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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50
“마마, 장 상궁이옵니다. 아직 기침 전이시옵니까?”
문 밖에서는 벌써 숱하게 장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방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벌써 해가 중천이건만, 이불 속의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좋은지 저들끼리 키득거리기에 바빴다.
“자, 이제 말해주시오. 황후.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지금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니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데두요.”
“하나쯤 생각해내는 일이 그리 어렵진 않을 텐데.”
“그리 조르시니 어린아이 같으십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맞잡고 맨발을 부비고 귀를 간질이는 갖가지 달콤한 말로도 시간은 모자랄 것 같았다. 한 번도 이런 게으름을 부려본 적 없는 사람이라, 은은 그가 자신의 회임에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뭔가를 자꾸 주고 싶어 하는 마음도 알 것 같았다. 그것 역시 그가 가진 작은 기쁨이라면 기꺼이 들어주고 싶었다.
“그럼,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폐하.”
“무엇이든지.”
“작은 연회를, 열어주십시오.”
더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마음껏 웃고 즐기며 뽐내고 싶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자신의 회임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또 다시 공식적인 축하를 받기는 어려워도,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한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장헌궁이라나 하는 궁주(宮主)에게는 더더욱.
“폐하, 지원입니다.”
장 상궁의 수십 번의 부름보다 영향력 있는 한 마디였다. 은은 자신도 모르게 뭔갈 들킨 사람처럼 발딱 몸을 일으켰다. 황제는 아쉬워하며 느릿하게 이불을 걷어낸다. 문밖에 흐릿하게 우겸의 인영이 비쳤다.
“무슨 일이냐.”
“폐하, 좌승상이 긴히 청할 말씀이 있다하여 황제궁으로 찾아왔습니다.”
“곧 가겠다고 전하거라.”
황제는 침상에서 일어섰다. 은은 그가 곤복을 정제하는 일을 도왔다.
“작은 연회라면, 이 도성이 들썩일 정도면 되겠소?”
“호호, 신첩은 그저 별궁 안에서 비빈들과 함께 다과를 나누는 정도면 족하옵니다.”
“그런 연회라면 언제든, 어느 때든 열어주겠소.”
“황공하옵니다.”
그는 기쁘다는 듯이 은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황제궁으로 나서기 전, 은을 꼭 안아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고맙소. 생애 최고의 기분이오.”
//貢女 奇皇后//
황제는 연회에 관한 일을 모두 고 환관에게 일임했다. 그 날 저녁으로 바로 정해진 연회로 인해 별궁을 통째로 단장하는 일로 몹시 바빠지게 되었다. 연회의 목적에 관한 것은 새삼 은의 회임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기에, 요 근래 소용에 관한 일들로 침잠해 있던 궁내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한 것으로 일단락시켰다. 7귀들을 비롯한 다른 후궁들만을 초대하여 조촐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물론 그것이 황제와 은, 두 사람에게만큼은 회임을 축하하기 위한 그들만의 축제가 될 것임을 아는 고 환관은 연신 싱글벙글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어지간히 기쁘셨던 모양이야.”
고 환관이 별궁의 상황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서 우겸을 향해 말했다.
“연회라니. 폐하와 황후께는 몰라도, 다른 이들에게는 얼마나 뜬금없는 일이겠는가.”
“그렇지요.”
잔뜩 들떠있는 고 환관으로서는 지나치게 침착한 우겸의 태도에 민망함을 느꼈다. 그러나 우겸의 속을 어느 정도 알고도 남을 고 환관은 더 이상의 말로 젊은 청년을 괴롭히는 짓은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 속 배려에도 불구하고 우겸은 상관없다는 듯이 여러 가지 일들에 직접 관여하여 완벽한 연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일들은, 잘 되어가고 있는지요?”
살랑살랑. 봄바람 불듯 가벼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 환관과 우겸은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의 바깥나들이가 즐거운지 양 볼에 홍조를 띈 장헌궁의 소홍은 두 사람을 향해 반갑다는 듯이 웃었다.
“오늘 저녁 연회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지금 막 듣고 달려와 보는 길이랍니다. 비빈들을 염려하여 이런 연회를 열어주시다니, 폐하께서도 참 자상하시지요.”
“그러하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는데, 더 계시다 나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실은, 흥성궁을 뵐 수 있을까 하여 나와 보았지요. 엊그제 소용의 장지에 다녀오신 뒤로 몸이 상하신 듯 하다 들었는데.”
“지금쯤은 아마 궁에서 한창 준비를 하시느라 바쁘실 줄로 압니다.”
“그럼 한번 들러봐야겠군요. 오늘은 느긋하게 차를 마실 수 있을런지.”
소홍은 기대의 빛이 역력한 투로 먼저 걸음을 돌린다. 흥성궁을 향해 멀어지는 그녀를 지켜보던 고 환관이 우겸에게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다정한 분 임에는 틀림없지만. 글쎄, 흥성궁에서 반겨할 지.”
...
그 이후에도 계속된 별궁의 단장은 제 때에 맞추어 무사히 준비가 끝났다. 주 연회 장소는 별궁 안쪽 한 가운데에 위치한, 하늘이 보이는 넓은 회랑이었다. 긴 사각 형태의 넓은 회랑은 가운데를 무릎 높이 정도로 파내어 대리석을 덧대고 물을 채워 넣은 인공 연못이 있었다. 꽃이 아름다운 작은 수중 생물들로만 장식된 인공 연못을 가운데에 두고 황제와 비빈들은 넉넉한 분위기와 풍성한 음식들로 연회를 가질 것이었다. 연회장을 장식하게 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언주가 담당하게 되었는데, 심신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 향유를 담은 병에 초처럼 작은 불을 붙여 연못 위로 띄우는 것이었다. 향유병은 백여 가지나 되었다.
“고생이 많구나.”
“아닙니다. 곧 끝나게 될테니, 음식이 준비된다면 곧 시작하셔도 될 것입니다. 지원 나으리.”
붉을 밝혀 띄운 향유병들은 마치 작은 초가 된 것처럼 반짝이며 물 위를 떠다녔다. 마지막 한 개에 불을 붙여 연못 가운데로 띄워 보낸 언주가 구슬땀을 닦아내며 일어서자, 고생한 답례로 상이라도 주듯 우겸은 친절하게 웃어주었다. 그 사이 수많은 궁인들이 고운 색 비단 방석들을 가져다 놓고, 갖가지 음식들과 과일들을 가져다 놓는 것으로 거의 모든 준비가 마쳐졌다.
//貢女 奇皇后//
“폐하,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전언입니다.”
황제는 집무 중이던 마지막 일을 마치고 붓을 내려놓았다. 그는 곧 우겸을 앞세워 고 환관과 함께 황제궁을 출발했다.
“준비에 차질은 없었다던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최고의 것들로만 준비 되었으니 염려 마십시오, 폐하. 또한 음식들은 모두 환관들의 감독 하에 만들어졌고 황후마마를 위해 술은 일체 금지, 과일즙을 낸 음료로만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수고 많았네.”
황제는 조금 더 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여, 연회를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폐하, 오전에 다녀간 좌승상은 무슨 일이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 일’ 말인가.”
황제는 다소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양녀를 들이겠다고 하더군.”
“‘양녀’말입니까. 갑자기.”
“내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 가운데 눈 여겨 보고 있는 아이가 하나 있다면서 허락을 구하질 뭔가.”
“그게 누구라고 합니까.”
“거기까진 말해주지 않더군. 대체 진 대인의 눈에 찰만한 아이가 누구라는 것인지.”
“황성 안의 모든 여인들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폐하께서는 뭐라 답하셨습니까.”
“나의 두 비와 후궁에 있는 빈들만 아니라면 상관없지 않겠느냐고 일러두었지.”
고 환관은 가볍게 웃었다. 뒤따르는 우겸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자연히 언주를 떠올렸지만, 구체적인 일의 진전이 있을 때까지는 섣부른 언급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황제의 저런 반응으로 보아 허락지 않을 생각은 아닌 것이라면, 결정은 온전히 언주만의 몫이니 앞으로의 일이 어떤 방향으로 진척될 지도 언주의 결정에 달려 있음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황제의 일행은 별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멀리,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별이 떨어진 듯 반짝반짝 빛나는 인공 연못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있었다.
...
연회를 가득 메운 즐거운 분위기, 넉넉한 음식들, 그리고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웃음소리가 별궁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각자의 기분에 취해 자유로이, 그러나 과하지 않게 모두는 저마다의 이야기로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은은 자신을 위한 황제의 선물을 마음껏 즐기기로 작정한 것처럼 그의 곁에서 전에 없이 기쁘게 웃고 떠들었다. 소홍은 그런 은을 부러 방해하지 않으려 적당한 선에서 은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보다 낮은 자리의 7귀들은 보이지 않게 눈을 흘기고는 했다.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을 즈음, 은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황제에게 술을 권했다.
“자, 폐하. 이제는 신첩이 올리는 술을 드실 차례입니다.”
“술이라니. 별궁에 술은 한 방울도 들이지 말라 하였는데.”
“그럴 줄 알고 신첩이 따로 챙겨왔습니다. 연회에 술이 없다니, 폐하께는 너무도 지루한 자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은이 따르는 술을 받았다. 오늘 하루쯤은 은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만 같은 다정한 눈을 하고선. 따르면 마셔주고, 따르면 다시 마셔주고. 7귀를 비롯한 다른 후궁들은 저들끼리의 잡담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곁눈질로 모두 황제와 은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서로를 마주보는 황제와 은. 가까이서 그 모습들을 봐야만 하는 우겸과, 어느 먼발치에서 몰래 그런 우겸을 보고 있는 언주였다.
“즐거우십니까.”
슬며시, 소홍이 은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즐겁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모쪼록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다행입니다. 우리 폐하의 혈손께서도 건강히 자라고 계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언제 한 번 장헌궁에도 들러주세요. 제 나름으로 손을 봐둔 곳이 많아서, 지금쯤 가장 보기가 좋을 때랍니다.”
“그리 하지요. 귀찮다고만 하지 않으시면 자주 찾아가겠습니다.”
“호호, 약조하신 겁니다. 그럼, 폐하와 마저 담소 나누세요. 전 자리를 비켜드려야 할 것 같군요.”
소홍은 그 사이 고 환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웃는 얼굴로 일어섰다. 그리고는 후궁들이 있는 틈으로 돌아가려다, 다시 걸음을 돌려 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조언했다.
“폐하께선 술을 그리 즐기지 않으신답니다. 너무 많이 권하지는 말아주세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싱긋 웃어보이고는 등을 돌려 멀어지는 소홍의 모습을 은은 가만히 지켜보았지만, 속으로는 기가 차서 콧방귀가 날 지경이었다. 아무렴 숱한 후궁들 앞에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권할까. 7귀들의 사이로 합류한 소홍은 금세 그녀들과 동화되어 즐겁다는 듯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무척이나 후궁들과 허물없이 사이가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조금 빈정이 상하기는 했어도, 은은 저를 위한 날임을 상기시키며 나쁜 감정들을 떨쳐냈다. 그리고 황제의 손을 잡아 이끌며 귓속말을 전했다.
“폐하, 신첩 그만 궁으로 돌아가 쉴까 하옵니다. 술을 따라드릴 후궁은 여기 잔뜩 있으니 괜찮으시겠지요?”
“벌써 돌아가다니, 너무 이르질 않소.”
“몸이 피곤한 모양입니다. 신첩은 먼저 돌아가옵니다만, 너무 늦게 오시어 저를 외롭게 하진 않으시겠다고 약조해 주소서.”
귀를 간질이는 은의 말에 황제는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바람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자연히 황제에게로 향했다.
“그렇다면, 지체할 필요가 없지.”
황제는 은과 함께 돌아갈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따라 많은 이들이 기립하자 황제는 원하는 만큼 먹고 즐겨도 좋다며 손을 내저었다. 은은 취기가 오른 황제를 부축하여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호호호. 멀어지는 은의 웃음소리. 이전의 어떤 황후도 하지 못했을, 은은 황제의 팔에 거의 매달리듯 제 손을 그의 소매 안쪽으로 끌어안고서 흥성궁으로 향했다. 그런 행동의 댓가로 많은 후궁들의 질투와 시기 역시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언주는 멀찌감치 그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을 지켜본다. 황제이되 황제가 아닌 것 같고, 황후이되 황후가 아닌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과 부지런히, 고 환관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을. 제 임무대로 그들을 수행해야만 하는 우겸 역시. 은은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그런 은에게서 뭔가가 툭 하고 떨어지자 표정 없는 얼굴의 우겸이 그것을 집어 든다. 가만히 제 손바닥 위의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황제는 벌써 저만치를 가고 있는데, 우겸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질 않는다. 제 손바닥 위에서 시선을 떼 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지독히도 고독함을 담은 그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언주는 이미 알 것 같아서 알고 싶지 않았다.
※ 네 번째 비하인드 EP는 쉬어갑니다.
다만, 몇 년째 죽 끓듯 하는 변덕을 부리고 있는 저를 반갑게 맞아주신
헤르티아 님, 까불지마ㅋ 님, Tiare★ 님, 유리별미곰 님, dmddmd 님 께는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네요.
더 하고 싶은 말들은 후에 천천히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다음화부터는 제가 원래 하던 짓을 계속 해나가겠습니다. 총총.)
첫댓글 사실 내일 아침에 도서관가서 시험공부를 하려했으나 컴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왔는데 너무나도 즐겁게 보고가요!
좋겟어요 은이는 다행이기도 하구요 ㅎㅎ 다만 언주의 선택이 은이와 반대로 갈듯해 걱정되네요
까불지마ㅋ 님★ 바야흐로 시험기간이군요, 시험기간 동안만 컴터의 유혹을 잘 이겨내시길 바래요~ 시험 잘보시구요! 다음화에서 뵙겠습니다^^
젬있게 보고가요...
소희 맘 님★ 꼬릿말 감사합니다. 다음화도 확인해주세요^^
그래도 진짜 회임이 되었으니 다행이네요. 그리고 언주가 진 대인의 양녀가 될지, 안 될지 너무 궁금하네요ㅎㅎ
유리별미곰 님★ 언주의 선택은 곧 확인하실 수 있으실거예요. 은에게 어떤 영향이 될지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오늘 연회로 한편 쉬어가는 기분이에요^^ 편안하게 보고갑니다~ 우겸이 주은 것은 예전 선물로 주었던 꽃모양 머리핀?(맞나?)
헤르티아 님★ 다음화가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겠네요. 다음화에서 뵐게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은이 적당한 선에서 멈춰야 할텐데...물론 모든걸 가진 상황이긴 하지만 걱정이 되어서...^^;;;
은이 영리하게 자기 행복을 지켜나갈수 있기를...
Tiare★ 님★ 은이 아직 버리지 못한 마음을 안고 있는 모양이에요. 마지막 말씀대로 이뤄지길 바래야죠. 꼬릿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