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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51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제 연회 때에도 하고 있었던 것을. 아니, 연회만이 아니었다. 매일 제 몸과 같이 여기겠노라 다짐하여 늘 저와 함께 지내던 물건인데 하늘로 증발했는지 땅으로 꺼져버렸는지 도대체 보이지가 않는다. 그것이 없어졌다는 것을 안 이후부터 시작된 불안이 점점 은을 괴롭히고 있었다. 새빨간 붉은 빛의 매화장식. 유일한 우겸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리고, 언주 역시 마치 선전포고라도 하듯 그 분을 마음에 품고 있음을 알려왔다. 실제하며 늘 거기에 있는 우겸인데도 점점 누군가에게 빼앗겨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째서 계속 멀어지는 느낌만 드는 걸까. 은의 머릿속은 온통 그런 생각들로, 맞은편에 환관들을 불러다 놓고도 그들의 말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 몸이 불편하십니까. 황후마마.”
“아닙니다. 계속 하세요.”
은은 고개를 저으며 당면한 상황에 집중하려 애썼다. 장 상궁이 지금쯤 별궁에 당도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그 머리장식을 찾고 있을 터. 분명 찾아서 돌아오겠지.
“요즈음 재상들 사이에 심심치 않게 돌고 있는 소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자’에 관한 것입니다만, 아마도 양녀가 될 아이를 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녀? 욕심 많은 늙은이답게 끝이 없군.”
“헌데 그것이 소문이 아닌 것으로 어제 판명이 되었습니다. 어제 연회 전, 그 자가 폐하께 찾아가 직접 언급을 하였다더군요.”
“제 양녀를 들이는 일 따위를 어째서 폐하께 고한답니까.”
“궁인 하나를 눈여겨보고 있다고 하였답니다.”
은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진 대인이 눈여겨보고 있다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겁이 났다. 영악하기로 소문난 진 대인이 그저 아무 궁인이나 데려다 제 집에 앉혀놓을 리가 없었다. 분명 황성의 사정과 황실의 내막에 바삭하고 또한 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아이를 데려다 날 위협할 만한 일들을 꾸미려 함이겠지. 생각만으로도 온 몸에 소름이 돋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반드시 찾아 보이겠습니다. 황후마마.”
“수고해주세요. 나는 빚은 반드시 갚는 사람입니다. 이번 일의 여하에 따라 그대들에게 휘정원의 요직을 맡길 수도 있겠지요.”
“명심하겠습니다.”
은은 유연한 미소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하나같이 마음에 들게 돌아가는 일이 없었다. 은은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방 안을 서성이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 제가 보기에도 무섭도록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곧 억지로 표정을 바꾸고는 배에 손을 얹고 아이의 호흡을 느끼려고 애썼다. 진정하자, 모든 것이 잘 되어갈거야, 라고. 그 때 문 밖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당도하는 것을 들었다. 은은 마치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 상궁 돌아왔는가.”
“지원입니다. 황후마마.”
거울을 통해, 문에 비친 그의 커다란 인영을 본다. 그리고 다시 거울 속 제 얼굴을 보았다. 늘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런 머리 장식도 꽂혀있지 않았다. 은이 망설이는 사이 우겸이 다시 말했다.
“잠시 들어도 되겠습니까.”
은은 다시 자리에 앉아 여유를 되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곧 우겸이 안으로 들어섰다. 매우 근엄한 태도로 제게 허리를 굽히는 우겸의 공적인 태도는 또 다시 둘 사이의 거리를 확인시켜주었다.
“장 상궁은-”
“심부름 할 것이 있어 보냈습니다. 앉으세요.”
우겸은 은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앉았다. 얼핏 미소 짓는 것을 본 것 같기도 하다.
“혹시 뭔가를 찾으라고 시키셨습니까.”
“차, 찾다니요.”
“그리하셨다면 장 상궁이 괜한 수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겸이 제 옷섶 안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을 본다. 그 손에 든 것을 은의 앞에 내려놓으며 우겸은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어제 연회장에서 돌아가시는 길에 떨어뜨리셨습니다. 일찍 전해드렸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붉은 매화장식. 그토록 찾았던 그 매화가 눈앞에 있는데도 전혀 반가워 보이지가 않았다. 이 머리장식을 늘 하고 있는 것으로 제 맘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큰 소리 치던 그 날 밤의 일이 그저 치기로 끝나버린 것 같아, 치부라도 들킨 양 얼굴이 새빨개진 은은 외려 제 스스로 화를 냈다.
“그렇다면 어제 곧바로 돌려주셨으면 되었을 일이 아닙니까.”
“폐하와, 너무 즐거워 보이시기에 건네 드릴 틈을 놓쳤습니다. 용서하소서.”
사실인 그 말이 은을 더욱 질책하고 힐난하는 것처럼 느껴져 뒤이을 말을 찾지 못했다.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들켜버렸으니 그럴 법도 하다고, 신중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실은 그것보다도, 전해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말씀하세요.”
“내일, 늦어도 모레면 고려에서 총부산랑 가(家)의 일행이 황성에 당도할 것입니다.”
은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이제 그 이름도 낯설어져버린. ‘총부산랑’이라면 분명 제 아비의 관작명이 틀림없었다.
“누가, 여기에 온다구요?”
“총부산랑과 그 대부인,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이 마마를 뵈러 이곳에 옵니다.”
은이 목소리에 힘주어 답했다.
“그 일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고 내가 이미 태감에게 일러두었습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황실의 사돈인데 만나보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은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괴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그리움이라고는 한 줌 남아있지도 않은, 전혀 보고 싶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먼 유랑이라도 떠나오듯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찾아오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반갑기는커녕 속이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힘들어하는 은을 지켜보며 우겸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마마, 외람되오나 언제든 한 번은 겪으셔야 할 일입니다. 의연하게 대처하시고 반갑게 맞아주시는 것이 옳은 일인 줄로 압니다. 폐하께서도 그것을 바라실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쯤은.”
“........”
“하지만 내가 어째서 거부하는지는,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은은 이마를 괸 채 우겸에게 응석부리듯 말했다. 한 나라의 황후로 이런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는 데서부터 이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가족들을 만나고 나면 황제도 자신에게 실망해버리지 않을까. 좌승상을 사돈으로 두게 한 장헌궁 쪽에 비하면 아무런 내세울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저인데.
“길어야 닷새입니다. 마마.”
전과 같은 때로 돌아가 마치 여동생을 달래듯 하는 말투로 저를 달래는 우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은은 그의 말처럼 의연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준비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럼 전 이만. 우겸은 목적한 일을 모두 마쳤으니 돌아가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리고-”
“........”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만 가 보세요.”
은은 언주에 관한 것을 물으려다 두서없는 말이 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또,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문 뒤로 무심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만 있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았다. 아무런 소득도 없었던 것 같은 긴 대화. 마주하면 웃어주고 당연하게 안부를 물어주던 예전의 관계는 없었다. 그것만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을 뿐임에, 은은 슬퍼졌다.
//貢女 奇皇后//
아무것도 모르는 체 행복감에 도취되어 황제와 함께 멀어져가는 은을 바라보던 우겸. 마치 늘 그렇게 그를 바라보던 저처럼.
쨍그랑. 하고 떨어진 것은 이미 다 써버린 향유병이었다. 그 파편들이 산산이 흩어지고 나서야 언주는 딴 생각에 잠겨있던 의식을 되찾아와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화급히 주저앉아 예리한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드는 언주의 곁으로 소홍이 다가왔다.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마마, 용서해주소서.”
언주는 깨진 유리조각 가득한 바닥에 손을 짚고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소홍은 가까이 다가와 그런 언주를 급히 일으켜 세웠다.
“지금 실수가 문제가 아니질 않느냐.”
소홍은 언주의 손을 제 가까이에 가져다가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할퀸 손바닥 위로 솟아오르는 붉은 선혈들을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당황한 언주가 괜찮다며 손을 빼내려 해도 소홍은 그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협탁 위에 얹어둔 제 손수건을 가져다 언주의 손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어서 피가 멎어야 할텐데. 큰일이구나.”
“이제 괜찮습니다, 마마. 손수건이 더러워졌으니 제겐 그것이 더 큰일입니다.”
소홍은 손수건으로 감싼 언주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호호, 웃었다. 다정하게 웃어주는 그 모습이 누군가와 닮았다고, 그리고 아름답다고, 언주는 생각했다.
“한 사람의 귀한 생명에 비한다면, 이런 손수건이야 세상에 널려있지. 이것은 네게 주마.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가서 잘 지혈하거라.”
손수건을 언주의 손에 돌돌 감아 잘 매듭지어주며 말한다. 손을 감싼 손수건의 감촉이 소홍의 말투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언주는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고 나와서는 한참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 피로 얼룩진, 고운 손수건에선 아직도 좋은 향내가 났다. 저 분의 마음결도 이리 곱지 않고서야 어찌 궁인 따위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저런 분을 ‘언니’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면 참 행복한 삶이 될 거라고, 언주는 잠시 상상했다. 멀리서 그렇게 장헌궁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첫댓글 오래간만에 첫번째 댓글자리를 차지♬
진대인이 자꾸 겹쳐져서 소홍이 마저도...
뭔가 다른 얼굴이 있을것만 같은 생각이ㅠㅠ
그나저나...은에게 새로운 위기가 닥쳐오려나요?
주말인데도 글 올려주신 Irene님!! 사...사...사..탕드세요>_<♡ㅋㅋㅋㅋ
Tiare★ 님★ 이면에 다른 얼굴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생각으로 글을 계속 쓰고 있어요. 소홍도 그럴지도요. 앞으로의 전개도 계속 지켜봐주세요~ 저도 사...사... 사탕 되게 좋아해요>_<ㅋㅋ
뭔가 불안한 마음을 숨길수가 없네요;; 자애롭고 인자한 모습을 보이는 소홍에 비해 은이는..ㅜㅜ 부디 초심으로 돌아가야할텐데요 ㅜㅜ 지원과의 관계도 안타까울뿐이네요.. 그렇다고 황제를 버릴순 없으니 말이에요ㅜ 어찌됐건가에 은이 화이팅! 작가님도 화이팅!
헤르티아 님★ 은과 소홍의 모습이 많이 대조적이죠. 은이 황후라는 이름과 권력에 잠식되지 않아야 할텐데요. 계속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헤르티아 님도 화이팅입니닷!^^
젬있게 보고가요..
소희 맘 님★ 다음화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해요^^
-0-언주야 그러면 안되그러면.....은이는 황제를 좋아하게 된겄이 아니었나요?ㅠ
까불지마ㅋ 님★ 아마도 은의 마음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것 같죠? 다음화도 꼭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사현- 님★ 오랜만에 봬요^^ 아무래도 언주의 마음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가는 분위기죠. 계속될 변화들도 관심있게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