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GY01S2Pzhso
로스트로포비치라는 이름은 첼리스트의 이름을 뒤지다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한다. 므스티슬라브와 레오폴드(1892∼1942) 부자가 그들이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카잘스의 제자였다. 그리고 므스티슬라브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핏줄 탓인지 환경 탓인지 므스티슬라브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4세때 폴카를 작곡해 스스로 연주했다. 5세 때는 집안이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레오폴드는 모스크바 방송 교향악단에서 연주하며 그네신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므스티슬라브도 그곳에서 코졸루포프에게 배우기시작했다.
10세 때인 37년, 레오폴드와 오케스트라 연주여행에 동행했던 그는 최초로 협연의 기회를 잡았다.1941년, 14세의 나이로 첼로와 피아노과를 동시에 졸업한 그는 이듬해 아버지 레오폴드를 잃었다. 당시 레오폴드의 나이 50세에 불과했다. 므스티슬라브는 15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첼로 클래스를 물려받았다. 그는 10대 후반에 이미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 등을 스승이자 동료로 두었다. 모스크바 필과 연주 여행을 다녔고, 10년 이상위인 리히테르를 독주회 반주자로 두었으며, 길렐스·코간과 피아노 트리오 활동도 했다. 1945년 모스크바 콩쿠르를 시작으로 프라하,바르샤바, 부다페스트에서 콩쿠르를 석권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로스트로포비치라 하면 사람들은 모두 레오폴드를 떠올리기보다 므스티슬라브를 떠올렸다. 카잘스에 비한다면 로스트로포비치의 젊은, 아니 어린 시절은 ‘화려한 인생’ 그 자체였다.
그가 어린 시절 피아노를 병행해 공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그는 훗날 부인인 소프라노 가수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의 독창회반주를 암보로 연주할 정도로 전문 피아니스트 수준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는 지휘자로서도 큰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처음 첼로의 길을 걸을 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협주곡에서 독주악기로 오케스트라와 대적할 때, 그의 연주는 특히 빛을 발한다. 이는 첼로로써 피아노가 내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의도했기 때문이다.
유리처럼 딱딱하고 금속적인 소리에서 돌변해 꿈꾸듯 부드러운 소리를 내고, 어떠한 어려운 기교도 악상에 맞게 소화해 내는 연주.아버지 레오폴드를 통해 내려온 카잘스의 주법이 므스티슬라브에 이르러, 약 50년 만에 다시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그의 연주는 초인적이다’ ‘그는 첼리스트가 아니다. 자연현상이다’ 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작곡가는 그에게 앞다투어 곡을 헌정했다. 그의 레퍼토리가 현대곡에 폭넓게 포진해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거꾸로 그의 폭넓은 표현력과 강렬한 연주 효과는 작곡가들에게 첼로 협주곡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가 현대곡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인적인 연주만큼 그의레퍼토리도 초인적으로 넓다.
1956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된 그는 구소련에서 인권운동을 펼치던 노벨상 수상작가 솔제니친을 옹호한 죄로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했다. 이 또한 정치와는 무관한 인류애의 발로였다. 따라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 앞에서 연주하던 그의 모습이 전혀 쇼나 이벤트로 비치지 않은 것이다.
이후 그는 미국을 근거지로 활동하며 지휘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이전에도 그의 연주 모습을 보면 협연석에 앉아 오케스트라를 향해 몸으로 얘기하는 듯한 동작을 자주 취하곤 했다. 몸속에 정열이 끓어오르던 그는 지휘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탈 도라티의 후임으로 1977년부터 워싱턴 내셔널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 그는 이후로도 첼로와 지휘를 병행하며 양쪽 어느 하나 허술함이 없었다. 그가 지휘한 텔덱 레이블의 음반중에는 이미 수작으로 거론되는 음반들이 상당수 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나 바이올리니스트들과의 협연 음반들이 좋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아끼고 아낀 끝에 92년에 녹음(EMI)했다. 새로운 해석을 많이 시도해 ‘장고 끝에 악수’라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아직 평가를 내리기는 성급하지 않나 싶다.
첼로만이 아니라 지휘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구소련에 속해 있던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출생으로 모스크바의 그녜신 음악원에서 첼로를 가르치던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첼로를 배웠다. 그 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해 코졸루포프에게 첼로를, 쇼스타코비치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졸업과 동시에 모교의 교원으로 채용된 그는 1956년 교수로 승진했으며 그 이전인 1950년 '프라하의 봄' 국제콩쿠르를 비롯한 여러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로는 구미 각국을 순회공연 하면서 명성을 높이는 한편 소련 국내에서도 정력적인 연주활동을 전개, 국가로부터 상도 받았다. 1968년 모스크바 볼리쇼 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가극『에브레기 오네긴』을 지휘해 지휘자로도 데뷔했고, 외국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도 시작했다.
그의 존재는 단지 금세기 최고의 첼리스트에 머무르지 않고 1968년의 솔제니친 옹호에서 발단한 인권 문제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1970년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을 옹호하면서 로스트로포비치는 소련 정부와 대립하기 시작해, 1974년 가족과 함께 2년 간 해외 체재 허가를 얻은 것을 계기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에 살면서 1977년 그 곳 내셔널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현존하는 첼로 주자 중에서 최고급의 기술을 가지고 호쾌한 연주를 한다. 아무리 어려운 페시지라 해도 균일한 음색으로 막힘이 없이 연주해 낸다. 볼륨도 지금까지의 연주자로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더구나 피아니시모의 섬세함도 비길 데가 없어서 놀라울 정도의 최약음까지도 회장의 구석구석까지 들리게 한다. 첼리스트로서의 로스트로비치는 카잘스가 '종래의 첼로 연주의 관념을 뒤엎은 명인'이라고 절찬한 것처럼 우선 비길 데 없는 기교의 소유자이다.
지휘자로서는 슬라브 음악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으며 부인인 소프라노 가수 비시네프스카야의 리사이틀에서는 피아노 반주자로서도 활약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그는 서베를린 쪽 장벽 밑에 혼자 버티고 앉아 무반주 첼로곡을 연주해 세계적인 찬사를 받기도 했다. 각 방면의 CD가 나와 있는데 거의가 명연주이다. 슈만의 『첼로 협주곡』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일찍이 카잘스는 이 연주가를 향해서 '첼로 연주의 개념을 바꾼 첼리스트' 라는 찬사를 보낸바 있다. 현대 첼리스트 세계 최초로 완전무결한 기술적 이상을 실현 시킨 로스트로포비치.
그는 기술에 있어서나 예술성에 있어서, 게다가 정치적인 신념에 있어서도 확고한 자기 세계를 지니고 있는 위대한 아티스트이다. 이미 10대에 바하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모두 연주한 경력을 지니 고 있다. 또한 실제 연주회 (1975년의 비엔나 연주회 등) 에서 이 작품 전곡을 감동적으로 연주한 경력의 소유자인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였으나 전곡을 녹음하겠다고 결심하기까지는 수많은 세월을 망설여 왔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과감하게 전곡 녹음에 도전했던 요요마와 극단적인 대조가 되는 대목이다. 1950년 제 2번과 5번을 녹음한 일이 있었지만 로스트로포비치는 근 60여년을 망설여 온 끝에 1990년에서야 전곡을 녹음하기에 이른다. 난곡 가운데 난곡이라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7번이나 녹음할 만큼 연주 기술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던 그가 왜 이렇게 오랜 세월을 주저했는지... 이에 대한 해답은 아직 없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에 성취된 그의 바하 연주는 비교될 수 없는 그만의 예술적 정체성을 지닌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내용으로 평가될 만하다. 도처에 강렬한 힘이 충만되어 있고, 열린 예술혼이 숨쉬고 있다. 그의 소리는 아주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다. 이런 모든 요소들은 60여년의 세월을 통해 그의 영혼이 터득한 독특한 바하의 세계일 수도 있다. 그렇게 때문에 로스트로포비치가 연주하는 바하의 첼로 모음곡은 바하와 로스트로포비치의 완벽한 결합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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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로포비치는 바하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이렇게 해석했다.
"제 1번은 가볍다.
제 2번은 슬픔과 열정이다.
제 3번은 빛난다.
제 4번은 위엄과 애매함이다.
제 5번은 어두움.
제 6번은 햇빛이다."
근본적으로 그의 해석은 아주 로맨틱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카잘스와 그 맥이 통하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는 훨씬 개방적이고 자유롭다. 기본적인 리듬 패턴을 준순하면서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혼으로 이 작품에 대하고 있는 것이다. 빠른 악장에서는 유쾌한 흥분이 들리고, 느린 악곡에서는 내면으로 깊이 스며드는 명상이 들리는 듯 싶다. 인토네이션에서도 그의 명암은 확고한 차별이 있다. 절묘한 피아니시모가 그 증거이다.
대개의 음악가들은 매우 다른 두 종류로 나뉘다고 볼 수 있는데,너무 겸손하여 수줍음을 탈 정도로이거나 아니면 자신을 숭상하는 목소리에 도취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이와는 다른, 아주 독특한 부류에 속한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즐기고 삶과 음악을 사랑하며 독특한 영어 발음으로 삶과 음악에 관해 열정적으로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만나자마자 환하게 웃으면서 당신의 팔을 잡고는 별명인 'SLava'로 자신을 부르라고 고집하는 사람이다. 사실 그의 이름인 므스티슬라프를 제대로 발음하기란 거의 고문에 가깝다. 그의 설득력은 놀라울 정도이다. 어느 다른 음악가가 프로코피에프나 쇼스타코비치, 브리튼 같은 작곡가들의 팔을 비틀면서 어떤 특정한 곡을 쓰라고 권유할 수 있겠는가? 로스트로포비치 이외 그 어떤 음악가도 프로코피에프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나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1번>, 브리튼의 <첼로 교향곡>과 같이 기념비적인 작품을 작곡해 내도록 유도할 수 없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로스트로포비치가 브레즈네프가 지배하던 소련에서 망명하자 러시아판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악보에서 헌정받은 사람인 로스트로포비치의 이름을 지워야만 했다. 그러나, 그 곡에 나타나 있는 그의 흔적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그 소절 안에 그렇게 많은 솔로 파트가 나오는 첼로 협주곡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그가 하는 모든 일에는 웅장함이 따라다닌다. 이 바흐 음반만 하더라도 로스트로포비치 자신이 기획한 것으로 스스로 속도를 조절하고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가려내었다. "내가 만족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쓰레기 통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실제적으로 얼마나 많은 부분이 사장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높은 예술적 이상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모음곡 제6번>은 정말로 거대한 '첼로 교향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곡은 완전히 장엄하고 웅장하지만은 않다. <모음곡 5번>의 사라반드는 그가 좋아하는 악장이다. "내가 보기에 이 악장이야말로 가장 천재성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단지 세 줄 뿐인데 얼마나 귀중한가! 이 몇 안되는 음들에 배포되어 있는 모든 것을 전하기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다고?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 불가능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도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스티븐 존슨 EMI CLASSIC <J.S. Bach Cello-SUiten>에서 옮김
(퍼 온 글이다 보니 두서가 없군요. 양해 바랍니다.)
글쓴이 : 로라⌒⌒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