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사회 여러 가지 문제의 중심엔 종교가 있다.
종교의 문제라면 그 중에서도 기독교를 빼놓을 수 없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가히 섬뜩하다.
이웃사랑을 가장 많이 부르짖는 기독교가
이웃을 향하여 가장 배타적이라는
이 역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배타성은 자신의 선과 진리는 참이지만,
타인의 그것은 거짓이고 마귀의 자식이라는,
지독한 이분법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잘못된 신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개인 혹은 성직자의 일탈과 상관없이 구조적인 문제라는 뜻이다.
현재의 기독교 신관 아래에서 배타성은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극복할 수 없다.
본질의 문제가 바뀌고 해결되어야 비로소 배타성은 뿌리채 뽑힐 수 있다.
기독교는 놀랍게도 자신들이 인정하건 안하건
창세기에 등장하는 뱀의 신관에 기초하고 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이는 뱀의 말이다.
뱀은 교리주의를 상징한다.
뱀은 일컫기를 하나님은 선악의 하나님이라고 규정한다.
은연중 기독교의 하나님은 권선징악의 하나님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악’이라는 사상이 팽배하다.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타인은 마귀의 자식이라는 사상,
예수 믿는 자신은 옳고, 그 외의 모든 것은 틀렸다는 것만 판을 친다.
자신의 하나님은 선하고,
그 외의 종교는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만 존재한다.
기독교의 선민의식은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선민의식은 천민의식에 다름 아니다.
기독교가 천박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 그들의 지독한 신관에서 비롯된다.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는 이 같은 기독교의 신을 항하여,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요, 마귀라고 선언한다.(요한복음 8장)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 이름은 하나님이고, 그 이름은 창조주이고, 그 이름은 구원자이고
그 이름은 번쩍번쩍 빛나는 금칠을 하고
인생의 전면에 나타나 지배권을 행사하려하지만,
살인자의 근원이고,
거짓의 창조자며,
마귀가 되어버렸다.
안타깝게도 기독교와 유사기독교의 신은 우상의 전형이 되어버렸다.
가장 지독한 우상이 되어 모든 인생들의 무릎을 꿇리고 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행태가 정치인들의 권모술수를
찜쪄먹고도 남을 만큼 부패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한기총회장 선거에 돈이 얼마 뿌려졌는지를 질타하려는 뜻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치부를 신의 축복이라고
그들의 신에게 두 손 들어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까닭이 나변에 있을까?
오늘날 판을 치고 있는 기독교의 신에 인생들은 총 궐기해야 한다.
그 신은 죽은 신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 신은 살인의 아비일 뿐이라고 고발해야 한다.
그같은 신은 거짓의 종결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하고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슬프게도 지독한 우상의 시대를 살고 있다.
거짓의 종결자를 넘어서는 곳에
예수의 길이 있고
예수의 믿음은 바로 그 같은 곳을 향해 있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빌어 예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길을 걷고 있다.
예수는 명의도용 당하고 있고 도적질 당하고 있다.
예수의 믿음과
예수의 길을 다시 찾자.
첫댓글 예수도 어차피 지독히 배타적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유대인 특유의 선민의식에서 벗어난 적도 없구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4 장 6 절 )
기독교의 배타성이란 곧 기독교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근간인 바이블부터가 배타성을 빼면 아무것도 안 남게 되는 문서입니다.
앙꼬 없는 찐빵 격이 되어버리죠.
결론적으로 기독교는 현대 사회와 공존할 수 없는 유일신교입니다.
마치 이슬람교나 유대교처럼 말이죠.
극복할 수없는 유해업소고 영혼을 갉아먹는 퇴폐업소라고 적대적으로만 대하면 해결가능할까요. 대척점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사람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는 근원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의 기반인 성서의 잘못된해독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고 그 밑뿌리부터 토론해보는 방법을 택했다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동의하지 않으실테지만...
@kai1 대척점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사람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니냐구요?
네,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을 하느냐 마느냐 여부를 놓고서 미국에서도 비슷한 류의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꽤 있었죠.
"아무리 추축국이 나쁜 놈들이라고서니 우리마저도 그들과 똑같이 무력을 동원하여 폭력으로 맞서 싸우면 우리도 그놈들과 똑같이 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현실 역사에서는 일본이 워낙에 크게 또라이짓을 벌이는 바람에 그런 목소리는 이내 쏙 들어갔지만요.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이블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그 유일신 신앙 자체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저는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꿈꾸는 알바트로스 유일신 신앙 자체에서 기인한 것에 동의합니다. 예수는 그를 부정합니다. 요한복음 8장을 찬찬히 읽어보시면 유대교를 철저히 부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교가 목숨걸고 유지하려는 유일신 신을 부정하고 도리어 그는 곧 '나'라고 해서 참람하다는 말을 듣고 결국 신성모독죄로 십자가형을 받습니다. 십자가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믿음을 굽히지 않았지요. 동학에서 인내천, 시천주와 큰 차이 없는 주장입니다. 이를 기독교인들은 또 다시 오해 예수를 하늘에 올려놓고 섬기는 우를 범하지요.
@kai1 야훼 신앙의 편협함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바득바득 변호하시려 드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예수가 욕 먹는 것이 싫으신 모양입니다.
예수가 유대교와 그 근간인 야훼신앙을 철저히 부정했다니 무슨 궤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 근거랍시고 인용하신 요한복음 8장 49절부터 59절까지를 읽어 보면 님이 말씀하신 바와 반대로 예수가 야훼 신앙의 열렬한 옹호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는 야훼에 대하여 전혀 나쁘게 말하고 있지 않으며 도리어 그의 권위를 전적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별것 아닌 예수가 야훼의 권위를 빌어 자신을 무슨 대단한 존재인 것 마냥 포장하는 현장이지요.
@kai1 그리고 어디서 동학을 끌어들여 예수를 변호하려 하십니까?
교주인 최제우가 지은 東學이라는 이름 그 자체가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 사상, 즉 西學을 배척하며 반대하여 들고 일어났다는 데에서 지어진 이름인데요? 즉 한마디로 말해 예수 추종하는 야소꾼들을 몰아내며 박살내자는 것이 동학의 기본 정신입니다. 어딜 봐서 동학이 유사 기독교 정도의 종교입니까? 기독교라면 치를 떠는 것이 동학의 창립 정신인데......
@kai1 실제 구한말 역사에서도 동학 교도들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조정으로부터 극심한 탄압과 핍박을 받고 있던 기독교도들을 상대로 자주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를테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도마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휘하에 거느린 천주교도 자경단이 백범 김구가 이끌던 동학군들을 맞이해 싸워서 동학 농민군들을 크게 무찌른 황해도 해주 전투라든가, 사료를 찾아보면 양 쪽의 무력 충돌은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이런데도 동학과 기독교를 비슷한 부류로 뭉뚱그리실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상이한 두 세력은 <적의 적은 나의 동지>란 식의 논리로 서로 손을 맞잡게 마련이나 동학과 기독교는 예외적으로
@kai1 조정에 둘 다 핍박받는 처지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는 견원지간이었습니다.
그만큼 양 쪽 모두 섞이기 힘든 물과 기름 같은 존재였다는 뜻이죠.
아마 님께서는 좌익 쪽의 해방신학 / 민중신학 내지는 예수를 피압박 민족의 구세주로 여기는 공상적 자유주의 신학 같은 부류를 주장하시려 하는 것 같습니다만 해방신학 같은 건 이미 오래 전에 한 물 간 사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더군다나 바이블을 근거로 정당성을 논한다면 논리적 비약을 한두 군데 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민중주의 신학이라는 게......
괜히 해방신학이 지구촌 어디에서도 뿌리를 못 내리는 게 아닙니다.
@꿈꾸는 알바트로스 크게 오해하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kai1 오해했다니요? 무엇을요?
반박을 하시려면 일방적인 '선언'말고 사실적 근거에 바탕한 '논리적인 반박'을 하셔야지요.
예수가 모세오경과 구약을 인용해서 유대교와 다를 바 없다구요? 예수의 핵심은 이런겁니다.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이게 예수의 유대교와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질문입니다. 어떻게 읽느냐는 점은 해석의 문제입니다. 기록된 것을 어떻게 읽느냐가 관건이라는 점일 뿐이지 모세오경을 인용한다고 예수도 유대교와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만이 믿음의 대상이라는 주장과 역설적으로 유사합니다. 주장하는 바가 다르더라도 그 구조가 유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우상을 타파하고 있고 이 점에서 오늘도 유효합니다. 기독교는 그 예수를 배반하고 있고 현저히 욕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는 '오로지 자신만이'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여야 하며 또한 구원으로 이어지는 통로임을 누차 강조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사복음서를 꼼꼼히 읽어 보시죠.
@꿈꾸는 알바트로스 이 점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오해한 것 만큼이나 같은 무게의 오해를 하고 계신 겁니다. 예수가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한 것을 나만이 진리이니 나 예수를 믿어야한다는 말로 오해하고 있는 오독입니다.
내가 길이란 뜻은 동시에 너는 네 인생에서 네 자신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는 대헌장의 선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만이 길이니 그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님은 같은 오해로 예수를 비판합니다. 이 편견과 오해가 깊어도 너무 깊은 겁니다.
@kai1 성서를 오해하다니요? <예수천국 불신지옥> 외쳐대는 그 어마어마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그렇게나 한꺼번에 오해를 할 수도 있답니까?
설령 그 많은 인간들이 정말로 오해를 한다 한들 예수에게는 책임이 없을 줄 아십니까?
만약 진정 오해라면 예수는 왜 자신을 오해하는 이들을 일깨우거나 막지 못하는 것이죠?
설령 오해가 맞다 한들 그런 여지를 준 것은 전적으로 오롯이 예수의 죄입니다.
@꿈꾸는 알바트로스 예수의 죄를 묻는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그를 비판하고 비난한다한들 살아돌아와 그 오해를 풀어줄까요? 그는 지금 죽고 없는데... 따라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그에 대한 오해를 풀고 재해석하는게 빠른 길인걸요~^^
@kai1 그리고 요한복음 3장 18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이것은 어떤 일종의 비유다.' 하는 식의 억지가 배제된 채 그냥 써 있는 그대로 읽어 보라구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둥의 헛소리를 막 늘어놓고 있는데 이걸 어찌 읽으면 예수가 배타적이지 않음을 뜻하는 게 되지요?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느 대상을 좋게만 보려고 작정하고 달라들면 그게 어느 누구든 그럴 듯하게 미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북조선의 처참한 실상을 기록한 탈북자의 수기를 읽고서 그 속에서 조선로동당 일당독재 통치의 정당성과 김씨 일가 백두혈통의 신성함을 발견해내고도 남을 만한, 그런 족속들입니다.
@kai1 오해를 풀어야 할 아무런 당위성이 없습니다.
오해가 되었건 그렇지 않건 여부를 떠나 이미 예수 신앙은 너무도 확고하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켜 어마어마한 분량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당연히 독선으로 가득찬 사상을 이 세상에 똥 싸듯 싸지른 예수와 그를 이용해 신흥종교를 만들어 낸 바울의 죄를 묻는 작업이 선행되어야지요.
누군가 죽고 없다고 해서 그 해악이 사라집니까?
누군가 죽어 버리면 살아 생전의 행위에 대한 비난에서 자유로워집니까?
그런 논리대로라면 임해군도, 순화군도, 김일성도, 이완용도, 살로트 사르도, 모택동도 하나같이 이미 한참 전에 죽어버린 사람들인데 그들을 욕하고 죄를 추궁하면
@kai1 안 되겠군요.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꿈꾸는 알바트로스 ㅎㅎ 그래서 폐기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허나 그것도 답은 아닙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같은 유형을 반복 재생산하고 확대하는 게 그 특성인걸요. 따라서 이전 사람을 욕하고 비난한들... 중요한 건 지금 나 자신입니다.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나인가 하는 점이 있을 뿐입니다.
@kai1 나 자신을 가장 중요시한다고 하여 역사 속에 스러져 간 이전 시대 사람의 잘못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중요시하되 역사 속에서 깔 사람은 까야지요. 더군다나 그 역사 속 인물이 현재를 살아가는 대다수 인간들에게 여전히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고요.
이건 이것대로, 저건 저것대로 둘 다 중요합니다.
게다가 예수는 어떤 면에서는 지금도 사실상 살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독교인들의 머릿속에서 언젠가 이 땅에 다가올 재림주로써 여전히 행동을 통제하고 보이지 않는 하늘의 감시자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거든요. 그의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kai1 그리고 기독교 교리를 비난하려면 당연히 그 수괴인 예수를 끌어내어 욕을 먹이는 작업이 우선 선행되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꿈꾸는 알바트로스 ㅎㅎ 그러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문제일 뿐입니다. 서낭당에 사람들이 모여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면 서낭당 나무를 비난한다고 해결될까요? 당산나무를 베어버리면 그만일까요? 그들의 인식의 오류를 푸는게 빠를까요? 애초부터 거기 왜 큰나무로 마을 어귀에 서 있었느냐~ 그게 문제다라고 비난하는 꼴입니다. 나무왈 왜 나만갖고 그래? 하지 않을까요?
@kai1 서낭당에 사람들이 모여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면 미신을 타파하는 작업이 그에 대한 해결책이어야지 인식의 오류를 푸는 것이 해결책은 아닙니다.
이 경우 애시당초 무슨 오류가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위의 일화엔 오류가 아닌 타파해야 할 미신이 있을 뿐입니다.
오류가 있어야 풀든가 말든가를 하지요.
@꿈꾸는 알바트로스 미신타파가 오류타파인셈이지 당산나무를 비판하고 비난하는게 미신타파는 아니니까요?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는게 미신타파입니다. ~^^
@kai1 그러고 있는 기독인들의 문제일 뿐이라.....
어째서 비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종교와 신앙으로 인한 대대적인 말살시도와 탄압을 찾는 게 그토록 힘들까요?
어째서 유일신교 문화권에서는 어김없이 피로 그들의 신앙을 물들인 사례가 거의 예외없이 나타나는 걸까요?
기독교 치하의 중세 유럽에선 종교는 극도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이는 죽임받아 마땅했죠.
반면 동양에서는 종교 가지고 기준을 삼아 다른 신앙을 체계적으로 뿌리뽑으려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숭유 억불 정책을 펼치긴 했으나 조정이 불교 승려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려는 시도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며
@꿈꾸는 알바트로스 저도 그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유일신신학의 구조를 비판하는 것에 동의하는데 예수를 유일신신앙의 뿌리로 보는 것에 이의를 달 뿐입니다. 예수는 그것에 항거했다는 게 제 이해입니다. 사람들이 도로 환원한 게 문제지요. 그것도 예수를 유일신과 등치시키면서...
@kai1 복음서의 기술을 보면 예수는 끊임없이 구약의 기록을 근거로 가져와 자신을 신격화하려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나온 모세의 불뱀 어쩌고 타령을 비롯하여 이루 세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는 유대교의 전통적인 야훼 관념을 타파하기는 커녕 그 야훼가 곧 자신이라고 박박 우기며 그 권위를 자신에게 덮어 씌우고자 하는 발언을 합니다.
알아듣기 쉽게 말해서 예수의 주장은
"쓰잘데기 없는 야훼놈 타령은 좆까!" 가 아니라
"내가 곧 준엄한 야훼니 모두 알아서들 기어라."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최대한 단순화해서 표현했는데도 못 알아들으신다면 더 이상의 대화는 힘들겠군요.
님은 지금 당산나무를 비난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당산나무를 비판한다고 해서 미신타파가 되는 게 아니지요~^^ 예수를 당산나무로 삼고 있는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그 미신을 타파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서낭당신학이나 서구신학이나 오십보 백보라고 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오해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서구 신학이야 말로 서낭당신학의 서구 버전일 뿐입니다.
예수를 오해한 사람들이 서구 신학을 만들었든 이미 예수는 신격화 된 거대 종교의 수장이 되어버린 이상 그건 크게 상관이 없다고 앞서 말씀드렸을 뿐더러 어떻게 바이블을 읽으면 그게 오해라고 박박 억지 주장을 할 수가 있는지요?
제가 앞서도 말했지요. 바이블에 나타난 예수의 언행을 가지고 그가 배타적이지 않음을 증명하려는 것은 마치 북조선 실상을 드러낸 기록을 읽으며 거기에서 애써 한 줄기 '위대한 수령님의 은덕'을 찾아내고자 기를 쓰는 시도나 마찬가지라구요.
아무래도 님이 난독증 환자가 아님을 직접 바이블 구절을 가져다가 증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듯 싶습니다.
어떤 구절을 보아야 예수가 자신이 유일한
구원의 통로임을 부정했는지 말이죠.
설마하니 예수를 무슨 1세기판 레닌이나 체 게바라 정도로 바라보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런 식의 해석은 너무 억지춘향식으로 무리하게 가져다 붙이기 식 논리를 펼친 결과
지금은 거의 생명력이 다 한, 한 물 간 이론입니다만.......
@꿈꾸는 알바트로스 ㅎㅎ 체게바라나 레닌 식이 아니래두요... 저는 그런 접근이 결코 아니랍니다. 민중혁명도 아니고 로마의식민지배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독립투사와는 전혀 번지수가 틀렸사옵니다. ㅠ ㅠ 토론의 한계가 느껴지옵니다. ~^^
@kai1 그러니까 예수가 본인이 유일한 구원의 통로임을 부정했다는 구절을 들고 오시라니깐요.
설득을 하려면 객관적으로 절대 다수가 동의할 만한 근거 자료가 있어야지요.
@꿈꾸는 알바트로스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억지주장이나 견강부회라면 당연 비판받아야 마땅하겠지요. 수많은 논증자료들은 축적해놨으니 천천히 이 곳에 올려보도록하지요~^^
@꿈꾸는 알바트로스 절대다수가 진리라면 기독교인들이 진리라는 뜻인가요? 예수는 고독한 일인이었고 절대다수는 유대교였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갑자기 절대다수가 동의하는 논증자료를 제시하라니... ㅎ 그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다수가 옳다면 저의 얘기는 님께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 저는 오로지 저 혼자이고 소수중소수이니까요. ㅋ
@kai1 갑자기 숫자 이야기를 하시는데 저는 사람 머릿숫자의 많고 적음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누구에게나 수긍이 갈 만한 자료를 들고 오시라는 뜻입니다.
더 정확히 설명해 드릴까요?
원래는 모두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을 만한 자료를 들고 오라고 요구하고 싶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모두가 수긍할 만한 자료는 사실 이 세상에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 그저 논리없이 바득바득 우기기만 하는 사람이 이 나라만 해도 오천만이 넘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설마 아예 없기야 하겠습니까?
그런 인간은 제쳐 두고서라도 다수가 논리적으로 동의할 만한 근거를 가져오라구요.
머릿수로 밀어붙임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꿈꾸는 알바트로스 ㅎㅎ 이 세상 모든 불행의 원인이 곱추에게 있음을 논리로 증명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덱쥐베리가 말하더군요. 형식논리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님이 동의할 수 있는 논리적 설명을 해봐라로 이해하겠습니다만... 그게 전제와 편견의 안경을 쓰고 있으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할 뿐 전혀 듣지 않는 법이지요. 해서 별로 큰 의미있는 게 아니라고 여깁니다만... 치열한 토론으로 에너지를 쏟고 싶지는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마음 내키면 한 두편 올려보지요~^^
@kai1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를 예로 들어 볼까요?
고교 화학 교과서에는 pH를 설명하면서 가운데 7.0을 기준으로 수치가 오를수록 염기성이고 내릴수록 산성이라고 배웁니다. 그렇다면 그런 경우는 그야말로 절대 다수에게 진실이라고 동의를 얻고 합의된 부분이겠지요.
물론 그 내용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어째서 pH의 기준이 7.0이냐? 기분 나쁘네. 난 동의 못하니 12.0이 기준이 되어야 마땅하다" 라든가
"학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라! pH 수치가 올라갈수록 강염기성이란 게 꼭 정해진 법칙이라도 되냐? 내가 보기엔 높을수록 산성이다!"
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학생이 이 땅 어디엔가는 충분히 있을 수 있겠지요.
@kai1 그러나 그런 식의 '우기기 식' 소수 의견은 학계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을 뿐더러 본인의 무논리 식 맹목적 우기기만을 드러내 보일 뿐입니다.
그러니 제 말은 자료를 가져와 해석함에 있어서 저런 학생 식의 억지만은 부리시면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꿈꾸는 알바트로스 ㅎㅎ 인문학적 소양을 물리적인 객관성과 등치시킨다는게 얼마나 어불성설인지는 아실테구요~^^
@꿈꾸는 알바트로스 글 한편 퍼오기 해서 올려놨습니다.~^^ 이 토론의 연장선에서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물론 지극히 일부분입니다만...
@kai1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명목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한 타인의 말글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것도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지요. 인문과학 분야라고 해서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보아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고전 문학을 배울 때 <홍길동전>을 배우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그것의 중심 주제가 '적서 차별을 적극적으로 옹호함'이라거나 <허생전>을 배우면서 그것을 관통하는 주제가 '왕권신수설을 찬양함'이라고 여긴다면,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의 <25시>에서 '고대 노예제로 회귀함에 대한 갈망'을 읽어낸다면 이것 또한 제대로 읽었다고 볼 수는 없지요.
해석의 다양성 어쩌구 저쩌구 둘러대도 확실히 비정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