례가 시작되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돌아올 것을 생각하면 또 끔찍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오늘부터 자리를 비웁니다. 새벽 묵상 글은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곳의 인터넷 사정이 많이 좋아졌으면 묵상 글을 올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22일까지 조금만 참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 묵상 글을 올립니다.
버섯을 성분 조사하면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물 90%, 단백질 3%, 탄수화물 5%, 지방 1%, 미네랄 1%.
문득 그러면 독버섯과 식용버섯의 구성 상 차이가 궁금해졌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구성 성분 안에 독이 들어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틀렸습니다. 글쎄 1%의 미네랄 안에 독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독버섯과 식용버섯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의외였습니다. 겨우 1%에 해당하는 부분에 의해서 사람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것이 말이지요.
버섯 전체 구성 성분의 1%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들으면서, 문득 사람의 말도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말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죽을 만큼의 아픔과 시련을 주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죽이는 말이 사람이 쓰고 있는 말의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아마도 1%? 어쩌면 0.1%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얼마 안 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독으로 다가가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나의 말이 독이 되는 말이 아닌 생명이 되는 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에게 하시는 말씀 역시 바로 생명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믿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 역시 생명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죽이는 말을 쓰면서 결코 주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있는 말은 과연 어떤 말이었을까요? 남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조금 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서 말하지 않는다면, 부정적으로만 말한다면 결코 주님을 믿는 사람의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강한 독성을 가진 죽이는 말이 아닌, 생명을 가진 살리는 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쓴다면, 특히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진정한 대화의 기술은 알맞은 곳에서 알맞은 말을 하는 것뿐 아니라, 안 맞는 곳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불쑥 해 버리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도로시 네빌).
어느 부자의 대화.
아버지가 직장 없이 빈둥빈둥 집에서 놀고 있는 아들을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에디슨은 너 나이 때 전기를 발명했다. 너는 지금껏 뭐했냐?”
아들은 이 아버지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그런 소리 마세요. 링컨은 아버지 나이에 대통령 했어요.”
비교하는 말은 절대로 힘이 되는 말이 아닙니다.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이 바로 살리는 말이 아닐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오늘부터 17일까지 피정을 합니다. 교구는 사제들이 피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핸드폰은 매일 충전을 해야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제들에게 피정은 핸드폰을 충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8일 동안 충전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영적인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강의를 듣고,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기쁨입니다. 마치 신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으면 약속 시간 전부터 기분이 좋아지듯이, 아직 피정을 시작하지 않았지만 벌써 기분이 좋아집니다.
며칠 전에 암 치료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암의 치료는 크게 3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암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외부의 치료는 효과는 있지만 부작용이 있습니다. 식욕부진, 구토, 탈모와 같은 것입니다.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세포가 손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몸의 면역체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진화하였습니다. 면역체계는 건강한 식생활, 긍정적인 생각, 규칙적인 운동, 적당한 휴식을 통해서 강화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이용하는 치료방법을 찾고 있으며 곧 실용화될 것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나노로봇을 이용해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나노로봇을 이용한 치료는 암뿐만 아니라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새로운 치료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세먼지가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듯이 나노로봇은 어쩌면 우리 몸의 면역체계에 새로운 도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靈’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주 아름답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재물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할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이겨낼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지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공동체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공동체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우리가 이런 생각의 지평을 넓힌다면 종교가 달라도, 세대가 달라도, 이념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지구별에서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입니다.
(강론은 피정 다녀와서 18일부터 올리겠습니다. 좋은 피정이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성령충만한 삶 -위에서 태어난 사람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의 자유입니다. 성령의 사랑입니다. 성령의 생명입니다. 성령의 창조입니다.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령에서 태어난 이들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을 합니다. 성령에서 태어난 이들은 위로부터 태어난 이들입니다.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태어난 이들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바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의 모습이요, 세례받아 위로부터 태어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성령따라 사는 이들이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한번으로 끝난 창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위로부터, 영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우리들이요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이루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참 좋은 선물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하늘길은 예수님뿐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영원한 생명의 하늘길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가 바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바로 이런 위로부터 태어난, 영에서 태어난 이들의 공동체가 바로 사도행전의 공동체요 우리 믿는 이들의 교회공동체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의 공동체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통한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합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의 힘입니다.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고 선물처럼 주어지는 참 좋은 공동체입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는 사람들이 성취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바로 공동체 중심에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통한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을 통해 위로부터 새로 태어난 이들의 공동체가 바로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공동체요 우리 교회공동체입니다. 성령을 통한 사랑의 일치 공동체의 생생한 모델이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부활하신 주님이요 끊임없이 계속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날마다 이를 새롭게 확인하는 우리들입니다. 미사시 성찬전례중 감사기도 제3양식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아버지, 성자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저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몸이 되게 하소서.”
부활하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며 한마음 한몸의 일치 공동체를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이영근 아노스딩 신부님
요한 3.7. 8-18(부활 2 화)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hayah)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qum, heqis) 라는 뜻을 나타내는 용어들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8부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을 드러내주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셨다.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죽었는데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 당혹스런 것은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다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드높여졌다고 합니다. 분명 누명을 쓰고 죽는 실패인데도 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겨 승리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바로 ‘이 놀라운 변화’, 역전의 대전환을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여기서,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은 물리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것을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위’란 무엇인가?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를 말합니다. 두 가지 방식, 곧 그 질서 안에 놓인 특별한 방식을 말합니다.
‘아래’ 질서의 통치원칙은 자기중심적인 ‘나’입니다. 그러나 ‘위’ 질서의 통치원칙은 사랑의 성령입니다. 이는 우리는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위”로부터 태어날 수 있는가?
곧 ‘위’로 올라가는 일이 가능한가?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요한 3,9)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신원에서 가능합니다. 그분이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하신 분, 곧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길은 “내려오신 분”과 함께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함께 올라가게 됩니다. 내려와 죽음을 건너 지나가신 분, 곧 아래로 내려옴(katabasis)을 통해 ‘위’로 올라가는 분을 따라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아래의 것들로부터 위의 것들로 지나갈 때, 파스카는 ‘위를 향해 지나감’(anabasis)가 됩니다. 이를 <필립비서> 2,6-12절의 <그리스도 찬가>는 잘 드러내줍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내려가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 내려감에, 올라가는 대 역전의 삶이 있고, 거룩한 바꿈, 거룩한 교환이 있게 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콜로 3,1-3 참조). 아멘.
새로 태어난 자의 삶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7-15: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절)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태어남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당신과 함께 머무를 자녀들을 낳으신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말씀과 성사로 태어났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8절) 즉, “너희는 그분의 소리를 들을 테지만 그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말씀이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보고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성령을 보지 못한다. 어떻게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편 노래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고 복음 선포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성령의 소리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8절)고 하신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9절)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듯하다. 이 태어남에 대해서도 구약과 관계가 있다. 창조된 첫 사람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여자,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의 잉태, 물로써 행해진 기적들, 예를 들면, 갈대바다를 건넌 일, 천사가 물을 출렁거리게 한 못, 요르단 강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깨끗하게 된 일 등, 이 모두가 미래에 이루어질 영적 태어남과 정화의 상징이다. 이사악도 이러한 탄생의 예형이었다. 이런 것을 암시하듯이 예수님께서는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10절)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11절) 아드님은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이시기에, 증언을 하실 때 복수로 ‘우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남과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에게서의 탄생과 비교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새로이 태어남은 하늘의 일이기는 하지만,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드님의 탄생에 비교하면 우리의 일은 세상의 일인 것이다. 그 세상일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고 하시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12절) 하신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이’라는 말은 그분의 기원이 성령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분은 말씀으로서는 하늘에 계시며 육으로는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 육의 기원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성령께 있다. 그래서 육이 되신 말씀은 비록 육이시지만 결코 말씀이 아닌 적이 없으신 분이다. 그분이 내려오신 것은 우리가 올라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땅에 속한 인간이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될 때, 영적 탄생이 이루어진다. 즉 그리스도께 결합될 때, 그리스와 함께 올라가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14절) 십자가가 들어 올려져 땅 위에 나타난다. 그 십자가는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 흠숭을 받으시고 십자가로 선포되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이다. 뱀은 세상의 모든 인간을 집어 삼키던 죄를 의미한다. 그 뱀을 들어 올린 표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분을 통하여 그 뱀에게 죽음을 선고되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저주를 받게 된 자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5절)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영원한 생명의 원인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신 분이 죽음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믿는 이들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어찌 멸망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께서 더 확실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신앙인들은 그분이 입으신 영광을 향하는 삶을 갖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닮는 것, 즉 우리도 우리가 지고 가는 나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영광을 입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바로 나 자신의 인간완성을 이루어줄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 또한 영광을 드리는 길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며 열심히 기도하자.
<그리스도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4. 10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요한 3,7ㄱ.8-15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땅에서 태어나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사람
하늘에서 내려와 땅 속 깊이 뿌리 내리는 사람
그러기에 땅을 딛고 하늘을 받치는 사람
영원 안에 하루의 의미를 소중히 보듬는 사람
하루의 삶 속에 영원을 담는 사람
그러기에 하루와 영원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
두 발 넓이 자그마한 땅만을 딛고 선 사람
무한한 마음으로 온 세상을 품에 안는 사람
그러기에 소유와 무소유의 벽을 허문 사람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 안에서 참된 사람을 만나는 사람
하느님이신 아드님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
그러기에 하느님과 사람의 하나 됨 안에 사는 사람
끝이 없는 하느님 영의 품 안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
보잘것없는 몸과 마음이지만 성령으로 가득히 채워진 사람
그러기에 하느님과 자신이 하나 된 사람
영의 힘 <요한 3, 7ㄱ. 8-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주님은 영의 현존과 바람을 같이 설명하십니다.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도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영적 힘의 작용 때문에 실존을 알게 됩니다. 내 몸의 현상은 여기 있으면서 저기 없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내 안에 있는 생각이나 영의 힘은 여기 있으며 저곳에 있고, 지금이지만 미래와 과거를 오르내립니다. 오늘 저는 병가를 얻어 동생 집에서 쉬고 있지만 내 생각은 여기만 있지 않고 수도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 하나에 따라 자신의 운명과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권력의 힘, 돈의 힘, 명예의 힘이 아니라 영의 힘으로 즉,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자신의 이념으로 삼고 사는지가 어떤 나, 어떤 나라를 만들어냅니다.
행복한 하루를 시작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행복하게 할 수 있지만 잘못 생각해서 오늘 나를 지극히 불행한 날이 되겠다고 하면 불행한 날이 닥쳐옵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몸이 요구하는 것에 따라 살면 온갖 고통으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인간은 자연적 삶 위에 하나의 이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에 의해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이 되고, 그 이상이 실현되기 위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이상은 허상이며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땅속에 썩을 수밖에 없으니 하늘에서 오신 분이 우리도 하늘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비록 여기 있지만 생각이나 이상은 저 높은 곳에 두고 살면서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영이신 하느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나의 행복입니다. 어디에 있으나 어느 때나 이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요한 3,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로운 일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에
변화또한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숨어 있던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로 드디어
나오게됩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
우리자신을 똑바로
보게됩니다.
우리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깨닫게됩니다.
빼앗기지 않을
영적인 삶을 이제
갈망하게됩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다름아닌 십자가의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영적인 길은
다름아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십자가를 먼저
지고 가신
예수님의 도움이
매순간 절실히 필요한
함께하는 삶입니다.
이 부활시기가 다시금
살아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영적인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처럼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우리의 십자가 안에서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예수님께서 먼저
보여주십니다.
미사 후에 어떤 어머니와 아들을 만나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성적이 오르지 않는 아들에 대한 걱정이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요.”라고 하시더군요. 이때 아들의 표정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분명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지요.
“솔직히 최선을 대해 열심히 했는데도 성적이 잘 안 나오는 거지?”
그러자 봇물 터지듯이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머리가 분명히 안 좋은 것 같다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적은 제자리에 맴돌 뿐이랍니다. 그러나 아이의 엄마는 항변하듯이 말합니다.
“네가 어렸을 때 얼마나 머리가 좋았는데, 척척 외우고 못하는 것이 없었어.”
어렸을 때 자기 자식의 모습은 다 천재,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능력자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또래에 비해서 엄청나게 빠르다고 판단하고 그래서 아주 특별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녀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인과 비교를 한 번 해 보십시오. 아주 별 것 아닌 능력일 뿐입니다.
어쩌면 부모가 치사한 변명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부모의 뛰어난 유전자를 안고 태어났는데, 네가 노력을 하지 않아서 이 모양 이 꼴이라는 것이지요. 즉, 너의 지금 모습은 부모 탓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네 탓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열심히 한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고해성사 때에 앞으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시겠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분들을 봅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지요. “그런 신앙인이 되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면 거의 90% 이상이 이렇게 뻔한 답을 말씀하십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되겠지요.”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분명히 지키지 못할 약속일뿐입니다. 열심히 노력한다는 말보다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행동하겠다는 결심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준을 내세우는 치사한 변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기준들을 묵묵히 실천하는 우리의 변화된 모습이 필요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곧 지난날과 달리 새로이, 그리고 지금의 우리와 달리 하느님을 닮은 이들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나의 막연한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구체적인 실천들이 모여져서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내 자신입니다. 이를 위해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바로 이해를 넘어서는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믿음을 갖춘 뒤에 니코데모는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는데 온 몸을 봉헌할 수가 있었습니다. 믿음을 통해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위로부터 태어나야 합니다. 이는 곧 믿음을 통한 새로운 변화입니다. 이 새로운 변화를 통해 하느님을 닮은 참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를 바꾸는 것은 일상 속의 작고 단순한 변화들이다. 세상에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없으니까(빌 젠슨).
한 친구에 대해 난 생각한다(막스 에르만)
한 친구에 대해 난 생각한다.
어느 날 나는 그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손님으로 만원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늦어지자 친구는 여종업원을 불러 호통을 쳤다. 무시를 당한 여종업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난 지금 그 친구의 무덤 앞에 서 있다.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 것이 불과 한 달 전이었는데 그는 이제 땅 속에 누워 있다. 그런데 그 10분 때문에 그토록 화를 내다니..
어떻습니까? 사람의 삶이란 어떻게 보면 정말로 순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얼마나 후회할 일들을 많이 만들고 있을까요?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조금 더 다르게 생각할 때, 분명히 후회할 일들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초대 공동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서 예전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 3년간 있었습니다. 벌써 17년 전의 기억입니다. 신자들과의 첫 미사에는 5명이 함께 했습니다.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한분은 해설이셨고, 한분은 독서였고, 두 아이는 복사였습니다. 다른 한분은 아들 신부가 본당신부가 되었다고 찾아오신 어머니였습니다. ‘주님께서 어머니와 함께’라고 미사를 드렸던 기억입니다.
주일 미사에서 헌금을 정리했습니다. 헌금액수는 195,000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3년 동안 재정적인 문제로 고민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성당을 떠날 때는 거금 삼천만원을 남겨드리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시골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서 지냈습니다.
이제 막 짠 우유를 끊여서 소금을 넣어 먹어 보기도 했고, 논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추어탕을 만들어 먹기도 했고, 겨울에 꽁꽁 얼은 임진강에서 미끄럼을 타기도 했고, 냇가에서 아이들과 물장구도 쳤습니다. 밤하늘의 별이 참 아름답다고 느끼기도 했고, 이름 없는 들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알았습니다. 성당의 텃밭에 호박, 가지, 배추, 방울토마토, 상추도 심어서 키워 보았습니다. 서울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개구리 소리가 들리면 성당이 가까워 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성당에는 작은 공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할머니 할아버지이신데 어린아이들이 6명 있었습니다. 새진, 새봄, 은솔, 한솔, 동연, 승연이였습니다. 처음에는 새진이만 성당에 나왔는데, 수녀님께서 새진이 집에 찾아가서 교리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6명으로 늘었습니다. 공소 마당에서 게임을 하고, 옛날이야기를 해주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매달 한번은 아이들과 함께 자장면을 먹는 날을 정했습니다. 한번은 문산에 나가서 햄버거를 먹기도 했습니다. 공소에 아이들이 있으니 공소도 활기를 되찾고, 그 아이들이 복사를 서니까 할머니들께서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아이들과 함께한 그 시간들이 무척 그리워집니다.
일정표에 해야 할 일들이 빼곡히 적혀있고, 정신없이 지내느라 뒤를 돌아보지 못하는 요즘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구청에 있으면,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일들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교구의 산적한 문제들도, 초대교회의 뜨거운 열정을 생각하면 풀릴 것입니다. 박하사탕에서 주인공이 외친 것처럼 “나 돌아갈래!”라고 외쳐보아야 소용없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치고, 힘들 때면, 시골에서의 3년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욥 성인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도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를 드렸으니,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 해도 감사를 드립니다.’ 욥 성인에게 행복의 기준은 재산, 능력, 화목한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행복의 기준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공동체를 이루었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으며, 모두가 부족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르나바는 자신의 것을 공동체를 위해서 봉헌하였지만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도들이 처한 환경이 더욱 좋아진 것도 아닙니다. 아직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감시하고 있었고, 박해의 칼날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능력이 갑자기 커진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능력도, 재산도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그들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행복은 내가 바라보는 대로 주어집니다. 원망과 미움,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면 그만 큼 나는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감사와 찬미, 희망과 겸손의 바람이 불면 나는 그만큼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귀가歸家 준비 -아름다운 죽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오늘 미사는 각별합니다.
통상적으로 오늘은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미사를 봉헌하지만 우리 베네딕도 수도회는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원래 3월21일 별세 축일이 성주간에 들어있던 관계로 이동하여 오늘 지냅니다.
참 아름다운 성 베네딕도의 죽음입니다.
아름다운 죽음, 말 그대로 은총입니다.
아름다운 죽음보다 힘들고 중요한 것도 없고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없습니다.
바로 성 베네딕도의 죽음이 그러합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귀가歸家준비-아름다운 죽음’입니다.
길다 싶지만 그레고리오 대 교황이 전하는 성인의 아름다운 죽음의 장면을 소개합니다.
-그분은 임종하시기 엿새 전에 당신을 위해 무덤을 열어 두라고 명하셨다.
곧이어 그분은 열병에 걸리셨고 심한 열로 쇠약해지기 시작하셨다.
병세는 날로 심해져서 엿새째 되던 날 제자들에게 당신을 성당으로 옮겨 달라고 하셨다.
그분은 거기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영하심으로써 당신의 임종을 준비하시고, 쇠약해진 몸을 제자들의 손에 의지한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같은 날 그분 수도원에 속한 두 형제, 즉 한 형제는 수도원 안에 살고 있었고 다른 형제는 먼 곳에 있었는데, 그들에게 하나의 동일한 환시의 계시가 나타났다.
실상 그들은 그분의 방에서부터 동쪽을 향해 하늘에 이르기까지 똑바로 나있는 길을 보았는데, 그 길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고 수없이 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자 그 위에 빛나는 옷을 입은 존엄한 분이 나타나시어 이길이 누구를 위한 길인지 알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모른다고 하자, “이 길은 주님께 사랑받는 베네딕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레고리오 대종;베네딕도 전기 235-237쪽)-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대로, 성인은 평상시 그렇게 귀가歸家 준비, 죽음 준비를 해 오셨기에 이런 아름다운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축복받은 이’라는 베네딕도 이름 뜻대로 축복받은 삶에 축복받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 성인입니다.
평생 떠남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했던 열매가 마지막 떠남의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떠남의 죽음을 위한 평소 귀가 준비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평소 탈출의 여정, 떠남의 여정에 항구할 때, 충실할 때 마지막 떠남의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이런 삶 자체가 이웃에겐 축복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을 닮은 성 베네딕도입니다.
두 분 다 파란만장한 삶 중에도 하느님만을 찾는 내적여정에 항구했던 분들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75세 고령에 고향을 떠나는 ‘영원한 청년’ 아브라함입니다. ‘
너는 복이 될 것이다(You will be a blessing)’, 얼마나 복된 말마디인지요.
아브라함뿐 아니라 성 베네딕도의 삶도 이웃에게 복이 된 삶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역시 매일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의 복이 되어 파견됩니다.
이렇게 복된 존재로 살아갈 때, 복된 떠남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아름답고 복된 죽음입니다.
복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일치의 삶을 추구합니다.
늘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일치의 삶을 살아갈 때 복된 떠남의 여정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믿는 이들이 당신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해 주십시오.”(요한17,20-21).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일치의 삶을 살아갈 때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늘 기도로 소통하는 일치의 삶, 이보다 죽음의 귀가준비에 좋은 삶도 없습니다.
언젠가 인용했던, 어느 자매가 전한 남편 임종시의 세마디 말도 문득 생각납니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마디인지요.
말그대로 복된 죽음임을 입증합니다.
진정 믿는 이들이 마지막 떠남의 순간, 주님과 이웃에게 고백할 수 있는 말마디는 이 셋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떠남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름다운 죽음의 귀가준비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시편33,22).
아멘.
-최원석 님--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 ? 이런 질문을 어려서 들었을 때는 바로 나온 대답이 신부님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커가면서 꿈도 변하고 나도 변하였습니다. 신부님에서 교수님, 그외 등등으로 나의 꿈은 변경되어 갔습니다. 지금은 대기업에서 나와서 늦은 나이에 박사과정 학생입니다. 꿈을 접었을때 후회도 많이 하고 눈물도 많이 흘리곤 하였습니다. 특히나 어려서 가진 꿈을 접을때는 많은 눈물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해화동쪽으로는 발을 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떤 외형적인 꿈을 이루는 것이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을때가 많습니다. S사 근무시에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대단한 사람처럼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그런데 삶이라는 것은 외면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나의 꿈은 무엇인가 ? 라고 물어보면 부활한 예수님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니코 데모와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원한 삶이 없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의 삶에 집착을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이기에 그들은 이세상에서 무엇인가 소유하려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우열을 가리고 그리고 그 위에서 괴롭힘을 주고 영적으로 맑은 사람들이 하늘나라로 가는 것을 방해 합니다. 이것은 전부 영원한 생명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짓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가 육으로 생이 끝나면 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신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손수 이를 보여주기 위하여서 강생하시고 수고 수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시며 부활하신 것을 우리의 삶속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보고 우리도 그분과 같이 살면 주님과 같이 영원한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것입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 그러니 내가 바라본 꿈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
그래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제시하신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 주님이 공생활하시기 전에 40일동안 광야에 계십니다. 그 속에서 주님은 나를 찾기 보다는 하느님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유혹도 받으시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 공생활시에도 주님은 나의 안녕과 평화를 찾기 보다는 나를 비우고 하느님을 찾으셨고 그분과 같이 계셨습니다.
부활하시고도 주님과 하느님과 같이 계셨습니다. 여기서 길이 있는 것 같아요. 나를 비우고 주님을 나의 제일 우선순위에 놓는 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미약하여 무엇을 이룰수 는 없지만 예수님 말씀데로 나를 맞기고 살아가면 나도 주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에로 이를 수 있습니다.
나의 꿈을 주님안에서 이루시길 기도 합니다.
아멘.
♣ 영적 변형을 추구하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3,7)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니코데모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3,9) 하고 여쭙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태어난 이’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영적인 삶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새로운 삶을 말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그분을 향하여 끊임없는 변형의 길을 가는 것이 주님을 믿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삶입니다. 이런 영적 변형의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할까요?
우선 위로부터 태어나려면, 곧 새로 나려면 새로움의 근원은 하느님이심을 상기하고 그분에게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시선을 뗄 수 없이 빠르게 변화합니다. 시시각각 등장하는 새로운 것들을 접하면서 더 강렬한 자극을 접하려 합니다. 우리의 뇌도 팝콘이 터지듯 크고 강렬한 자극에만 반응하는 ‘팝콘 브레인(Popcorn Brain)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새로움은 그런 세상의 새로움과 변화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닙니다. 새로움의 근원이신 창조의 하느님께 뿌리를 두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기루같은 현상을 좇고 오감을 자극하는 것들에 길들여져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세속적인 사람, 현세적 가치와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영적 변형을 위해서는 세례의 은총을 회상하면서 새로움의 근원이신 분께 삶의 중심을 두고 육(肉)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수난과 부활의 여정이요, 죽어서 사는 길이기에 매우 어려운 길입니다. 옛것을 버려야 새로워질 수 있는데 그것은 고통과 아픔이 따르기 때문이지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붙들고 살아온 자신의 에고를 끊어내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그럼에도 저 밑바닥부터 새로워지는 영적 변형, 곧 참 행복을 바란다면 자기애, 이기심, 자기폐쇄, 고정 관념, 물질에 대한 애착, 감각적인 만족과 욕구충족, 선입견 등을 버려야만 합니다.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며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변형을 위해서는 매순간 삶의 근원이자 목표인 하느님을 선택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겠지요.
마지막으로 영적 변형을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의지와 열정만으로 변형이 이루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변화되어야 하는 이유도, 변형의 근원적인 힘도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상기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뱀을 보고 살아났듯이 예수님의 십자자를 바라볼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새로움의 근원이신 창조의 하느님께 내 삶의 중심을 두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십가자의 힘으로 ‘거짓 자아’와 온갖 애착과 물질로부터 떠나고, 묵은 습관과 고착된 행동, 사고의 틀과 선입견, 부정적 사고를 버리는 영적 변형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육을 떠나 주님의 영으로 세상을 품었으면 합니다.
하느님에 관심 없는 하느님의 사람들
-남창현 신부님-
자동차라든지 휴대폰 이야기가 주가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혹시라도 진지하게 영성적인 이야기를 꺼낼라 치면, ‘아이고 대단한 영성가 나셨네’ 농담 반 진담 반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세상 속에 발을 딛고 사는 사제들이니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세상사 다 잊고 살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하느님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는 사제들의 태도는 뭔가 이상하게만 느껴집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복음의 기쁨』에서 교종께서는 부끄럽지만 다음과 같이 지적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봉헌생활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목 활동가들이…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자신의 신원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즉 사목활동을 자신의 개인 생활에 부수적으로 덧붙여진 것쯤으로 보게 됩니다.”(78항)
이와 대비되게도 오늘 복음의 니코데모는 영적대화에 목이 말라 있습니다. 율법 학자였던 그는 어둠을 가로질러 예수님을 찾아가 심오한 영적대화를 청합니다. 그 대화는 니코데모의 삶을 다시금 깨어나게 했고, 그는 후에 모두가 주님을 외면했을 때 용기 있게 주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 장례를 치르는 인물로 기록됩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무엇에 목말라 있습니까?
초월치 않으면 자유롭지 않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자들의 공동체는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오늘 주님께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해서 바람이 불고 싶은 곳이 따로 있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다는 뜻으로 오늘 말씀을 알아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뜻으로 알아들어야 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뜻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 만일 저더러 자기 집에 안 오면 삐질 거라고 하거나 누구네 집이 부잣집이니 그 집은 꼭 들려야 한다고 하면 저는 그때 나는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갈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비슷한 뜻으로 말씀하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 그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운 분이시잖아요?
또 그러기에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존재에게 가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초월과 자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초월하지 않으면 자유롭지 않다.”
이런 뜻에서 저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다음 바로 이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라고 덧붙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초월해야지만 위로 올라가고, 로 올라가야지만 이 세상 것에서 자유로워지며,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야만 자유로우신 성령을 만난다는 얘깁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고 하나만 초월하지 못해도,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만 하나에라도 매어있으면 그 하나가 나를 하늘로 오르지 못하게 하고 성령을 못 만나게 합니다.
풍선이 하늘로 오르고자 하나 가는 실 하나에 매여 못 오르듯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풍선은 실 하나로도 위로 오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실에 매여 있는 풍선은 어떻게 그것을 끊고 오를 수 있으며 수없이 많이 소유한 것들과 그것을 소유케 한 그 많은 소유욕에 칭칭 감기고 매여 있는 우리는 어떻게 위로 오를 수 있겠습니까?
맨 것을 하나하나 푸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풀면 다른 욕심이 생기고 그래서 그것에 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예 아무 것도 가지지 않기로 하지 않는 한 하나를 버리면 그 없는 것 대신 다른 것을 갖고자 할 것입니다.
앓던 이가 빠져도 허전한데 애지중지하던 것을 버리고 나면 빈자리가 허전하여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단칼에 모든 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쫓아온 부자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한 것이 바로 당신을 따르라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라고 하신 것처럼 다 팔고,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신자들처럼 다 팔아 내 놓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소유와 탐욕과 욕망을 정당화 하고, 심지어 소유와 탐욕을 세뇌하고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못 가져서 불편하고, 불행하다고 우리를 착각하게 만듦으로써 소유와 탐욕과 욕망의 노예가 되게 만들고 불행케 만듭니다.
우리는 더 많이 가지려고 하다가 불행하게 되고, 더 좋은 것을 가지려다가 불행케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치심인데 이 세상은 도리어 주님의 가르침이 잘못된 거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따르고 누구를 따를 것인가 심각하게 도전받는 오늘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사도 4,34)
-오상선 신부님-
우리 가족이 5남매라 할 때 모든 형제들이 궁핍하지 않고 잘 살았으면 하고 바라지요.
어느 형제는 엄청난 부자이고 어느 형제는 가난과 빚에 찌들어 살게 되면 그 가족 형제들은 서로 만나고 싶어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족은 어떠한가요?
저희 형제들 가족은 모두 고만고만하네요.
특별히 잘 사는 형제도 없고 그렇다고 가난과 빚에 시달리며 사는 그런 형제도 없습니다.
다들 소박하게 살아가지요.
넉넉하게 베풀며 살지는 못하지만 저런 이런 우리 가족이 좋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가장 이상적으로 여깁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사유재산이 없이 모든 것을 공동 소유하고 필요한만큼 나누어 쓰는 공산주의 공동체였습니다.
원조 공산주의는 그리스도교의 이념입니다.
이 자발적이고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이 모두가 한 형제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꿈이 이기적인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왜곡되어 공산주의가 하느님을 부정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괴물이 되어 실패한 주의가 되어버렸지요.
그래서 인간의 자유를 중시하고 개인의 능력대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자본주의가 사유재산제도를 강화시켜 나감으로써 인간의 이기적 욕심에 부응하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결국 자본주의는 모든 재화는 하느님의 것이요 우리 모두는 그 이용자일 뿐이라는 재화의 공공성을 담보하지 못함으로써 공산주의 못지않은 실패한 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가정, 어떤 사회, 어떤 공동체를 하느님 나라에 가장 가깝다고 여기시나요?
하느님 나라는 아무도 궁핍한 사람이 없이 모두가 하느님 자녀로서의 고귀한 인격을 누리고 살아가는 그런 공동체가 아닐까요?
오늘날 유일하게 수도생활만이 그러한 비현실적인 꿈을 꾸고 있답니다.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초대교회 공동체의 이상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수도생활은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을 통해 계속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중 아무도 궁핍하여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거나 비난하여 죄짓지 않는 그런 축복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부자로 사는 것이 결코 축복이 아닌 것을...
나누며 모자람이 없이 사는 것이 진짜 축복인 것을...
<그리스도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땅에서 태어나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사람
하늘에서 내려와 땅 속 깊이 뿌리 내리는 사람
그러기에 땅을 딛고 하늘을 받치는 사람
영원 안에 하루의 의미를 소중히 보듬는 사람
하루의 삶 속에 영원을 담는 사람
그러기에 하루와 영원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
두 발 넓이 자그마한 땅만을 딛고 선 사람
무한한 마음으로 온 세상을 품에 안는 사람
그러기에 소유와 무소유의 벽을 허문 사람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 안에서 참된 사람을 만나는 사람
하느님이신 아드님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
그러기에 하느님과 사람의 하나 됨 안에 사는 사람
끝이 없는 하느님 영의 품 안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
보잘것없는 몸과 마음이지만 성령으로 가득히 채워진 사람
그러기에 하느님과 자신이 하나 된 사람
생각은 운명을 바꾼다.<요한, 3/7ㄱ8-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늘의 사람으로 사느냐? 땅에 사람으로 사느냐? 는 사람의 생각으로 결정한다, 위로부터 태어나서 하늘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아래로부터 태어나서 세상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욕구에 따라 사는 사람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삶의 결과에 큰 차별이 있습니다.
생각 속에 진, 선, 미를 따라 살려는 사람은 진리와 선행과 사랑을 낳고 살지만 생각 속에 거짓, 악, 추함을 따라 사는 사람은 속임수와 악행과 더러움을 만들어 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각자의 생각 속에 양심을 심어주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고 법을 만들어 주시고 항상 양심 안에서 위로부터 하느님의 영적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그 소리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이 참 구원자이시다 라고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님 안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초창기부터 세상을 떠나 주님의 곁으로 다가가고 주님의 소리를 더 잘 듣고 따르려고 고독과 침묵 속에 사는 수도승과 영적 삶을 살려고 기도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사람들의 생각이 엣 사람과 달라서 땅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세상 욕망의 노예가 되어갑니다. 더 높이 올라가서 윗자리를 탐하고 자기 이익만 챙기고 유명세만 쫓아다니려고 정신 차릴 시간이 없어 위에서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생각이 바르지 않으면 바른 말을 하지 못하고 바른 말을 하지 못하면 바른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며 불행한 운명을 살게 됩니다.
저는 가끔 좋은 생각이 떠오르다가도 세상의 편리함 안락함 유익함을 따르면서 좋은 생각이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이 초라하게 느끼면 더 높은 이상의 세계로 자신을 초대하고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살면 빛나는 운명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마음을 드높이 주님에게 향하여 살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 1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기쁜소식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또한 우리의
십자가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내면의 기쁨을
채워주십니다.
십자가는 우리
내면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니코데모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우리의 믿음은
시작됩니다.
믿음또한
십자가 위에서
새로워질 것입니다.
십자가와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의 공통점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십자가와
어떤 바람이냐에 따라
우리가 반응하는 것과
발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들어올려지는
새로운 삶처럼
영적인 탄생으로
오늘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믿음이
필요한 시간은
바로 우리의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들어 올려지는
기쁨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며칠 전, 차에 주유를 하고는 세차 가격 2,000원이라는 것을 보고는 세차 터널로 들어갔습니다. 너무나도 지저분한 제 차가 오랜만에 깨끗이 목욕을 했습니다. 세차 터널을 통과하고서 나오는데, 모자를 눌러쓴 어르신이 차에 남아 있는 물기를 닦아 주십니다. 깊은 주름의 얼굴, 그리고 모자 사이로 보이는 하얀 머리카락을 보니 편하게 차 안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이 분의 일이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2,000원으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싶더군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운전을 하는데, 생각해보니 호사를 너무 많이 누리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트의 계산대에서 일하시는 분, 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환경미화원, 아파트 경비를 맡으시는 분, 정말로 적은 시급을 받으면서도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서비스업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 등등.... 그동안 참 많은 호사를 누리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감사의 마음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 때가 많았으며, 친절한 말 한 마디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되더군요.
얼마 전에 한 선배신부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들은 정말로 잘 살아야해. 만약 신자들이 교회에서 봉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어? 그들에게 무조건 친절해야 하고, 더 좋은 모범을 보일 수 있도록 잘 살아야지.”
물론 사제가 없으면 미사를 할 수 없겠지만, 봉사하는 신자들이 없다면 교회가 제대로 유지되기도 힘들 것입니다. 즉,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감사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당연한 것으로만 알고 있으니, 서로에게 감사하지도 못하고 또 서로를 탓하면서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이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볼 수 있나요?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그 성령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어요?”라고 물으십니다. 이 대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라고 이야기하시지요.
우리는 바람의 움직임이나 경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람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 느낌으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도 이런데 어떻게 거룩한 성령의 활동을 직접 체험할 수 있을까요?
성령이 내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듣고 느낌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삶 안에서 나와 함께 하는 성령의 활동을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나를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를 도와주는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고 불평불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이 영원한 생명의 길에 좀 더 가깝게 갈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은 약하지만 신앙은 강합니다. 강한 주님께서 신앙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다 ‘틀렸다’, ‘끝났다’라며 포기하려해도 신앙인은 그 불가능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신앙인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신앙인 좌절을 잃은 사람입니다.
건강을 해치는 8계명
예전에 스크랩했던 글들을 보다가 ‘건강을 해치는 8계명’이라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그 8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남과 비교하라.
2. 힘든 것만 고집하라.
3. 유행하는 식단을 맹목적으로 따르라.
4.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현상만 바라보라.
5. 빠른 해결책을 강구하라.
6. 많이 불평하라.
7. 생활에 격한 변화를 줘라.
8. 포기하라.
몇 가지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참 신앙인이라면 그래서 주님께서 제시하신 길로 가는 사람은 건강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여러분은 건강하십니까?
다 버려야하는 여행준비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해외여행을 많이 갑니다. 견문을 넓히고 외국이 옆집 같고 지구촌이지요. 세계여행은 학교에 있으면 좋을법한 인생과목 같고 큰 배움이라 봅니다. 여행 준비는 고추장 경비 옷 등 가져갈 게 많고 그래야 잘 돌아온다지요?
영원 세상에 갔다 온 사람이 있다면 이 역시 인생에 큰 참고가 될 겁니다. 그곳엔 모두 다 꼭 갈 겁니다. 그러니 이 여행준비는 모두 꼭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왔다 갔다 하셨는데 그곳 여행준비는 가진 걸 다 버리라던데요?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요한 3,12)”
< 재산이 많음을 부끄러워하는 분위기가 되기를 >
-전삼용 요셉 신부님-
1923년 시카고 에드워드 비취 호텔에 7명의 미국 부자들이 모였습니다. 이 모임에 모인 사람들의 재산이 당시 미국 전체의 국고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모임 이름을 마이더스의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손만 대면 금으로 바뀌었다는 전설의 왕, 마이더스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황금을 가장 많이 가진 7인의 신화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온 미국의 매스컴이 이 에드워드 비취 호텔에 집중되었고 이목을 집중시킨 모임의 참석자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동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5년이 지난 다음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미국의 제일 큰 강철 회사 사장이었던 찰스 샤브는 거지로 죽었습니다. 농산물 곡물 수집업을 해서 거부가 된 아더 퀴터도 거지로 죽었습니다. 뉴욕 은행의 총재였던 리차드 위트니는 중한 죄를 짓고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재무부 장관까지 지냈던 엘버트 홀은 사기죄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풀려 나와서 몸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국제 은행 총재였던 네언 훼저와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큰 회사 사장이었던 제시 리버모우는 자살했습니다. 또 미국 부동산의 대표적인 거구였던 이반 쿠버는 자살 미수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를 돌보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출처: 홍정길, 301가지 감동 스토리]
부자가 다 이렇게 망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부자라고 자신들끼리 만나서 선망의 대상인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재산이 많다는 이들이 모여 교회의 공식 단체로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만약 초대교회 때에도 재산이 많다는 사람들끼리 교회 안에서 모임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우선 오늘 독서에서 초대교회에는 궁핍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나옵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그들 자신이 자신의 것을 자기 소유라 주장하지 않은 정신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땅이나 집을 팔았다고 합니다. 바르나바라고 하는 사람도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이들이 부동산을 팔았다는 것은 또한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항상 종말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당장 우리가 죽으면 남겨놓게 될 부동산들은 하느님 앞에서 꾸중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부동산을 사는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신과 후손들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의 소치입니다. 계단식 논에서 한 논이 물을 막아버리면 밑의 논들은 말라버립니다. 그것을 잘 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밑에 있는 밭이 물 부족으로 병이 들면 그 병이 위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는 것이 자신도 살리는 길입니다.
초대교회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진정으로 큰 자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창피스러운 일은 우리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있을 때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주위에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자신의 재산을 자랑할 수 있는 분위기라면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 재산의 많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문화가 되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주위에 가난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던 중 한 건물 밑 구석에 누더기를 뒤집어쓴 한 사람이 구걸하는 몸짓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동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니 돈을 달라고 내민 손바닥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주위에서 굶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 재산의 많음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어쩌면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를 바라보면서도 예수님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토마스와 같은 믿음은 아닐까요? 함께 성당에 다니고 있는 누군가가 궁핍하다면 미안해하며 최대한 도와야 할 것입니다. 내 주위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생기지 않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부자와 거지 라자로에서, 거지 라자로를 방치해 놓은 것만으로도 부자가 지옥에 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혼자서 자녀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자매님은 남편의 장례를 마치고 자녀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빠의 장례비용을 치루고 남은 돈은 하느님께 바치려고 한다. 그러니 너희들도 그렇게 알아주면 좋겠다.’ 자녀들도 아빠가 좋아할 것이라고 하면서 하느님께 바치려는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 자매님은 생활 형편이 넉넉하기 때문에 나눈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누었습니다.
시흥5동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여름에 폭우가 내려서 할머니의 집에도 침수 피해가 있었습니다. 성당에서도, 정부에서도 피해를 입은 할머니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할머니께서는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성당에서 드린 돈, 정부에서 지원해 준 돈을 도로 가져오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모으신 돈까지 가져오셨습니다. 할머니는 큰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니, 더 큰 피해를 입은 분들을 위해서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서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다만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시는 따뜻한 마음이 있으셨습니다.
작년에 교황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원봉사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전례 봉사를 해 주셨고, 어떤 분들은 질서유지 봉사를 해 주셨고, 어떤 분들은 통역 봉사를 해 주셨고, 어떤 분들은 번역 봉사를 해주셨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만여 명이 넘었습니다. 다들 바쁘신 중에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봉사를 해 주셨습니다. 교황님의 방한을 준비하는 비용은 대부분 많은 사람들의 협찬으로 마련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기쁜 마음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소중한 것은 ‘靈’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주 아름답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소중한 것은 재물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공동체는 바로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공동체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입니다.
행동하는 믿음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개나리 진달래, 라일락이 꽃을 피우며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미선나무도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긴 겨울의 추위를 견뎌 낸 나무들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습니다. 영양을 충분히 지닌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들이 드러납니다. 밑거름이 중요한데 웃거름으로 겉만 다스렸던 나무들은 힘이 없습니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지만 밑거름이 충분하지 못하면 일시적인 효과를 내는 웃거름에 매달리게 됩니다. 결국은 튼실하지 못하여 쉽게 명을 다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꾸준합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효과를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떠도는 유명한 곳을 찾아 돌아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신심단체활동 등 생색내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기도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믿음의 생활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4-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행함으로써 증거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17,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의 삶이 중요합니다. 알프레드 디 수자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안에서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화사한 봄날 같은 사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리사이 가운데 유다 최고 의회 의원이었던 니코데모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참으로 특별했습니다. 바리사이 가운데 최고 의회 의원이라 함은 당시 엘리트 가운데 엘리트를 상징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아주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은 당대 다른 바리사이들이나 최고 의회 의원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비뚤어진 시각이 아니라 호의적이고 진지한 시각이었습니다. 그는 유심히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봤습니다. 때로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쌍날칼보다 날카로운 말씀, 의미심장한 말씀에 가슴 찔리기도 하면서 그 말씀을 곰곰이 묵상했습니다.
그는 기본이 된 신앙인, 건강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니코데모는 마침내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현존하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니코데모가 공개석상에서 아니면 최고 의회 진행 중에 떳떳하게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럴 자신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분위기상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잘 나가던 인생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쥐도 새도 모르는 깊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신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를 유심히 바라보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신앙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기 위해 자극이 되는 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한 관문이 있습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적인 태어남에 이어 영적으로 다시 한 번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겠다는 표현, 하느님을 내 주님, 내 아버지로 여기며 살겠다는 표현, 육에 따른 삶이 아니라 영에 따른 삶을 살겠다는 표현인 세례 성사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은 세례성사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생활 안에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매일의 삶 안에서 어제의 나에 죽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서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어제의 어두움과 심각한 죄, 어제의 상처와 괴로움을 매일 어제의 강물에 흘려보내고 마치 다시 태어난 듯이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 부활과 관련된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을 접했습니다. "온천지에 봄이 왔지만 아직도 내게는 봄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내게 다가오자 그로 인해 비로소 내 인생에도 봄날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치 요즘 날씨처럼 찬란하고 화사한 선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우리들 인생은 매일 매순간이 봄날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존재 자체로 따뜻한 봄날 같은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절망의 나락에 빠진 아이들, 죽어가는 이웃들에게 그래도 세상은 따뜻하답니다, 그래도 삶은 살아볼만하답니다, 라고 외치며 화사한 봄날을 선물로 주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경계(境界)가 없으신 분 -성령의 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원장수사와 대화 중 깨달음이 은혜로웠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묵상입니다.
삼위의 하느님 모두가 경계가 없으신, 그대로 사랑과 생명, 자유의 분임을 깨닫습니다. 공동체의 신비는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경계가 없으신 분입니다. 끊임없이 사랑으로, 생명으로 자유롭게 흐르는 분이십니다. 도저히 율법주의의 구획이 적용될 수 없는 분입니다.
듣고 보니 온전히 건강한 수도형제가 나를 포함하여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도와 양상의 차이일뿐 모두가 병자들이었습니다.
아니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그러합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본의든 아니든 커다란 십자가 하나씩 지고 삽니다.
사실 때때로 자기 탓없이 타고난, 정체불명의 희귀병을 앓는 형제자매들을 만나다 보면 이런 생각은 더 확실히 자리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을 만나 성인(聖人)이 되는 길뿐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살아있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작은 요셉수도공동체지만 그대로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세상과 격리 유리된 수도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제 저녁 식사 때만 해도 형제 셋은 휴가중이고, 형제 셋은 광화문에서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수도자 주최의 추모 미사에 참석했기에, 형제 일곱만 남아 식사했습니다.
광화문 광장의 두 위대한 '애민(愛民)의 사람',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 사이에서의 미사가 참 상징적이다 싶었습니다.
마침 어제 읽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중 짧은 구 일기문도 감동이었습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냉철하고 단정단단하기가 얼음 같습니다.
"맑음, 옥문을 나왔다"(1597,4,1)
"필공을 불러 붓을 매게 했다"(1597,4,2)
'맑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심정의 표현이고, '붓을 매게 했다'는 것은 과거에 매이지 않고 내일을 준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런 성군(聖君), 성웅(聖雄)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대한민국임을 생각합니다. 새삼 믿는 이들 모두가 성인(聖人)으로 불림 받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참 성인은 누구입니까?
그 연민의 사랑으로 인해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을 닮아 경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뛰어난 개방성, 유연성, 신축성을 지닌 이들입니다. 바람같고 구름같고 물같은 사람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바로 예수님처럼 영에서 태어나 사랑따라 부는 바람같은 이가 성인입니다. 참 자유로운 하느님 사랑과 생명의 현존같은 존재들입니다. 사랑으로 자유롭게 흐름이 바람같고 구름같고 물같은 '성령의 힘'입니다.
자유롭게 흐르면서 시기적절한 때 생명의 비가 되어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구름이며, 유유히 흐르면서 메마른 대지에 생명을 주는 강물이고, 봄바람처럼 죽음의 겨울지낸 대지와 나무들을 사랑으로 스치면서 생명의 싹을 티우고 생명의 꽃을 피워내는 성령의 바람입니다.
이런 '사랑의 성령'이 끊임없이 흐르면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치유하기에 유지되는 개인이요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성령 바람이 닿지 않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개인 및 공동체는 물론 세상 속속들이 불고 싶은 데로 불어가는 사랑의 성령 바람입니다.
깨어있어 성령의 흐름에 민감히 호응하는 이들이 바로 성인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성령의 바람은 니코데모에게 불었고 사도행전의 신자공동체에 불었습니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입니다. 사도행전의 신자공동체는 결코 인간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 아닌 순전히 성령의 선물로 주어진 유토피아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인류역사상 인간이 시도했던 유토피아 세상을 위한 폭력적 혁명은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의 힘으로 유일하게 성공한 사도행전의 유토피아 공동체입니다.
진정 꿈의 공동체, 지상에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 성인이요 유토피아 공동체입니다.
"신자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성령의 열매 공동체입니다. 여기에서 영감 받아 탄생한 수도공동체들이요 심지어는 공산주의 사상 역시 여기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성령의 힘이요, 경계가 없이 사랑과 생명으로 불고 싶은 데로 부는 성령의 바람, 사랑의 바람, 생명의 바람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내적일치와 더불어 위로와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십니다.
"주님,
이 거룩한 파스카 신비로 구원을 이루시니 이 미사가 저희에게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아멘.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 4,32)
-오상선 신부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이제 함께 살기로 작정합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공동생활을 시작합니다.
각자가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내것을 주장하지 않고 다 우리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유에 집착함이 없으니 모두들 영으로 자유로와집니다.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쁨 가운데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어찌 이게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수많은 수도공동체들이 바로 이러한 초대교회 공동생활을 모델로 삼고있지요.
수도자들에겐 내 것이라곤 없습니다.
다 우리 것일 뿐입니다.
많이 번다고 다 내것이 아니요. 집에서 청소만 한다고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수도공동체 안에는 아무도 궁핍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가난하면서도 모두가 부자입니다.
모두들 자기 것을 다 내어놓으니 가난하고 내어놓은 것을 다 모으니 늘 차고넘칩니다.
왜 이러한 논리를 더 확장시키지 못하는 걸까요?
사실 내 것이라는 건 다 하느님이 주신 것이고 다른 사람의 수고의 댓가인데 왜 내것이라고 자꾸만 우기는지...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액을 총인구수로 나누면 모두가 궁핍하지 않고 모두가 풍요로울 텐데...
내것을 챙기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궁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좀 내려놓읍시다.
내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제발 우기지 맙시다.
그래야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가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참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불고 싶은 데로 부는 성령의 바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바람과 같다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성령의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바람이 불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요?
반대로 불고 싶지 않은 곳은 어디일까요?
저는 성령의 바람이 불고 싶은 곳일까요?
저는 성령의 바람이 불고 싶지 않은 곳이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어디를 가리지 않고 다 불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분다는 것은 어디, 누구에 매이지 않고 어디고 자유롭게 분다는 뜻일 겁니다.
그럼에도 성령의 바람은 위에서 불기에 위에서 태어난 사람, 위로 오른 사람에게 분다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의 바람은 주님의 산 위에서 불기에 주님의 산으로 오른 사람이라야 성령의 바람을 맞을 것입니다.
왜냐면 성령의 바람은 하늘이나 땅 어디나 불지만 땅위의 사람은 그것이 성령의 바람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 바람을 쐬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처럼 위에서 태어나야 하고, 주님처럼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위, 곧 주님의 산으로 오르겠습니까?
시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몸과 마음과 정신이 다른 데 가 있지 않고 주님의 산 위에 가 있는 깨끗한 사람이라는 얘깁니다.
우리말에 ‘그런 썩어빠진 정신 가지고 무엇을 하려느냐?’,
‘그런 썩어빠진 정신 가지고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썩어빠진 정신을 그리스도교나 프란치스칸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spirit of the flesh’, 곧 ‘육적인 정신’ 또는 ‘육의 영’일 것입니다.
이 육적인 정신(sprit of flesh)은 헛 군데에 정신을 쓰는 영인데 여기서 헛 군데란 하늘 위가 아니라 세상일이기에 육적인 정신은 하느님 나라에 정신을 쓰지 않고 세상일에만 씁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우리는 육의 영(spirit of the flesh)을 지니지 말고 주님의 영(spirit of the Lord)을 지녀야 하며, 주님의 영을 모시기 위해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바람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바람인데 성령에서 태어난 사람도 이와 같다고 오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령의 바람은 세상일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 자유로운 영혼에게 불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 한복판에서 ‘하늘 일’을 행하는 영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면 참으로 답답하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거짓과 부패, 갈등과 소외가 심화되고 대단한 꿈도 아닌 그저 인간이고 싶고, 소박한 기쁨을 맛보며 사는 것이 왜 그다지도 힘겨울까? 육의 영, 더러운 영이 판을 치는 이 현실 앞에 화사한 봄 햇살마저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요한복음의 육(肉, 사륵스)의 관념은 자연적인 인간 조건을 말한다. 곧, 스스로 고립되어 살아감, 고정 관념, 선입견 속에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지칭한다. 반면에 영(靈, 프네우마)은 숨, 기운, 바람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하느님의 시각, 하느님의 정신을 갖고 사는 태도를 말한다. 여기서 구원에 이르려면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야 하며, 사고방식과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곧,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3,7) 이는 온갖 애착과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분의 심장으로 느끼며 그분 안에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는 ‘변화되어야 하는’ 회개의 삶을 말하며, 무디고 더렵혀진 마음의 창을 말씀과 성령에 의해 닦아내는 ‘죽음의 길’이다.
변화의 동기와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이며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므로 그리스도처럼 내면이 변화되고 변형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성령의 역사하심에 자신의 삶을 맡겨야 한다. 내 뜻, 나의 사고방식, 나의 고정 관념, 나의 판단, 의지가 아닌 그분의 힘에 맡길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능력이요 겸손이다. 더러운 영(靈), 육의 영을 버리고 하느님의 영 안에 머물고자 하는 이는 굳어진 자기 모습이 부서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이 주는 새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 이끄심을 식별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고 그에 따라 움직인다. 또한 영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과거의 관습적인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불확실과 불안정에 과감히 자신을 던지는 것을 말한다. 배척이 아닌 수용을 통하여 모든 사람과 일, 모든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니코데모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질문을 던지고 사라져버린다(3,9). 밤에 예수님(=빛)을 찾아와 빛을 대하자 빛 앞에 자신을 폭로시켜버렸다. 이처럼 우리도 새로이 태어나기 위하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하고, 부서지고 재(?)로 변하여 다시 태어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3,12)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려는 ‘세상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을 계시해주시기 위해 보여주신 표징들을 일컫는다. 그렇다! 우리는 나날의 삶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의 표지를 알아보지 못한다. 반면에, 예수님의 계시에는 세상적인 것과 무관한 절대의 신비와 진리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 일’이다. 그러나 죄중에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이를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3,14-15) 십자가에 들어올려지시어 죽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 부활, 승천의 과정이 모두 영의 질서이며 우리가 살아내야 할 길이리라! 매일의 삶에서 겪는 수고로움과 불편함과 고통과 시련은 주님과 일치하기 위한 과정이며, 육의 영에서 떠나라는 표지가 아닐까? 그런 것들을 회피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자! 이제 우리도 ‘거짓 나’를 태워버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 일’을 깨닫고 실천하는 일에 몰두해보자!
경제논리를 앞세우며, 304명의 고귀한 생명들의 죽음의 진실규명에 한발짝도 나서지 않는 철면피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저항에 나서는 것이 ‘하늘 일’을 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권력과 재력을 가진 이들의 경제정의 침해, 기본 생존권에 대한 위협, 일상화된 거짓과 부패 앞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말하고 행동할 때이다. 어디든 하느님 부재(不在)의 상황을 더는 참지 말아야 한다. 영의 질서는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을 외면하고 인간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을 떠나 저 허공에 있지 않으니...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마음을
만납니다.
십자가의 마음이
부활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십자가처럼
들어 올려져야
이 모든 것이
삶의 선물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처럼
들어 올려져야
내려 놓을 수 있습니다.
들어 올려지는 순간이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자아를 벗어나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하는
생명이 됩니다.
믿음은
들어 올려진
십자가의 예수님과
마주할 때
만나게 되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십자가에 기댈 수만 있어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다버린
십가가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살다 보면
삶이란 버려야
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올려들어야 할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여실히 일깨워 줍니다.
발돋음하는
십자가로
부활의 하늘아래
펼쳐진 생명들이
힘차게 싹들을 튀웁니다.
자아에 갇혀있는 우리를
나오게 하기위해
들어 올려짐과
펼쳐보임의 십자가는
언제나 부활의 중심에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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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제님께서 회사 일을 하다가 자존심을 상해 홧김에 사표를 냈습니다. 자기가 왕년에 얼마나 잘나가는 사람이었는데, 별 것도 아닌 사람에게 굽실거리면서 사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것이지요. 체면이나 명성을 유지하는 자존심이지만, 이렇게 자존심만을 세웠을 때 찾아오는 것은 결국 내일이 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즉,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물론 어느 정도의 자존심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자존심을 내세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전혀 듣지 않은 채 자기주장만을 철저하게 고집하게 될 때에는 다른 이들과 화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항상 혼자 있는 나의 모습을 스스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은 너무 세도 좋지 않고, 너무 없어도 좋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나를 딛고 일어서 변화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를 사람들은 ‘자존감’이라고 말하지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내면자아의 존엄성이라고 말하는 ‘자존감’은 지나온 시간과 경험들을 통해서 그리고 삶 안에서의 열심한 노력을 통해서 차곡차곡 내 안에 쌓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외부의 비난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한 굳이 외적으로 자기를 들어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행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감싸 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인가? 아니면 자존심이 센 사람인가? 나는 혹시 ’왕년에‘라는 말 사용하면서 구시대의 틀 안에 잡혀 있는가? 아니면 지금의 삶에 감사하면서 겸손하고 사랑하면서 살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스승인 ‘니코데모’에게 어떻게 보면 모욕의 말을 전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그래도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으며 또한 스스로도 많은 공부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 것도 모르느냐?”라는 말을 듣게 되니 얼마나 얼굴이 화끈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극적인 말씀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성령으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박학함에 우쭐대고, 유다인들의 스승 자리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성령으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겸손과 사랑을 직접 보여주시지요.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유한하고 나약한 육신의 몸을 취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겸손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낮은 자리도 기꺼이 선택하신 것이지요.
주님 앞에서 우리가 내세울 것이 전혀 없음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겸손을 본받아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구원 사업에 함께 동참할 수 있습니다.
뭔가로 보이지 않는다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지. 요컨대 아직 틀에 박히지 않았다는 얘기니까(무라카미 하루키).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
많은 이들이 행복을 소유에 달린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소유가 주는 만족은 순간일 뿐입니다. 이를 하버드대의 댄 길버트 교수가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발표했습니다. 글쎄 복권 당첨의 행복감은 평균 3개월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꿈을 이루거나 고급 승용차를 산 사람도 3개월이 지나면 예전과 똑같아졌다고 합니다.
이렇듯 소유는 순간의 만족만을 주기에 사람을 더욱 더 허무하게 만듭니다. 결국 행복은 내적인 마음에 있으며, 겸손한 삶과 사랑의 삶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지요.
어 느 날, 한 처녀가 길에서 요술 램프를 주웠습니다.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요정이 나타나 말했습지요. “아가씨! 소원을 말하세요. 한 가지만 들어줄게요.” 고민이 되었습니다. 소원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돈도 있어야 되고, 남자도 있어야 하고,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꾀를 부려 램프 요정에게 한꺼번에 소원을 말했습니다. “돈! 남자! 결혼!” 그러자 요정이 소원을 들어줘서 정신이 돈 남자와 결혼했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소유만을 찾다보면 마음의 평화를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 방법이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 피, 새로 태어나게 하는 힘 >
-전삼용 요셉 신부님-
독일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errer, 1471-1528)는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로서 독일이 유럽연합(EU)에 가입하기 이전 독일 화폐에 그려져 있던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가 남긴 작품은 수도 없이 많지만 특히 뉴른베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기도하는 손’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기도하는 손’에는 위대한 사랑과 우정이 깃든 감동적인 사연이 함께 전해져 내려옵니다.
뒤러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지만 워낙 가난하여 자신의 재능을 불태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침울한 소년기를 보낸 뒤러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이 둘은 더 큰 도시로 나가 정식적으로 그림을 배워볼 결심을 하고 낯선 지방으로 가게 되었지만 도시는 그들에게 먹을 것도 잠을 잘 자리도 제공해주지 않았습니다. 둘이 가져온 돈도 다 떨어지자 둘은 더 이상 도시에서 버틸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둘 다 공부를 못할 것이니 한 사람이 공부하는 동안 한 사람은 일자리를 구하여 뒷바라지를 하고, 학업이 끝나면 서로 교대하여 공부하자고 제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뒤러의 친구는 삼류식당에 뛰어들어 먼저 취업을 했고 그 친구가 힘들게 번 돈으로 공부를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뒤러의 첫 그림이 팔리던 순간 친구의 얼굴이 생각나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그림은 친구의 피로 탄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들고 친구가 근무하는 식당으로 뛰어갔습니다.
캄캄한 친구의 주방을 들어서려는 순간 뒤러는 문틈으로 친구가 방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뼈마디가 굵어지고 거칠어진 두 손을 함께 모으고 뒤러를 위해 진실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끌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뒤러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기에는 부적절하게 변해버린 친구의 두 모은 손을 기억에 담아 그렇게 ‘기도하는 손’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알브레이트 뒤러는 문학에서의 괴테와 함께 독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그의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뒤러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또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 세상의 진리입니다. 누군가의 노력 없이 건물이 지어지거나 예술품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새로 무엇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피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일본에서 천민이었지만 사무라이가 된 이야기를 여러 번 한 것 같습니다. 이 아이는 훈련을 받다가 그리고 귀족 훈련생들 때문에 몇 번이고 뛰쳐나가고 싶을 때마다 성 기둥 안에 있는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죽었지만 그 기둥 속에서 아들에게 끊임없이 힘을 주고 계셨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소년은 그 기둥 안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받고 끝까지 버티어 훌륭한 사무라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죽는 것은 에너지를 배출합니다. 가장 큰 에너지는 누군가를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할 때입니다. 이 사랑을 위한 희생만이 누군가를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니코데모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느냐고 하십니다. 세상에서도 무언가 새로 태어나게 하려면 피를 흘려야 하는데 어찌 하늘의 이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란 예언인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며 흘리신 피로써 새로 태어나 이젠 자신의 가진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리마테아의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도 누군가 새로 태어나려면 또 다른 누군가의 피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새로 나는 것도 누군가의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태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아이가 기둥 안에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죽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믿기만 한다면 그분의 피를 통해서 우리가 새로 태어나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문제의 답은 성령입니다.
성령의 힘, 성령의 은총입니다.
우리를 개안의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도 순전히 성령의 은총입니다.
하여 수도공동체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성령청원 찬송가를 바치곤 합니다.
참 좋은 성령입니다.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은총을 상징하는 성령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씀대로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로 이런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갈라5,22-23).
진정 성령 충만한 사람인가는 이런 성령의 열매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성령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찾이합니다.
반면 육의 행실은, 열매는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등이요 이런 짓을 저지르는 이들은 결코 하느님의 나라를 찾이하지 못합니다(갈라5,19-21).
이처럼 성령의 열매와 육의 열매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과연 나는 영의 사람입니까 육의 사람입니까?
아무리 세상적으로 똑똑해도 성령에 무감각할 때 그는 눈이 닫힌 육의 사람입니다.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바로 세상적으로 모든 것을 갖춘 니코데모에게 한가지 결정적으로 결함된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날 것을 거듭 촉구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 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니코데모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니코데모는 구도자의 모범입니다.
진지하게 묻고 경청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이미 성령의 은총이 작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니코데모 자신도 예수님도 답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니코데모의 무딘 마음을 일깨우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성령의 은총과 니코데모의 노력만이 남아있습니다.
니코데모에게 부족한 것은 성령의 은총에 마음을 활짝 여는 겸손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1독서 사도행전의 공동체는 인간이 성취한 유토피아 공동체가 아니라 순전히 성령께서 하신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축복, '그들 가운데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신명15,4)'라는 말씀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4,32-35).
이런 사랑의 공산주의 공동체는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순전히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성령님이 하시지 않고는 한마음, 한뜻의 공동체, 공동소유의 공동체,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는 공동체,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공동체는 불가능합니다.
역사상 유토피아 공동체를 설립하고자 시도했던 대부분 경우 실패 원인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성령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하려 했던 탓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에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노고를 통한 성령의 열매가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보고 감상하라 있는 사도행전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내 몸담고 있는 자리에서 성령의 힘과 우리의 노력으로 이뤄야 할 한마음, 한뜻의 사랑의 공동체요, 바로 이런 '공동체의 원형'이 우리가 드리는 공동미사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아멘.
땅의 사람, 하늘의 사람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하늘은 땅을 품습니다. 하늘은 땅보다 더 넓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땅만을 보고 삽니다.
이 땅이 전부인 양 말입니다. 땅만을 보면 마음이 좁아집니다. 자연히 자신의 것만을, 자신의 이익만을, 자신의 권리만을, 자신의 안위만을 따집니다.
자신의 자리와 안전만을 따지기 때문에 다른 이의 눈물과 아픔과 호소에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외면합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자신의 자리 보존에만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왜 생각날까요?
또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제일 먼저 도망친 사람들이 왜 생각날까요?
우리 가운데는 이 땅에 살지만 분명 하늘에서 내려온 이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이웃을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남들에게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피신시키다가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이들이 남긴 마지막 말들은 “사랑합니다”였습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 이미 하늘을 품고 산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이 땅은 살만합니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우리는 땅만 보지 않고 하늘을 품고서 살 수 있습니다.
“주님, 하늘에서 내려오신 당신처럼 하늘을 품고 산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소서. 또한 우리도 이 사람들처럼 하늘을 품고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행동하는 믿음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당주변의 철쭉, 연산홍, 꽃잔디, 주름잎, 민들레 꽃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소나무 솔잎 꽃도 너무도 이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핀 꽃이지만 얼마 안가서 다음을 준비하며 시들해질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자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누구의 인정에 개의치 않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아름다움 모습이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만한 영양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속이 튼튼하지 못하면 생기가 없습니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면서 스스로 성장을 조절합니다. 그런데 밑거름이 부족하고 웃거름만 넘치면 일시적인 효과에 매달려 웃자라고 제때에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웃거름은 겉만 다스리지 속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튼실하지 못하여 쉽게 명을 다하게 됩니다. 웃거름은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꾸준합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효과를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떠도는 유명한 곳을 찾아 돌아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신심단체활동 등 생색내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기도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가장 완벽한 기도는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4-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행함으로써 증거 되는 것입니다.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17,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의 삶이 중요합니다. 알프레드 디 수사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안에서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사랑합니다.
만나러 갑시다
-구자균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요한 3,1-21) 중 일부입니다. 바리사이로서 유다인들의 최고의회 의원인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니코데모가 그만큼 간절했기에, 아니면 다른 이들 몰래 은밀히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으로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니코데모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었지만 그의 내면에 있던 무언가가 그 밤에 예수님께로 그를 이끌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두 사람이 하는 대화의 논점은 ‘다시 태어남’으로 보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니코데모는 아직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깨닫지는 못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하나하나 말씀해 주십니다. 동시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의 완고함을 꾸짖으시는 것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예수님은 니코데모의 부족한 믿음을 단호하게 지적하시면서도 그의 절실한 마음을 읽으시며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십니다.
완전하진 않지만 그에게 간절한 믿음의 씨앗이 있음을 아셨던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예수님 보시기에 그는 충분히 당신 말씀을 받아들일 그릇이 된다고 여기셨던 것일까요? 출발은 니코데모의 간절함에서 시작되었으니 그의 간절함을 닮아 우리도 그분을 향한 거룩한 갈망을 표현하러 찾아갑시다! 그분을 만나러 갑시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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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
사랑하는 가족도 형제도 벗도 죽는다.
미워하는 이들도 죽는다.
사실 슬픈 일이며 허무한 일이고 두려운 일이다.
삶을 가장 잘 이해하게 하는 말은 죽음이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우리는 삶을 제대로 만들 수 없음이다.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피하거나 잊고 살려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피곤하고 무섭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무겁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복음적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가끔은 거울 앞에 서듯,
자신에게도 여지 없이 찾아올 그 죽음 앞에 서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가장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순간이 허락된다.
내가 좇고 있는 것의 허상과 실상을 식별할 수 있게 한다.
허망한 욕망이 아닌 참된 희망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하여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알게 한다.
가장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지혜를 가르친다.
죽음 역시 준비된 자가 가장 아름답게 맞이한다.
죽음은 끝이 아닌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그리스도인들은 믿고 있다.
그러면서도 ‘영원한 죽음으로’의 길에 모든 것을 쏟고 있지는 않은지 자성할 일이다.
아름다운 죽음은 죽음을 넘어서는 약속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말 조련사 아버지를 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꿈을 설계해 보라는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소년은 평소에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이다음에 100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목장의 주인이 되리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7장의 종이에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일정을 꼼꼼하게 작성하여 다음날 선생님에게 제출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소년의 숙제에 빨갛게 x표를 치며 말했습니다.
“얘야. 너와 너의 아버지는 지금 너무 가난하단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을 모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니? 좀 더 현실적인 계획표를 작성해 오면 그때 다시 점수를 주겠다.”
하지만 소년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냥 x를 주세요. 저는 점수와 제 꿈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 로부터 30년 후! 소년은 그의 꿈대로 100만평의 목장 주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늙은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100만평에 달하는 엄청난 목장의 규모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장 주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보게! 나를 기억하겠나? 30년 전 자네의 100만평 꿈에 x표를 했던 선생이라네. 아, 나는 수많은 아이들의 꿈에 x표시를 한 꿈 도둑이네, 꿈 도둑! 아, 그런데 자네만이 나에게 꿈을 도둑맞지 않았구먼.”
만약 이 아이가 그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꿈을 빼앗기고 꿈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 다 좋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새로워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스승으로 삼고 그로부터 새로 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헬렌 켈러와 같은 사람은 어쩌면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보다 설리번 선생님을 통해서 새로 태어난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 러나 부모로부터는 잘 태어났더라도 스승을 잘못 만나면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래가 아니라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누구를 스승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인생도 바뀌고 또 영원한 삶도 얻거나 잃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로부터’ 나를 나게 해 줄 스승을 어떻게 고를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설리번과 헬렌 켈러의 사례를 통해 답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헬렌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말하자면 짐승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헬렌 켈러를 가르치기 위하여 왔던 다른 선생들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는 그의 상태를 보고서는 다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설리번 선생은, 헬렌의 집에 처음 도착하던 날, 먼저 그 짐승 같은 아이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그 이후 설리번 선생은 지성을 다한 노력으로 헬렌 켈러에게 수화와 단어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랑’이라는 단어를 배우게 되었을 때, 설리번 선생이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헬렌은 “선생님이 오시던 날 나를 꼭 안아 주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설리번 선생이 꼭 안아 주던 그 첫날부터 짐승처럼 거칠던 헬렌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설리번 선생은 어떻게 남들이 손잡기도 꺼려하던 그 짐승 같은 아이를 사랑으로 껴안아 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설리번 선생 자신이 심각한 망막 질환으로, 실명 직전까지 갈 정도로 큰 아픔과 고통의 과정을 겪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겪었기에 그 같은 고통 속에 빠져 있는 불쌍한 헬렌을 진심으로 사랑을 다해 안하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헬렌을 살려 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 내 자신을 맡길 가장 믿을만한 사람은 나의 어려움을 자신의 아픔처럼 알고 나를 사랑으로 안아 줄 수 있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즉 위로부터 새로 난다는 말은 사랑으로 새로 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나의 아픔을 대신 아파해 주고 나에게 생명까지 바치며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스승이 그리스도 외에 존재할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참 스승은 당신 한 분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 기가 태어나기 위해서 엄마 뱃속에서 무슨 준비를 할까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엄마의 뱃속에 머물기만 하면 키워주고 낳아주는 것은 모두 엄마의 몫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머물기만 하면 그분의 성령 안에서 나를 키워주시고 새로 나게 해 주시는 것은 그분의 몫인 것입니다. 내 스스로 커보겠다고 그분의 품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그리스도만큼 가장 확실한 나의 스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뭅시다. 한 번만이 아니라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때까지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이는 구름처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다 애지중지愛之重之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애지중지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컴퓨터와 운동화(등산화 포함), 부채를 애지중지하였습니다.
부채는 마음의 여유를 주기 때문에 애지중지하였고, 컴퓨터와 운동화는 제가 많이 하는 일과 운동에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때 저는 컴퓨터 반대론자였습니다.
그 편리함과 유용함 때문에 제가 컴퓨터의 노예가 될까봐 두려웠던 겁니다.
그러다 번역을 하는 것 때문에 컴퓨터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옛날 제가 번역을 할 때는 사전을 찾아가며 노트에다 번역을 하였는데, 수정을 해야 할 경우 찍찍 긋고 빨간 펜으로 수정을 하였으며 그것을 다시 정서하거나 그대로 책 편집자에게 넘기곤 하였고, 외부에 보낼 때에는 우리 형제들에게 컴퓨터로 쳐주기를 부탁을 했지요.
그러니 책 편집자나 형제들이 제발 컴퓨터로 작업을 하라는 거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 없어서 컴퓨터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컴퓨터로 하게 되었고 지금 제가 말씀 나누기에 글을 올리는 것도 컴퓨터를 하지 않았으면 아마 아예 생각도 못했을 것이고 시작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시 문제점이 없지 않습니다.
제가 그토록 염려하던 그 기심機心이 제게 있는 겁니다.
“有機械者必有機事, 有機事者必有機心:
기계를 가진 자 반드시 그것을 쓰게 되고, 그것을 쓰는 자 반드시 기심을 갖게 된다.”(장자, 천지편)의 그 기심입니다.
필요할 때 기계를 그저 쓰기만 하면 될 텐데 기계를 쓰다 보니 애착이 생기고 기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너무 유용하니 기계가 고맙기도 하고 애착이 가고, 기계에 의존하는 마음, 기계 없으면 뭘 못하겠다는 마음도 생깁니다.
말하자면 술 중독처럼 기계 중독인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또 다른 기심을 생각합니다.
“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금강경)의 그 기심其心입니다.
앞의 기심機心이 우리 안에 없어야 할 마음이라면 뒤의 기심其心은 우리가 안에 지녀야 할 마음입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의 기심, 곧 어디에도 머물지도 집착치도 않는 마음입니다.
지금 저는 어느 수녀원 연 피정 지도를 하고 있는데, 어제는 수녀원 뒤 산에서 산악 마라톤을 하였습니다.
다 뛰고 내려오는 길에 운동기구가 있어서 윗몸 일으키기를 하고 힘들어 누운 채로 쉬었는데 소나무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바람에 떠가는 구름이 보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 마라톤을 하였기 때문인지 다음과 같은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바람은 자유롭게 불고 바람에 이는 구름은 머무는 곳도 없고 있다가도 없다.
성령의 바람도 매이지 않고 불고 싶은 데로 불고 성령의 바람에 움직이는 마음도 어디에 매이지 않는다.
이제 나는 무엇을 가지되 가지지 않고 어디에 머물되 머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지나치다면 무엇을 쓰되 가지지 않고 가지되 애착치 말 것이다.
어디에 머물더라도 붙잡혀 안주치 말고 어디로 가더라도 욕심에 이끌리어 가지 말 것이다.
영에서 태어난 사람,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 것이다.

<세상일, 하늘 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이 말씀에서 '세상일'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일,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요한 3,3.5)'을 가리킵니다.
'하늘 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요한 3,5)'로 해석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너희가 세상일을 믿는다면 하늘 일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나 복음서 저자의 말로 생각한다면, '세상일'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모든 일들로 해석할 수 있고, '하늘 일'은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일을(복음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구원과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가 되고, 다시 이 말은, "우리가 증언하는 복음을 믿고 구원과 생명을 받아라."가 됩니다.
루카복음서 저자는 복음서 머리말에서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루카 1,2)."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은 이 세상에서 직접 목격한 일들이고, 직접 들은 말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말씀들은 '세상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머리글을 보면,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처음'의 일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예수님)'이 한처음부터 계셨고,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누군가가 직접 목격한 일이 아니라, 그냥 믿는 일입니다.
이것은 믿어야만 하는 '하늘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은 세상일부터 말하기 시작해서 하늘 일을 말하는 책이고, 요한복음은 하늘 일을 먼저 말한 다음에 세상일을 말하는 책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복음서 저자가 앞의 12절을 해설하는 말로 봅니다.
여기서 "하늘로 올라가다." 라는 말은 '승천'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늘 일'을 알아듣게 해 주고, 믿게 해 주는 일을 뜻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라는 말은 "예수님 말고는 하늘 일을 말씀해 주실 분이 없다."이고, 이 말은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 일을 알게 되고 믿게 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일은 '하늘 일'이고, 내려온 후에 지상에서 하신 활동은 '세상일'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활동을 보고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세상일'을 통해서 '하늘 일'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일'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하늘 일'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들이 뭔가 굉장히 복잡하고 공허한 신학 이론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데, 사실 그렇게 복잡한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라는 말은 하늘과 땅이 전혀 다른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교회가 땅을 외면하고 하늘만 말한다면 치료제는 안 주고 진통제만 주는 사이비로 전락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만일에 교회가 하늘은 외면하고 땅만 말한다면 사회사업 단체로 변질될 것이고, 더 이상 종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하늘 일과 세상일을 모두 말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인은 세상일에 나서지 마라." 라고 압력을 가하거나, 반대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그만 하고 세상일에 투신해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모두 옳지 않은 일입니다.
개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을 보지 않고 하늘만 본다면 그것은 현실도피이고, 하늘을 보지 않고 땅만 본다면 현세적인 기복신앙으로 변질됩니다.
신앙인은 세상일을 통해서 하늘의 일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에 있기 때문입니다(루카 17,21).
새로운 시작
- 전진 신부님-
우리의 믿음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관문, 바로 육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는 신비의 문입니다. 우리는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합니다. 그러나 현세를 사는 우리에게 죽음은 낯선 체험입니다. 실제로 죽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성생활을 한다는 것은 삶 안에서 죽음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바로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을 현세에 앞당겨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신비를 몸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 안에서 죽음 체험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입고 거듭나 영적 차원에서 하느님의 평화를 누리고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른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십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삶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된 삶이며, 하느님의 생명을 몸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정향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예수님 바라보면서 지금 내 삶의 의미를 알아듣고 삶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으로 거듭나 이전의 나, 육적인 나는 죽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거듭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세 안에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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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회사의 영업회의 시간. 영업팀장이 실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직원들을 심하게 나무라며 말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남긴 초라한 실적과 변명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이 당장 이 일을 그만 두더라도, 우리 제품을 판매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도 모집공고를 내면 지원자가 줄을 설 것입니다.”
이어 이 영업팀장은 자신의 말을 확인하려는 듯 프로축구 선수 출신인 직원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축구경기에서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선수를 교체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영업팀장의 이 질문에 갑자기 회의실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질문을 받은 축구 선수 출신의 직원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팀 전체에 문제가 있을 경우, 보통 감독이나 코치를 갈아치웁니다.”
영업팀장의 말이 맞는 것 같았지만, 생각해보니 축구 선수 출신 직원의 말도 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개개인의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이 개개인을 모아서 조화를 이루고 더 큰 능률을 낼 수 있도록 만드는 간부의 역할도 중요한 것이니까요. 따라서 누가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사실 남의 탓을 하기 전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남의 탓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은 주님 탓도 끊임없이 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 탓을 하면 할수록 주님께 대한 믿음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지도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니코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믿지 못하는 우리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는 것이지만, 지금 현대에도 이 완고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지요. 어쩌면 과거보다도 더 완고한 마음으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불신의 마음보다 믿음의 마음을, 원망과 불평의 마음보다는 이해와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는데 최선을 다하길 바랍니다.
쉽게 믿는 것은 어른에게 약점이지만 아이에게는 장점이다(C.램).
현세적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뜻
- 오민환-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여기에 적절합니다. “현세적인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1코린 2,14) 하느님의 편에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 어리석어 보이고 거북하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를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은 통렬합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요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의식적으로 종교·정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의 회당과 성전에서 유다 지도자들과 공개적인 논쟁을 벌이십니다(요한 18,20). 예수님은 세상이 다 알도록 말씀하시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은밀히 준비합니다. 그들은 도저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자신들의 개인적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밤에” 남몰래 길을 나선 유다 지도자 니코데모도 예수님께 호의적이긴 했으나, 그 역시 자신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힌 ‘육’적인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영에서 태어남’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일”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어떻게 “하늘의 일”을 이해하겠냐면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결국 ‘육’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무지로 십자가에서 드높여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죽음은 인간 구원을 위한 전제였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만드신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바람은 모든 곳에 가 앉는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즉시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입니다.
“바람은 모든 곳에서 떠나-간다.”
바로 이어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성령의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는 것을 성령의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고 이해해도 되는가?
성령의 바람은 어디에 집착하여 매이지 않고 성령의 자유로움으로 어디든지 간다는 뜻이라면 그렇다.
그러나 이기주의적이고 제 멋대로 또는 제 좋을 대로 분다는 뜻이라면 아니다.
그것은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바, 주님의 영(Spirit of the Lord)이 아니고 육의 영(Spirit of the flesh)이다.
성령의 바람이 이렇게 자유로우니 성령의 바람을 쐬는 사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성령의 바람을 인위적으로 잡아둘 수 없고, 마리아가 당신을 붙잡으려 할 때 붙들지 말라신 주님 말씀대로 성령의 바람을 잡아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영적인 집착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어떤 때는 영의 바람결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고 안달치 않고 무미건조함도 부활을 위한 십자가처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성령의 존재로서 성령의 바람처럼 자유로워야 한다.
어디에 집착하지 않고 그래서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어디든지 간다.
좋은 사람과 좋은 곳만 골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굴 만나든 꺼릴 것 없어 자유롭게 다가간다.
해산의 고통
-전삼용 요셉 신부님-
생명이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피를 흘려야합니다.
예수님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죽음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생명의 열매를 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기 위해서도 고통을 당하고 피를 흘립니다. 제왕절개를 해도 마취가 깰 때 많은 아픔을 겪는다고 합니다. 고통 없이 태어나는 생명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도 그랬습니다. 성모님과 요셉의 고통을 비롯하여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의 많은 아이들이 헤로데에 의해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모세가 태어날 때도 파라오에 의해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은 모두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교회가 탄생하기 위해서도 필연적으로 많은 피가 필요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탄생하면서부터 스테파노를 시작으로 많은 박해와 순교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고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수많은 순교자들이 계십니다. 세계 도처에 순교자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오늘 니코데모는 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겠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말씀보다도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즉, 새로 태어남은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써 죄가 씻겨지고 성령님이 들어오시는 ‘세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요한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피와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성모님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이는 당신과 함께 성모님도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으셨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질적으로, 성모님은 보이지 않게, 두 분이 하나 되시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새로운 세대의 아담이 되고 성모님은 하와가 됩니다.
이 두 분의 실제적 피 흘림과 숨겨진 해산의 고통으로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주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이야기 들어주고 사죄경만 해 주면 될 것 같지만 죄지은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입니다. 좋은 이야기를 자주 들어도 실증이 나는데 안 좋은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따라서 판공성사 때는 신부님들이 초죽음이 됩니다.
그러나 그 초죽음으로 신자들이 새로 태어나 평화와 기쁨을 얻어 고해소를 나가는 것을 보면 모든 수고가 보람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새 생명을 주는 유일한 공식입니다. 나의 생명을 짜내어 상대를 살리는 것입니다.
한 번은 성지순례단과 함께 해외성지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많은 고민들을 가진 신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엔 저만 팔팔하고 그 분들은 매우 힘들어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엔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저만 초췌해지고 신자분들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미사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해성사 해 주고 하면서 저는 힘들었지만 신자들은 그것을 통해 힘을 얻고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 달라진 모습들을 보니 몸은 힘들어도 내적인 즐거움은 컸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죽여 이웃에게 생명을 주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짧은 묵상>>
어제는 샤워젤이 다 떨어졌습니다. 간신히 두들겨서 나오는 아주 조금의 양으로 샤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비누나 샴푸도 마찬가지지만 이것들은 자신을 소멸시켜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줍니다.
니코데모는 우리가 어떻게 새로 태어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높이 달리셔야 한다며 당신 죽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살리는 에너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분의 죽음으로 성령이 오시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새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움으로써 주위를 밝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영영 어둠 속에서 죽음을 무서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때는 밤이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통하여 여명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는 결국 빛과 함께 있다가 밤에 예수님을 배반하러 나갑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음에도 우리 자신이 그 은총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 분의 죽음이 헛되고, 그런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눈을 뜨고 있건, 눈을 감고 있건 초는 자신의 죽음으로 주위를 밝힙니다. 우리의 희생이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빛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 죽음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결국 죽음 자체는 나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
- 오정순-
가족이 함께 해외 여행을 떠났다. 집에 누군가를 남겨두고 오지 않아 홀가분하게 다니다 보니 마치 내 나라인지 남의 나라인지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냥 오래 산다면 나는 내 나라를 떠난 기분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바로 나에게 다가온 단어가 ‘영원한 생명’이었다. 이렇게 욕망이 담긴 육적 세계를 떠나 영혼이 자유로운 영적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향한 여정임을 실감나게 이해했다.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비자를 발급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비자에 찍힌 도장이 국가 간의 믿음을 통한 전 인격적 인증서인 것처럼 영적 삶 또한 믿음 없이는 가짜인 셈이다.
해외에 있는 우리를 한국에서 볼 수 없어도 우리는 살고 있으며, 연락을 하지 않아도 여행지에서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기도 속에서 만난다는 말 또한 실감났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한테는 죽음이 그다지 두려운 과정이 아닐 것이며 살아서 천국을 살다가 육신의 옷을 벗으면 그뿐이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란 말씀을 믿고 진정으로 ‘아멘’ 할 수만 있다면 그 영원함이 바로 순간의 연속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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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봄이나 가을을 좋아합니다. 즉, 아름다운 꽃이 피는 봄을 그리고 예쁘고 멋진 단풍을 볼 수 있는 가을을 좋아하지요. 더군다나 이 시기는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생활하기 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저 없이 봄이나 가을을 좋아하는 계절로 꼽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렇게 길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봄이 왔다 싶으면 어느새 더운 여름이고, 가을이 왔다 싶으면 어느새 추운 겨울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계절만 그런 것이 아니네요. 좋은 시간일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시간, 청춘의 시간, 노는 시간, 여행하는 시간 등은 왜 이렇게 짧다고 느껴질까요? 이러한 시간들은 좀 더 길고 영원했으면 좋겠는데 참 빠르게 지나가는 반면에 고통과 시련의 시간은 항상 길게만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짧게 느껴지는 그 좋은 시간들이 정말로 짧은 것일까요? 아니지요. 생각하면 그 짧은 시간 안에 오히려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짧게 지나가버린 시간 같지만 우리들의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남아서, 순간순간에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짧다고 하면서 아쉬워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짧다면서 아쉬워하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가치가 있음을 기억하면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우리들은 지금 이 시간을 보다 더 의미 있고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매 순간을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짧다고 느껴지는 그 시간들에 대해 아쉬움만을 간직한 채 끊임없이 과거에 연연하기 때문에, 지금 행복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가져오면서 더욱 더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그래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 참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니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들어 올려 졌습니다. 즉, 광야에서 뱀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지 않았던 것처럼, 들어 올려진 예수님을 믿고 바라본 사람들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천년이라는 역사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굳은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지요. 그 역사를 통해, 우리 역시 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완연한 봄입니다. 실내에만 있지 마시고 밖에 나가서 봄을 느껴보세요.
대화를 하십니까?
- 김우정 신부님-
사람들이 일상을 풀어나가는 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대화’입니다. 대화가 오가면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여러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도 하며, 때로는 생각지 않은 이익을 얻기도 합니다. 이처럼 유익한 대화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상황이 악화되기도 하고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며 엄청난 손해와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대화 속에 숨어 있는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화가 때로는 논쟁이 되고, 또 논쟁이 이따금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서로 그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화·논쟁·싸움으로 이어지는 구도에는 언제나 자신의 입장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 할 때 자신이 말할 것을 미리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자신이 아는 것, 경험한 것 외에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고 그보다는 내가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상대방에게 내가 설득당하지 않을까 하는 데 더 관심을 둡니다. 그러다 보면 서로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고 계속되는 대화는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 그것을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싸움으로 번지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를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자신 안에만 머뭅니다. 그래서 니코데모처럼 자신의 이해를 위한 질문에만 급급합니다. 그러다 보면 일반 상식조차 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시기보다 언제나 우리의 말을 경청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상대방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의 말씀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우주 전체가 축복의 꽃밭으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일생에 단 한번만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극진한 사랑도 체험해보지 못하고, 위로도 받아보지 못하고, 일생동안 죽으라고 ‘쌩고생’만 하다가 쓸쓸히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느님 축복 속에 이 세상에 태어났지요. 다행스럽게도 물로 세례를 받으며 두 번째로 태어나지요. 그뿐만 아닙니다. 성령의 불로 또 다시 한번 태어납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진정 ‘위로부터’ 태어날 때 얻게 되는 축복은 또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모릅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처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흘러갑니다.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모든 세상만사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자리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물건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지루하고 고달프게만 느껴졌던 우리의 일상생활이 영롱하게 반짝반짝 빛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매일 다가오는 갖은 형태의 십자가들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세상이 바뀝니다. 인생관이 바뀝니다. 거치관도 바뀝니다. 내 인생 전체, 우주 전체가 축복의 꽃밭으로 변화됩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는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독서> : 믿음으로 하나가 된 초대교회 공동체
- 경규봉 신부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교회는 각자가 자신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공동체가 필요로 할 때에 내어놓고 공동으로 사용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능력인 동시에 하느님 은총의 결과였다. 교회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여 거룩한 친교를 나누게 되면 자연히 신자들도 서로 사랑의 친교를 나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며, 유다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아’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산헤드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파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렸다. 그리하여 신도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신분과 지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사도들은 신도들이 내어놓은 재물을 구성원의 필요에 따라 분배해주었다. 그 결과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빈곤한 자가 결코 없을 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약속(신명 15,4)이 초대교회 내에서 실현되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인 요셉은 사도들로부터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 공동체에 아낌없이 내어 놓음으로써 뛰어난 믿음의 행위를 보였고,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11,24)), 믿음을 갖게 된 첫 레위 사람으로서 복음에 대해 유대인이 가진 편견을 허물어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모두 바쳤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초대교회 신도들에게 커다란 기쁨과 평화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였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함으로써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요한 17,11)라는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서로 일치된 이들에게는 더 이상 자신만의 것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에 형제의 아픔과 굶주림은 나의 아픔과 굶주림이며, 형제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소유도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이 가진 재산은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팔아야 할 필요를 느끼기 전까지만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믿음이 자라났다. 자신의 소유는 모두 하느님의 것이며, 따라서 이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믿음이 초대교회 신도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공동체가 재물을 필요로 할 때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아까운 줄 몰랐다. 이처럼 신앙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형제들과의 친교와 나눔을 가져온다. 그럼으로써 신앙은 모두가 하나 되게 한다.
그러나 불신은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아 적이 되게 하고 사람과 하느님과의 사이도 갈라놓는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느님을 불신했기 때문에 하느님과도 멀어졌고, 그들 사이도 서로 갈라졌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라고 외쳤던 아담이 하와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게 되었다고 자신의 잘못과 죄를 하와에게 전가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 안에서는 부부도, 부자나 모녀 사이도 서로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사회에는 분열과 불화만이 있을 따름이다.
신앙은 그 자체가 축복이며 은총이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말씀하셨다. 신앙 안에서 신앙으로 살 때,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 되고, 이웃과 하나가 된다. 이러한 속에서만 우리는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주님과 하나 되고, 이웃과 하나가 됨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의 삶을 누리자.............◆
-김웅태 신부님-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의 사함을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 니꼬데모에게 "다시 나야한다!"하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는 올바른 진실을 진실 그대로 우리는 알아듣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지식의 부족과 경험의 부족입니다. 즉, 지식의 부족과 경험의 부족에서 뿐만 아니라, 진실을 알아보려는 의도가 없기때문에 진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즉, 보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닫아버리게 됨으로써, 진실을 외면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 영원한 삶을 살기위하여 "다시 나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진실을 외면하면, "다시 나야 한다"는 그 의미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하여 고의로 눈을 감고, 마음을 닫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니꼬데모는 예수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에 대해서 "당신이 말씀하시는 "다시 나야 한다" 는 것이 가능할 지는 모르나,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작용으로 그렇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러한 니꼬데모에게 예수님은, "나는 그대에게 쉽게 말해주려고 했다. 나는 일상 생활 속에 있는 소박한 사람들의 일들을 사용해서 말했다. 그런데도 그대는 알아들을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평범한 일도 그대가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하물며, 더 깊은 일을 어떻게 그대가 깨닫기를 바라겠는가?"하십니다. 여기에 우리 모두에게 향한 경고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신 이 모든 말씀이 사실일지? 혹은 반대로 사실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무슨 권리로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그 말씀이 사실이란 것에 어떤 보증을 찾아 볼 수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그 답은,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할 수 있는 진리, 그분이 하느님을 직접 알고 계시며, 알고 계신 분으로써 그 신비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
-김유철 신부님-
예수님에게는 소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위로부터 태어났으면’(3,7 참조)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위로부터 태어나지 못한 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아픈 자를 낫게 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알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깨달아서 물과 성령을 통해 거듭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3,11). 즉 모르는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은 유한한삶을 삽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둘러보면 모든 것은 다 수명이 있습니다.
죽지 않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두가 유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들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유한한 세상을 살면서도 ‘영원한’, ‘무한한’, ‘끝없는’, 이런 단어를 알고 있고 그 의미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잘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영원한 나라에서 살던 기억조각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本)고향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타향에서 이방인으로 살던 삶을 이젠 그만 끝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한한 세상에서 머리를 들어 영원한 나라로 우리를 다시 모아들이려 오신 당신을 믿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이처럼 우리를 영원한 고향으로 이끄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활 제2주간 화요일
- 이성주 신부님-
오늘도 우리는 어제 복음에 이어 니코데모와 예수님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제는 아니었지만 율법을 공부하는 열심한 바리사이였던 니코데모도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기는 어려운가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니코데모는 자기의 생각이 맞다고 무조건 우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틀리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우리에게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열린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는데, 니코데모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도 아직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름이 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만큼 많이 공부해야 되고, 지켜야할 율법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외우고, 또 실천까지 해야 되기에..... 그렇게 이름이 난 니코데모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미처 몰랐던 것이고 그냥 외울 수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를 통해서 우리는 신앙은 외워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새로 나야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학교시절 시험공부를 하다보면 이해하기 보다는 무조건 외우려고만 했습니다. 아니 기도문도 외우려고만 했습니다. 이해하지는 않고, 남들보다 못하다는 말은 듣기 싫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성령의 힘으로 부활신앙이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아지고, 예수님에 대한 기도문이 마음으로 와 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름난 스승 니코데모가 율법을 외우지 못해서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이 손수 인간이 되신 그 사랑을 알고 싶고, 받아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밤에 찾아갔지만,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새로 나야 되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니코데모는 요한복음7장에서, 예수님을 끌고 오지 않은 성전경비병들에게 질책하는 수석 사제들과 다른 바리사이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요?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7,51-52).”라고 핀잔을 주는 예수님의 반대세력들이 하나도 두렵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지고, 돌아가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두려움이 없어지게 됩니다. 오늘 사도행전4장이 전하는 독서의 말씀이 이를 잘 알려줍니다. 초대교회 신자 공동체는 자기가 남들보다 못하면 어떻게 되지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꺼이 자기 것을 내어 놓고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나누는 것은 율법 속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신, 살아계신 하느님을 보여주는 사랑표현입니다. 부활신앙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고, 내가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하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의 힘을 받아드리는 용기입니다.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령이 주는 믿음의 은사를 통해서 우리는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니코데모처럼 예수님을 찾아가야 되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귀를 활짝 열고서 들어야 되고, 또한 주님을 우리 집에 머물도록 청해야 됩니다. 아멘.
"새로 나야된다."
<적어도 80까지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귀가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택시를 탔습니다. 개인택시 기사님의 서비스는 제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습니다.
꽤 연세가 지긋해 보이셨던 기사님(아마도 제 부친 뻘 되어 보이시는)께서 아직 새파란 제게 깍듯이 인사를 건네시는 바람에 갑자기 저는 무안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서 오세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죠?"
갑자기 요즘 보기 드문 "과잉친절"을 받은 저는 너무나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만, 진심으로 감사 드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집에 도착하기 직전 그 어른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은 너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제 나이가 올해 일흔이 넘었지만 자식들 신세지지 말고 건강 허락하는 날까지 열심히 뛰어야지요. 개인 택시, 이거 이래봬도 무시 못합니다. 슬슬 해도 하루 칠 팔 만원은 거뜬히 벌지요. 하긴, 택시 몰다보면 별 사람 다 만나고 속상하는 일도 많이 생기지만 그러려니 합니다. 남의 돈 벌기가 어디 쉬운가요? 나이 들수록 허세 부리지 말고, 뒤로 빼지도 말고 더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80까지는 뛸 수 있을 것 같아요."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겸손과 성실의 미덕을 지니신 기사님의 삶은 제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어제에 이어 "새로 나야 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내가 올해로 종신서원한지 몇 년짼데" "이 몸이 올해 몇 살인데" 하는 마음먹지 말고 매순간 새롭게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내가 사젠데" "내가 수도잔데" "내가 누군데" 하는 마음 갖지 말고 매일 겸허하게 자신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나이 들수록 삶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교만해지지 말고 조심조심 시작했던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순간순간 우리라는 작은 자아를 포기하고 크신 주님의 머물기 위해 모든 집착에서 떠난다는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죽는 순간까지 새 마음, 첫 마음, 소박한 마음,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죽은 지 오래된 뿌리만 남은 나무등걸에서도 새순이 돋게 하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죽은 지 오래되어 살 썩는 냄새만이 진동하는 라자로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갖은 죄와 악행으로 오염된 우리 영혼에게서도 생명수가 솟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새로 나야 된다.
-정민수 신부님-
◆예수님이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시자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말씀하시는데 니고데모는 육체적인 재생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은 영적 재생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면서 짤막하게 성령론을 펴십니다.
우리도 가끔은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집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저런 사람을 만나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지금보다 공부도 더 잘할 것이며,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지요. 내가 다시 태어날 때는 온갖 지식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또다시 갓난아기부터 시작해서 지겹도록 공부해야 하는데 어찌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고, 더 나은 상황이 나에게 주어지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니고데모처럼 육적인 재생만이 내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듯 우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그렇기에 늘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갈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보다는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이 내가 만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그들을 더욱 사랑하는 삶을 통하여 새로 태어나 영원한 생명에 한 발자국 다가서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람같은 자유인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그대에게
나무(木)를 심는 것은 생명을 심는 것입니다.
五行은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입니다. 땅(土)은 모든 것의 바탕입니다. 땅 위에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랍니다. 나무(木)는 물이 있어야 자라지만 나무가 없으면 물(水)의 성질을 다스릴 수 없게 됩니다. 나무는 동물들이 숨을 쉬게 하고 먹을 것과 안식처를 제공하고, 따뜻함(火)을 보존하도록 합니다. 나무(木)는 땅(土)을 비옥하고 아름답게 만듭니다.五行의 相生原理에 따르면 나무를 심는 것은 생명을 심는 것입니다.
땅(土)에 나무(木)를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슴과 영혼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당신은 신앙인이니까요.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람 같은 자유인(自由人)이 됩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늘의 뜻을 따르는 성령의 사람은 무애인無碍人이 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도 그분을 죽음의 권세에 넘기지 못합니다.
무덤도 그분을 가두어두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갈라5,22)
그러나 하늘을 외면하고 이기(利己)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늪에 빠진 처지와 같습니다.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의 족쇄는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숨통을 조입니다.
그리고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그와 비슷한 것들’(갈라5,19)을 열매 맺습니다.
당신은 성령의 사람이 되어 자유를 누리시기를 원합니까?
욕망의 노예가 되어 향락을 누리시겠습니까?(一明)
하느님 영의 역동성과 창의성
-박상대 신부님-
교회는 오늘 부활 제2주간 월요일부터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관한 복음선포를 접어두고 성령강림대축일 직전인 부활 제7주간 목요일까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얻게되길 희망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을 시도한다. 생명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동안 봉독되는 사도행전의 독서말씀과 요한복음서의 복음말씀으로 시도된다. 특히 '생명의 책'이라 불리는 요한복음에서 선택된(3장, 6장, 10장, 12-16장) 말씀들이 생명의 의미를 충분히 밝혀 줄 것이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오늘 복음(요한 3,1-8)이 그 장(場)을 열고 있다.
문맥상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오늘 복음의 이전 부분을 잠시 보자. 거기에는 과월절을 맞아 상경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고 이 기적들을 본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도 아니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도 아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는 무관한 믿음이다. 그저 예수께 대한 호감(好感)이라 표현함이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2,24) 라는 표현으로 이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암시는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언명(言明)이 있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 대한 호감(好感) 이상의 마음을 가진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와 묻는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2절) 이 대목은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0,25) 라는 질문과 비슷한 유형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질 만큼 준비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이 그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이유이다. 이는 유다인들의 지도자에 속하는 니고데모가 다른 유다인들의 눈을 피하고자 하는 속셈일 수도 있고, 니고데모 스스로가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유다교 신앙에 대하여 혼돈과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가 던진 질문 이상의 차원으로 응수하신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새로 태어나야 함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의 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은 강행(强行)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5-6절)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영(靈)에 의한 삶을 영위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를 직관(直觀)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에 입적(入籍)하려 하는 자는 물과 성령의 세례(洗禮)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물과 성령의 세례'는 우선적으로 내적 변화를 통한 새사람이 됨을 의미한다. 니고데모에게 주어진 과제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육체를 지배하는 율법에 의한 묵은 삶을 벗어버리고 영을 지배하는 사랑에 의한 새로운 삶에로 초대받은 것이다.
이어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계속된다. 오늘 복음의 대화는 물과 영으로 '새로 남'의 의미에 대한 추가설명(7-10절)과 예수님의 자기계시적(自己啓示的) 가르침(11-15절)의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최소한, 그러나 절대적인 조건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생각은 더 이상 진행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예수께서는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을 제안하신 것이다.
'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은 생명(生命)과 정화(淨化)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 문제는 '영'에 대한 것이다.
영(靈)에 대한 지식은 모두가 짧다. 히브리어의 '루아흐'(Ruah)나 희랍어의 '프네우마'(Pneuma)는 구약성서에서 '바람, 호흡, 영혼, 정신'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다양하게 쓰인다. 예수께서는 '영'을 니고데모뿐 아니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바람'에 비유하여 설명하신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8절)는 말은 '영'의 자유로운 속성을 가리킨다. 바람이 부는 소리는 우리가 들을 수 있으나,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기상대가 관측하여 바람의 방향을 예보(豫報)할 수는 있으나, 예보는 어디까지나 예상(豫想)이며, 가정(假定)이다. 따라서 바람의 방향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바람의 성질을 통하여 영의 역동성(逆動性)과 창의성(創意性)을 암시하신다. 그래서 곧바로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8절)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동번역 성서는 여기서 '성령'이라고 말하지만, 희랍어 원문에는 그냥 '영'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아직까지 하느님 성삼(聖三)의 구조를 언급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목의 '성령(聖靈)'은 그저 '거룩한 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언급을 한다고 해도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전부로 알고 있는 니고데모가 이를 이해할 턱이 없다. 따라서 니고데모의 반문은 하느님 '성령'이 아니라 막연한 '영'에 의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9절) 라는 식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의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10절)라는 꾸중은 니고데모가 '영'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야 함을 고무하는 말씀인 셈이다.
이제 '정말 잘 들어 두어라'(11절)라는 요한복음의 특유한 표현으로 두 번째 단락이 시작된다. 즉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 가르침은 단지 니고데모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니고데모가 어제 복음에서 "선생님, 우리는..."(3,2) 하고 시작했던 물음의 서두를 기억하여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포함한 '우리는'이라는 표현과 니고데모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유다인들을 지칭하는 '너희는'이라는 표현으로 가르침을 내리신다. 이 가르침은 '너희'를 포함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은 사실상 보류(保留)되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는 암시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니고데모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일'(바람에 비유된, 또는 바람과 같은 영의 의미와 능력) 조차도 깨닫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깨우치거나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십자가 죽음에 관한 예고의 대목(13-15절)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發說)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저자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공관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발견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가 요한복음에는 없기 때문이며, 물과 영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 대한 믿음에 연결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남'은 분명 세례성사를 의미한다. 세례성사에서 물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다. 모든 성사에서 합법적인 성사거행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은 형상(形象)과 질료(質料)이다. 세례성사에서 물은 질료에 속한다. 물은 생명(生命)과 정화(淨化)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그렇다고 물이 성사를 베푸는 것은 아니다. 물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이다. 따라서 세례성사가 목적으로 하는 '새로 태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힘, 새 생명을 가져다주는 힘은 바로 하느님의 영이다. 이는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의 기운(창세 1,2)이며, 진흙 인간이 숨을 쉬도록 생명을 가져다 준 하느님의 입김(창세 2,7)이다. 하느님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숨길을 불어넣어 주시고"(민수 16,22), "땅위에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며"(이사 42,5), "마르고 비틀어진 뼈들 속에 숨을 불어넣어 다시 살려주시는"(에제 37,6) 힘이다.
이러한 하느님 성령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 세례성사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맞물려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례 받은 사람은 이미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하느님의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인 것이다.........◆
†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 - 성령으로 새로 태어남 †
어제복음에서는 두려움을 느끼는 두 인물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한명은 소외지역 나자렛 촌구석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마리아 처녀가 하느님(천사)를 만나면서 느끼는 두려움이고, 다른 한명은 호사스런 집단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 니고네모가 주님을 만나면서 느끼는 두려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의 인물 중 가난한 영인 마리아는 즉각 반응하여 순명했으나, 지식계층 니고데모는 여러차례 주님께 반문을 하고 따지는 논리적 대응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도 요한이 전하는 마지막 복음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몰약을 장사지내는 대열에 참가했다는 기록을 보면, 시간이 다소 걸리기는 했지만 거듭태어난 것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니고데모와 같은 지식 계층들이 주님을 받아들이는데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그들만의 주관으로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많아서 시간이 많아 걸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새술을 헌부대에 담으려 하기 때문에 스스로 찢기우고 터지고 하면서 만신창이가 된 이후에야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니고데모는 주님과의 만남에서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입니다. 니고데모는 두려움 속에서 거듭태어남의 영광을 얻으려고 노력한 인물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인간이 지니게 되는 두려움이란 무조건 부정적 의미만을 띠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두려움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속시키는 중요한 생체활성화의 도구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두려움은 인간을 더욱더 폐쇄적이고 아집적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주님수난의 역사에서 악한 역할을 해 온 대부분의 바리사이파 족속들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욱 완악하고 독선적으로 그들의 이기적 수구생활을 이끌어갑니다. 이와같이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미묘한 존재여서 생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상황 앞에 서게 되면 거의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기 방어의 조치를 취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어느날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은행에 갔다가 총을 들고 있는 강도를 만났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양쪽이 낭떠러지인 벼랑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갖겠습니까? 다른 생각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로지 두려움뿐일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두려움의 순간 우리 인간들은 자동적으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호랑이를 피해 마하속도로 줄행랑을 칠 것입니다. 또 권총을 든 은행강도 앞에서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무조건 바닥에 엎드리는 수밖에. 또 한밤중에 벼랑 끝에서 길을 걸을 때는 아주 조심해서 조금씩 더듬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은 우리 인간을 나약하고 비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의 위협이나 위기 상황 앞에서 생명을 지속시키고 싶은 생명활성의 원동력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느끼는 두랴움 속에서 보다 영적으로 쇄신된 인간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이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감정입니다. 그러나 때로 너무 지나친 두려움은 우리들의 삶을 속박시킬 뿐만 아니라 기도 제대로 못 피고 위축된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 무조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일이 의외로 쉽게 잘 풀릴 수도 있을텐데, 꼭 최악의 상황만 예견하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의미의 두려움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서 겪게 되는 고통은 또 얼마나 심한 것인지요. 그냥 바람같이 한번 스쳐 지나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정말 아주 시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날 것 같이 밤잠을 설치면서 괴로움과 좌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지난 과거 안에서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 분노 등등이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맺힌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한 자기 쇄신의 길, 자기 정화의 길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두려움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전은 사랑입니다. 이유를 묻지 말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또한 두려움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전은 "당당한 직면"입니다. 그것이 힘들다면 깨끗한 포기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두려움에 대한 처방전을 주고 계십니다. 고가에 대한 깨끗한 포기와 새로 태어남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는 성령론을 펴십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듯이 우리도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늘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제와 오늘복음에서 육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은 매우 쉽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영이 임하시면 마리아 여인과 같이 즉각 순명하는 변화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오늘복음의 마지막 성구인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묵상해 보겠습니다.
영원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인간의 육적 생명인 유한한 생명과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관련하여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죽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 죽음은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이, 어떤 면에서 볼 때 정말 열심히 살아갑니다.
아침에 기분 좋게 일터로 나가면서 나도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 속에서 그 죽음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을 뿐입니다. 결국 나의 문제로 다가오겠지만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삶의 모습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류가 태어난 이래로 이 죽음의 문제는 수없이 제기되어 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해 왔습니다만 예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명확한 대답을 해준 이는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제 복음에 이어 예수님을 찾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 되는데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이렇게 명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죽음 다음의 세계에 대해 언급한 분은 없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으며 그분의 모습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확실한 목표와 희망이 있으며, 그리고 작은 일에 충실하는 나의 모습이 무한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현실에 더 충실할 수 있고 자신 있게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 행복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시다..... 아멘.........◆
-두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