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3:1~9 / 욥의 반항과 근심
(욥 23: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욥 23: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욥 23: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욥 23: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욥 23: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욥 23: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욥 23: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욥 23: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욥 23: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오늘 말씀에서 욥은 자신이 받는 고난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단련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단련을 통하여 자신이 정금같이 변화될 소망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이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고난을 감당할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7) 욥은 오늘도 하나님께 반항하고 근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의로운 자신에게 왜 고난을 주셨는지 하나님께 반항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죄가 많은 다른 사람도 잘 사는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반항심이 생겼습니다.
혹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가 있는가 근심하였습니다. 내가 깨끗하게 산다고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도 알지 못하는 죄가 있는가 근심되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탄식하여도 없어지지 않는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항심과 근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반항심과 근심을 사람들에게 가지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위로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그를 정죄하고 그의 마음에 상처를 두었습니다. 그는 반항심과 근심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고자 하나님께 들고 나갔습니다.
우리는 욥을 통해서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는 우리는 문제를 갖고 사람들과 싸우지 말고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욥이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친구들과 다투면 피곤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과 대화해야 합니다.
둘째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자신의 사정을 아뢰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합리적인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반항하는 마음 근심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난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설명을 들은 소경은 힘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은 죽을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해석을 하자 제자들은 그 사건을 소망 가운데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우연이나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 가운데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었던 한국동란, IMF 경제 위기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우리 민족을 회개시키고 연단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질병에 걸렸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이런 것을 주셨는지 하나님 편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면 의미가 생기고 소망이 생깁니다.
(8,9)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가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뒤로 가도 하나님은 그곳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왼쪽에서 일하시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오른쪽에서 일하고 계시지만 오른쪽으로 돌이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사방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욥과 함께하셨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를 신뢰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욥은 외적인 어떤 변화나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표적을 구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0절에 ‘그러나’ 가 중요합니다. ‘그러나’는 극적인 전환을 의미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외적인 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자 내면적인 데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우침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욥에게 한 가지 확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으로 그의 마음에 대답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무죄함을 아시고 그의 선을 행한 것도 아시고 의로운 것도 아십니다. 그의 연약함을 아시고 고통하는 것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욥을 아시고 하나님의 때에 욥의 고통을 감당하여 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만 기억해도 나의 슬픔이 많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시험하실 때는 피할 길도 함께 내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자신의 목숨까지 우리를 위하여 버리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 반항심과 근심이 해결됩니다.
둘째,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단련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단련하여 그의 믿음을 순금과 같이 만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시련의 때에 받는 고난으로 인하여 잠깐 근심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련의 때도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보다 귀한 믿음으로 단련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믿음으로 만들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