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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호/ 싸울 생각은 않고 구세주만 기다려
● 자신들은 사제직결의 신심을 한다고 하지만, 실천 없는 사제직결은 없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어서와 선생님 말씀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무도심(無道心)의 자는 생사를 떠나지 못함이라” (어서 237쪽) 즉 불도를 구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생사의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요컨대 당시 천태종의 중들은 ‘악과 투쟁하는 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았습니다. 본질은 무도심이며, 이는 사이비 신앙인을 말합니다.
대성인은 당시 천태종 사람들을 가리켜 일본국 일체중생의 대원적이라고 가책 하였습니다. <개목초 강의, 하, 207-208쪽> 천태종을 생각하면 지금의 53그룹을 생각하게 합니다.
● 선의연대는 ‘혼자 선다’는 사제직결의 신심으로 집행부의 방법을 가책
선생님께서는 “자비의 투쟁을 일으켜 자신의 타성, 방심, 비겁 등 생명에 낀 녹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지혜로운 투쟁을 관철하는 사람은, 인간을 속박하는 고정관념, 인간을 소외하는 불신의 무명을 타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SGI반대파’라는 누명을 쓰고 18년의 세월을 투쟁하면서, 타성, 방심, 비겁 등의 녹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지속되는 집행부의 탄압을 받아오면서, 인간을 속박하는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인간을 소외하는 불신의 생명이 얼마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악과 투쟁하는 사람은 정신의 부패를 물리치는 맑게 흐르는 물로 자기의 생명도 닦아, 만인이 행복해지기를 기원하는 광대한 경애를 한없이 열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계의 더할 나위 없는 추억을 생명에 새길 수 있습니다.
한국은 투쟁하는 개혁연대가 있어 행복합니다. 광선유포를 위한 인생의 영광은, 끝까지 투쟁하는데 있습니다. 개혁연대 모든 분들을 한 없이 존경합니다.
● 어떻게 해야 초창의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대화하고 싶습니다.
“불교회와 하나로 통일이 될 때까지 타성에 흘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대화는 언제나 신심으로 시작하여 신심으로 끝나야 합니다. 신심은 이케다 선생님께 배워야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인간혁명’에 광선유포에 대한 모든 것을 말씀하시고 게십니다.
저의 경우 한의원이 어려워지면 야마모토 선생님이 선거전을 성공시킨 인간혁명을 공부하며 원점을 새깁니다. 다음은 인간혁명에 나오는 지방선거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타구에서 출사표를 낸 고니시 다케오의 선거 사무실 벽에는 “신심으로 승리”라는 표어가 붙었다. 그러나 도다는 우려했다. 선거활동이 단순히 평범하고 피상적인 활동으로 시종일관하게 되면 낙선할 위험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공고일로부터 수일이 지난 후, 도다는 신이치를 불러 오타구의 고니시 다케오의 선거 최고 책임자로 지휘할 것을 지시했다. 도다의 뜻을 받아 신이치가 고니시의 선거사무실에 가보니 과연 도다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곧 알았다.
대다수의 학회원들은 너도나도 사무실에 얼굴을 내미는 것이 마치 선거운동인 양 생각하고,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댔다. 사무실은 언제나 학회원으로 넘쳐흘러 박수가 터지고 열기는 고조됐으나 실질적인 싸움은 제자리 걸음이었다. 간부는 차를 마시고 잡담으로 소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동지의 단결은 선거에 휩쓸려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신심은 언제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선거가 있든 없든 학회행사는 조금도 변경됨이 없이 추진되어야 하며 이상적인 광선유포의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선거활동에만 전념한 오타구는 이 기본자세를 잊고 헛되이 가사상태에 빠져들고 있지 않은가. 그날 밤 오타구의 수뇌회의에 참석해 보니 호언장담하는 이면에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자가 생겨나고 있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우리들은 선거를 위한 선거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심조차도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선거 일변도가 아니고서는 승리할 수 없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신심의 원점을 잃고 우리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심 근본으로 마음껏 당당하게 활동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이치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심으로 단결하여 승리했습니다.
● 맺음 말
법화경은 장군학입니다. “무슨 병법보다도 법화경의 병법을 쓰실 지어다”입니다. 남은 것은 우리들에게 얼마만큼의 기념이 있는가, 얼마만큼의 행동이 뒤따르는 가에 달려있는 셈입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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