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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http://blog.naver.com/hanmailhan/90071249608
孫世一의 비교 傳記 (70) -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독수리作戰」과「냅코作戰」-- 美戰略諜報局(OSS)과「독수리作戰」 추진
「독수리作戰」과「냅코作戰」
孫 世 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 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 政界에 투신하여, 11代, 14代, 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民會議 정책위의장,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孫世一 논설위원
光復軍의 자주성을 되찾은 臨時政府는 美戰略諜報局(OSS)과 協同으로 國內進入을 위한 「독수리作戰」을 추진했다. 美國 OSS본부에서도 같은 工作을 위한 「냅코作戰」을 추진했다.
李承晩은 1945년 2월5일에 國務長官代理 그루(Joseph C. Grew)에게 편지를 보내어 소련이 한국에 진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다고 하는 〈韓國解放委員會(Korea Liberation Committee)〉를 政府로 내세울지 모르므로 그러기 전에 韓國臨時政府를 빨리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李承晩은 3월8일에 루스벨트 大統領의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를 만났다. 그녀는 韓國人들에 대한 武器貸與法援助요청을 루스벨트에게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것은 實現되지 않았다.
終戰이 임박해지자 重慶에 있는 獨立運動者들의 權力鬪爭도 한결 치열했다. 4월에 열린 臨時議政院會議에서 金九는 李承晩의 전보 한 장으로 情勢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공격을 받았다. 韓國獨立黨과 朝鮮民族革命黨에서 탈당한 사람들은 新韓民主黨을 결성하고 獨立運動者代表大會의 소집을 요구했다.
(1) 美戰略諜報局(OSS)과「독수리作戰」 추진
광복군 9개 준승이 취소된 뒤에 한국광복군과 미국전략첩보국(OSS)의 협동작전 논의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마지막 돌파구로 미군과의 군사협동을 추진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OSS도 일본 본토 진공을 앞두고 광복군 인력을 활용하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西安에 있는 李範奭의 제2지대와 安徽省의 阜陽(부양)에 있는 金學奎의 제3지대는 1945년 1월 거의 동시에 개별적으로 OSS와 접촉했다.
光復軍 第2支隊의 韓美軍事合同訓練
이범석은 OSS 중국본부 비밀첩보과(SI)의 사전트(Clyde B. Sargent) 대위를 서안의 제2지대 본부로 초청했다. 成都大學 교수로 근무했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중국어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전트는 중국말이 능숙한 중국통이었다. 그는 1943년 6월부터 OSS의 워싱턴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44년 4월에 OSS 중국본부로 배치되었다.1) 사전트는 한국 사정에도 밝아서 이범석의 요구사항을 OSS 국장 도노반(William J. Donovan) 장군에게 조언하여 합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교량 역할을 했다.2)
사전트는 이범석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이범석을 군사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군인이면서도 정치에 무관심하고 오로지 군사문제에만 전념하는 〈혁명적 군사지휘관〉이라고 평가했다. 사전트는 전반적인 사기와 개인적인 능력, 단결심 등을 조사한 결과 광복군 제2지대원들은 OSS작전에 적합하며, 이들 가운데에서 요원을 선발한다면 〈OSS한국첩보작전을 위한 요구를 가장 적절하게 충족시켜 줄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국 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의 자율권을 확대해 주는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아 중국정부도 광복군과 OSS의 합동작전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3) 이러한 판단에 근거하여 사전트는 광복군을 활용한 「독수리작전계획」을 구체적으로 입안했다.
버치 대위의 주선으로 第3支隊도 OSS와 合同訓練 실시
광복군 제3지대의 OSS 훈련은 김학규가 곤명에 본부를 두고 있는 미군 제14항공대와 교섭하여 이루어졌다. 1945년 1월에 안휘성 臨泉의 중국군 제10전구 전방지휘소에 연락장교로 파견되어 있던 金祐銓(김우전)은 임천 근처에 있는 제14항공대 소속 버치(John M. Birch) 대위에게 광복군의 무전교육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4) 김학규는 이를 즉각 받아들여 김우전, 朴相基, 文洙烈 등 대원 5명을 선발하여 OSS 무전교육을 실시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중국 군사위원회의 견제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김학규는 포기하지 않고 버치와 상의하여 임시정부와 광복군총사령부를 통하여 정식으로 중국정부의 승인을 받기로 했다. 김학규는 곤명으로 가서 3월13일에 제14항공대 사령관 첸널트(Claire L. Chennault) 장군을 만나고, 이틀 뒤에는 합동훈련에 관한 세부계획과 구체적인 실시방안을 결정했다.5)
김학규는 3월16일에 중경으로 갔다.6) 그는 李靑天에게 OSS와의 합동훈련 교섭 경위를 보고하고 총사령부의 재가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동안 인원이 부족하여 명목상의 편제에 지나지 않았던 제3지대를 정식으로 편제해 줄 것을 요청하여 제6징모분처를 제3지대로 정식으로 승인받았다.7) 제3지대의 훈련을 담당한 것은 선교사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난 윔스(Clarence N. Weems) 대위였다.
OSS 中國本部 秘密諜報課에서 「독수리作戰(The Eagle Project)」 입안
OSS 중국본부 비밀첩보과(SI)는 2월24일에 광복군을 대일첩보작전에 활용하기 위한 「독수리작전 계획서」를 작성했다. 「한국으로의 비밀첩보 침투를 위한 독수리작전(The Eagle Project for SI Penetration of Korea)」으로 명명된 이 계획서는 1월23일에 OSS 워싱턴본부 기획단이 작성한 「비밀정보 수집을 위한 일본 적진에 대한 요원 침투 특수계획(Special Program for Agent Penetration of Japan’s Inner Zone for Secret Intelligence Purposes)」을 중국전구에 맞추어 재조정한 것이었다.8) 이 계획서는 광복군과 OSS의 한반도침투계획의 전모를 잘 보여 주는 문서로서, SI의 사전트가 이범석과 긴밀히 협의하여 작성한 것으로 짐작된다.9) 이범석은 뒷날 이때의 일을 〈사전트와 동숙하며 결사의 신념으로 이 일을 했는데, 뒤에 이 전략건의서의 초고가 발견되어 이를 감명 깊게 보다가 그 건의서의 우수한 점에 놀란 일이 있다〉라고 회고했는데,10) 이범석이 말하는 전략건의서의 초고가 바로 「독수리작전」 초고였을 것이다.
「독수리작전 계획서」에 적힌 개략적인 작전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탈출 학병청년들을 포함한 광복군 제2지대원 120명 가운데에서 공작요원 60명을 선발하여 3개월 동안 첩보 및 통신훈련을 실시한다. 훈련 결과 다시 적격자 45명을 선발하여 1945년 초여름쯤에 한반도의 5개 전략지점(청진, 신의주, 부산, 평양, 서울)으로 침투시킨다. 이들의 주요임무는 각 지역별로 해군기지, 비행장, 병참선, 항만시설, 산업시설, 교통망 등에 대한 정보수집이다. 공작원들은 이 지역들에 관한 정보수집 이외에도 지하운동의 규모와 활동에 관한 정보와 연합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때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나아가 대중봉기를 지원한다. 훈련기간은 3개월이다. 처음 2개월은 杜曲에서 첩보훈련을 중점적으로 실시하고, 나머지 1개월은 곤명에서 통신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한다. 작전계획은 SI가 주관하고 연구분석과(R&A)와 교육훈련과(S&T)가 협조한다. 작전 수행을 위해 SI와는 별도로 제2지대 본부가 있는 두곡에 작전본부를 설치한다. 토교에 있는 40명의 일본군 탈출학병들은 두곡으로 이동시키고, 훈련에 필요한 숙소는 신축한다. 훈련을 위한 모든 준비는 1945년 4월15일까지 완료한다.11)
「독수리작전 계획서」는 2월27일에 워싱턴 극동정보처에 보고된 뒤에 도노반 장군과 중국전구 미군총사령부의 승인을 거쳐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12)
사전트가 臨時政府 방문하여 「독수리作戰」 協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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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光復軍의 훈련 모습〔白凡記念館 제공〕. |
미국 당국의 최종승인이 나자 사전트는 임시정부 고위 간부들과 협력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월30일에 이범석과 함께 중경으로 갔다. 사전트는 4월1일 저녁에 金九, 이청천, 김학규 등과 만나기로 했으나, 金九는 이날 모임에 불참하고, 閔弼鎬와 鄭桓範이 대리로 참석했다. 사전트는 광복군과 OSS의 합동작전은 모든 한국 지도자들과 단체들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범석은 계획된 작전에 대해 임시정부는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강조했고, 이청천은 이범석의 말과 행동은 金九 주석과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사전트는 이범석이 金九와 이청천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음을 확인했다.13)
이날 저녁 회의에 金九가 참석하지 못한 것은 그 전 주에 장남 仁이 사망한 충격 때문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김인은 안개와 구름이 많은 중경의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폐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사망하여 이틀 전인 3월30일에 장례를 치렀다.14) 1934년에 할머니 郭樂園 여사를 따라서 9년 만에 다시 중국에 온 김인은 중국 중앙대학을 졸업하고 金九가 조직한 한국국민당 청년단원으로 활동하면서 金九의 지시로 상해에 잠입하여 비밀공작활동에 참여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는 등 金九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운 총명한 청년이었다.15) 김인의 시신은 南岸에서 6, 7리쯤 떨어진 和尙山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곳은 곽낙원 여사를 비롯하여 宋秉祚, 孫逸民 등 독립운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묻힌 곳이었다.16) 金九는 어머니를 여읜 지 6년 만에 다시 아들을 먼저 보내는 슬픔에 가슴아파해야 했다.
金九는 4월3일 오전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사전트를 만났다. 이청천, 이범석, 정환범과 이틀 전 회합 때에 참석하지 못했던 김학규도 참석했다. 통역은 정환범이 했다. 金九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치파오(旗袍) 차림이었다. 그는 먼저 지금 몸이 불편하여 쉬고 있는 중이어서 4월1일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노라고 사과했다.
金九는 사전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모나 태도에서 완벽해 보였고, 스스로 겸손과 신사도로 단련된 위엄과 침착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가 25년 전에 테러리스트였고, 애국적인 살인을 했던 전력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고 사전트는 비망록에 적고 있다.17)
사전트가 金九를 25년 전에 테러리스트로서 애국적인 살인을 했다고 한 것은 1932년의 李奉昌 사건과 尹奉吉 사건을 전해 듣고 한 말일 것인데, 그것은 13년전의 일이었다.
金九는 37명의 일본군 탈출 학병청년들을 포함한 유능한 공작원들을 양성하여 OSS의 활동에 전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말하고 〈이범석 장군과 사전트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모든 것〉을 승인한다고 말했다. 金九는 미군이 필리핀 섬에 진공할 때에 맥아더가 오스메냐(Sergio Osmen~a) 대통령 등 필리핀의 요인들을 동반한 것이 필리핀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협력을 얻는 데 매우 유효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연합국 군대가 한반도에 진격할 때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동행하면 필리핀에서와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말했다.18)
脫出 學兵靑年들을 OSS 訓練要員으로 선발
사전트는 金九를 만나고 나오는 길로 바로 이청천, 이범석, 김학규, 정환범과 함께 토교로 갔다. 한동안 임시정부 청사에서 기거하던 일본군 탈출 학병청년들은 2월20일에 동포들이 살고 있는 토교로 옮겼다. 이들은 언덕 위에 있는 한국기독교청년회관을 숙소로 정하고, 「광복군 토교대」를 편성하여 총사령부 총무처장 崔用德의 지휘 아래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졌다. 이 무렵 張俊河와 金俊燁은 임천에서 창간했던 등사판 잡지 「등불」을 속간했다.19) 이들이 토교에 머무는 동안 임시정부 각 정파의 포섭공작이 치열했다. 내무부장 申翼熙는 임시정부 경위대를 새로 조직한다고 학병청년들을 설득하여 尹慶彬, 徐相烈, 白正甲 등 8명이 임시정부 경위대로 뽑혀 중경으로 갔다.20)
토교에서는 민필호, 嚴恒燮, 劉振東 등이 이범석과 사전트를 맞이했다. 이범석은 민필호의 집에서 학병청년 대표 김준엽을 만났다.
『이제 미군과 제휴하여 싸우게 되었으니 우리 광복군이 한국에 상륙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
이범석의 말에 김준엽은 깜짝 놀랐다.
『상세한 이야기는 전체 동지들 앞에서 설명할 테니까 김동지는 어서 동지들을 집합시켜 주시오』
김준엽은 부리나케 뛰어다니면서 학병청년들을 기독교청년회관으로 불러모았다. 학병청년들은 미군과 손잡고 고국에 진입하는 작전을 전개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 흥분했다. 학병청년들이 다 모이자 이범석과 사전트가 회관에 당도했다. 이범석은 학병청년들에게 미군과의 합동작전에 참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여러분! 왜놈을 고국산천에서 몰아내는 데 무력 이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소? … 드디어 기회가 온 것입니다. 나 이범석이 앞장을 설 테니까 여러분도 나와 함께 미군과 제휴하여 전쟁터로 갑세다.…』21)
이범석의 소개로 사전트도 간단한 인사말을 했다. 사전트는 탈출 학병청년들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들 모두가 지적이고, 기민하고 빈틈이 없었다. 내가 본 군인 집단 가운데에서 가장 지적인 집단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능력은 어떤 미국 청년장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고 그는 비망록에 적었다. 사전트는 이범석에게 탈출 학병청년들 전원을 「독수리작전」의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시키기 위해 두곡으로 데려가자고 제안했다.22) 이렇게 하여 장준하, 김준엽, 魯能瑞 등 19명이 이범석을 따라서 4월29일에 서안으로 갔다.23)
中國戰區 美軍司令部에 軍事協助計劃書 제출
사전트를 통하여 「독수리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金九는 중국전구 미군총사령관 웨드마이어(Albert C. Wedmeyer) 장군과의 회담을 추진했다. 金九는 4월11일에 정환범을 통해 OSS의 버드(Willis Bird) 대령에게 자신과 이청천, 조소앙 세 사람이 웨드마이어 장군을 방문하겠다고 통보했다. 金九가 웨드마이어를 만나고자 한 것은 웨드마이어가 미국에 있을 때에 그를 만나 대일전에서 한국인들을 활용하는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다는 李承晩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24)
金九는 4월17일에 외무부장 조소앙, 통역 정환범과 함께 미군사령부를 방문했다. 그러나 웨드마이어는 만나지 못하고 대신 참모장 그로스(Mervin E. Gross) 장군을 만났다. 金九는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들이 연합국에 협조할 수 있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고,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된 「미국당국에 요청하는 군사원조 안건에 관한 개요」라는 제안서를 그로스에게 수교했다. 그것은 「독수리작전」의 계획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25)
金元鳳을 「독수리作戰」에서 排除
그런데 OSS와 「독수리작전」을 추진하는 동안 이청천, 이범석, 김학규뿐만 아니라 金九도 임시정부 군무부장인 金元鳳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앞에서 본 대로 4월1일과 3일에 사전트가 임시정부를 방문하여 金九를 만날 때에도 김원봉은 참석하지 않았다.
사전트의 비망록에 따르면, 김원봉은 「독수리작전」에 대해서 아무런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으나, 金九·이청천·이범석 등 한국독립당그룹에 OSS와의 합동작전의 선수를 빼앗긴 것을 몹시 불쾌해 하고 있었다. 김원봉은 金九에게 자기가 웨드마이어 장군을 만나는 것을 허락할 것과 국내에서 미군과 협력할 모든 작전에 대한 총괄적인 계획을 밝혀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金九는 김원봉의 요구를 거절했다.26) 그것은 한국독립당이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그룹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을 참여시킴으로써 광복군과 OSS와의 합동작전이 파괴되지나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27) 또한 김원봉이 화북조선독립동맹의 金枓奉에게 편지를 보내어 독립동맹을 조선민족혁명당 화북지부로 고쳐 줄 것을 요청하는 등 연안의 공산주의자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28)도 한국독립당으로서는 불만이었을 것이다.
김학규는 이청천에게 미군과의 합동작전에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의 제1지대를 참가시키면 본국으로 진입했을 때에 군중이 사상적으로 좌우로 갈라지고 동족상잔의 피로 물들여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제1지대는 참가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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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냅코 作戰」의 훈련장인 로스앤젤레스 앞바다의 산타 카탈리나 섬. |
(2) 在美同胞 指導者들도 「냅코作戰」에 참여
1945년 1월에 버지니아주의 핫 스프링스(Hot Spring)에서 열린 태평양문제연구회 제9차 회의에 참석한 중국대표들을 통하여 임시정부의 승인문제에 대해 중국 국민정부의 태도가 바뀌고 있는 것을 확인한 李承晩은 2월5일에 국무장관 대리 그루(Joseph C. Grew)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共産政權수립 막기 위해 臨時政府 승인필요
〈이 점에 관하여 6개월 전까지도 열의를 보이지 않던 중국정부가 지금은, 만일 미국이 뒤따라 준다면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나서겠다고 합니다. 저는 미국정부가 한국의 승인과 관련하여 중국과 허심탄회하게 협의할 수 있기 바랍니다. 중국정부는 국무부의 양해 없이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국무부가 중국에 협조하겠다는 암묵적인 양해를 해준다면, 중국은 대한민국의 법적 지위를 공식으로 승인할 것입니다.…〉30)
이 편지는 미국정부가 임시정부를 시급히 승인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서 쓴 것이었는데, 李承晩이 임시정부 승인이 시급히 필요한 이유로 든 것은 소련이 한국에 진입하여 그곳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다고 하는 〈한국해방위원회(Korean Liberation Committee)〉를 정부로 내세울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李承晩은 편지에서 시베리아에 있는 한국공산군이 한국 국내로 밀고 들어와서 망명 중인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민주정부가 귀국할 겨를도 없이 한반도 전체를 석권하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진주만 공격 이후 줄곧 국무부에 경고해 왔음을 상기시켰다. 그렇게 되면 국민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부형태에 관해 의사표시를 할 기회를 상실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사태는 필연적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에도 불리한 상황을 조성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무차관 던(James C. Dunn)은 2월20일에 주중대사 헐리(Patrick J. Hurley)에게 李承晩의 편지내용을 비공식적으로 중국 외교부에 알리고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보류하는 것이 국무부의 견해임을 통보하라고 훈령했다.31) 이 훈령의 사본은 주영대사와 주소련대사에게도 송부되었다. 그러나 李承晩에게는 회신을 보내지 않았다.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 때에 전쟁부 장관을 지낸 헐리는 1944년 8월에 루스벨트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11월에 고우스(Clarence Gauss)의 후임으로 주중대사에 임명되어 있었다.
『소련군이 參戰하면 日本軍이 블라디보스토크 차지해』
소련의 대일참전이 기정사실화하면서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에 따른 정치적 및 군사적 문제점을 두고 여러 갈래에서 구체적으로 검토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만주와 중국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실체나 그들의 작전계획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지 못했다. 중국-인도-버마전구 미군사령관 겸 蔣介石 총사령의 참모장이었다가 해임되어 워싱턴에 돌아와 있던 최고전략가 스틸웰(Joseph W. Stilwell) 장군과 「냅코작전」을 추진하고 있던 아이플러(Carl F. Eifler)의 다음과 같은 대화는 그러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두 사람은 대형 군사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서 이야기했다. 스틸웰이 물었다.
『아이플러, 당장의 자네 계획은 뭔가?』
아이플러는 한국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한국에 상륙한 다음에 거기에서 일본으로 침투하는 것입니다』
스틸웰은 아이플러를 보면서 말했다.
『이 점을 명심하게. …러시아인들이 들이닥칠 것이네. 그들이 움직이면 왜놈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연결되는 철도를 끊기 위해 만주에서 북쪽으로 이동할 것이고, 그러고 나서는 일본 영향권의 지리적 중심으로 그 도시를 차지할걸세. 블라디보스토크를 차지하게 되면 그들은 자기네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마음대로 일본으로 이동시킬 수 있거든. 이때에 한국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일본군대를 마음대로 일본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혁명을 통제하기 위해 군대를 묶어 놓게 될 거야. 자네 계획에서 이 점을 고려에 넣게』
아이플러는 스틸웰의 권고를 재빨리 새기면서 계획과 일정에 다소의 변경이 필요하겠다고 느꼈다.32)
스틸웰의 권고는 아이플러가 3월7일에 도노반에게 제출한 「냅코계획」의 제1차 보고서와 30일에 제출한 수정 보고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40代가 넘은 人士들도 自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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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S가 韓國沿岸 上陸用으로 특수제작한 2人用 잠수정. |
「냅코작전」이 張錫潤의 보고서를 근거로 하여 작성된 2월26일자 보고서와 달라진 점은 한국에 침투시킬 공작요원으로 한인포로들뿐만 아니라 이미 미군에 입대해 있는 한인 청년들과 유학생 등 일반인들도 선발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柳一韓을 비롯하여 金剛, 卞埈鎬, 李根成 등 40대가 넘은 재미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들도 자원하여 「냅코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작전」에 따르면, 이들은 오키나와에서 잠수함으로 한반도에 침투하여 그곳에 첩보망을 조직하고, 한반도에 추락하는 미공군 조종사들을 구출하며, 앞으로 한반도 안에서 파괴공작과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고 나서 일본으로 침투하는 것이었다.33) 이를 위하여 5명 이내를 한 조로 하는 10조의 공작원들을 국내로 파견하되, 이들이 체포되어 조직의 실체가 탄로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각 조의 공작원들은 다른 조의 사람들을 서로 모르게 훈련시키기로 했다. 10개조 가운데에서 3개조는 체포될 것으로 예상했다. 공작원들이 한국에 상륙할 때에는 1만5,000엔(1만5,000달러)을 지니고 한국옷을 입고, 일제안경을 쓰고, 무전통신기재와 그것을 파묻을 일제 삽을 휴대하게 했다. 상륙은 2인용 잠수정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미해군은 그런 잠수정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 주문으로 한 척을 만들어야 했다. 비용은 2만 달러였다.34)
1945년 6월 단계까지 확정된 침투조는 다음의 4개조였다.
○ 아이넥 조(Einec Mission): 황해에서 서울로 침투. 유일한을 조장으로 하고 李超, 邊日曙, 車眞宙, 이종흥. 이 조의 임무는 주로 경제상황과 일본군부대의 위치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 차로 조(Charo Mission): 진남포를 거쳐 평양으로 침투. 이근성, 김강, 변준호. 이들은 안경, 치아 교정, 사마귀 제거, 신경성 눈깜빡이와 납작코 교정을 위한 소규모 외과수술을 받아야 했다.
○무로 조(Mooro Mission): 무로 조에 대한 기록은 OSS 보고서에는 없고, 아이플러의 회고록에만 나온다. 한국 해안의 한 외딴 섬을 탈취하여 첫 침투기지를 삼을 계획. 현지 사정에 밝은 안내자 한 사람과 미군 요원 6명이 침투할 예정. 현지 주민은 18명가량인데, 우리 편이 되어 주리라고 생각되나, 불가능하면 없애 버림.
○차모 조(Chamo Mission): 함경남도 함흥 근방의 계곡에 이근성, 김강, 변준호, 하문덕 네 사람을 중국에서 공수하여 낙하산으로 투입. 이근성과 김강은 전에 살던 평양에 가서 세포를 조직한 뒤에 서울로 가서 일본에 침투시킬 공작원을 선발한다. 변준호와 하문덕은 계곡에 비행기 이착륙용 활주로를 만들고, 공작원 양성소를 설립한 뒤에 흥남으로 진출한다. 이 차모 조는 3월에 계획된 차로 조가 변경된 것이었다.
학병으로 버마전선에 배치되었다가 영국군에 투항하여 OSS에 인도되었던 朴順東, 朴亨武, 李鍾實 등은 전남으로 침투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고 하나, 이들이 관련된 공작조의 이름은 OSS문서에서 확인되지 않는다.35)
선발된 요원들은 로스앤젤레스 앞바다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Santa Catalina) 섬에서 외부와 격리된 채 서너 달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무전과 첩보교육을 위주로 하고, 그밖에 무기·비무장 전투법·독도법·촬영·파괴·낙하산 훈련·선전 등이었다.36) 공작원들은 실제로 잠수정을 타고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침투하기도 했으나 한 번도 적발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침투조를 총괄하던 장석윤의 OSS에 등록된 주소가 주미외교위원부의 주소인 「워싱턴 D.C. 16가 4700번지」였던 것을 보면, 李承晩은 장석윤을 통하여 「냅코작전」의 진척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직접 관여하지는 못했다.
3部調整委員會에서 韓人部隊창설 검토
OSS의 「냅코작전」 작업이 진행되고 있던 4월23일에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는 대일전쟁 수행에 한국인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문제를 검토했다. 국무부가 제출한 이 안은 李承晩이 거듭 제의해 왔고, 또 1945년에 들어서는 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이 2월23일에 주중미국 대리대사 애치슨(George Atcheson)과 만나, 태평양의 한 군사기지에서 한인부대를 훈련시킨 뒤에 중국 북부의 해안기지로 이동시키고 미국이 한국 임시정부와 무기대여 협정을 체결하여 군수품 조달과 경제원조를 해줄 것을 제안한 것37)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국무부의 안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전쟁포로 캠프에 수용되어 있는 한국인 포로 가운데 자원자들로 구성되는 한국군 부대를 창설한다는 계획이었다. 일본에 강제 징집되어 일본군으로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포로가 된 한국인 청년들 가운데에서 반일사상이 투철한 사람들을 석방하여 미육군에서 미국 국적을 가진 30내지 40명의 한국인 장교와 함께 전투부대를 구성하여 태평양에서 태극기 아래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해방된 뒤에는 한국에서 군사정부가 이들을 활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38)
SWNCC의 한국인 활용안에 대하여 워싱턴의 거의 모든 관료들은 찬성했으나, 중국 현지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 장군은 군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그 계획은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회보했다. 웨드마이어는 그러한 부대를 훈련시킬 수 있는 미국인 또는 중국인 요원도 없고 보급품과 장비도 부족한 것 등 어려움이 많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한국인을 통제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들을 가장 유익하게 활용하는 방안은 현재 이용되고 있는 바와 같은 소규모의 비밀단체라는 의견이었다. 전쟁부 차관보 매클로이(John McCloy)는 웨드마이어의 소견을 SWNCC에 전달하면서 미국 또는 중국의 후원 아래 효과적인 한국 전투부대를 결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실용성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전쟁부의 견해라고 말하고, 선발된 한국인들은 군부대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쓰도록 하자고 국무부에 제안했다.39) 이러한 전쟁부의 입장에 따라 한인부대 결성 계획은 SWNCC의 안건에서 제외되었다.40)
엘리노어 루스벨트의 칼럼을 읽고
3·1절이 되어도 특별한 기념행사를하지 못한 채 억분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李承晩은 미국 대통령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가 3월1일자 그녀의 신디케이트 신문 칼럼 「마이 데이(My Day)」에서 3·1운동과 임시정부의 활동을 언급한 것을 보고 적이 놀랐다. 李承晩 내외는 루스벨트 부인에게 편지를 써서 개인적으로 방문하여 사의를 표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李承晩은 1942년에 자신의 저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그녀에게 우편으로 보냈었다. 루스벨트 부인으로부터 3월8일 오후 4시에 만나자는 통지가 왔다. 李承晩 내외는 정해진 시간에 그녀를 방문했다. 李承晩은 그녀에게 올리버(Robert T. Oliver)가 쓴 「한국: 잊혀진 나라(Korea: Forgotten Nation)」(1944)라는 책을 증정했다. 그것은 李承晩의 요청으로 집필한 것이었다. 李承晩 내외는 그저 인사말이나 나누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루스벨트 부인은 대뜸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들은 무기대여법 원조를 받으시려고 합니까?』
그래서 李承晩은 한국인들이 대일전에 동참하려고 얼마나 여러 번 미국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그러나 지금까지 단 1달러의 무기대여법원조나 다이너마이트 한 개도 지원받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李承晩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한국인들에 대해 잘못 전해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럴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루스벨트 부인은 대통령에게 말하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틀림없이 말씀드리겠어요』
흥분하여 집으로 돌아온 李承晩은 프란체스카로 하여금 올리버에게 급히 편지를 쓰게 했다. 올리버가 루스벨트 부인의 칼럼을 논평하는 편지를 써서 루스벨트 부인에게 보내기를 바라는 편지였다. 프란체스카는 그 편지에 루스벨트 부인이 쓴 칼럼기사를 동봉했다.41)
엘리노어 루스벨트는 李承晩 내외를 만나고 난 뒤에 3월12일자 「마이 데이」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전에 李博士를 만난 적이 없으나 그의 얼굴은 숭고한 정신으로 빛났고 그의 온화한 표정에서는 그의 동포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발휘해 왔을 인내심을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42)
그러나 무기대여법 원조는 한국인들에게는 끝내 이행되지 않았다.
「냅코작전」은 5월31일에 OSS 기획단의 공식 승인을 받았고, 6월19일에는 합동참모본부도 이 작전계획을 승인했다. 훈련을 마친 제1차 공작요원들은 출발을 기다렸다.43) 그러나 원자폭탄의 개발로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남에 따라 「냅코작전」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3) 新韓民主黨의 결성과 獨立運動者代表大會 召集問題 論難
종전이 임박해지자 중경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의 권력투쟁도 한결 치열해졌다. 4월11일 상오 10시에 蓮花池 임시정부 청사 대례당에서 개원된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중경시대의 마지막 정기회의이자 가장 격심하게 논쟁이 벌어진 회의였다. 4월11일에 개원하여 5월8일에 폐원할 때까지 모두 16차례의 회의가 열려 다양한 문제들이 논란되었다.
『自力更生의 길로 나아가자』
개원일은 임시정부수립 26주년 기념일이었다. 원칙적으로는 기념식을 별도로 거행해야 했으나 의정원 개원식과 임시정부수립기념식을 함께 거행하기로 했다.44) 洪震 의장의 개회사에 이어 金九, 김원봉, 孫斗煥, 柳林, 金星淑이 각 정당 대표로 차례로 축사를 했다. 홍진은 국제정세가 한국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점에서 임시정부가 세계 각국으로부터 승인받을 만한 성과를 낸 것이 없음을 반성하고 앞으로 남은 기간에 최선을 다하자고 말했다. 金九는 자력갱생을 강조했다.
『오늘은 우리가 유리한 조건으로 대승리로 들어가는 반면에 왜놈은 막다른 골목에 든 때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비록 우리 힘으로가 아니라 남이 하여준 것이나, 또한 기뻐 아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때는 남을 믿을 때가 아니므로 우리는 자력갱생의 길로 나가야겠습니다. 여러분도 물론 다 그리 생각하시고 그렇게 하기를 도모하실 줄 압니다. 우리는 과거를 검토하고 새 단결, 새 마음으로 자력갱생의 길로 나가야겠습니다. 우리는 미주사회의 분열을 우려하였던 것인데, 한족연합회도 임시정부를 옹호한다는 전보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의정원에서도 앞으로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으로 자신합니다.…』45)
한족연합위원회도 임시정부를 옹호한다는 전보를 보낸 것은 李承晩이었다. 그러나 이 전보의 내용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金九는 의정원회의에서 곤혹을 치러야 했다.
회의는 각부 정무보고를 마치고 4월 16일 회의부터 대정부질문이 시작되었다. 먼저 광복군 문제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가장 열띤 논란이 된 것은 외교문제와 이와 관련된 재미동포단체들에 대한 정책문제였다.
주미외교위원부의 위원 선임문제부터 논란되었다. 야당 의원들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을 임시정부가 직접 임명하지 않고 교민단체에 넘겨서 선출하도록 해 놓고 임시정부가 다시 개입하여 직권행사를 한 이유를 추궁했다. 국무위원 成周寔은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15명이 선출되어 분규가 일어나서 부득이하게 임시정부가 개입하여 직권행사를 했다고 답변했다.
다음은 샌프란시스코회의에 파견한 대표단 문제였다. 孫斗煥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샌프란시스코에 파견할 별도의 대표를 선출한 적이 있는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한국인이 먼저 임시정부를 부인하는 일이라면서 이에 대하여 임시정부는 사전에 어떠한 지시를 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조소앙은 李承晩이 자기가 단장이 되고 아홉 사람과 더불어 단원이 되어 합작한 것이라고 한 번 전보한 적이 있으나 임시정부에서 지시한 적은 없고, 만일 민중대표가 따로 파견된다면 불행한 일이라고 애매하게 답변했다. 유진동도 민중대표 선출을 우려했다.46)
대소외교정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이 있어서 흥미롭다. 4월17일의 회의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朴建雄이 외무부의 정무보고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얄타회담에서 우리에게 불리한 점이 있는데, 거기 대하여 상반되는 글로 발표한다는 답변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실이라 믿는가, 아니라 믿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조소앙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과거에 (소련과) 연락을 못 지었던 것이 유감입니다. 4월에 일-소협정폐지 이후로 한-소관계가 깊어질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대소관계는 그만침이라고 보면 좋겠고, 얄타문제도 더 묻지 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입장으로 보면 시간에 제한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성가십니다』
이에 박건웅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소련을 중국이나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지원국으로 인정하느냐 않느냐입니다. 왜 묻느냐 하면 소련대사관에 가 물으니 없다고 하였고, 또 국무장관은 얄타회담의 결의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실이 조금도 없습니다. 루스벨트가 예한테 조선을 먹자고는 말이 아니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의 국책이 약소국을 방조(?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심한다면 우리 독립은 무슨 파악을 가지고 하느냐 말입니다. 각방에 사실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李承晩의 근거 없는 전보 한 장 가지고 결정하느냐 말입니다』47)
회의록의 내용이 불분명하나, 이러한 논란으로 미루어 보면 李承晩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얄타밀약설을 터뜨리기 전에 얄타회담의 비밀협정 내용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金九에게 타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新韓民主黨의 結成으로 韓國獨立黨이 크게 타격 입어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가장 논란이 된 안건은 독립운동자대표대회의 소집문제였다. 독립운동자대표대회소집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은 新韓民主黨이었다. 신한민주당은 2월8일에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불만을 품고 탈당한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에서는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 부의장 崔東旿, 참모총장 柳東說 등의 원로를 비롯하여 安原生, 유진동 등의 소장파들이 참여했다.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참석한 사람들은 金朋濬, 손두환, 申基彦, 申榮三, 金允敍, 文逸民, 姜昌濟 등 1943년 2월에 확대개조대회를 통하여 조선민족혁명당에 합류했던 비의열단계 인물들이었다. 홍진, 유동열, 김붕준은 주석단에 추대되었고, 비서부장에 신기언, 조직부장에 김윤서, 선전부장에 안원생, 재무부장에 유진동이 선임되었다. 이로써 한국독립당은 이전보다 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당내 합작파의 중심인 조소앙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임시정부 안에서 한국독립당과 대결해 온 조선민족혁명당도 의열단 직계 중심으로 당세가 크게 위축되었다.48)
신한민주당의 결성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한국독립당이었다. 임시정부는 신한민주당을 반국가분자들의 집단으로 인식할 정도로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조소앙은 광복군의 신입대원 훈화에서 신한민주당 구성원들이 종래에 임시정부의 권위를 크게 훼손시켜 왔기 때문에 임시정부가 지금까지 각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고 비난하고, 필요할 때에는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이들을 저지하겠다고 공언했다.49) 실제로 신기언이 한인포로가 모인 장소에서 임시정부를 비방하고 당원을 모집하려고 하자 임시정부는 경위대를 보내어 그를 구타했다. 이 사건으로 신기언은 병원에 입원했고, 임시정부는 그를 법부차장직에서 해임했다.50)
臨時政府는 런던 폴란드 亡命政府와 같은 운명이 되지 않기를…
신한민주당은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운명을 보기로 들면서 독립운동자대표대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나왔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폴란드는 1939년 9월에 시코르스키(W. Sikorski) 장군의 지휘 아래 파리에서 망명정부를 세웠으나, 프랑스가 독일군에 점령되자 망명정부를 다시 런던으로 옮겼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소련침공으로 소련의 역할이 중요해지자 미국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존재가 미-소동맹관계에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영국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승인하지 않았다. 소련이 폴란드로 진격하면서 소련의 비호 아래 폴란드국민해방위원회[루블린정부]가 설립되자 연합국은 루블린정부를 주축으로 한 국민통일임시정부(Prosivison Government of National Unity)의 성립을 인정했다.51)
폴란드 망명정부의 운명은 중경의 독립운동자 사회에서는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신한민주당의 창당 선언문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의 오늘날의 경우가 명백히 중경에 있는 한국 임시정부의 운명이 아니라고 누가 보증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임시정부가 폴란드 망명정부와 같은 운명이 되지 않기 위해서 독립운동자대표대회를 소집하자고 주장했다.
〈우리는 해방 후 우리나라의 정부형태 및 그밖의 건설문제가 응당 전국의 인민이 자유·평등·비밀투표 방식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로 조직된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국 이전의 독립운동 기간 중의 일체의 문제는 응당 국내외 민주집단의 대표들로 구성된 독립운동자대표대회를 거쳐 결정되어야 한다.…〉51)
신한민주당의 이러한 주장은 金九와 임시정부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줄기차게 추진해 온 임시정부의 국제적인 승인외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獨立運動者代表大會 召集案 제기
신한민주당은 독립운동자대표대회 소집문제를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정식 안건으로 제출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의정원은 대표대회 소집문제를 논의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의안심의를 반대했다. 의장의 요구로 소집안은 4월21일의 회의에 상정되었으나, 5당통일회의에서 검토하고 있다는 이유로 곧바로 제안자에게 반려되었다.53) 한국독립당은 기존 임시정부의 틀을 완전히 깰 수 있는 소련이나 화북에 있는 동포의 참여는 연락이나 교통과 비용 등의 문제를 고려할 때에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대표대회 소집안은 5월7일의 회의에서 김원봉, 崔錫淳, 趙擎韓 등 7명의 긴급제안으로 다시 제출되었다. 이 안은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이 공동으로 제출한 것이었는데, 소집의 주체가 임시정부(국무위원회)로 바뀌고, 대회의 구성 요소, 범위, 소집 질서 등 대회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임시정부가 행사하도록 규정하는 등 신한민주당의 원안과 큰 차이가 있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가 주도권을 가지는 조건하에서 빠른 시일 안에 대표대회 소집문제를 처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54)
새로운 소집안은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동의로 원안대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해방될 때까지 실제로 대회는 소집되지 않았다.
臨時議政院 및 臨時政府 擴大改造案
독립운동자대표대회안이 유야무야되자 반대파들은 5월1일에 제출된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확대 개조안을 들고 나왔다. 이 안의 취지는 제안자의 한 사람인 손두환의 발언에 잘 표명되어 있다. 임시정부가 국내외 동포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면 다른 지역에 딴 임시정부가 생길 염려가 있고 그것은 러시아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제일 많다고 했다. 그것이 폴란드가 당한 경우인데 한국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불행한 일이 생기면 소련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을 도우려 할 것이고 미국과 중국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은 분열되고 양쪽의 간섭으로 위임통치가 실시될 위험성이 높다고 그는 주장했다.55) 그러므로 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을 고쳐서 화북, 만주, 소련, 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도 임시의정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개편하자는 것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개조문제는 헌법사항이므로 임시헌장을 개정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대했다. 한국독립당이 확대개조안을 반대한 실질적인 이유는 소련지역 대표의 참가문제 때문이었다. 趙琬九는 소련지역 동포들은 소련 국적을 가진 이중인격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임시의정원에 들어오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확대개조안은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56)
이어 임시헌장개정안과 「건국강령」개정안이 논란되었다. 임시헌장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임시의정원 의원 4분의 3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폐회될 때까지 회의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여 임시헌장 개정안은 정식 안건으로 성립되지도 못한 채 흐지부지되었다.57)
「건국강령」 개정문제는 제3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제기된 이래 건국강령수개위원회를 구성하여 별도의 초안 작성을 논의하고 있던 핵심 쟁점이었다. 수개위원회는 총 4차례의 회의를 열었으나 위원들이 참여하지 않아서 위원의 한 사람인 姜弘周가 새로운 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조소앙 등은 「건국강령」을 고치는 것에 반대하여 일곱 차례나 회의를 소집했음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지 않아서 개회도 못했다. 4월28일의 회의에서 김원봉, 손두환, 강홍주 등은 「건국강령」 문제 논의를 독립운동자대표회로 이관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한국독립당의 반대로 기존 수개위원을 해임하고 5월1일의 회의에서 박건웅, 金尙德, 趙擎韓, 조완구, 崔錫淳의 5명을 새로운 수개위원으로 선출하는 것으로 논의를 끝냈다.58)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회의 기간을 일주일 더 연장하면서까지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 없이 5월8일에 폐회했다.59)
獨立同盟에 張建相을 特使로 보내
해방이 임박해지자 金九는 다른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자들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특히 연안독립동맹과의 연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고려했다. 독립동맹과의 연대는 임시정부나 한국독립당의 공식논의를 통해 추진된 것이 아니라 비밀특사를 통한 비공식적 접촉이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金九는 1944년 3월 무렵부터 연안과의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1944년 3월에 金學武를 통하여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10월 초에야 김두봉에게 전해졌다. 金九는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락과 통일을 위하여 老身이 일차 연안으로 가면 中韓 양 방면이 환영할 가망이 있겠는지?〉라고 물었고, 10월16일에 쓴 답장에서 김두봉은 〈여기에 대하여 우리가 성심으로 환영할 뿐 아니라 중국 방면에서도 물론 환영합니다〉라 회답했다. 또한 〈지역과 남북과 파벌이 다름을 불문하고 성심 단결하고, 서로 연락을 취하여 압록강에서 군대를 모이게 하는 일을 실현시킬 수 있다면 내가 나서서 알선해 보겠습니다〉고 하여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국내진공을 위한 연대를 제안했다. 김두봉은 이때에 같은 내용의 편지를 중경에 있는 다른 단체 앞으로도 보냈다고 한다.60)
金九가 연안에 파견한 김학무는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서 金九의 추천으로 1934년 2월에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金九진영을 이탈하여 1935년에 공산주의 비밀단체인 혁명동지회에 참여했다가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했다. 1941년에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할 때에 연안으로 갔던 김학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다시 중경으로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의용군 간부였던 金剛의 증언에 따르면, 김학무가 중경으로 金九를 찾아가서 자신들을 지도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金九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가 해방 직전에야 그에 대한 응답으로 張建相을 연안에 파견했다는 것이다.61)
金九가 국무위원 장건상을 연안으로 파견한 것은 1945년 4월 초 무렵이었다. 장건상은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원된 다음날인 4월12일자로 장기 휴가원을 제출하고 있다.62)
한편 김원봉도 연안 독립동맹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그는 독립동맹에 비밀편지를 보내어 임시의정원 회의 기간에 독립동맹이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63)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는 국내와의 연락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국내정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임시정부는 국내항일운동세력과의 조직적인 연대를 추진하지는 못하고 몇 차례 개별적으로 국내공작원을 파견하여 국내와의 연락을 시도하는 데 그쳤다. 대표적인 사례가 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에 근무하던 白昌燮의 경우였다. 백창섭은 조소앙, 신익희, 홍진 등의 개별적인 승낙을 받고 광복군 제3지대를 거쳐 국내에 잠입했다. 그러나 金九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거나 임시정부의 정식명령으로 파견된 것은 아니었다.64)
이와는 별도로 임시정부 외무부는 1945년 초에 李忠模를 서북특파원에 임명하여 먼저 서안, 蘭州, 靑海, 迪化 등지를 거쳐 중앙아시아 거류동포들과의 연락방법을 강구하도록 했다.65) 이충모는 1945년 1월2일에 寶鷄에 있는 일본군포로수용소에 잠입하여 한국인 포로들을 상대로 활동하다가 6월6일에 난주로 갔다.66)●
1) 太倫基, 「回想의 黃河」, 1975, 甲寅出版社, 211쪽 : 정용욱, 「태평양전쟁기 미국 전략공작국(OSS)의 한반도 공작」,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4집, 2006, 백범학술원, 67쪽. 2) 李範奭, 「光復軍」, 「新東亞」 1969년 4월호, 198쪽. 李範奭은 자신과 긴밀히 연락한 OSS 장교가 「칼튼 크라이더」 대위였다고 적고 있으나, 그가 중국에서 대학교수를 지냈고, 중국말을 잘하고 한국 사정에 밝았다는 것으로 보아 사전트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3) 「한국에 대한 비밀첩보침투를 위한 독수리작전 보고서」(1945.2.24),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2) 한국광복군Ⅲ」, 2006, 국사편찬위원회, 119~121쪽.
4) 金祐銓, 「韓國光復軍과 美國 OSS의 共同作戰에 관한 硏究」, 朴永錫敎授華甲紀念論叢刊行委員會,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1992, 探求堂, 1488~1489쪽. 5) 金學奎, 「白波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601쪽 ; 金祐銓, 「光復軍日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집, 198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674쪽. 6) 金祐銓, 「光復軍日記」, 677쪽 ; 金祐銓, 「韓國光復軍과 美國 OSS의 共同作戰에 관한 硏究」, 1491~1497쪽. 7) 金祐銓, 「韓國光復軍과 美國 OSS의 共同作戰에 관한 硏究」, 1497쪽 ; 韓詩俊, 「韓國光復軍硏究」 1993, 一潮閣, 211쪽. 8)정병준, 「해제」,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2) 한국광복군Ⅲ」, ⅩⅩ쪽. 9)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活動硏究――美 戰略諜報局(OSS)과의 合作訓練을 중심으로」, 東國大博士學位論文, 1999,, 56쪽. 10) 李範奭, 앞의 글, 199쪽. 11) 「한국에 대한 비밀첩보침투를 위한 독수리작전 보고서」(1945.2.24),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2) 한국광복군Ⅲ」, 105~126쪽. 12)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活動硏究」, 1999, 56~57쪽.
13) 「사전트 비망록」(1945.4.1),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2) 한국광복군Ⅲ」, 147~149쪽. 14) 「백범일지」, 406쪽; 金祐銓, 「光復軍日記」, 686쪽. 15) 정정화, 「녹두꽃」, 1987, 未完, 201쪽. 16) 「국외항일운동유적지(지)실태조사보고서Ⅰ」, 2002, 문화관광부·독립기념관·한국근현대사학회, 412쪽. 17) 「사전트 비망록」(1945.4.3),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2) 한국광복군Ⅲ」, 149쪽. 18) 「사전트 비망록」(1945.4.3),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2) 한국광복군Ⅲ」, 149~150쪽.
19) 金俊燁, 「長征(2) 나의 光復軍時節(下)」, 1989, 나남, 448~473쪽. 20) 金俊燁, 위의 책, 482~483쪽. 21) 金俊燁, 앞의 책, 477~482쪽. 22) 「사전트 비망록」(1945.4.3),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2) 한국광복군Ⅲ」, 151쪽. 23) 張俊河, 「돌베개」, 1971, 禾多出版社, 325쪽 ; 金俊燁, 앞의 책, 482~483쪽. 24) 「임시정부대표의 미군사령부 방문과 관련한 문서」(1945.4.11),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2) 한국광복군Ⅲ」, 156쪽. 25) 「대한민국임시정부대표단의 방문」(1945.4.17),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2) 한국광복군Ⅲ」, 173~176쪽. 26) 「사전트 비망록」(1945.4.3),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2) 한국광복군Ⅲ」, 150쪽. 27) Clarence N. Weems, “American-Korean Coorperation(1941~1945), Why Was IT So Little So Late?”, p.38,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活動硏究」, 131쪽에서 再引用.
28) 「金若山과 延安과의 關係」(1945.1.15),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2)」, 1972, 延世大出版部, 239쪽. 29) 朴英晩, 「光復軍(運命篇)」(上), 協同出版社, 114~115쪽. 30) Rhee to Grew, Feb. 5,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ol.Ⅵ.,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1002. 31) Dunn to Hurley, Feb. 20, 1945, FRUS, 1945, vol.Ⅵ., pp.1022~1023.
32) Thomas N. Moon & Carl F.Eifler, The Deadliest Colonel, Vantage Press, 1975, p.224. 33) THE NAPKO PROJECT: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Field Experimental Unit”, Mar. 30, 1945,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2) 臨政篇 Ⅶ」, 423쪽. 34) Thomas N. Moon & Carl F. Eifler, op. cit., p.221.
35) 鄭秉峻, 「解題」, 「NAPKO PROJECT of OSS-―재미한인의 조국정진계획 :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資料(ⅩⅩⅣ), 美洲篇⑥」, 2001, 國家報勳處, 17쪽. 36) 朴順東, 「侮蔑의 時代」, 「新東亞」, 1965년 9월호, 374~379쪽. 37) Atcheson to Stettinius, Mar. 1, 1945, FRUS, 1945, vol.Ⅵ., p.1024. 38) SWNCC 115, Apr. 23, 1945. 39) SWNCC 115/1, May 31, 1945. 40) SWNCC 115/2, June 4, 1945.
41) Rober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 A Personal Narrative, Panmun Book Company, 1978, pp.11~12. 42) Rober T. Oliver, Syngman Rhee――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 Company, 1960. p.209. 43) 金光載, 「韓國光復軍의 活動硏究」, 1999, 109쪽. 44) 「臨時議政院會議 第38回」,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2005, 국사편찬위원회, 12쪽. 45) 「臨時議政院會議 第38回」,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13쪽.
46) 「臨時議政院會議 第38回」,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38~39쪽, 42~47쪽. 47) 「臨時議政院會議 第38回」,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40~41쪽. 48) 裵慶植, 「중경시기 ‘반한독당세력’의 임시정부개조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상)」, 1999, 國家報勳處, 650~657쪽. 49) 「創黨에 關한 消息과 內部實情」(1945.4.1),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2)」, 191쪽. 50) 「議政院의 最近動態」(1945.5.22), 「臨政法務次長의 發言」(1945.5.15),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1)」, 358쪽, 403쪽.
51) 이주천, 「루즈벨트의 친소정책 1933~1945」, 1998, 신서원, 284~285쪽. 52) 「新韓民主黨創立宣言」,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2)」, 187쪽. 53)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57~58쪽, 67~68쪽, 132쪽. 54)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115~120쪽. 55) 「臨時議政院會議 第38回」,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108쪽. 56) 「臨時議政院會議 第38回」,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107~111쪽.
57) 「臨時議政院會議 第38回」,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102~104쪽, 124쪽. 58) 「臨時議政院會議 第38回」,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102~107쪽. 59) 「臨時議政院會議 弟38回」,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126쪽. 60) 「金九·金奎植이 金枓奉에게 보낸 1948년 2월16일자 편지」,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 「白凡金九全集(8)」, 1999, 대한매일신보사, 722~723쪽. 61) 염인호,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 2001, 나남출판, 224~225쪽. 6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21쪽. 63) 「韓人의 最近動態」(1945.3.7),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2)」, 81쪽. 64) 「백창섭」,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Ⅱ」, 2002, 국가보훈처, 203~228쪽; 박진희, 「해방 직후 정치공작대의 조직과 활동」, 「역사와 현실」 제21호, 1996 참조. 65) 「韓人의 最近動態」(1945.3.7),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2)」, 80쪽. 66) 太倫基, 앞의 책, 153쪽, 2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