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나무들-55] 하늘과 바람과 별을 따라 몸을 바꾸는 나무들
[2009. 7. 3]
하늘과 바람과 별을 가슴에 품고 시(詩)를 쓴 사내 윤동주처럼 나무는 하늘과 바람과 별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평화의 생명체입니다. 하늘을 향해 바람을 향해 나무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나무는 제 살 곳을 찾아 머무르고, 자기만의 삶의 방식으로 직수굿이 살아가지요. 윤동주의 시가 그런 것처럼 나무가 아름다운 건 그런 평화 때문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이 아름다운 건 사람의 우격다짐으로 지어낸 치장이 아니라, 오랫동안 자연에 동화되어 살면서 나무들 스스로 얻어낸 평화가 살아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관람객들이 크게 늘어, 그 분들의 다양한 요구에 맞추느라, 수목원의 색깔을 다양하게 한 흔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천리포수목원이 가꿔온 자연의 평화와 아름다움은 오롯이 살아있습니다.
그 평화의 땅 천리포수목원의 명물 가운데에 삼색참죽나무(Toona sinensis 'Flamingo')라는 기발할 만큼 독특한 나무가 있습니다. 경내 여러 곳에 몇 그루씩 나눠 심어 가꾸는 명물 나무이지요. 큰연못 가장자리에 낸 길가,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쓰고 있는 측백나무집 앞 오솔길, 캐나다박태기나무가 서있는 큰밭, 잎사귀에 무늬를 가진 식물들을 모아놓은 반엽식물원에 서있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의 기발함을 보려면 시간을 길게 잡고 봄부터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한번에 이 나무의 멋을 알아채기는 어렵고, 여러 차례 찾아가 보아야만 이 나무가 왜 명물로 여겨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적당한 시간의 차이를 두고, 나무가 보여주는 변화가 놀랍기 때문이지요. 마술은 마술이지만, 사람의 마술처럼 순식간에 일어나는 둔갑술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벌이는 자연의 마술인 겁니다.
그야말로 하늘과 바람과 별을 가슴에 품은 듯, 하늘과 바람과 별의 변화에 따라 서서히 변화하는 이 나무의 모습은 참 놀랍습니다. 잎 나는 때의 모습부터 그러합니다. 잎 나기 전까지 이 나무는 볼품 없는 나무에 속합니다. 줄기 하나가 기다랗게 솟았는데, 중간에 옆으로 난 가지 하나 없이 삐죽한 모습이 생뚱맞아 보입니다.
그나마 눈에 뜨이는 것은 이 나무의 줄기에 밝은 회색 빛이 돈다는 것 정도입니다. 줄기 색이 밝아서 잎 나기 전부터 눈에 잘 뜨이는 건 사실입니다만 그밖에는 특별한 게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나 천리포수목원의 동백이나 목련들이 화려한 꽃을 다 피우고 서서히 꽃잎 떨굴 즈음이면, 이 나무가 드디어 마술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잎이 나는 거죠. 새 잎의 색깔이 바로 위의 사진들에서 보시듯이 선명한 빨간 색입니다. 잎사귀를 달고 있는 잎자루에도 붉은 빛이 선명합니다. 살짝 돋아난 새 잎은 정말 붉습니다. 그렇게 새로 난 붉은 빛의 잎사귀들은 보름 정도 잎사귀를 키우며 제 색깔을 유지합니다. 전체적으로 붉은 잎을 달고 선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나무이긴 합니다만, 이건 그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두고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의 새빨간 빛은 차츰 옅어지면서 보랏빛 혹은 짙은 분홍빛을 띠면서 아주 약간의 변화를 보입니다. 처음으로 잎이 날 때인 5월 초하루의 사진의 짙은 붉은 색은, 열흘 쯤 지난 오월 십일 사진에서 보랏빛으로 붉은 기운이 조금은 옅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닙니다. 잎이 나서 보름에서 스무 날 정도 지나면 잎의 색깔은 본격적으로 바뀝니다.
오월 이십육일에 찍은 넷째 사진에서는 붉은 기운이 눈에 띄게 옅어진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의 조짐을 보이던 붉은 잎사귀는 난데없이 노란 색으로 빛을 바꿉니다. 바로 위의 사진이 그렇게 바뀐 색깔입니다. 넷째 사진과 같은 날 찍은 사진이지만, 이 사진은 반엽식물원의 삼색참죽나무로, 좀더 서둘러 마술을 부린 겁니다.
그 변화가 참으로 극적입니다. 짐작하기 어려웠던 색깔로 잎사귀의 색깔을 바꾼 겁니다. 다시 보름 넘게 잎사귀에는 그 노란 색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다가 하늘 빛 짙어지고, 햇살 따뜻해지며 봄 지나가는 소리 들려오면, 나무는 한번 더 변신을 시도합니다. 이번에는 여느 나무들의 잎사귀와 같은 색깔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초록색입니다. 빨간 색에서 분홍 빛을 거쳐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노란 색이었다가, 이제는 평범한 초록빛이 되는 겁니다.
한 달 하고도 보름 정도를 더 지내며 서서히 연출해낸 나무의 마술입니다. 이 사진이 초록 빛으로 옷을 바꿔 입은 삼색참죽나무의 모습입니다만, 아직은 노란 색 기운이 조금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지나면, 노란 색은 다 사라지고, 짙은 초록 색 잎이 됩니다. 물론 붉은 잎을 달았을 때가 가장 독특하지만, 그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건 신비로운 경험이 될 겁니다.
이 나무는 우리 천리포수목원의 명물 가운데에도 대표급 명물입니다. 이 나무의 신비로운 마술을 볼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에서는 천리포수목원 밖에 없다는 것도 특이한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 식물원에서도 이 나무를 가져다 키우는 곳이 몇 곳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천리포에서처럼 잎사귀 색깔의 선명한 변화를 볼 수 없습니다. 충청남도 태안의 천리포 지역의 하늘, 그 바람, 그 별이 이 나무의 마술을 가능하게 하는 힘인 겁니다.
내내 수목원 식물들의 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다가 오늘은 잎사귀가 보여주는 신비로운 마술을 보여드립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식물의 잎사귀들에는 꽃 못지 않은 멋이 있습니다. 물론 꽃은 한해 한번씩 피어나니, 눈길이 먼저 가기는 합니다만, 관찰하면 할수록 식물의 잎사귀에도 꽃 못지 않은 오묘한 멋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위 사진은 제가 ‘실핏줄 단풍’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나무의 잎사귀입니다. 실제 이 나무의 학술적 이름은 Acer palmatum 'Shigitatsu-sawa' 라는 나무입니다. 잎사귀의 생김새에서 알 수 있듯이 단풍나무의 한 종류입니다. 우리는 흔히 단풍나무 이야기하면, 가을에 붉게 물들었을 때를 먼저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아가 손처럼 예쁜 잎사귀에 단풍 든 모습이 더 없이 아름답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단풍이 들지 않고서도 예쁜 단풍나무가 있습니다. 하기야 ‘홍단풍’이라고 해서 봄에 처음 나는 잎부터 붉은 단풍나무가 있긴 합니다만, 이 나무의 잎은 붉어서 예쁜 게 아닙니다. 햇살이 그대로 스며들 만큼 얇은 잎사귀에 선명하게 돋아난 잎맥이 예쁜 겁니다. 단풍 들지 않아도 실핏줄이 드러난 맑고 투명한 아기 피부처럼 연약한 잎사귀가 그대로 느껴져 더없이 다정한 느낌을 주는 나무입니다.
우리 수목원의 큰밭, 실육카 길 옆에 서있는 나무인데, 혹시라도 이 길을 거닐게 되신다면, 꼭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스쳐지나지 마시고, 나무 앞에 서서 잠시 숨을 멈추고는 나무 아래 쪽으로 몸을 낮춘 뒤, 고개를 들어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세요. 나뭇잎에 새겨진 선명한 실핏줄이 아름답게 드러날 겁니다.
같은 단풍나무과에 속하는 나무 가운데 고로쇠나무가 있습니다. 봄 되면 뼈에 좋다며 물을 빼 먹는 나무이지요. 고로쇠나무 가운데에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울릉도의 옛 이름인 우산국을 따서 우산고로쇠(Acer okamotoanum) 로 부르는 나무입니다. 고로쇠나무(Acer mono)와 비슷하지만, 고로쇠나무의 잎사귀가 5~7개로 갈라지는 것과 달리, 우산고로쇠는 그보다 많은 6~9개로 갈라진다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나무입니다.
우리 수목원의 우산고로쇠는 다른 큰키나무들 사이의 비교적 그늘진 곳에서 자라고 있는데, 큰 나무들 사이로 살짝 햇살이 비쳐들었습니다. 그늘일 때에는 그리 눈에 들어오지 않던 잎사귀였는데, 하늘과 바람과 햇살 머금은 우산고로쇠의 찬란한 잎사귀가 눈길을 사로잡네요.
나무 한 그루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나무는 돌아가신 우리 수목원 설립자 고 민병갈 님의 집무실 창가 앞에 서있는 층층나무입니다. 보시다시피 나무의 가지가 층층이 돋아나기 때문에 층층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겁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특히 잎사귀에 무늬가 있어서 더 독특해 보이는 나무입니다.
하늘을 따라, 바람을 따라, 햇살을 따라 신비롭게 마술을 펼치기도 하고, 제 몸을 한껏 펼쳐내기도 하는 식물들의 고요한 아우성이 참 고맙습니다. 사람의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숲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한없이 소중한 평화입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솔숲닷컴에서 받은 편지
첫댓글 몇년 전에 갔을 때는 슬렁슬렁 보고 왔는데....아쉽기만 하네요. 다시한번 간다면 책 펼쳐들고 꼼꼼하게 만나보고 올텐데....언제가 될지..
마음을 먹고 있으면 가게 될 날이 꼬옥 올 겁니다...............
이제야 찬찬히 다 읽어 봅니다. 삼색참죽나무...신기하고 예쁜데요. 아직 가보지 못한 천리포수목원도 조만간 꼭 가 보고 싶은 곳입니다.
천천히 여류롭게 꽃과 나무들 사이를 걸어다니면 무척 좋을 것 같아요. 바다에 접힌 곳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