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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드라마이지만
이를 통해 당시의 중국인이 인식하던 당시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짐작 해볼수 있다.
(처음에 나오는 노란옷 걸친사람이 고려의 황태자임. 옷 양쪽 가슴 부위에 어설픈 태극마크ㅋ)
(소년 포청천) 드라마 내용:
송나라에 온 고려 태자가 마음대로 행패를 부리고
심지어 송나라 여자를 겁탈하지만 중국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대장금에서 깽판 치는 명나라 사신이 생각나지 안나요?)
고려 태자의 암살기도가 있자 고려 태자는 송의 대신에게 3일안에
범인을 못잡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송 황제에게 한소리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있다.
연회자리 에서는 송나라가 고려보다 못한나라라고 깔보고 무시한다.
고려 태자가 송에서 암살당하자, 송 조정은 고려가 처들어올것을 두려워하여 대립하는데
송 황제는 주화파와 주전파 사이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또한 고려임금을 고려황제라 부르고있는데 이는 고려를 동등한 자주국으로 인정하는것이며
위의 장면들만 보면 고려가 송나라의 상전이면 상전이지 도저히 하위국 이라고 볼수없다.
사극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철저하게 역사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이야기가 만들어 지는 것이 바로 사극이다.
저 드라마의 중국인 작가는 과연 어떠한 역사 기록을 근거로 저 장면들을 만들어 냈을까?
그때 당시의 중국 기록으로 확인해 봅시다. 『송사-외국열전』
○[희녕(熙寧)] 7년(A.D.1074; 高麗 文宗 28)
군(郡)·현(縣)에서 [고려(高麗)의 사신을] 접대하는 옛 준례가 없어 백성들이 퍽 괴로웠는데,
규정을 만들어 반포(頒布)하고, 비용은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註211]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고려(高麗)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케 하였으니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1074 년이면 고려의 황금기라 일컫는 문종의 재위기간 중이다.
고려사신 접대하느라 송나라 백성들이 괴롭고 고려가
50년동안 송나라를 매우 힘들게 하였다고 한다.
○정화(政和) 연간(A.D.1111~1117; 高麗 睿宗 6~12) 에
고려(高麗)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註203] 예우(禮遇)가 서하국(西夏國)보다 위에 있었고,
요(遼)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으며,
인반관(引伴官)· 압반관(押伴官) 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심지어는 예모전(睿謨殿) 안에서 고려(高麗) 사신을 위하여 연회(宴會)까지 베풀었다.[註205]
-▶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기록에서
송나라는 오히려 고려를 더욱더 극진히 대우한다..
마침내 1129년 . 금이 발호하자,
고려가 뒤에서 금과 손잡을 것을 걱정하던 송 황제는 급기야 조서를 내리는데..
○ 건염(建炎)] 3년(A.D.1129)
고려(高麗) 사신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금(金)나라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마침내 조서(詔書)를 내려 [고려(高麗) 사신이 오지 못하도록] 중지시켰다.
그 조서(詔書)는 대략 다음과 같다.
▷▷ 짐(朕)의 만년에 실로 변고가 많아 온 중국의 백성들이 강적인 [금(金)나라의] 침입을 받았소.
그들은 이미 국경을 깊숙이 짓밟고서도 병사를 일으켜 침입을 중지하지 않고 있어 장위(仗衛)를 잠시 강호(江湖)로 이주(移駐)시켰소.
[註223]
만약 이 때에 고려 사신이 정말 온다면 관원(官員)이 [그 신변을] 경호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우니 변방의 난리가 그침을 기다려 방문(聘問)할 시기를 묻겠소.
☞ ㅋㅋㅋ 그렇게 뜯기고도 송의 황제가 고작 한다는소리가
'이 난리통에 오시면 고려사신님 들의 신변의 경호가 염려스러우니
이해해 주세요..' 라는 내용이다.
송나라가 고려의 사신에 신경쓰는 애절함이 참 안스러울 정도다.
반면, 고려측 기록.
『고려사』-문종 12년
하물며 우리나라에는 문물(文物)?예악(禮樂)이 행한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므로,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 고려의 문물이 발달하여 중국과 교역할 필요가 없다는것이다.
고려의 이런 자부심은 고려 중기 사람 진화가
금나라 사신으로 가는 길에 지은 시 -봉사입금(奉使入金)- 에서도 보인다.
☞ 서쪽 즉 중원(중국)을 지는 해로, 북쪽(몽골,여진 등)은 어두우며
동쪽에 태양(고려)이 솟아오른다는 당찬 자부심이 보인다.
(고려인은 당시 고려 황제를 해동천자,신성제왕 등으로 부를 만큼 신성시 하였고
천자국, 즉 고려가 천하의 중심국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 시기의 금석문들에 남겨진 고려 황제의 칭호들
황제폐하(皇帝陛下)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우리 황제폐하(皇帝陛下)께서도 지극하신 정의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
금상황제(今上皇帝)의 만세를 기원합니다.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977년)
엎드려 황제폐하(皇帝陛下)의 덕이 하늘과 땅에 떨치고..
보현사석탑(1044년)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부석사원융국사비(1053년)
황상(皇上)께서 천조(踐祚)에 오르시던 병술년 봄 정월에 이르러..
칠장사혜소국사비(1060년)
성황(聖皇)께서 국척 원신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이자연묘지명(1061년)
무릇 우리 황(皇)의 아들들은 모두 공의 생질이 되니...태자(儲皇)와 후비, 친왕 등에 이르러서는..
이정묘지명(1077년)
공이 황후(皇后)의 인척이므로 더욱 총애하여..황후(皇后)가 안에서 공을 불러..
최계방묘지명(1117년)
5남 응추는 황자(皇子)인 극세승통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이식묘지명(1156년)
태자(儲皇) 역시 그 아름답고 고움을 슬피 여겨 특별히 제물을 내리고 각별히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왕영녀왕씨묘지명(1186년)
때는 황상(皇上)께서 즉위하신 원년 모월 모일이다.
개천사석탑(1214년)
황태제(皇太弟)가 바로 신종(神宗)이다.
최충헌묘지명(1219년)
::금석문에 기록된 칭제기록만 보더라도 당시 고려인들은
고려 임금을 천자. 즉 황제로 인식하고있음을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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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떠 어떠한 역사를 다 알지 못하니.. 이런사실을 알게되면 좀 놀랍네요
현재는 (애써)비하의 의미로 쓰고 있는듯하지만, 아직도 고려몽둥이 라는 말을 잊지 못하고 있으니까요ㅋㅋㅋ 얼마나 처맞았길래 그러나 했더니ㅋㅋㅋ
딱..제가 하고싶엇던 말이네요
까오리방즈..방망이로
졸라쳐 맞앗으니 두려움의 대상
저기....그거는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서 근무 하는 조선인들은 총을 주면 위험해 질수 있다고 일제놈들이 총대신 몽둥이를 주면서
중국인들은 우리를 고려인이라 불렀으니깐... 몽둥이 들고있는 고려인이라고 부르면서..시작된건데...오래전 일이 아니라..
아~~ 그런의미군요 ㅎㅎㅎ
제가 알기로... 고려는 강한 무예국으로써, 중국도 두려워 햇던걸로 압니다...
당시 송나라는 북방의 요 제국에게 엄청 두들겨 맞고 거의 속국 처럼 빌빌 대고 있었는데
3차례의 요 제국 과의 싸움에서 고려가 결국 승리 하자 송은 고려를 완전히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송나라는 고려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제가 아는 후배중에 역사를 전공한 녀석이 있었는데, 술만 취하면 항상 고려에 대해 얘기를 했죠. 대륙의 땅 일부도 고려의 실질적인 영역이었고, 군사력으로는 동아시아 최고라는 등등...벌써 10년전 일인데, 이 글을 보니 생각 나네요.
고려 문종이라면 조선으로 치면 세종대왕님의 시대와 같이 황금기인데 그때가 고려의 국력이 이정도로 강력했던건가...물론 요에 비하면 송나라가 약한편이긴한데 이정도까지 였나...결론은 송나라가 제일 약했던 시기고 고려가 제일 강력했던 시기인건가...
와우 흥미롭네요 ㄷㄷ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러면서도 대원제국이 유일하게 어떻게 하지 못하고 외형상으로 자주국가로 내버려둔 유일한 나라가 고려입니다... 자신의 막내딸을 고려 세자와 혼인시켜서 고려를 원나라편에 붙들여드려고 했었죠.. 충렬왕의 아들 충숙왕은 쿠빌라이의 외손자였고요...
송나라가 금나라에 밀려서 남송을 자처할때 겨우겨우 나라 명맥만 유지하던 시절이 있었죠. 중화 역사상 최약체 국가 송나라때 고려가 송나라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기도 하고, 도와달라는 송나라의 애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우리의 이득을 챙겼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때가 고려죠. 그리고 그러한 자주성과 당당함은 조선시대의 개막과 함께 흐려지면서 부터 세종대왕시대부터 완전히 사대로 기울어졌습니다. 자주성과 자존감이 강했던 훈구파가 밀려나면서
부터죠. 세종대왕은 물론 제가 존경하는 왕이시기는 하나 사대에 있어서는 신하들이 말릴 정도로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오죽하면 명나라 사신들에게 바치는 기생을 자제 좀 하라는 상소에(기생도 우리나라 여인이니 보호해주어야한다며), 기생은 귀한 것이 아니니 그냥 명나라 뜻대로 하라며... 내가 명나라에 충성하는것만큼 너희 신하들도 나에게 충성 좀 하라며 ... 그러셨죠....
몰랐던 사실이네요. 그럼에도 천문대를 설치하고 글자를 만든다는건 사대주의와는 반대되는 발상이죠. 그리고 세종대때 국방력이 강하여 남북으로 치고 외족들을 신하로 삼는데 명은 이것을 경계한것으로 압니다. 사대에 어긋남이 없는듯 보이지만 실지로는 자주적으로 발전시킨 시대였죠. 조선의 체제자체가 명을 섬기는 나라였으니 현실적인 한계는 어쩔수없었던것 같습니다.
고구려 장수왕때는 중원에서 밀려난 왕이 망명온 것을 받아준 적도 있었고요. 우리 역사가 사대성이 짙었던 때는 조선중기 이후부터입니다. 송나라가 벌벌떨던 금나라 성종은 국경수비대에 "고려애들은 성질이 고약하니까 왠만하면 국경지대에서 충돌하지말라"고 엄명을 내리기도 했었죠.
엄밀히 보면 사대하던것은 신라에 유입된 유학과 당의 영향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세력이 켜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지속되다, 고려중기에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를 봐도 당시 사대주의의 모습을 확인할수 있지요. 이런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자주주의자들도 함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것이 원의 간섭기때 균형이 깨지면서 유학사대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릴수있게되었고, 그 기세가 꺽이지 않고 조선이란 철저한 사대국가를 만들어 세력을 장악한뒤 점점더 공고히 사대주의를 심화시켰던것 같습니다.
김부식은 엄밀히 말해서 사대주의자가 아닙니다 대놓고 당 태종이 소인배라고 욕하고 있고요 김부식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스페셜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매우 주체적인 시각에서 삼국사기를 집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입니다.
고구려의 기상을 이은 고려답습니다. 원의 침입으로 꺽였지만요.
지금도 친일친미 사대주의가 판치는데 옛날 이야기 하며 누가 잘했네 못했네 논할게 아니라..
지금 당장부터라도 바로 잡아야죠...
가장 한심한때는 지금이라고 봅니다...
그랬구나...몰랐던 사실..
조선시대 원삼 족두리를 입혀놓고 고려국 공주라니.....ㅋㅋ
사실 원삼 족두리는 원의 영향인데...몽고풍이라 하죠. 몽고풍은 고려말기에나 들어 왔으니 역사고증이 잘 못 된 듯 싶습니다.
송원 교체기때 송나라 말씀하시나? 그때는 머 사실상 군사력이라고 할만한것도 없죠 송나라가 변방뿐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분열이 심할때라 지금은 중국한테 먹힌 거란족이 득세하고 나중에는 말갈로불리던 여진족이 세운금나라한테 거란이 다시 먹히는 요상한 형국이라 고려로써는 눈치보면서 강약조절할때지요 당시 서희등 좋은 외교관이 많은것도 눈에 띄지요 하지만 우리가 일본싫어하지만 사실상 경제력에서 일본에게 안되듯 중국에게 전면적으로 해보자는 식으로 덤빈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됩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개긴적은 있지만 내부적으로 결속을 다지기위해 또는 훌륭한 자주사상가들에 의해 큰소리를 쳣겟지만.....
송나라가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문약한 나라였습니다. 송나라를 세운 인물이 당 말기 절도사(군벌)였기 때문에,
자기가 한 짓(역모)를 절도사가 또다시 되풀이 할 것을 두려워하여 절도사들을 모두 문관으로 대체해 버립니다.
때문에 변방이 약해지고, 외적이 침입하면 그냥 조공을 바치고 타협하는 쪽으로 하다보니까 주변국들한테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반면에 고려는 저때까지만 해도 사대주의가 없었습니다. 신채호 선생이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제압하면서부터 자주적인 풍토가 무너지고 사대주의가 싹텄다고 했는데
조선이 명나라에 조공한 것과 비교하면 그래도 훨씬 자주적인 외교였죠.
근데 저기 보면 고려사 부분에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에 "중국"이라는 국호는 존재하지 않았음. 만약 저기에 '송'이라고 되어있지 않고 '중국'이라고 되어 있었다면, '중국'은 내륙지역 정도로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중국 이라는 국호는 없었어도 오래 전부터 중원을 중국이라 칭하며 역사서에 적었습니다.
중원을 중국이라??? 그 근거는? 그냥 후세에 추정한 것일 뿐.. 그리고 그 중원이라는게.. 멀 의미하는지는 해석의 문제
훈민정음에도 보면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어쩌고 저쩌고.... 당시 '중국'이라는 국호는 존재하지 않았음. '중국'은 1940년대 말에 만들어진 '중화인민공화국'의 줄임말일 뿐임....
조선 초기라면 '명'이라고 했어야 했음. 아님 '대국' 정도... '중국'이라는 표현은 다른걸 지칭하는게 아닐까?
나는몰랐네...고려가 칭제건원한건알았지만 이리대단한 나란줄 이제야 알았네 부끄럽고 기쁘기 그지없다네^^
고려는 스스로를 마고의 나라라고 불렀으며, 불교국가로 공식적으로는 채식주의의 국가였습니다
(일본도 메이지 시대전까지는 채식이였다가 고기를 종용하면서 돈까스가 생겼지요)
조선으로만 국한된듯한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찾으려면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맥으로써 고려에 대해 친밀할 필요가 있는듯 안타까운 면이 있지요
이걸 보니,, 문을 숭상하던 중국의 송나라와 역시 문을 숭상하던 조선이 같군요.. 문은 무보다 강하다지만,, 문만 숭상하면,, 주변국들에게 개털리고,, 박해받을 수 밖에 없고, 빌빌 기어야 된다는 송나라=조선=대한민국 다 마찬가지 호구나라들..
근데도 왜 우린 정작 우리 드라마,영화에선 맨날 핍박받고 침략당하는 것만 보여주는지 몰겠어요.그걸보는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뭐라고 생각할까요. 아무래도 조선시대에 말아먹은 영향이 큰듯.
ㅋㅋㅋㅋㅋ 소동파가 고려 엄청나게 까댔죠 저넘들 오만방자하다고
유학이 사대주의와 연관시키는것이 요즘 시각인듯하군요. 조선도 고려만큼 엄청나게 휼륭한 나라인데. 이리저리까이네요. ㅋㅋ 과연 요즘 사람들이 꽉막힌 골수 유학자들보다 더 순수하다 볼수있는가. 전쟁일어나면 과연. 갑짜기 마이너 성향이 확올라오네요.
고려의 병사수는 조선의 병사수보다 훨씬 많았다고 하더군요. 물론 귀족들의 권한이 강력하고 귀족들이 자기 병사를 키울 수 있는 고려이기에 가능했지만요.
거란군 수십만을 괴멸 시킨
고려초는 7세기 고구려초와 맞먹을 정도 입니다
예전에 국사시간에 배운게 생각나네요. 고려와 송의 관계에서 고려는 군사, 송은 문화...
이런것보면 한국사도 구라가 많이 껴있는기분.. 중국도 인정하는 고려를 정작 우린 모르고 있었으니
민주적으로 추대된 왕과 쿠데타를 일으키고 스스로 왕이라고 추켜세우는 놈하고는 차이가 나지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상황은 같지 않나 싶군요. 잘 읽고 봤습니다.
울 나라 사극 만드는 PD나 작가들이 사대주의에 빠져 있는지 한심하죠.
역사 공부를 제대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빌어봅니다.
우리나라 사극의 중국사신들 대하는 모습하고 완전 똑같이 딱반대로 우리사극에서 그리고 있네...
그건 일본놈들이 가르친 역사대로 실행해서인가? 식민사관교육으로?...
제가 공부를 잘안햇던건가요? 아니면 조선시대의 패배의식이 팽배한걸까요..왠지 뿌듯한 역사를 알게되어서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해방 후 바로 독립하지 못하고 미군정이 이뤄졌고 미군정에서 일제시대 부역하던 인간들을 그대로 유지시켜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친일파들이 고스란히 이 나라 집권세력으로 남았죠. 특히 한국사 분야에서 식민사관에 찌든 학자들이 대대로 제자들을 식민사관으로 가르쳐 아직까지도 말 안 되는 부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친일파의 효시인 김옥균이 일본극우의 사주에 의해 국가전복을 시도하다 실패한 사건인 갑신정변을 아직까지도 개화를 위한 긍정적인 사건으로 가르침. 정작 우리 주도로 개화를 주도하던 젊은 브레인 민영익을 죽였고 진짜 개화파인 고종이 주도하던 개화시도가 폐기위기에 몰렸는데 개화파는 개뿔... 김옥균은 일본군과 함께 철수해 일본 가서 기모노 입고 일본인 행세하며 살다 고종이 파견한 홍종우에 의해 중국에서 사살됐는데.. 고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찬탈해 일제시대를 26년이나 앞당기려 했던 놈을 개화파라 칭송해주다니...ㅠㅠㅠ 진짜 개화파는 고종입니다. 일본보다도 우리가 3년이나 먼저 전기와 전차를 놓았어요.
지난주 방영한 "조선총독부 최후의 25일"이란 8.15특집다큐에서 어떻게 해서 일본인들에 의한 통치체제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나를 다뤘는데 정말 충격적이더군요. 못 보신 분들은 한 번 꼭 보세요. 8월 15일에 해방돼 일본놈들은 그 날로 다 쫓겨난 줄 알고 있었는데 조선총독부는 계속 버티면서 뒤로는 미군을 꼬드겨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 있으니 일본의 통치체계가 유지돼야 한다'고 설득해 미군으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답변을 얻고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가짜 돈을 공수해 와 일본군 및 일본인 철수자금으로 풀어 물자와 교환해 하나도 손해 안 보고 다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일본군은 9월 넘어서야 철수.
우리나라 역사를 중국이 왜곡시키고 일제시대 때 일본이 왜곡 시킨 겁니다 지금도 뉴라이트(친일파)가 쓴 교학사출판 역사책을 쓴것이 국정 교과서가 된다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그 책으로 입시 필수 과목으로한다니 매국노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거 보다 고려는 더 대단한 나라였던거 같습니다.
한반도의 소국 말로만 황제국이 아닌 실제로 강대한 제국이었던거 같습니다.
중국인들은 우리의 역사를 알고 있겠죠..
일본도 그럴것이구요.
우리만 우리의 역사를 모를뿐...
그것이 너무 안타깝네요
고려는 유라시아를 석패한 대황제국이 확실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