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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밝홈실 참의공파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설죽선생
<1920년대의 무장독립단체>
북로군정서
김좌진(金佐鎭)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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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金佐鎭, 1889년 12월 16일(음력 11월 24일) ~ 1930년 1월 24일)은 한국의 아나키스트, 사상가,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 교육자, 군인, 시인이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으며, 김동삼, 오동진 등과 3대 맹장(猛將)으로 불리기도 했다.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본관은 (신)안동, 김상용의 11대손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나이 17세에 집안의 가노를 해방 및 땅을 분배하였고 민족적 자립을 위한 한국의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는 동시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생애
1889년 12월 16일(음력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하였다. 3살 때 아버지 김형규를 여의었으나 넉넉한 살림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하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모친인 한산 이씨에 의해 엄하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904년 해주 오씨 오숙근과 혼인하였다.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노 해방 및 전답을 무상 분배한 뒤 1907년 호서(충청도) 지방을 밝게 한다는 즉 개화한다는 뜻인 호명학교를 설립하였다.
가산을 정리한 뒤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으로 된 자신의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했다.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기호흥학회 장학재단을 설립하였고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였다. 안창호·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를 설립하여 교감을 역임하는 한편,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조달차 돈의동에 사는 족질 김종근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복역 중 김구와도 조우한다. 191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김좌진은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는 시를 지었다.
1917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박상진 등과 활동하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정의단에 합류한 군사부문 책임자가 되었고 동 단체를 군정부로 개편한 후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1919년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했다.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하였다. 또한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8년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하였고 1929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었다. 1930년 1월 24일 주중청년협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이범석(이범석)장군
이범석(李範奭, 1900년 10월 20일 ~ 1972년 5월 11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군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 등지에서 항일독립활동을 하였으며,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뒤 소련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 광복군의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세종대왕의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의 17대손이며 이문하의 아들이다. 호는 철기(鐵驥), 자는 인남(麟男)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왕운산(王雲山), 인남(麟男), 철기(哲琦), 이국근(李國根), 이국진(李國鎭) 등이 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과 광복군 활동
사관생도 시절
1916년 이범석은 신규식의 추천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총통 손문을 만날 수 있었다. 손문은 신규식에게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신규식을 통해 손문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손문의 천거로 손문이 혁명간부를 양성하던 운남육군강무학교 기병과에 12기로 입학하였다.
6개월간 신병교육 수료 후, 기병과에 편입하여 32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1919년 1월에 중국 운남 육군강무학교를 기병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4월, 견습사관 재직 중 국내에서 발생한 3.1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였다. 곧 운남성을 출발하여 6월 상하이에 도착, 신규식, 이시영 등을 만났다. 2개월간 상하이에 체류하며 유격전투 준비를 한 후 이시영 등의 추천으로 그는 1919년 가을 중국 상하이를 출발, 만주 신흥무관학교로 갔다.
만주 독립군 활동
이시영의 소개로 그는 만주 봉천성 유하현에 있던 신흥군관학교에 도착, 김광서(金光瑞), 신팔균(申八均), 지청천(地靑天)을 만났다. 1919년 가을부터 1920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1920년 이범석은 길림성(吉林省)의 왕청현(汪淸縣)에 도착,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담하여 중대장으로 청산리 대첩에 참전했고 이어 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초 그는 자신의 전재산과 교포들의 모금과 모금결사대의 활동의 성과로 체코군으로부터 다량의 탄환과 소포, 중기관총, 포탄, 화약 당을 사들였다.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한 뒤 그는 사관생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청산리 대첩
1920년 3월 그는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의 부름을 받고 수천리를 도보로 강행군하여 왕청현(汪淸縣)에 있는 북로군정서로 가서 연성대장(硏成大長)으로 부임하였다. 8월 23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 학생 3백 수십명을 졸업시키고 그 중 150명과 사령부 경비대원 및 새로 모집한 병사들로 북로군정서 보병 1개 대대를 조직하여 이동했다.
9월 7일 이범석과 김좌진은 병력을 이끌고 청산리로 이동했다. 탄띠와 소총으로 무장 옥수수 가루와 콩가루로 만든 떡과 추위를 견디고, 산맥을 타고 1개월간의 도보 이동으로 20년 10월 5일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에 도착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의 토벌군이 청산리 주위를 포위하여 오자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은 임시 전투조직을 개편하고 총사령관 김좌진, 군정서 참모장 나중소(羅仲昭), 사령관 부관 박영희(朴英熙) 등으로 개편 편성되었으며, 이때 이범석은 다시 북로군정서 연성대장(硏成隊長) 겸 중대장이 되어 본대인 보병부대 1개 대대를 송림평의 진을 쳤다가 운평(白雲平) 숲속의 지형에 매복시켰다.
첩보원으로부터 왜병이 도착한다는 전갈을 받은 이범석은 산꼭대기에 올라 망원경으로 일본군의 이동을 지켜봤다. 정탐군을 보내 보병, 포병, 기병, 공병을 합친 병력이 1만 명으로 5만 대군의 선발대라고 하였다. 소총, 중기관총, 수류탄 80만발의 탄환을 집결한 뒤 10월 20일 새벽 그는 우진 이민화(李敏華), 좌진 한근량(韓根凉) 중우 진의 김동(金動), 중좌진의 이교성(李驕成)에게 각각 2백발의 탄환을 직접 분배하였다. 10월 20일 9시경부터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그날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기습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오래된 말똥을 뿌린 뒤, 일본군의 척후병이 나타나 말똥을 채취하여 오래전에 지나간 것으로 알고 일본군 주력부대 5만이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집중 사격을 가했다. 1차 선발대와 2차 선발대가 전멸하고 3차 선발대가 나타났다가 우왕좌왕 흩어질 때 이범석은 마상에서 독전 연설을 했다. 10월 21일부터 10월 23일 화룡현내 천수동(泉水洞), 어랑촌(漁郞村), 만록구(萬鹿溝) 등으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일본군을 습격, 독립군 전사자는 20여명이었으나 일본군 수만명의 사상자를 내는 전과를 올렸다.
청산리에서 성과를 올린 뒤 그는 따로 병력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이주, 새벽 2시에 천수동 골짜기에서 19사단을 공격하고 포로로 잡힌 독립군을 구출했다. 마록구(馬麓溝)에서는 2천 명의 군사로 2만 명의 일본군을 상대, 한인 교포들이 탄환과 물자를 수송하였고 90명의 독립군 전사자를 내고 2만 명의 일본군을 섬멸했다.
1921년 1월 26일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했다. 이 연합부대는 러시아로 넘어오기 직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서일의 북로군정서, 신흥학교 교관 지청천, 광복단 등 몇 개의 부대가 모인 것이다. 이범석도 이들을 따라 이만까지 갔다. 2월 말, 러시아행을 탐탁해하지 않던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은 함께 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고려혁명군, 광복군 활동
이후 독립군 진영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밀산에 집결했다가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동했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소련에서 소련합동민족군 연해주지구 지휘관으로 활동하고 1923년 5월에는 김규식(金奎植), 고평(高平) 등과 함께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여 수 년간의 실전 체험에서 그보다 진보적인 이념과 방법으로 통일성 잃은 산만한 행동을 집중, 체계화 하였으며 군사교육을 강화하였다. 고려혁명군 창설시 그는 기병사령(騎兵司令)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 후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고려혁명군 결사대의 조직에 참여하고, 고려혁명군결사대 정치부원, 피복창 주임 등을 역임했다.
소련 탈출과 중국군 복무
만주에 도착, 일부 독립군은 장종창에게 무장해제당하고 그는 장종창 부대에 편입, 중국군 소좌로 임관하여 중국군 직업 군인이 되었다.
1927년 77명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게릴라 유격전을 했다.
1928년 마점산이 이끌던 중국 동북항일군 작전과장으로 취임하고 중국군 소장으로 임관하였다. 1929년 일본 경찰의 추적으로 만주에서 외몽골로 피신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마점산 부대의 흑룡강 제1군사령부 작전과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중국어와 러시아어 등에 능하여 마점산 부대의 작전과장, 계급은 중국군 소장 자격으로 유럽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임시정부에 합류, 광복군 활동
만주에서 무장항일활동의 실패로 병력만 잃게 되자 1933년 5~6월경 중 이범석은 지청천과 함께 100여 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중국본토로 건너왔다. 1933년 중국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한인특별반이 편성되자 한국인 특별반 장교대장에 선임되었다.
1933년 후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소재지에 도착, 김구 세력에 합류하였다. 1934년 낙양군관학교 교육대장이 되었다. 1936년 중국 국민군에 재입대하여 곧 양호성(楊虎城) 휘하의 기병연대장이 되었다가, 이후 중국육군 제3로군 참의급(參議級) 고급참모(중국군 소장)겸 중국군 제3집단군 제50군단 참모처장, 제3집단군 55군단 참모처장 등을 지냈다.
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 결성되자 김구·지청천과 함께 광복군에 창군에 참여하여, 한국 광복군 육군소장 에 임명되었다. 1941년 광복군 중장에 임명되고 광복군사령부 참모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제5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이 피살된 뒤 1942년 4월 광복군의 각지대 개편에 따라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그는 광복군 제2지대장을 자원하여,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으로 개편된 광복군 제2지대장직을 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2지대장으로 부임하여 서안(西安)으로 건너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교육훈련과 항일투쟁을 하였다.
이후 임정 주석 김구, 구미위원장 이승만 등의 주선으로 미국과 연결 미 첩보국 OSS와 합동훈련을 시도하면서 특수훈련에 참여한다
백포(白圃) 서일(徐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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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徐一, 1881년 2월 26일 ~ 1921년 8월 2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며, 아호는 백포(白圃)이다.
생애
국경 지대인 함경북도 경원군 출생이다. 1902년 경성군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인 1911년 국경을 넘어 만주로 망명했다. 대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중광단(重匡團)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해 단장에 취임했다. 그는 1911년 경에 창시자 나철을 만나 감화를 받은 뒤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광단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개편하였고, 무장 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설치하여 만주 지역을 거점으로 한 무장 항쟁을 기도하였다.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대한군정부로 통합된 뒤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는데, 흔히 '북로군정서'로 불리는 단체이다. 이범석과 김좌진이 북로군정서 소속이었으며, 서일은 총재를 맡았다.
1921년에는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가, 그해 6월 28일 자유시 참변(일명 흑하사변)이 일어나고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후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독립기념관 내에 "조국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적힌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아들인 서윤제도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독립군
홍범도(洪範圖)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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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洪範圖,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 1943년 10월 25일)는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며, 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사냥꾼으로 활동하여 사격술에 능하였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생애
평안북도 자성에서 출생하였으며 머슴, 건설현장 노동자, 종이공장 노동자, 사냥꾼, 광산 노동자 등을 전전하다가 1895년경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에 자극을 받아 갑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삼수·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만주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후에 독립군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1927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당했고, 그곳에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였다. 1943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연표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 평안북도 자성군에서 출생.
1883년 - 평안감영 입대 나팔수 근무.
1886년 - 어렸을 적에 일찍 부모가 죽자, 여러가지 막노동을 전전. 제지공장에서 일하던 중, 친일파였던 공장주가 7달동안 품삯을 주지 않고서는 도리어 먹고 입고 잠잔 값을 받아야겠다고 하자 공장장을 살해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감. 총술과 검술은 이때 산생활에서 익혔다고 함.
1895년 -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홍범도도 강원도 철령에서 봉기
1896년 - 14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함경남도로 이동하여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류. 을미의병 해산 후 포수로 위장하고 일제의 추적을 피함.
1907년 -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정미의병 발발. 홍범도는 함병도 갑산 신포계 신포수 중심으로 의병 조직. 12월에 삼수 전투에서 일본군 함흥/북청/갑산 수비대를 궤멸시키는 등 대소 37회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국내에서 무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함.
1919년 10월 - 평안북도 강계 만포진을 공략하여 일본군과 3일간 격전을 치르면서 70여 명을 살상.
1920년 6월 7일 - 봉오동에서 일본군 19사단 소속 야스가와 소좌 휘하 부대를 격멸(봉오동 전투)
1920년 10월 - 청산리 대첩 참가. 김좌진과 공동 작전.
1921년 6월 - 자유시 참변. 러시아 자유시에서 소련의 해산 명령을 계기로 독립군 조직간에 분열이 발생하여 동족 상잔. 이후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적군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
1922년 - 모스크바에서 열린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 이때 레닌과 조우
1923년 - 연해주 이남 구역 차우돈카에서 농업 콜호스를 조직하여 활동
1927년 - 소련 공산당에 입당
1937년 -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자치공화국으로 옮겨져 연금으로 생활
1938년 - 알마아타의 크질 오르다 고려인 극장에서 수위로 근무
1943년 10월 25일 - 향년 76세의 나이에 소련령 카자흐스탄 자치공화국에서 사망.
1963년 10월 25일 -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최진동(崔振東)장군
본관 진산(珍山). 최진동(崔振東,崔鎭東)-원명 최명록(崔明錄), 일명 최희(崔喜)라고도 최진동이란 이름은 항일독립운동을 하면서 사용하였다. 그는 1878년에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최우삼의 맏아들로 태여났다.최진동의 아버지 최우삼은 아들 최명록, 최운산, 최명순, 최명철과 딸 하나, 그리고 일가식솔들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연변땅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때는 1890년경이다.
최우삼은 연변 연길시 사득촌에 정착한후 인차 귀화입적하고 지주로 되였으며 그의 큰아들 최진동은 당지 점산호인 허춘빈이라는 지주의 양자로 들어가 20년대초에 봉오동(현재 도문시 봉오동저수지)를 중심으로 석현,대감자등지의 땅을 소유한 대지주로 되었다.
1913년 1월,리동춘,구춘선,정재면 등은 간민교육회를 토대로 조선인자치기관인 간민회를 건립하기로 결의하였다.간민회는 총회를 국자가(연길)에 설치한후 연길,화룡,왕청현에 분회를 설치하였는데 왕청현 분회장에는 최진동이 선임되였다. 1912년부터 1918년 사이에 최진동은 늘 구춘선,리동춘,김약연 등과 함께 반일친중의 독립운동방략을 토의하였다.
1919년, 최진동은 도독부를 건립하였는데 도독부군은 건립초기에 무장력이 한개 대대 산하에 4개 중대,매개 중대 산하에 2개 소대가 있었고 총병력은 200여명이였다.총재에 최진동,참모장에 박영,대대장에 박춘승이였다.
1919년 겨울,최진동의 도독부독립군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량하청의 독립군부대와 련합하여 두만강을 넘어 조선함경북도의 회령,종성,온성 등 군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목표로 련속적인 국내진격전을 벌렸다.1920년 4월 18일,최진동은 30명의 대원을 지휘하여 향당동에 있는 일본경찰서를 습격하였다. 1919년 8월부터 1920년 5월에 이르기까지 독립군부대의 수십차에 달하는 전투는 모두 중조국경을 넘어 조선땅에서 진행한 기습전이였다면 봉오동전투는 독립군련합부대가 최진동,홍범도,안무의 지휘밑에 중국 연변땅에서 진행된 첫 저격전이였다.
봉오동은 최진동의 본거지로서 도독부의 근거지였다.봉오동은 지리적으로 고려령의 험한 산줄기와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천연적인 난공불락의 군사요새지였다. 최진동은 1910년 한일합방이후 배초구경찰서장의 자리를 사퇴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봉오동으로 돌아와 학교를 꾸려 반일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소작농을 중심으로 이른바 자위대를 조직하고 개인의 재산을 털어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하였다.
최진동은 자기의 땅을 지킨다는 명목을 내세웠다. 봉오동과 그 부근의 토지가 모두 최진동의 소유였으므로 봉오동과 그 일대는 최진동의 반일부대의 근거지로서의 경제적인 지반으로도 될수 있었다. 1919년 3.13운동이후 연변의 적지 않은 독립군단체는 봉오동을 중심으로 그 외곽지구에 주둔하고있으면서 하나의 통일된 군사근거지를 이루고있었다.
봉오동은 두만강서북연안에 위치하였는데 최진동의 소유로서 천연적인 군사요새지인 봉오동골짜기로하여 명성이 높았다. 당시 그 부근에 있는 7~800명이상의 북로독군부의 부대가 집결하였고 그밖에 리흥수가 거느리고 있는 약 60명가량의 신민단독립군이 합류하여 봉오동골짜기를 중심으로<<봉오동전투>>를 준비하게 되었다.
화룡시경내의 서부지대에서 홍범도가 령솔한 련합부대와 김좌진이 거느린 북로군정서부대가 일본군 아즈마지대와 대혈전을 벌릴 때 훈춘,왕청등지의 독립군부대들도 리범윤,최진동의 통일적인 지휘하에 서부지대의 반일작전에 호응하여 일본군과 적극적인 전투를 진행하여 서부전선을 지원하고 일본군의 <<토벌>>작전계획을 교란하였다.왕청현경내의 십리평, 로무주할골, 장가점, 하마탕, 훈춘현 경내의 삼도구, 우두산 등 전투들은 동부지대에서 독립군들이 일제와 싸운 주요한 전투였다. 홍범도련합부대와 북로군정서부대가 서진한후 왕청현봉오동에 근거지를 두었던 최진동이 거느리는 독군부의 300여명 대오는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대한총군부의 집행위원들로는 문창범, 리범윤, 서일, 진학신, 최진동, 한 니콜라이, 강팔립 등이였다. 총재에는 로씨야경내에 있는 문창범이 임명되고 반일투쟁의 원로인 리범윤이 사령관에 임명되고 봉오동전투의 주역이였던 최진동이 군사부장을 담임하였다고 한다. 최진동이 령솔한 대한총군부 독립군전사들은 동부전선에서 비록 분산적이고 소규모적인 전투를 전개하였지만 이런 전투들은 전반 경신년반토벌전에서 일제의 《토벌계획》을 교란하고 김좌진, 홍범도의 서부전선의 독립군주력부대를 지원하는데 역할을 놀았다.
1921년 3월 14일, 연해주로 이동한 여러 독립군은 1000여명의 병력을 갖고있었는데 밀산에서 건립되였던 대한독립군단을 대한독립군 총합부로 결성하였다. 대한 독립군총합부는 총장에 서일, 부총장에 한춘운, 군무사령관에 홍범도, 군무부장에 김좌진, 외교부장에 최진동을 임명하였다. 1921년 3월 24일, 최진동은 로씨야 추풍방면에서 활동하면서 김좌진의 부대와 협동작전을 펼쳤다.
1922년 6월, 최진동은 안경선 등과 함께 오므스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80여명의 생도를 모집하여 개교식을 가졌다. 학교에서는 생도들에게 공산주의사상을 주입시키고 조선독립사상을 주입시키였다. 사과학교에서는 250여명의 정예한 사병으로 혈성단을 조직하고 이루크츠크에 본대를 두고 씨비리아 각지 요소마다에 지대를 배치하고 리청천을 대장으로, 최진동을 최고고문으로 추대하였다. 그후 혈성단은 급진단이란 이름으로 개칭되여 그 병력이 2500여명에 달하였으며 로씨야 쏘베트정부와 손잡고 적극적인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1922년 9월에는 최진동은 홍범도와 함께 치따지방에서 조선인으로 조직된 암살단의 최고고문으로 임명되였다. 약 200여명의 단원으로 조직된 암살단의 목적은 조선독립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일본광공서와 조선민족의 독립을 반대하는 자들을 암살하는것이였다.
그후 최진동이 병으로 다년간 치료받았지만 효험을 보지 못하고 1941년 11월 25일 도문에 있은 집에서 사망하였다.
-연변일보 기사에서 발췌-
청전(靑田) 안무(安武)장군
안무(安武, 1883년 음력 6월 29일 ~ 1924년 양력 9월 8일)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명은 안병호(安秉鎬), 아호는 청전(靑田)이다.
생애
함경북도 경성의 무인 집안 출신으로 1899년 대한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는 함북 무산 등 국경 지대에서 육군 군사 훈련을 담당하는 교련관으로 근무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뒤 함북 지방에서 체육 교사로 일하다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계기로 북간도로 망명하면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북간도에서 이동휘, 김약연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국민회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구한국군 출신의 경험을 살려 국민회군의 훈련을 맡았으며 독립군 양성과 무장에 힘을 기울였다.
1920년에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대한군북로독군부(사령관 최진동)를 조직하고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성과를 올렸다. 일본은 정규군이 섬멸당한 봉오동 전투의 치욕 이후 이 지역에 토벌군을 대거 투입했고, 안무는 그해 10월 21일부터 김좌진, 홍범도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하여 일본군 토벌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 대첩 이후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동했으며,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다시 북간도로 돌아와 와해된 독립군 조직 재건을 위해 힘썼다.
1923년 베이징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국민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1924년 용정(龍井)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그는 일본의 치료를 받을 수 없다며 거부하고 곧바로 사망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서로군정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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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李相龍, 1858년 음력 11월 24일 ~ 1932년 6월 15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1925년 9월 24일부터 1926년 1월까지 제3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하였다. 일명 이상희(李象羲), 이계원(李啓元)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자는 만초(萬初)이며 호는 석주(石洲)이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경상도 안동의 유림 명문가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생가인 임청각은 왕의 궁궐이 아닌 사대부 반가로는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99칸 짜리 집으로 유명하며,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택이다.
유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김흥락의 제자로서 의병 운동에 참가했으나, 50세 무렵인 1907년경부터 교육의 역할을 중시하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 협동학교 설립 및 대한협회 안동지회 창설, 시국 강연 등을 벌였다. 유인식, 김동삼이 이때부터의 동지들이다.
그러나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대한협회가 해체되자, 신민회의 해외 독립기지 설치 방침에 동조하여 1911년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상룡의 집안은 이회영, 허위의 가문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 그를 포함해 두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조카 세명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외숙은 의병장 권세연이며, 처가 역시 소문난 독립운동 가문이다.
이상룡은 이곳에서 독립 운동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 조직과 부속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 설치에 참여했다. 경학사는 이듬해 부민단으로, 1919년 3·1 운동을 기점으로 한족회로 발전된다. 신흥강습소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무장 항일 운동가들을 양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모두 만주 지역 항일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만주에 군사 기구인 군정부를 설립했다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치되자 이를 지지하고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칭했다. 서로군정서 책임자로서 1921년 남만통일회를 개최하여 서간도 일대의 독립 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통군부를 수립했다.
1925년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으로 물러난 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사퇴하자 192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무령이자 제3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갈등이 계속되고 내각을 조직할만한 세력을 모으지 못하자 1926년 1월 임시정부 수반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이후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 나뉘어 있던 운동 단체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2년 지린에서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대구의 달성공원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백산(白山)지청천(池靑天)장군
지청천(池靑天, 1888년 2월 15일 ~ 1957년 1월 15일)은 일제 강점기의 항일 독립운동가였으며,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하다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광복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광복 후 귀국,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였고,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국무위원 겸 무임소장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친(親)이승만계 정당인 대한국민당, 자유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본관은 충주(忠州). 호는 백산(白山), 아명(兒名)은 지수봉(池壽鳳), 지대형(池大亨), 지을규(池乙奎), 지석규(池錫奎), 일명은 이청천(李靑天), 이대형(李大亨)이다.
생애
출생과 가계 배경
지청천은 1888년 국운(國運)이 기울어질 무렵에 서울의 도심 삼청동 30번지에서 지재선(池在善)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지청천이 출생할 무렵의 1880년대 후반은 서양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되어가는 가운데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놓인 촛불과 같이 매우 위태로운 시기였다.
1888년 2월 15일에 출생한 지청천은 관향(貫鄕)이 충주(忠州)였고, 아명(兒名)이 수봉(壽鳳)이었으며, 관명(冠名)을 석규(錫奎)라 하였다. 지청천의 부친인 지재선은 지문(池門)의 선조 지경(池鏡)의 31대손이 되는 인물로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무장(武將)의 집안이었는데, 왜구 토벌에 수훈이 컸던 지용기(池湧奇), 조선 중기 이괄(李适)의 반란을 진압하고 병자호란 때에 신계(新溪)에서 청나라 군사들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지계최(池繼說) 등의 무관(武官)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무관학교 입교
구한말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 당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는 1907년 여름에 군대해산으로 간신히 폐교를 면하고 축소된 형태로 존속했던 상태였다. 그러나 이듬해 1909년 8월, 2학년때 통감부의 압력으로 군부가 폐지되면서 동시에 무관학교도 폐교처분을 받았다. 이때 일본 측은 선심을 써서 재학 중인 1, 2학년 생도 50여명을 일본의 동경육군중앙유년학교로 유학을 보내 위탁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지청천은 동기생 및 후배들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1914년에 26기생으로 졸업하였다. 중위로 진급한 후 1919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였다. 이때 망명하면서 일본군의 병서(일종의 전술교범)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유일하게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지청천의 가치는 독립군에게 아주 중요했을 것이다.
독립군 활동
1920년 지청천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있었고 곧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로 건너갔다가 초빙을 받고 서로군정서로 건너가 서로군정서 간부에 취임, 활동하였다. 그러나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의 한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폐교하고 병력을 간도로 이끌고 건너갔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때 소련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지만 북만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그곳에서 이범석 등과 고려혁명군을 결성했다. 그의 탈출 과정에서는 임시정부의 석방 노력으로 풀려나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서일, 홍범도, 김규식,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지청천이라는 이름은 이 때부터 사용했다고도 한다. 지청천은 이후에도 여러 항일무장투쟁단체 결성에 관여하였다. 양기탁, 오동진 등과 정의부를 조직했으며, 김좌진이 저격당한 후인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고,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기도 하였다. 1930년 7월에는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가하였고, 독립군의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만주에서 무장항일활동을 벌였으나 병력만 잃게 되자 1933년 5~6월경 중 지청천과 이범석은 100여 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중국 본토로 건너왔다.1933년 후반 김구 세력과 합류하였으나 1934년 지청천은 탈당, 신한독립당을 창설하여 따로 나갔다. 1940년에 중일 전쟁의 여파로 충칭(重慶)으로 옮긴 임시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이동, 그해 9월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이듬해인 1946년 4월 개인 자격으로 귀국, 광복군의 재건을 희망했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고 대동청년단을 창설하였다.
이후 국회 전원위원회 위원장,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장,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자유당에 입당하여 자유당 원내대표위원, 자유당 중앙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기타 사회 활동으로는 대한 적십자사 중앙집행위원, 대한 군인유가족 회장, 반공 통일연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1957년 1월 15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성동구 신당동 자택에서 급서하였다. 장례는 1월 21일 오전 10시부터 중앙청 야외음악당에서 거행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대전자령전투
대전자령전투는 1933년 한국의 독립군 지청천 부대, 중국군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 이어 3대 대첩으로 평가받는다.
개요
한국독립군과 중국군은 둥징청을 확보하기 위하여 닝안[寧安]을 점령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한.중 연합군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인원과 장비 때문에 1933년 6월 28일 라오쑹링[老松嶺]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다뎬쯔[大甸子]에 주둔하던 일본군 이즈카[飯塚] 부대는 이동하는 한.중 연합군을 전멸할 계획을 세웠으나, 7월 1일 일본군의 동정(動靜)에 대한 정보를 얻은 한.중 연합군은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한국독립군 2,500명, 중국군 2,000명을 대전자령에 잠복시켰다가 대접전을 벌였다.
4시간의 격전 끝에 이즈카 부대를 전멸시키고, 전리품(戰利品)으로 군복 3,000벌, 박격포 5문, 군용물자 200마차분, 담요 3천 장, 평사포(平射砲) 3문, 소총 1,500자루 등을 얻은 이 전투는 독립군의 항일전에서 특기할 만한 대승리였다.
그러나 전리품의 분배문제로 한.중 간에 대립이 생겨 그 후의 한.중 연합에 큰 지장을 주었다. 같은 해 9월 1일에 한국독립군은 둥닝현[東寧縣]의 적군을 공격했는데, 원병을 보내주기로 약속한 중국 구국군은 독립군의 총사령(總司令) 이하 수십 명의 고급간부를 구금했다.
일송(一松)김동삼(金東三)장군
김동삼(金東三, 1878년 6월 23일 ~ 1937년 4월 13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명은 김긍식(金肯植)이며 아호는 일송(一松)이다.
생애
경상북도 안동 태생으로, 한학을 공부하다가 근대 교육과 민족주의 운동으로 뜻을 돌려 1907년 유인식, 김후병 등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협동학교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한 안동 지역에서 개혁 유림 세력이 힘을 합쳐 세운 3년제 중등학교였다. 이 무렵 계몽 운동에 뛰어든 인사들 중 신민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내다보고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는데, 그도 양기탁 등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1910년 마침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이 계획을 구체화하여 1911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윤기섭 등과 함께 간도 지방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 데 참가했다. 경학사는 자치 조직, 신흥강습소는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무장 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간도 지역에서 군정부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고 1919년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로 조직을 개편하고 참모장을 맡았다. 3·1 운동의 단초 중 하나를 제공한 무오 독립 선언에 39인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1919년경, 김동삼은 상하이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1922년에 만주 지역 독립군 단체가 통합한 대한통의부에 가담했고,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 및 의장으로 참가하였으며 1925년 정의부 참모장에 취임했다.
1931년 하얼빈에서 이원일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시신은 한용운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광복군사령부
국동(菊東) 조병준(曺秉鎭)선생
선생의 자는 유평(幼平),호는 국동(菊東)이다. 평북 의주군에서 출생하여 3세 때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운암 박문일의 문하생으로 수학했다.
조병준(1862~1931)은 평안도 창성의병장, 남만주 대한독립단 총참모, 민국독립단 도총재, 평북독판부 독판, 광복군참리부 참리부장, 내몽고지역 의민부 총재 등을 역임한 인물로 남만주와 내몽고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1895년 10월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자 국수보복의 대의를 품고 유인석의 의거에 호응하여 유학자인 장원섭, 신우현 등과 함께 평북 창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평안도 일대의 산포수를 모집하여 의병단을 조직하고 일제에 항전하였다. 조병준은 일제의 헌병에게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광무황제의 특사로 출옥하였다.
조병준은 증곡재라는 학당에서 박문일 선생의 초상을 모시고 경의학을 가르치면서 문하생 수천 명을 배출하였다. 증곡재에는 서북 각도의 청년 학도 7~8백 명이 모여 유학을 연구하면서 국사를 토론하기도 했다. 조병준은 제자들에게 때를 보아 거의할 것과 해외에 나가 군대를 양성할 것을 간곡히 권유하였다. 이러한 권유를 들은 제자들 가운데는 실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병준은 스스로 솔선하여 서간도로 망명한 후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재차 거의하여 평북 창성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하였으나 일제의 병력이 증강되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관전현과 환인현 등지에 근거를 마련하고 의병장 전덕원, 박장호, 이진용, 조맹선, 백삼규 등과 함께 농무계와 향약계 등을 조직하여 교민들의 식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단과 포수단 등을 주축으로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총참모에 선임되어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 등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동 단체가 양분되자 민국독립단 도총재로 활동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의 비밀연락방 조직인 연통제 평북독판부 독판에 선임되어 평안도와 황해도에 89개 지단을 설치하는 등 조직 확대에 힘썼으며, 1920년에는 임시정부 직할기관인 광복군 참리부장으로 활동했다.
1923년 통의부 통의부장에 피선되었으나 곧 사임하였으며, 일제의 만주침략을 예견하고 동지 및 가족 80여 명을 인솔하여 내몽고 수원성 포두현 중탄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도산 안창호가 미주 동포에게서 마련하여 지원한 이주자금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주선으로 농지 약 60만 평을 임차하여 배달농장을 세우고, 배달학교와 대종교 수광시교당(綏光施敎堂)을 설립하였으며,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함과 아울러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곳에 의민부를 설립하여 배달농장의 수입금으로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1년 10월 2일. 포두현 중탄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0세였다.
선생은 폭넓게 독립운동을 지휘한 독립운동계의 영수라 할 수 있으며, 증곡재라는 학당을 통해 수많은 제자를 길렀고, 상당수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건국훈장이 서훈된 인물만도 수십 명에 달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원석(圓石) 조맹선(趙孟善)장군
한말의 의병장·독립운동가. (1872-1922)
호는 원석(圓石).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유생들과 함께 대한13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해 11월 21일과 24일 2차례에 걸쳐 을사5적을 참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의병장 박장호(朴長浩)를 참모장으로 홍범도(洪範圖)·박정빈(朴正彬)·우병렬(禹炳烈)·이진룡(李鎭龍)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평산, 경의선, 계정(鷄井), 예성강 연안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국내에서의 활동이 힘들게 되자 남만주로 망명해 홍범도·윤세복(尹世復)·차도선(車道善) 등과 함께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했다. 포수단은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와 연락을 취하면서 우국청년 및 재만한인들을 입단시켜 군사훈련을 시키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6년 10월 이진룡·황봉운(黃鳳雲) 등 7명과 함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평안북도 영변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금광회사의 송금차를 습격했으나 실패했다. 1918년 1월 차도선·황봉신(黃鳳信) 등과 함께 비밀결사 충의사(忠義社)를 조직, 무기를 구입하여 국내로 진공할 준비를 했다.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진영을 통합하기 위해 박장호·백삼규(白三圭)·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 등과 함께 1919년 4월 의병계(義兵系) 독립운동 단체들인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 등을 규합, 복벽주의(復辟主義)를 표방하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했다. 박장호가 총재로 추대되고 자신은 총단장이 되었다. 시베리아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장비를 갖추었으며, 하얼빈[哈爾濱]에 주둔하고 있는 백계 러시아 부대 사령관 세미노프와 교섭하여 러시아군 부대에 약 2,000명의 독립군을 파견해 군사훈련을 받게 했다.
대한독립단은 만주뿐만 아니라 국내까지 활동영역으로 삼았으며, 1919년 12월까지 100여 개의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조직해 활동했다. 1920년 2월 대한독립단·대한의용군사의회·한족회·대한청년단연합회 등 만주일대의 군사기관이 통합되어 상해임시정부 군무부 직할의 광복군사령부로 개편되자 사령장에 임명되었다. 광복군사령부가 보다 조직적이고 단합된 전투력으로 독립전쟁의 제1선을 담당할 선봉부대로 1920년 7월 관뎬 현[寬甸縣]에서 광복군총영을 발족하자 이를 지도했다. 1921년 4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2년 지린 성[吉林省] 추풍(秋楓)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화남(華南) 박장호(朴長浩) 도총재
1850(철종 1)∼1922. 조선 말기의 의병·독립운동가.
호는 화남(華南). 황해도 출신. 한말에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유인석(柳麟錫)·홍재학(洪在鶴)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상소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홍천(洪川)에서 관동의병(關東義兵)을 일으켜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10년 주권을 빼앗기자 의병부대를 인솔하여 만주로 이동하였으며 그곳에서 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 등의 의병장과 함께 계속 항전하였다.
1919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각 단체 대표를 소집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고 도총재(都總裁)에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지휘하였다.
그뒤 청년들을 규합하여 독립군을 편성하는 한편, 국내에 조직을 확대하여 지단(支團)을 편성하는 등 항일운동에 종사하다가, 1922년 일제의 앞잡이 김헌(金憲)에게 암살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850(철종 1)∼1922. 조선 말기의 의병·독립운동가.
호는 화남(華南). 황해도 출신. 한말에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유인석(柳麟錫)·홍재학(洪在鶴)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상소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였다.
1919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각 단체 대표를 소집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고 도총재(都總裁)에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지휘하였다.
그뒤 청년들을 규합하여 독립군을 편성하는 한편, 국내에 조직을 확대하여 지단(支團)을 편성하는 등 항일운동에 종사하다가, 1922년 일제의 앞잡이 김헌(金憲)에게 암살당하였다.
자는 현복(賢復), 호는 온당(溫堂). 1895년 을미사변 후 제천에서 기병한 유인석의 영향을 받아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35년 북경·텐진(天津) 등 중국내 각지를 순방하다가 산시성(山市省) 타이위안(太原)에서 대동병원(大同病院)을 개업하여 한중연합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