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여름, 처서를 앞두고
처서를 하루 앞둔 팔월 넷째 월요일이다. 열대야가 사라진 간밤 기온은 부쩍 내려가 창문을 닫고 잠들었음에도 얇은 이불을 당겨 덮어야 할 정도였다. 새벽녘 잠 깨어 하루를 설계하려니 산행을 일찍 나설 수 없는 일정이었다. 아직 현직인 한 대학 동기가 이달 말 퇴직을 앞두고 점심 식사를 같이 나누기로 약속되어 산행이나 산책을 그 시간 맞추려니 날이 밝아온 이후도 미적댔다.
내 기준으로 평소보다 늦게 시작된 아침에 현관을 나섰더니 아파트단지 주민들은 일터로 출근하기 전이었다. 이웃 동에 사는 꽃대감 친구가 가꾸는 꽃밭을 둘러보니 친구는 내려와 있지 않고 가을을 앞두고 제철에 피어나는 화사한 꽃들이 반겨주었다. 그 가운데 지난해 여름 친구가 키운 모종을 기부받아 교직 마지막 학교에다 심어 불꽃 같은 꽃을 피웠던 횃불 맨드라미도 보였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난 반송동 시내버스 정류소에서 반지동 주택지와 명곡 교차로를 지난 소답동 환승장에서 마금산 온천장으로 가는 녹색버스로 갈아탔다. 천주암 아래서 굴현고개를 넘어간 버스는 외감마을 앞을 지난 삼거리에서 내렸다. 운행 노선의 경로에 익숙한 시골 버스 기사는 평소 하차 손님이 드문 정류소에 한 승객이 내리려 했으니 그 사내 정체가 궁금했을지도 몰랐다.
달천계곡 들머리 외감마을은 봄철이면 외지인들이 붐비는 동네다. 이른 봄날 벚꽃 시즌과 겹쳐서 야산에 피어난 진달래꽃 군락지로 알려져서다. 내가 교직 말년 삼 년을 보내고 온 거제 대금산이나 섬진강 건너 여수 향일암 영취산만큼 진달래가 유명하다. 창원 도심 거리 곳곳 만개한 벚꽃의 꽃잎이 분분히 날릴 즈음이면 천주산 응달의 진달래는 선홍색 꽃을 피워 정념을 토해냈다.
여름 끝자락에 흑염소와 오리고기를 판다는 식당을 지나 남해고속도로 교각이 걸쳐진 달천계곡으로 들었다. 평일 아침이라선지 주차장은 한산했고 드나드는 행인도 드물었다. 오토캠핑장을 지나니 미수 허목 유허지 빗돌이 나왔다. 조선 후기 당쟁 소용돌이에서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이 젊은 날 잠시 머물렀던 달천계곡은 외감 새터의 구천 달천정을 비롯한 몇 군데 흔적을 남겼다.
주말 이틀 막바지 피서 행락객이 다녀갔을 달천계곡은 월요일 이른 아침 인적이 뜸해 한산했다. 미수 허목 유허지 빗돌을 지난 계곡의 쉼터에서 배낭을 벗고 등산화 끈도 풀었다. 평상에 머물다가 계곡물이 뿜어내는 음이온과 바윗돌의 지자기를 받아보려고 맨발로 냇바닥으로 내려갔다.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발목에 와 닿는 물줄기에서 여름이 가는 막바지 더위를 홀로 날려 보냈다.
한동안 머문 계곡에서 벗어둔 등산화 끈을 조여 묶고 천주산 꼭뒤로 오르는 임도를 따라 걸었다. 며칠 전에 이어 여름 끝자락 내가 달천계곡을 다시 찾아감은 물봉선꽃을 완상하기 위함이었다. 향기를 내뿜지 않았지만 역시나 기대했던 만큼 응달에는 물봉선이 선홍색 꽃잎을 펼쳐 있었다. 물봉선은 남들이 선뜻 가길 싫어하는 응달 물가를 자생지로 삼아 내 마음을 홀리는 야생화다.
개화가 시작된 물봉선은 이제 내가 더 찾아가지 않아도 가으내 한동안 꽃을 피우지 싶다. 천주산 정상으로 가는 임도를 따라 오르다 약수터에서 샘물을 받아 마시고 잣나무가 우거진 삼림욕장으로 들어섰다. 창원 근교 편백이 우거진 숲은 많아도 그곳은 잣나무로 손에 꼽히는 삼림욕장이었다. 하늘을 가리도록 미끈하게 자란 잣나무 숲에서 피톤치드를 한껏 흡입하고 고개를 넘었다.
만남의 광장에서 천주산 정상 가는 길은 비탈이 가팔라 오르길 단념한 지 오래다. 고갯마루를 넘어 천주암으로 내려서니 법당엔 녹음기로 흘러나온 독경이 낭랑하게 들려왔다. 암자를 지나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내가 사는 동네 우체국에서 택배를 한 건 보내고 퇴직을 앞둔 동기를 만났다. 삼복이 지난 철이었지만 둘은 삼계탕으로 점심을 들면서 나는 맑은 술을 몇 잔 곁들였다. 22.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