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영남 이순신연구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의병정신선양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털과개털
삼척지방의 항일투쟁사
1. 서 론
우리민족은 수천년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침략해 오는 주변 민족에 대하여 피로써 항쟁하면서 민족 존영의 명맥을 수호해 왔다.
그 중에서도 최근세에 있었던 일제의 침략행위는 그 규모와 성격이 가장 크고 잔혹한 것이었을 뿐더러, 마침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강토를 짓밟으며 수많은 생명을 살육하고 재산을 약탈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우리들의 독립투쟁도 심각하고 치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민족 전체가 참여했던 독립운동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미 국치 이전 의병항쟁으로부터 시작하여 3·1운동을 거쳐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해외에서는 독립운동의 총사령부인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거기에 따라 독립군의 조직적 집단적 투쟁과 함께 의·열사들의 결사적인 의거가 끊일 사이없이 감행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언론·종교·교육·학술 등 문화 전반을 통하여 투쟁을 쉬지 않았고, 또 전국적으로 학생독립운동도 일어났다. 당시의 일제침략에 항거하여 농민과 노동자들이 농민운동·노동운동을 일으켰으며 여성들과 청소년들까지도 민족항쟁의 깃발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사야말로 우리민족의 피의 역사요, 혼의 역사요, 여기에 민족의 참 면목이 있고, 민족의 방향과 진로가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삼척지방의 항일투쟁사는 을미사변(乙未事択)으로 영동의병(嶺東義兵)이 일어난 것을 필두로, 1913년 임원리(臨院里) 임야측량사건(林野測量事件)으로 일어난 농민항쟁이 있었으며 기미 3·1운동의 여파가 삼척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로 나타나기도 했다. 또 항일민족운동의 발전단계라고 볼 수 있는 1921년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때 삼척보통학교생들의 선전활동과 학생시위가 있었고, 끝으로 1920년대 이후 1940년대까지 삼척의 사회단체인 청년동맹, 신간회, 농민조합, 노동조합들의 항일운동이 전개되었으므로 기존의 단편적인 논문이 발표된 것도 있으나, 여기에서는 종합적으로 삼척지방의 항일투쟁사를 엮어보기로 하였다.
2. 관동의병의 항일투쟁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 제도의 변혁과 일제침략에 대항하여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민족적 사상과 국권수호의 구국적 행동을 강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하여 항쟁하였으니 삼척에서도 창의장(倡義將) 김헌경(金憲卿), 서기(書記) 김달호(金達鎬) 등의 유림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의 항일전이 전개되었다. 삼척의 의병은 관동의병과 더불어 원산에 일본군을 공격할 때도 참여했고, 영동의병의 마지막 전투인 삼척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관동의병장 민용호(閔龍鎬)은 1895년 12월 3일(음력) 원주 신림에서 결성한 후 영월, 평창, 정선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12월 16일 강릉에 들어와 경무관 고준석(高俊錫)을 처형하니 관찰사 이위(李暐) 등이 인제 산중으로 도망쳐 버렸고 민용호는 강릉에다 관동창의 도병소(都兵所)를 설치하여 관동지방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때 민용호와 강릉 창의장 심홍택(沈鴻澤)은 소모사(召募使) 3명, 전후영(前後營) 2명, 무사(武士) 포군(砲軍) 100여명을 거느리고 삼척에 와서 10여 일간 있으면서 삼척 창의장 김헌경, 서기 김달호, 선봉장 주명승(朱明昇)과 합세하였다. 이 때 삼척군에서는 포수 40명을 파견하였는데 강릉에 모인 영동지구 포수는 3000여명이 되었다.
이리하여 우선 원산에 있는 일본의 세력을 공격하기 위하여 다음 해인 1896년 정월에 강릉을 출발하여 안변 신평(新坪, 혹은 昇坪, 혹은 承平)에 도착한 것이 2월 6일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는데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다. 의병들은 군기를 모두 버리고 돌아왔다. 민용호가 영남열읍에 보내는 격문에서 이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안변 신평까지 진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를 분별할 수 없게 풍설이 몰아닥쳐 왜(倭)는 산 위에 있다가 때를 놓치지 않고 갑자기 쳐들어 오니 여러 사람의 마음은 경동하고 무사들은 활 시위를 당기지 못하였으며, 총은 불을 붙일 수가 없어서 형세 불리하게 되겠기에 군사를 지휘하여 퇴진하게 되니 이야말로 날이 개이지 않아 원산을 공파할 수 없게 되어 통분하기 한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군사는 상하지 않고 돌아 왔으니 어찌 한때의 불리한 것이 후일 크게 활동할 바탕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민용호의 의병부대는 원산공격을 실패하고 2월 21일 강릉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때에 새로 부임한 관찰사 서정규(徐廷圭)가 4월 12일 서울에서 내려온 김홍권(金鴻權) 중대장의 관군을 앞세워 반격해 왔다. 처음에는 대관령 밑 대공산성(大公山城)에서 싸워 19명을 사로잡았으나 계속 반격해 오므로 임계 백복령, 북평을 거쳐 삼척으로 후퇴하였다. 삼척에서 변덕스러운 울릉도 시찰사 염석하(廉錫夏)를 먼저 처단하고 앞으로 닥쳐올 대전을 위해 삼척읍성을 중심으로 진을 쳤다.
경군(京軍)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관동창의군은 마지막 보루인 삼척성에 총집결하여 일제의 앞잡이 경군과의 대혈전에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閔)대장은 같은 민족끼리 싸울수 없어 몇번이고 싸우지 말 것을 애원했으나 끝내 듣지않아(累次哀呼終不聽) 결국 일대 혈전을 치르게 되었다.
삼척에 집결한 관동의병은 3개 지역을 나누어 진을 쳤다. 읍(邑)뒤의 삼봉(葛夜山과 그 서쪽의 높은 봉과 北쪽의 봉을 말한다)에는 민대장을 위시하여 최중봉(崔中奉), 강우서(姜禹瑞), 이영찬(李永燦), 전치운(全致雲), 신무섭(申무燮) 등이 호를 파고 매복해 있었고, 읍성에는 선봉장 김도현(金道鉉)과 민동식(閔東植)의 부대가 잠복해 있었고, 죽서루(竹西樓) 동쪽(南山)에는 김헌경, 김달호, 주명승의 삼척의병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에 경병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시내로 들어왔다. 매복해 있던 의병은 일제히 불을 당기니 삼척대전, 또는 갈야산성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1896년 4월 19일 묘시(卯時)에서 신시(申時;오전 6시∼오후 6시)까지 온종일의 혈전인 것이다. 알개방재(謁介岩:갈야산과 그 북쪽 산봉사이를 말한다)는 피차간의 사상자가 많아 피바다가 되었고 읍성 안은 불바다가 되었다. 의병들은 탄알이 떨어져 오십천으로 후퇴하였다. 경병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성안으로 들어와 방화하였다. 불꽃은 하늘을 찌를듯 타올랐다. 민대장은 오십천을 따라 군졸을 거느리고 황지령(黃池嶺;통리재)을 넘어 정선으로 가고, 김도현은 그의 고향인 영양으로 군졸을 거느리고 돌아갔다. 삼척 창의장과 서기는 붙잡혀 관군에게 문초를 받은 후 왕의 조칙에 의해 풀려 나왔으나 관군은 북평으로 가서 삼척의병장 김헌경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삼척의 대전은 승패가 없었다. 모두의 패전으로 끝났다. 200명의 관군도 50명이 살아 강릉으로 돌아갔다. 의병도 통의장 김건필(統義將 金乾弼)을 비롯하여 전사자가 많았다.
이 삼척전투에 대한 이해를 보다 쉽게 하기 위해 이 싸움에 참전했던 경북 영양 의병대장 김도현의 자서전인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중 이 전투부분만 소개한다.
[……삼척읍에 도착하자 민대장이 울릉도 시찰사 염석하(廉錫夏)를 죽였다. 5일 후에 들으니 서울군대 수천명이 바야흐로 들어와서 장차 한번 싸울 계획을 한다고 한다. 중군 최중봉(中軍 崔中奉)은 뒷산에 진을 치고 민대장은 본읍 군대와 함께 남쪽 산에 진을 치고 나는 민동식(閔東植), 한중보(韓重輔)와 함께 성 안에 진을 쳤다. 웅덩이를 파 군사를 매복하고 있으려니 조금 후에 저쪽 군대들이 먼저 대포를 쏘아 포 소리가 천둥소리와 같고 탄환은 우박과 같이 쏟아진다. 나는 성을 돌보면서 격려하노라니 맨 앞 진이 약철이 다 떨어졌다. 나는 그 중에서 제일 날쌘 포정 5명을 데리고 남쪽 산으로 가서 약철을 지고 도로 뒷산으로 돌아왔다. 이 때 진중에서 한 사람이 큰소리로 '약철을 빨리 가져오너라'한다. 적군들이 이 말을 듣고 승세하여 연달아 포를 쏘니 진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또 앞 진은 이미 흩어져 달아났고 산성에 매복한 복병도 역시 놀라 달아났다. 나는 한 삼나무(杉)에 의지하여 우리 군사가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이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돌아오니 겨우 50명 밖에 되지 않았다. 길에서 장삼모(張參謨), 박진사(朴進士)와 포정(砲丁) 몇 명을 만나 함께 평릉(平陵;平陵道察訪이 있는 근덕交柯)으로 지났으나 민대장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컨대 필시 오십천(五十川)으로 들어가는데 내 산졸(散卒)들도 역시 그 곳으로 따라 간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하여 삼척혈전은 막을 내렸지만,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며 일어난 관동창의군이 일본군과 그의 앞잡이 경군과의 싸움은 오로지 일제라는 외세를 내몰기 위한 것이 었으나 경군(京軍)과의 싸움은 같은 민족끼리의 싸움이었다. 이것이 우리 민족사의 하나의 비극이거니와 오로지 의를 위하여 싸울 뿐이라는 의병들의 혼은 불타 없어졌지만 그 발판 위에 역사는 발전할 것이니 그들의 희생은 영원할 것이다.
3. 임원리 임야측량사건
식량부족에 허덕이고 있던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를 폭력적으로 수탈하고, 일본농민을 이주시켜 농업전체를 지배하기 위하여 1910∼1918년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을 담당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등은 농촌경제의 수탈이나 농민착취로 말미암아 여기에서 헤어나기 위해 산간벽지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던가 그렇지 않으면 간도지방(間島地方) 및 해외로 이주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만주나 연해주지방에 많은 동포가 이주해 살았다는 것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망명한 사람도 있겠으나 토지를 잃고 생활의 근거지를 잃은 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농촌경제 수탈에 대하여 전국 곳곳에는 농민의 항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강원도의 경우는 삼척 임원의 농민항쟁을 대표적인 사건으로 들 수 있다.
임원리 임야측량사건(臨院里 林野測量事件)을 삼척 향토지 혹은 증언에 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3년 4월에 임원리 국유림과 사유림의 경계측량을 하는데 사유림에 대하여 부당하게 국유지에 편입시키는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에 항의할 목적으로 원덕면민 500여명이 운집하였다. 임원리 김치경(金致卿)의 지휘로 재측량을 요구 궐기하여 수일간 시위를 벌였다. 당시 삼척군수 심의승(沈宜昇)과 원덕면장 김동호(金東鎬)가 일인 측량기수 화장(花藏)을 대동하고 민중을 설득시키기 위하여 임원리에 왔는데, 이때 뒷산에서 사진 촬영하는 자를 발견하고 군중은 일시에 격분하여 기수를 죽이라고 외치며 몰려들어 타살하여 불에 태웠다. 일본 헌병 20여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니 군중들은 해산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참사가 났다. 이때 3명이 죽고 부상자는 부지기수였다. 주동자 김치경을 비롯하여 조정원(趙正元), 이락서(李洛書), 김문식(金文植), 김평서(金平書)등 70여명이 끌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김평서는 옥사하고 남은 사람들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간 복무하였으나 모진 고문으로 형을 마친 후에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별세하였다. 이 사건이 있는 뒤 원덕면의 유림들이 잔악한 일본 헌병의 만행을 맹렬이 규탄하고 비난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은 유림의 세력을 말살한다는 보복심에서 유림들을 탄압하고 1913년 5월 유림들의 본루(本壘)인 원덕면 축천리의 산양서원(山陽書院)을 방화하여 건물은 타 없어지고 묘정비(廟庭碑)만 남게 되었다.
1971년 유림들의 정성으로 묘정비각은 중건하였으나 서원 본건물을 복구되지 못하고 있으니, 임원리 임야사건은 산양서원사건으로 옮김에 원덕 주민들은 지금까지 잊지못할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정책은 토지를 중심으로 경제적인 착취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잔인하고 비열한 정책임을 임원리 임야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
4. 삼척보통학교 학생들의 3·1 만세운동.
한말 의병운동에서 다져진 항일 풍토가 민중의 정신 구조에 많은 작용을 하여 근대적 자유주의 사상적 기초 위에 농촌 경제의 착취와 무단정치하의 관리들의 횡포로 반일감정이 고조되었으며, 고종황제(高宗皇帝)와 독살설, 그리고 3·1운동을 주도한 민족지도자 33인은 천도교(天道敎)와 기독교(基督敎)의 지도자가 대부분으로 은연중 종교적 감정도 작용하여 1919년 3·1운동이 폭발하므로써 일제 강점기에 한국 민족이 전개한 독립투쟁 중에서 최대 규모의 전민족적인 것이었다.
강원도의 3·1운동은 중앙과 유기적 연락을 갖지 못하여 보통학교 생도가 단독으로 운동을 전개한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에서는 삼척지방의 만세운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삼척은 원래 유교의 고장이다. 때문에 관동의병이 일어났을 때에도 유학자들이 힘을 모아 궐기하였고,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해서 신문화에 대한 반응도 민감하여 삼척읍에는 계동학교(啓東學校)가, 북삼면 송정리에는 명동학교(明東學校), 천곡리에는 보명학교(普明學校)의 사립학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학교들은 3·1운동 전에 계동학교는 삼척공립보통학교로, 명동학교와 보명학교는 병합하여 송정공립보통학교로 흡수되어 그것이 항일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삼척의 3·1운동은 삼척보통학교와 송정보통학교의 학생이 일으킨 것이 대표적인 것인데 이 때 이들의 운동은 서울에 외유하고 있던 학생들이 지방으로 내려오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특히 북삼면 효가리(孝街里)에 있는 김순하(金舜河) 학생은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신발 밑에 숨겨서 삼척보통학교와 송정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전한 것이 직접적인 동기라 한다.
삼척보통학교는 4월 14일 김달하(金達河)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심부윤(沈富潤)·오원모(吳元模) 등과 협의한 후 다음날 15일에 전교 학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불러 삼척읍을 진동시켰다. 이때 교사 김기덕(金基德)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며 교장 산전(山田)은 소위 천황(天皇)의 칙어(勅語)를 옷에 감추어 뒷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들의 운동은 운동장 안에서 헌병의 출동으로 끝났지만 당시 강원도장관에게 보고한 자료에 176명의 생도가 참가했다는 것을 보면 규모가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강원도 헌병대장의 보고에는 94명을 훈계 처분했다고 하니 규모도 컸고 만세운동에 전교생이 호응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삼척보통학교 학생이 운동을 벌였던 것은 오후 1시 20분의 일이라고 하는데 운동장에서 만세소리가 터져나와 읍내에 퍼져나가니 일반인도 크게 자극을 받았다. 이날은 음력 3월 5일이라 삼척 김씨의 시조 춘계전사일(春季奠祀日)로서 300명 가량의 사람이 모여 있다가 시위를 벌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를 미리 포착한 헌병의 출동으로 해산하고 말았는데, 앞에서 지적한 강원도장관의 보고에는 천도교의 주동으로 일어나려고 했다는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당시의 삼척보통학교의 학적부를 열람한 즉 전체 학생수는 183명으로서 176명이 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은 전교생이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기덕 교사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직원명단에는 김기홍(金基弘)으로 되어있다. 주동학생 김달하는 4년생이고, 심부윤 오원모는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당시는 4년제 보통학교로서 김달하는 최고 학년으로 주동 역활을 하였는데 1903년 2월 30일 생으로 운동당시 만 16세의 학생이었다. 지금의 중학생에 해당되는 연령으로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으니 당시 우리민족은 남여노소 할 것 없이 전민족이 독립을 갈망했고 저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척보교의 운동은 북삼면 송정보통학교에도 영향이 미쳤다고 한다. 당시의 기록에 나타난 것은 없으나 김정경(金鼎卿)의 증언을 들으면 4월 17일 주하영(朱夏英) 김진수 (金振壽) 홍학현(洪學鉉)등과 협의하여 오후 2시에 50여명의 학생이 만세를 불렀다고 하며 이 때문에 직원실에서 일본 헌병의 모진 취조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송정리 최만희(崔晩熙)의 증언에는 역시 북삼면 송정리 김형국(金炯國)과 효가리 홍순황(洪淳璜)이 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실패했다고 한다.
이처럼 삼척지방에는 학생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으니 이는 구한말의 의병활동에서 다져진 항일풍토, 애국계몽운동, 민족주의, 근대적 자유주의 사상 등이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고,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당시 일제의 농촌경제의 수탈, 관리들의 횡포, 고종황제의 독살설 등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에 서울의 3·1운동의 영향으로 민감한 학생들에 의해 전개된 것이 삼척의 만세운동이었다.
이러한 삼척보교의 학생운동은 1921년 태평양회의 때의 시위운동에도 영향을 끼쳤고, 더욱이 이 학생운동의 주동역할을 하던 학생들이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여 1930년대에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전개하면서 항일운동에 주동역할을 하게 된다.
5. 태평양회의와 학생시위
태평양회의는 미국에서 준비되고 있던 워싱턴회의를 말하는데, 1921년 11월 11일에 열렸다. 태평양회의는 아시아문제를 다룬다는 회의였으므로 임정(臨政)이나 한국 독립운동계로서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상해(上海)에서는 임정을 중심으로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外交後援會)가 조직되어 선전활동 모금운동 등을 벌이고, 국내에서는 해외 독립운동계를 지원하기 위해 비밀활동을 갖가지로 전개하게 되었다. 천도교회에서는 3·1운동과 같은 대시위를 계획하기도 했고, 그외 여러 가지 방법이 추진되고 있었는데 그 하나의 방법이 각급학교 학생의 선전운동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21년 11월초에 삼척일대에는 태평양회의에 관한 여러 가지 소문과 때마침 암살 당한 일본의 원경수상(原敬首相)에 대한 풍문이 나돌고 있었다. 삼척보교(三陟普校)에서는 학교장과 교사들이 그 내심은 어떻든지 모든 훈화시간을 통해 학생에게 근신할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교장은 원경수상을 암살한 것은 한국독립운동자라고 했고, 그 이유는 태평양회의에 대하여 국제적 신망이 높은 원경(原敬)을 제거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삼척지방에는 태평양회의에 관한 선전문이 들어와 여러가지 이야기가 돌고 학교에도 우편으로 선전지가 온 것을 학교에서 받아 감추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리하여 4년생 오원모(吳元模)를 주축으로 최삼용(崔三龍), 심부윤(沈富潤), 김윤달(金潤達) 등이 주동하여 동맹휴학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보내온 양 선전지를 만들어 학교등교길에 놓아서 학생이 주워보게 한 후 다시 비밀리에 학생회의를 열어 동맹휴학을 결정했는데 이것이 11월 9일의 일이었다. 회의 때 시위론까지 대두하였으나 동맹휴교로 결정되었는데 이것이 탄로나고 말았다. 이것 때문에 학생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4학년 담임교사 김기덕과 관계 학생이 모두 경찰에 잡혀 고초를 겪었는데 이때 경찰에 잡혀 가서 김기덕교사와 오원모가 쓴 자술서를 오원모의 장자 오병선(吳炳善;江原道敎委)이 보관하고 있다.
이 삼척보교의 동맹휴학운동은 폭발 직전에 차단당하고 말았지만 보교학생들이 국제회의에 대처한 민족운동을 계획하였다는 점과, 선전지를 자기들이 손수 제작하였다는 점 등은 특수한 면을 보이고있다.
6. 삼척지방의 사회단체의 항일운동
3·1운동 후 일제식민지통치에 항거하는 민족적 돌출구를 찾으려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다양하게 일어났으니 농민운동, 노동운동, 사회운동, 여성운동, 청소년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운동들은 모두가 우리들의 독립운동 사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운동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삼척지방에서도 청년동맹, 신간회 삼척지회,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을 조직하여 일제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① 삼척청년동맹조직(三陟靑年同盟組織)은 1927년 10월에 당시 조선일보(朝鮮日報) 삼척지국기자(三陟支局記者)로 있던 정건화(鄭健和), 심부윤(沈富潤)이 주동이 되었으며 앞으로의 신간회 삼척지회(三陟支會),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을 조직함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② 신간회(新幹會) 삼척지회 조직은 1928년 3일에 정건화 심부윤이 주동이 되어 결성하였다. 이 신간회는 전국적으로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항일전선에서 행동을 같이 하기 위해 강력한 민족 단체의 출현이 필요하여 1927년 2월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신간회(新幹會)가 출범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일제 식민통치하였으므로 표면으로는 사회 문화운동만을 표방할 수밖에 없었던 합법적인 결사조직이면서 안으로는 비 타협투쟁을 감행하는 항일 민족운동의 대표적인 단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간회의 결성은 각 도와 각 군에도 지회를 조직하였는데, 강원도에서는 1927년 7월 12일 춘천기독교회관에서 [전강원도 사회운동단체인회(全江原道 社會運動團體人會)]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는 14개 단체 대표 41명이 모여 신간회를 적극 지지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이것을 전후하여 강원도내에서는 신간회 지회 결성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삼척에서는 1928년 3월에 결성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강릉에서는 각지 대표자 회의를 열어서 강원청년연맹을 결성하고 1929년 7월에는 원주공회당에서 강원청년연맹 제1차 대회를 열었으며 1930년 7월에는 삼척에서 제2차 대회를 열었는데 삼척대회를 허가했다고 해서 삼척경찰 서장이 파면당한 일도 있다.
그러면 이 신간회의 모임에서 투쟁의 항목이라던가 부르짖음이 무엇이었는가는 신간회의 각 지방대회 때에 토의 사항으로 내걸었던 주요 의제를 통하여 그 방향을 알 수가 있다. 즉 착취기관의 폐쇄, 타협적 정치 운동배격, 조선인에 대한 특수 취체법규 철폐, 이민정책반대, 각군 농회반대, 조선인 본위 교육제실시, 조선어 교육 요구, 교수용어의 조선어사용, 제국주의의 식민지교육정책 반대 등이 그들의 투쟁항목이었고 이러한 요구조건들은 당시 학생들에게까지 공명되어 그들의 운동에도 반영되었음을 본다.
이러한 신간회는 마침내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폭발되자 신간회 간부들은 일제의 간악한 정책을 폭로하며, 일본경찰의 학원유린을 규탄하며, 구금된 학생들의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려는 민중대회를 열 것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대다수 간부가 체포 구금되는 동시에 대회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거니와 각 지회에서는 그 지방마다의 지도자들이 학생들의 배후에서 항일 투쟁을 계속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할수록 일제의 탄압은 더 강화되어가고 거기에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마저 알력이 일어나 모처럼 이루어졌던 공동전선이 무너지고 1931년으로써 신간회는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③ 삼척군 북평성황당 사건(三陟郡 北坪城隍堂 事件)은 1928년 4월에 삼척청년동맹(三陟靑年同盟)을 조직했던 정건화가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여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기 위하여 민족정기 앙양에는 일제의 눈초리를 숨겨가면서 민족의 계몽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집회계몽장소인 공회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각 부락에 있는 성황당을 미신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훼철하여 그 자재로서 공회당을 건축할 계획으로 1928년 4월에 이도리 성황당 및 쇄운리 성황당을 훼철하는 도중 왜경에게 발각되어 투옥된 자가 수십명이었다.
④ 삼척농민조합(三陟農民組合) 및 노동조합(勞動組合)의 조직
1931년에 합법단체인 신간회는 일제의 억압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고 민족독립운동은 지하로 잠복하게 되었다. 1930년대 전반기의 농민운동은 농민조합을,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일제 경찰은 적색농민조합 또는 적색노동조합이라 하여 공산주의운동으로 규정했지만 1927년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합작한 신간회가 결성된 것을 보아도 당시의 모든 민족운동은 공산주의운동과 합류해 있었으므로 농민이나 노동자가 그를 경계할 현실적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일제하에서는 자유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의 어느 것이 되었든 제1차적 목표가 한국의 독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는 농민조합관계자의 검거 기사로 메워져 있는데 당시에는 그것을 경계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독립운동 차원에서 보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삼척지방의 농민조합 및 노동조합의 비밀결성과정을 살펴보면 [1931년 5월에 정건화, 황운대등이 삼척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 심부윤(沈富潤), 간부 이상인(李尙寅), 박래빈(朴來賓), 전엽(全燁), 서두인(徐斗仁), 오원모(吳元模) 등과 조선일보삼척지국에 모여 조선을 독립시켜 국체를 변경시키고 사유재산제를 부인하며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할 목적으로 노동조합 또는 농민조합 조직에 합의하고 각각 지구 책임자를 결성하였는데 정건화는 남양농민조합조직 책임자로, 황운대는 정라노동조합책임자가 되어 앞의 목적을 실행에 옮길 협의]를 하였으니 이것이 삼척지방의 농민조합, 노동조합 조직의 태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의 농민조합, 노동조합의 결성의 목적이 사유재산제를 부인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목적도 있겠으나 조선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차원 높은 투쟁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거니와 당시 일제치하에서는 어느 사회단체건 독립을 열망하였고 일반백성들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음이 사실이다.
삼척의 농민조합, 노동조합의 확대 강화를 위해 1931년 10월말에 근덕면 동막리 심부윤집에 모여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이 모임에서 삼척군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면 우선 그 하부조직으로 각 리에 조합반을 조직해야 하고 이의 지도 통일기관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궁극에 가서는 조선을 독립시켜 국체를 변경시키고 또 조선에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며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목적으로 K회인 결사를 조직하고 비서부 책임 황운대, 조직 연락부 책임 김덕환, 교수부 책임 심부윤과 부서를 결정하고 김덕환은 정라항, 황운대는 덕산리(德山里) 즉 삼척군내 노동중심지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하여 지구책임을 정하고 활동하였다.
⑤ 근덕면 사무소 습격사건
노동조합의 강화를 위해 비밀결사대(K회 결사)인 황운대, 김덕환, 심부윤과 함께 1931년 11월 중순경 삼척 정상리(汀上里) 산중에서 위 K회의 회합을 개최 협의하여 다수의 동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현재 진행하고 있는 근덕면과 노곡면 사이의 도로개수공사 부역에 대하여 근덕면민의 불평 불만이 있음을 이용하여 부역반대의 면민대회를 개최하고 동면장에게 반대이유를 개진하는 동시에 면민을 동원하여 대시위운동을 전개하며, 그 운동을 통하여 농민조합조직을 촉진하기로 결정, 1931년 11월 30일 심부윤 등이 근덕면 교가시장(交柯市場)에 면민 약 2·3백명을 집합시켜 시위, 근덕면 사무소를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검거 처형되기도 하였다.
⑥ 삼척 노농공작위원회(勞農工作委員會) 조직
위 근덕면사무소 습격사건으로 K회의 비밀결사는 소멸되었으나 이들은 다시 1933년 7월에 삼척노농공작위원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된다.
[1933년 7월 24일에 심부윤, 변소봉(卞小鳳), 정석대(鄭錫大), 이상인(李尙寅), 박래빈(朴來賓)과 함께 삼척면 오분리(梧粉里) 해안에 모여 삼척 노농공작위원회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삼척면은 주로 정라항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북삼면(北三面)은 농민조합, 근덕면은 농민조합 및 노동조합을 각각 조직할 것이며, 중앙부 책임 심부윤, 근덕면 책임 이상인, 북삼면 책임 박래빈, 삼척면 책임 정석대, 정라항을 중심으로 하는 책임 변소봉을 결정하여]활동하고 있었는데, 삼척면 책임자 정석대 부인 김반운(金磻云)여사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남편 정석대씨의 집은 근덕면 매원리인데 근덕면 대평리(大平里)에 살던 심부윤씨와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삼척보통학교에 다닐 때 선후배로서 삼척면에 하숙을 같이하여 형제와 같이 지냈고, 1923년 삼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모 중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때 중퇴하였다. 1926년 3월에 근덕면 대평리 보통학교 선생으로 근무, 1928년 삼척면 정하리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근무, 1933년에는 정상리 온유공장 서기로 근무하였는데 이 시절에는 정하리 119번지 임순태씨(현재 정하리 파출소 자리) 행랑방에 두 부부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세를 들어 살고 있었는데 오후 10시 이후 밤만 되면 남편인 정석대, 심부윤, 오원모, 이상인, 황운대, 정건화, 김모씨 등의 우두머리들이 모여 무엇인가 의논함으로 야식을 마련해 주기도 하고 주간에는 오분리(梧粉里) 해변 약수터 옆 폐광굴에서 수시로 집회를 가지기도 하고 때로는 정하리 성황당 숲 속에서도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이러던 중 1934년 음력 4월 2일 정석대씨 외의 많은 사람들이 삼척경찰서에 검거되고 본인은 약 1년간 경찰에 수시로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으나 자기 집에서 집회한 일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남편인 정석대씨는 1934년 음력 4월 2일에 삼척 경찰서에 검거, 그해 11월에 강릉 검사지청을 거쳐 1935년 1월 29일에 함흥 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1935년 10월 25일 2년반의 언도를 받고 1937년 음력 9월 3일에 석방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척노농공작위원회의 비밀결사를 위해 그들의 집회장소는 삼척면 오분리 해변 약수터 동굴과 정하리 성황당 숲속이 아니면 정석대집에서 비밀리에 모여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비밀결사조직은 조선의 독립과 사유재산제를 부인하고 공산주의사회건설이라는 혁명의식 앙양을 도모한다는 것이기에 당시 일제의 군국주의 식민정책으로서는 그대로 묵과할 수 없는 단체인 것만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하여 1934년 5월 21일을 기하여 삼척경찰서는 조선공산당 재건의 지하공작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정건화외 100여명의 청년을 검거하게 되었는데 8·9개월간 조사 끝에 전향자가 속출하여 거의 석방되고 그중 16명이 1935년 1월 29일에 함흥 검사국에 압송(1935. 1. 31 동아일보) 되었다가 1935년 10월 25일에 구형이 있은 후 31일에 언도 공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구형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덕환(金德煥) 6년 최윤달(崔潤達) 2년
황운대(黃雲大) 3년 홍길성(洪吉成) 2년반
주응록(朱應祿) 2년 변소봉(卞小鳳) 4년
이개동(李開東) 3년 정건화(鄭健和) 2년
심부윤(沈富潤) 3년 박래빈(朴來賓) 3년
최춘희(崔春熙) 2년 최동의(崔東義) 2년
정석대(鄭錫大) 2년반 정진옥(鄭振玉) 2년
최대희(崔大熙) 2년 이상인(李尙寅) 2년반
(1935. 10. 27. 동아일보)
이들 16명중 주응록 등 6명은 출감하고 1심 판결에 불복한 변소봉, 황운대, 이개동, 심부윤, 정건화, 박래빈, 이상인 등 7명은 1935年 12月 4日 경성으로 호송되어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가(1935. 12. 5 동아일보) 1936年 12月 23日 위 공소자중 5명을 경성복심원에서 피고인 등의 각 공소 이유없다고 판결 변소봉 4년, 황운대 3년, 이개동 2년 6개월, 심부윤 2년 6개월, 정건화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1936년 12월 24일 조선일보)
이렇게 삼척노동조합, 농민조합운동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운동을 하던 중 1934년 5월의 대거 검거되어 그 주동자들은 1936년 말 처형되고 말았으나 그들이 형을 마친 후에도 계속되었으니 조선일보(1937. 5. 5)에 [강원도 삼척청년동맹원으로 북삼면 농민조합 재건위원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혐위로 체포되었던 정의찬, 최윤달이 함흥 지방법원 공판에 1937. 4. 30에 회부되었다]라는 기사를 보아 알 수 있거니와 이들의 항일저항운동은 1930년대 말까지는 물론 1945년 해방 당시까지도 계속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상 삼척지방의 항일운동을 살펴보았다. 1895년 관동창의군은 유생의병장들에게 주도되어 위정척사적인 반외세, 반침략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1913년의 원덕임원리사건은 일제의 경제적인 수탈에 대하여 농민들의 저항운동이었다. 3·1 운동 때 삼척보교의 시위와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이러난 시위는 나라를 상실한 민족의 원통을 풀고자 보교학생마저도 궐기했던 국권회복의 항쟁이었다. 이러한 저항운동은 끝이 없이 게속되어 1930연대 전후하여 청년동맹, 신간회,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의 비밀 지하단체를 조직하여 수단방법을 가릴 것 없이 계속하여 일어났던 것이다.
삼척지방에서 일어났던 이러한 항일운동은 중앙이나 어떤 외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체에서 단독으로 계획하고 조직하여 일어났던 운동으로 이 고장에서도 외민족에 대한 민족의 자주성의 강한 면을 발견할 수 있거니와 이 자주정신이 유구한 이 민족을 보존 발전하는 원동이 되었으리라.
이소응에 대하여
춘천의병 진두지휘한 '황실의 후예' 이소응 1.황실의 후예로 태어나 화서학파의 계보를 따르다 1852년 강원도 춘천 남면 하방곡리에서 낙향한 황실의 후예 이도재의 장남으로, 선조 제9왕자 경창군의 9대손으로 태어났다. 6세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며 학문을 수학했으나 본격적 학문은 1872년 22세 때 아버지가 교유하던 화서 이 항로의 고제(高第)로 경기도 양평의 한포서시에서 강학중이던 성재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부터다. 화서 학파의 학문적 논리를 따르던 이소응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개항이 논의되던 1876년 동문 47명과 함께 상경해 '복합유생척양소'를 올려 강력한 개항반대론을 펼쳤다. 또 1889년 8월 유중교가 새로운 강학 장소를 찾아 충북 제천의 장담으로 남하하자 유인석 등과 함께 스승을 따라 이거, 제천과 처음 인연을 맺으며 독실한 학문수학의 기회를 가졌다. 2.위정척사론으로 무장하고 의병활동에 나서다 1894년 6월 김홍집 내각의 박영효 등이 갑오개혁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한 선생은 결사 신제를 따르지 않고 호적에도 들지 않는 등 강경한 입장을 펴 나갔다. 특히 일본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려 민족자존의 상징이던 상투를 잘랐다는 소식을 접한 이소응은 절대적 위기의식을 갖고 단발과 의관제도의 변혁을 비판하는 '훼복훼형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이소응은 1896년 1월 유중악. 유봉석과 함께 양평의 용문 산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춘천에서 활동하던 이경응을 비롯한 의병주창자들이 의병대장직을 강청하면서 의병항일전에 투신하게 됐다. 3.전국 의병활동의 선두에서 요동망명까지 이소응이 이끌던 춘천의병은 당시 삭발하고 부임하던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 승을 가평관아에 잡아 처단하는 획기적 사건을 통해 전국적으로 명성을 이어갔다. 이는 의병이 부임관리를 처단한 최초의 사건으로 내각 대신은 물론 자방관원들에게도 일대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기록되면서 중앙정부에서 춘천의병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계기를 가져왔다. 그러나 당시 훈련되지 않은데다 전략, 전술에 익숙지 못했던 춘천의병들이 관군과 내통하던 이에 의해 결국 패하게 됨에 따라 이소응은 전력의 열세를 통감하고 제천의 진에 합류한 후 강릉의 민용호 의진이나 유인 석의 서북 행에 합류해 활동을 계속했다. 이 때 이소응은 의병들의 행동강령을 청해 보다 철저한 투쟁의식을 심어주기위해 '군중시무대장'을 펴내는 등 참모로서의 역할을 다해 학자와 의병장으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4.이역만리에서 조국광복의 한을 묻다 한일병탄을 눈앞에 둔 1909년 이소응은 일진회원들의 횡포가 가중되자 가족을 이끌고 청풍 장선리 어리곡에서 유거하며 갖은 고초를 겪으며 생활했다. 나라가 망한 이듬해 부인 유씨가 타계하자 이소응은 국외망명을 결심하고 1911년 봄 오랜 숙원이던 망명길을 떠나 20년간 유인석, 유홍석 등 지사들과 본토진공의 방략을 모색하다 몽골 사막지대인 강평현 제7구에서 1930년 4월 23일(음력 3월 25일) 7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이소응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담은 유고가 후학에 의해1969년 '습재집'으로 간행되었으며 62년 건국훈장 국민장에서 90년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추서됐다. 국가존망의 위기의식속에서 의병항쟁과 항일운동으로 평생을 바친 이소응은 스스로 '평생의 학문은 어디까지나 영관된 조국에 있고 종국(宗國)이 광복될 날만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일본 제국주의 외압이라는 민족적 수난기에 처해 민족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정신적 지표로서 민족 자주의식 고양에 이바지한 그의 뜻이 다시금 새겨질 수 있도록 선양사업의 추진이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