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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농민을 분노하게 한 조병갑,
공주 山中에 잠들어 있다
동학농민전쟁을 촉발시킨
고부군수 조병갑의 일생
*** 충남 공주시 신풍면 한 산속에 있는 조병갑 무덤 ***
----1894년 동학농민전쟁 후 조병갑은 고향인 산 너머 예산
대흥면으로 숨었다가 이곳 신풍면에서 생을 마쳤다.
조병갑 무덤 옆 능선에는 그 아버지 조규순 부부 묘가 있다.
두 사람 묘가 있는 이 능선 전체는 지금도 그 후손 소유다.
동학란이 진압되면서 조병갑은 전남 고금도로 유배형을
받았지만 이듬해 음력 7월 다른 동학 관련 탐관오리 278명과
함께 사면되고 이후 법부 민사국장, 한성재판소 재판관,
황실 비서원 주임관으로 승승장구했다.
만석보를 만들고 아버지 조규순 공덕비 비각을 만들며
돈을 착복한 행위는 개인적인 비리였지만, 역사적으로는
동학을 촉발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탐관오리 하나가 망국의 지옥문을 연 것이다.
정읍에 남아 있는 만석보 흔적과 조규순 공덕비,
그리고 공주 산기슭 상석도 비석도 없는 조병갑 무덤이
129년 전 흑역사를 보여준다----
< 박종인 기자 >
** 유튜브 https://youtu.be/op9wZEGbYEg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역사 흐름을 바꾼 탐관오리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였던 조병갑(趙秉甲)은
탐관오리(貪官汚吏)였다.
더럽고 탐욕스러운 관리였다.
얼마나 탐욕스럽고 더러웠나.
탐관오리들로 인해 조선팔도에 민란이 들끓던
그때, 고종도
“조병갑이 형편없이 수령 노릇을 했다’
(1894년 음4월 24일(이하 음력)
‘고종실록’)고 힐난하고 그가 저지른 일을
조사한 현지 조사관이
“이전에 듣지 못한 일[事未前聞·사미전문]”
(1894년 7월 17일 ‘고종실록’)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탐욕스럽고 더러웠다.
그런데 조병갑은 본인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 흐름을 역류시킨 사람이다.
조선 근대사에 끼친 영향을 따진다면
이 조병갑을 능가할 개인이 없다.
그저 개인 탐욕에 눈이 멀어 만석보를 만들고
아비 공덕비 비각을 세웠다.
물세를 뜯고 비각 건축비를 착취했다.
착취당한 백성이 죽창을 들었다.
그 죽창을 꺾기 위해 정부에서 외국군을
불러들였다.
그 외국군끼리 조선에서 전쟁을 벌였다.
전쟁 결과 조선이 일본 손아귀에 들어가는,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돌아간 역사를
조병갑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조병갑이 충남 공주 산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잠들어 있다.
옆 능선에는 그 아버지 조규순 부부 무덤도
있다.
동진강에는 만석보 흔적이 남아 있다.
옛 고부 땅에는 조규순 선정비가 여태 서
있다.
그리고 역사 흐름을 바꾼 장본인, 조병갑이
저기 잠들어 있다.
동학의 시작, 1893년 최제우 신원
1800년 조선 22대 국왕 정조가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며느리로 간택하고 죽었다.
김조순 사위이자 23대 국왕 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왕실 외척이 국정을 농단한
소년왕(少年王) 시대를 세도정치 시대라고
부른다.
국정은 농단당하고, 그 와중에 400년 누적된
사회적 모순이 물 위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얌전하던 조선 백성이 죽창을 들기
시작한 민란 시대이기도 했다.
1893년 3월 충북 보은에 동학교도
수만명이 집합했다.
1864년 처형당한 초대 교주 최제우의
복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충청감사 조병식은 이 요구를 무시하고
탄압으로 맞섰다.
정부는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급파해
동학군을 해산시키고 민원을 접수했다.
그해 11월 어윤중이 정부에 올린 보고서는
이러했다.
‘조병식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이후 몹시
가혹하고 끝없이 가렴주구하여 진실로
근래에는 들어보지도 못하였다.’
(1893년 11월 7일 ‘승정원일기’,
‘조병식 탐학 장계’)
‘공주 백성 오덕근’을 비롯해 땅 가진 사람들은
모두 ‘간음했다’고 누명을 씌워 쫓아내고
한겨울에 집과 땅을 차지했다.
아산 백성 김상준은 관아로 끌고와 죄를
자백하라며 주리를 틀었다
자백할 죄도, 돈도 없던 김상준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조병식에게 돈을 뜯긴 사람들 명단과
액수가 워낙 많아서 보고서에는 부록이
따로 붙어 있었다.
이 조병식은 이듬해 7월 15일 충남 면천에
구금된 뒤 19일 의정부 요청에 의해 수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7월 30일 고종은 조병식 석방을
명했다.
9월 23일 고종은 조병식을 사면하고 관직에
복귀시키라고 명했다.(이상 해당 날짜 ‘고종실록’)
그리고 4개월 뒤 전라도 고부에서 또다시
농민들이 죽창을 들었다.
이번에는 조병식 4촌(8촌이라고도 한다) 동생,
고부군수 조병갑이 문제였다.
고부군수 조병갑과 고종정권 ‘빽’
1892년 4월 28일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마치 양떼목장에 들어온
늑대처럼 악행을 즐겼다.
악행은 1893년 11월 30일 익산군수로
발령 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조병갑은 익산으로 떠나지 않았다.
그해 12월 24일 신임 고부군수 이은용이
황해도 안악군수로 발령이 되더니
1894년 1월 2일까지 신좌묵, 이규백,
하긍일, 박희성, 강인철 순으로 계속
신임 고부군수가 바뀌었다.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서류상으로 고부군수가
일곱명이 바뀐 것이다.
결국 이조(吏曹)에서는
“조병갑이 세금 징수에 문제가 많았지만
새로 군수를 뽑으면 일을 더 못하리라 본다”
며 익산으로 갈 조병갑을 고부에 눌러
앉혔다.
(1893년 11월 30일~1894년 1월 9일 ‘승정원일기’)
왜 일곱명이나 후임이 갈려나가고,
왜 조병갑이 명령에 불복하고 자리를 지켰는지
이 난해한 인사 대행진에 힌트가 있다.
1894년 2월 조병갑의 악행이 폭로된 뒤
전라관찰사 김문현이 조병갑을 체포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의정부 정승들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칭찬한다고 연임시키더니
[始也褒仍·시야포잉] 지금은 잡아오겠다고?’
(1894년 2월 15일 ‘고종실록’) 관찰사 ‘빽’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중앙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고부군수 부임 직전인 1892년 4월
영동현감이던 조병갑은 중앙정부 기기국
위원으로 전임됐다.
그 무렵 왕비 민씨가 조카 민영소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병갑이는 그러하나, 그 색(色·관직) 외에는
나지 않아 다른 데로 하겠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민비 편지, ‘고궁 1178′)
일단 다른 직책에 임명한 뒤 상황을 보겠다는
뜻이다.
조병갑은 기기국 위원 재임 19일 만인
4월 28일 고부군수로 발령이 났다.
‘고부군수 조병갑’ 뒤에 고종-민씨 척족
세력의 강력한 ‘빽’이 작용했다는 증거다.
----전북 정읍 동진강 변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만석보 흔적.
조병갑은 기존에 있는 보(洑) 하류 쪽에 새로운 보를 만들고
물세를 징수해 농민 분노를 촉발했다----
< 박종인 기자 >
역사적인 악행, 만석보와 공덕비
이러구러한 경로로 조병갑이
고부군수가 되었다.
동학을 이끌었던 전봉준에 따르면,
조병갑이 군수로 있으면서 저지른 비리는
이러했다.
‘첫째, 남의 산 나무를 벌목하고 주민을
강제 동원해 원래 있던 민보(民洑) 아래
또 보를 쌓아 물세를 징수하고
둘째, 논마다 세금을 추가로 걷고
셋째,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추가로 세금을
걷고
넷째, 부자들에게 불효, 음행 따위 죄목으
로 걷어낸 돈이 2만 냥이 넘고
다섯째, 자기 아비 공덕비 비각 세운다고
천냥을 뜯고
여섯째, 나라 세금 낸다고 고급 쌀을
거두더니 정작 중앙에는 저질 쌀로 세금을
납부하고 이득은 횡령한 죄.’
(동학농민혁명 사료 아카이브,
1895년 2월 9일 ‘전봉준 공초’, ‘초초문목(初招問目)’)
전봉준은 이 모두를 “수령이 홀로 행했다”
고 답했다.
여러 죄상 가운데 만석보가 가장 컸다.
고부에 흐르는 동진강물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쌓아 놓은 둑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조병갑이 민력을 강제 동원하고 남의 산
소나무를 강제로 징발해 또 둑을 쌓고
물세를 신설해 챙겼다는 것이다.
악행은 부임하자마자 ‘처음부터 행했고’,
그 모든 악행 이득을 ‘혼자서 다 챙겼다’는
것이다.
1894년 1월 10일 고부 농민이 죽창을
들었다.
조병갑은 도주했다.
동학군은 고부관아 감옥을 파괴하고 창고를
도끼로 열어 벼 1400석을 풀었다.
그리고 1월 17일 농민들은 만석보를 파괴했다.
(국사편찬위, ‘동학농민혁명사 일지’)
----정읍 피향정에 있는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 선정비.
조병갑은 이 선정비 비각 건축비를 주민에게 뜯어내며
자기 배를 채웠다.
일개 지방 탐관오리에게는 개인 비리에 불과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이후 조선 근대사 흐름을 바꾸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 박종인 기자 >
되돌리지 못한 흐름
동진강은 다시 흘러갔다.
하지만 한번 역류를 시작한 역사는
되돌리지 못했다.
2월 15일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는 철저하게 농민 탄압으로
일관했다.
농민 반란은 더욱 확대돼 전국으로
확산됐다.
황토현에서 동학군에 패한 관군사령관
홍계훈은 조정에 원병 요청을 건의했다.
고종은 최측근이자 농민군의 타도
대상인 민영휘와 함께 국내 주둔 중이던
청군사령관 원세개에게 군사를 요청했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 정부
공식 요청에 병사를 파병했다.
일본은 ‘조선 파병은 공동으로 한다’는
1885년 ‘천진조약’ 조항을 내밀고
일본군을 파병했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터졌다.
동학전쟁은 조선관군과 일본군 연합작전에
궤멸됐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청일전쟁 종전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
1조에 일본은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는
조항을 삽입했다.
대륙 진출을 노리던 일본이 마침내 조선을
집어삼킬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역추적하면 조병갑이라는
더럽고 탐욕스러운 지방관리, 중앙권력
비호를 받는 탐관오리 개인 비리가 떡하니
앉아 있다.
일개 관리 비리가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된 것이다.
----충남 공주 조병갑 무덤 옆 능선에 있는 아버지 조규순 부부묘.
비석은 1970년 후손이 세웠다----
< 박종인 기자 >
조병갑의 평화로운 말로
실록에 따르면 조병갑은
1894년 5월 4일 두 차례 곤장을 맞고
전남 완도 고금도로 유배됐다.
죄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듬해 3월 12일 갑오개혁정부 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무대신 서광범이 고종에게
조병갑 재수사를 요청하고 고금도에
관리를 보내 조병갑을 서울로 압송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음력 5월 4일
고종은 개혁정부가 제시한 개혁안을 모조리
거부하고
“작년 6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
고 선언했다.
(‘일본외교문서’ 28권 1책, p444~445, 7.
조선 국내정 개혁에 관한 건 301. 왕궁
호위병 교대에 관한 국왕과 내각 충돌보고
1895년 6월 26일)
그리고 음력 7월 3일 동학과 관련돼
유배형을 받은 인물 279명이 일괄 석방됐다.
그 가운데 민영휘, 민영주, 민형식, 민병석,
민응식 같은 척족 여흥 민씨들이
있었고 동학의 먼 원인을 제공한 조병식과
동학을 폭발시킨 집안 동생 조병갑이
들어 있었다.(1895년 7월 3일 ‘고종실록’)
조병갑은 1898년 양력 1월 2일 대한제국
법부 민사국장으로 권력에 복귀했다.
6개월 뒤인 7월 2일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고공판이 있었다.
최시형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 배석판사 2명 가운데 한 명이
조병갑이었다.
1904년 6월 20일 조병갑은 황실 비서원
주임관인 비서원승에 임명됐다.
(같은 날 ‘황성신문’)
1907년 현재 조병갑은 관직에서 은퇴한
뒤 충청도 청양에 살았다.
(1907년 7월 3일 ‘황성신문’)
청양 북쪽 예산 대흥면은 양주 조씨
집성촌이다.
조병갑 큰아버지인 전 영의정 조두순
집이 남아 있다.
대흥면에서는 바로 이 집에 조병갑이
살았다고 전한다.
(대흥향토지편찬위원회, ‘대흥향토지’, 2017, p527)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은 1885년에
죽었는데, 부인 이씨와 함께 산 너머
공주 신풍면 사랑골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조규순 묘비석’)
1970년 그 후손이 무덤가에 비석을
세웠다.
공식 기록에서 종적이 끊긴 조병갑은
바로 그 아버지 옆 능선에 묻혀 있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석물(石物) 하나 없지만 땅은 양지바르다.
두 무덤이 있는 산기슭과 마을 앞쪽 임야는
모두 양주 조씨 조규순 후손 명의로
등기돼 있다.
주인을 알리는 석물은 없지만, 마을 주민에
따르면, 해마다 봄이면 답사 단체가 무덤을
찾는다.
평화롭게, 근대사 물줄기를 바꾼 관리
하나가 그렇게 잠잔다.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송림산인
문제인의 악행과 이제명의 비리를 합쳐 놓은 인물이
조병갑인 것 같다.
맥가이더
부관참시하자,우선적으로 선조,고종,조병갑
술퍼맨
혁명이라고 말 하는 그 동학이 조선왕실을 흔들어
약화시키고 청일전쟁을 일으켜 그 청일전쟁에
따라 일본이 득세하여 한반도를 식민지화 한 것이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의 원인은 동학이 될 수도
있겠군요.
SeanLee
노정권때 대통령비서실 송보수석 비서관이었던
조기숙이 조병갑의 증손녀라죠..
결자해지
조선왕조 오백년의 세월동안 고종같은 흐리멍텅한
인물이 왕이 되었으니..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든말든 제 안위에만 몰두했던
무능력한 왕이었으니 말이다...
역사를 뒤돌아보고 현실을 직시함과 동시에
미래를 설계.개척해 나가야하는데 이를 깨우치지
못한 인간들이 나라를 운영한다고 까불다가
엉망으로 만든이 의 대표적인 인물이 문재인같은
인간이 아니었을까...
후세의 자손들은 이렇게 평가하지 않을까 싶다.
"현대사 역대의 대통령중 가장 무능력한 인물이
문재인이었다" 라고...
술집주인
조기숙의 증조부라며?
춘풍록엽
동학혁명 이후 녹두장군 전봉준의 일가들은
멸족 위기에 처해 타향으로 떠돌았다.
그래도 경상도로 피한 전두환의 할아버지가
삼성 이병철 집안의 마름이 되었다.
탐관오리 조병갑은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계속
공직생활을 했고 그 자손들은 잘 풀렸다.
전북도지사 후보로 나왔던 조배숙도 조병갑의
직계 후손이다.
박대마
우리 현대사의 종북주사파 518 향우회팔이
미친 개떨냔늠덜은 조병갑이 조씨네 종합판
세트네요~~!!!
진오석
문재인 정권과 흡사하구먼 5년간 도적질한
나쁜넘들이다
東禹
좌파 조기숙은 병갑이 가렴주구한 재물로 크고,
산자인데, 지금쯤 죽창들고, 병갑이 부관참시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淺學菲才
조병갑=이죄명. 물죄인 = 탐관오리
청진Kim
정규재라는 정신나간 자가 조병갑이 수로를
만들었다고 공치사를 했다.
과연 그러한가?
멀쩡한 저수지와 수로를 놔두고 새로 만들어
수세를 갈취한 자가 조병갑이다.
조병갑이 수로를 만든 것이 농민을 위함인가?
아니면 자신을 위함인가?
정규재는 대답하라.
해몽
저 조선을 멸망시킨 후 식민지로의 전락의 원흉이
된 이 역적놈을 제대로 처벌도 못한 고종이나
일제와 6.25 원흉의 잔당들을 똑같이 처벌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들이 모두 같은 역사의
죄인들이다.
이 죄인들의 후손들은 2다리 뻗고 여전히 부를
누리고 있다.
河馬
그의 증손녀가 민주당 국회의원을 여러번
했었지 !
공주 신풍면 평소리(사랑골)에 그의 무덤이 있는줄
까맣게 몰랐네 ~~~!!
월드컵북로
조선은 망할만 했다..
조병갑은 격발장치에 불과할 뿐..
고종같은 자를 나라를 지키려한 비운의 황제라
묘사하고 민비를 조선의국모 어쩌구 하는 연극까지
만들어서 추종하려는 한심한 인간들이 있으니
양산개나 조국 형보수지 같은 놈들이 활개를 치지..
로타블루
이씨조선 오백년을 통털어 가장 무능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없고 단지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왕이되고 지하고싶은 대로 온갖
분탕질을 한 왕이 셋이있었으니 선조와 인조와
고종이 바로 그들이다..
성리학이니 사대주의니 외척에 의한 국정농단이니
하는 부수적인 요인들을 차치하고라도 가장
무능한 자들이였음에 이씨 조선이 오백년을
버터어온것도 가히 기적과도 같았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들을 망각한다면 또다시
그런시절이 도래한다.
사상마련
민주당을 만든 원조가 조선에서는 지수세력으로
일제시내에는 친일세력으로 건국후에는
좌파세력들로 변해 죽창가를 부르죠.
어찌보면 개가 웃을 일이죠.
노무현시대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조병갑의
자손이였죠!
근데 그들은 친일청산 죽창가를 불렀죠.
진정한 우파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이 파직후에도
재임용되어 계속 관직을 이어나갔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학교에서는 안 배운다.
창피해서 말 못하는 모양이다.
권선징악에도 안 맞다.
개인은 편히 살았을지라도 역사는 그를
이완용 수준으로 조병갑은 악인으로 기억되고
있고 앞으로 기억될 것이다.
웅비4해
초병갑이 촉발시킨 동학란으로 비무장한 무식한
농민들이 신식무기 앞에 몰살당했다.
그들은 일본군의 조선반도 친출의 계기가
되었다.
억울하게 몰살당한 농민들의 원귀는 없었는지
조병갑의 후손은 잘 산다.
국회의원까지 하고
사자산인
병갑이가 환생하여 재명이로 왔네요.
콘테
조기숙은 뭐래나 들어보자
그 피는 어디 안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