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해병대군악동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서봉석
[증언: 박흥선 前사령부군악대장 내용정리: 카페지기 서봉석(병118기)]
[박흥선과 제2사단군악대의 창설]
1973년12월3일 해병대에 부사관으로 입대한 前사령부군악대장 박흥선준위는 1981년 제2사단군악대의
창설과 1994년 사령부군악대가 재창설되는 그 시기의 산 증인이고 위 두 군악대의 창설 및 재창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부사관 교육을 끝내고 하사가 되어 의무적으로 거쳐야하는 소총소대 분대장 직책을 6개월간 수행한
후인 1974년11월 김포의 제2여단 고적대장으로 임명된다. 이때는 사령부군악대에 속해 있던 고적대
16명이사령부 해체와 더불어 김포의 제2여단 33대대에 소속되어 보병임무를 수행하다가 행사가 있으면
고적대 연습을 하고 행사에 참여할 때였다. 그는 아무리 군대이지만 음악을 하는 고적대를 보병임무를
병행시키는것은 무리라고 판단, 계속 상부에 건의하여 1975년6월에는 고적대가 제2여단본부 소속으로
옮기게 된다.
(이 시절에 통진고교 밴드교사이며 개인사업을 하던 現 조종현군악동우회장은 고적대를 위해서 물심
양면의 도움이 있었다는것이 박흥선대장의 증언]
[1976년 제2여단 고적대 시범연주 자료제공: 박흥선 前사령부군악대장]
1981년4월에는 김포의 제2여단이 제2사단으로 승격되면서 박흥선(중사)고적대장은 계속 제2사단
군악대장 직을 맡게 되며 사단 규모에 맞게 군악대 정원을 가능한 한 많게 하려고 노력한 끝에 결국
32인조로 편성된 제2사단 군악대를 창설하게 된다.
제2사단 군악대 창설시 고적대용 악기만 있고 군악대용 악기가 없는 관계로 의식행사 및 각종 행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1980~81년 사이에 해군본부군악대에 수시로 가서 쓰다 남은 악기(폐품처리용
악기)를 어렵사리 얻어와, 수리를 해서 사용하는등(Clarinet 5, Saxophone 4, Trumpet 5, Trombone 5,
Euphonium 2, Sousaphone 2 등) 힘들게 군악대 행사를 치루었으며 그 몇년 후 부터는 해군군악대에서
신품으로 교체하고 남는 악기들중 소수의 악기를 지원받아 사용하게 되었다.
[1981년 제2사단연병장에서 행사중인 새로이 창설된 제2사단군악대
자료제공: 박흥선 前사령부군악대장]
{카페지기 생각: 이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임종린사령관이 장교도 아닌(당시에는 해병대 내에 군악
장교가 없었기도 했지만) 부사관에게 이런 중책을 왜 맡겼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임사령관은 과거 제2여단에서 대대장,연대장 또 제6여단장.제2사단장등의 보직을거치면서 자주 박흥선
군악대장을 접하게 되었을것이고, 제2여단고적대장과 제2사단군악대장으로서 자신이 책임맡은 부대의
발전을 위해, 해결하기 쉽지않은 여러가지 일들을 상부에 건의하고 이해시키는 과정에서 그의 집요함과
업무 추진능력이 임사령관에게 강한 이미지를 심어준 듯하다. 그렇기에 장교도 하기 힘든 사령부군악대
재창설 작업을 上士인 그에게 맡기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사령부군악대 재창설의 주역 군악대장 박흥선]
1993년1월4일, 당시 해병대사령관 임종린중장은 김포의 제2사단 박흥선(상사)군악대장을 해병대사령부
군악대장으로 임명하고 사령부군악대의 재창설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사령부로 전출되어
재창설 준비를 하게 되는데 군악대가 사용할 건물도 없고 준비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서 이런 저런 준비를 하려니 무엇부터 먼저 해야할지 막막하기 그지 없었다. 박흥선군악대장은
군악대장으로 임명은 받았지만 휘하에 한명의 대원도 없이 단 혼자였고 군악대 건물도 없었기때문에
당시 서울영등포구신길동에 있던 해군본부군악대에 부탁을 하여 해군군악대內의 작은 사무실을 하나
얻어 책상 하나와 전화기 한대를 놓고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무용 비품이 하나도 없어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는 해병대전우회구로지역 회장에게 부탁하여
타이프라이터를 기증받아 행정처리를 했고, 앞으로 연주할 악보가 필요해서 해군본부 군악대에 양해를
얻어 악보를 복사하기로 했는데 성능 좋은 복사기가 필요해서 또다시 염치불구하고 전우회에 부탁하니
고맙게도 복사기 신품을 기증해 주어서 악보들을 깨끗하게 복사할수 있었다. 박흥선 군악대장은 지금도
그분들의 고마운 마음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대원모집,악기구입,악보구입등의 예산확보와 그 이외의 연주상 필요한 많은것들과 부대비품들,군악대
내무실과 연습실 확보등등을 위해 해병대사령부와 해군군악대를 비롯 서울시내의 악기점,각 학교를 찾아
다니며 악기구입 관계와 군악병 모병활동을 하는등, 그 많은 곳을 출장비 예산 하나도 없이 자비로
활동비를 써가며 동분서주, 요소요소 마다 찾아 다니며 반구걸 하다시피 하여 사령부군악대를 재창설해
낸것이야 말로 해병대 사나이 박흥선, 그가 이루어 낸 해병대군악대 전체의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군악대원을 뽑기 위해 모병홍보를 해야 하는데 모병 포스터 제작 예산이 없어 개인적으로 친분이있는
해병대전우회 경기도시흥지부에 부탁, 모병포스터 500부를 인쇄하여 병무청 및 밴드부가 있는 학교마다
돌아 다니며 벽보판에 부착하여 모병 활동을하였었다.
현재도 마찬가지 이지만 그 당시 해군에서 예산을 타다 쓰고있던 해병대사령부가 어떤 위치에 있었나를
생각해 보면 이 일이 얼마나 어려웠던 일인가를 바로 알수 있다. 해병대군악대의 예산은 해군본부군악대
에서 편성하고 집행하는 관계로, 해병대 내에서는 해병대를 대표하는 사령부군악대이지만 해군에서 볼때
에는 해군본부군악대의 예하 군악대중의 하나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것이었다. 그래도 이런
굴욕적인것은 해병대 전체가 감내해야 할 일이니 참고 넘어갈수 밖에 없었다. 군악대 예산(악보구입,
편곡료,악기부속 재료, 수리비, 크고 작은 연주회.초빙강사 강의료등)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
매년 해군측과 수 많은 언쟁과 설득과 굴욕이 반복되는 속에서 힘들게 이어져 왔다.
{에피소드 : 군악대 창설 준비에 여념이 없던 1993년8월 어느날에는 국방부장관비서실에서 박흥선군악
대장에게 전화가 와서 "어디서 제보가 들어왔는데 해병대에서 대규모 연예공연단체를 만드는 준비를
한다는데 어떻게 된것인가?" 라는 내용이었단다. 그런것이 아니고 해병대사령부에 군악대가 없어서
군악대를 조직하려고 준비중이라고 하니까 국방부에 들어와서 자세하게 설명을 하라고 해서 박흥선
군악대장이 국방부에 가서 설명을 하고 왔단다. 대한민국 군대끼리 해병대의 위상 정립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무리가 있으니 우리나라 군대가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든다.}
[군악대원 모집과 군악대 재창설기념일]
1993년1월부터 군악병 모집을 했지만 응시자가 부족하여(대부분의 고등학교에 밴드부가 없다보니) 매월
약간명씩을 선발하여 신병훈련 수료 후 1사단과 2사단 군악대에서 임시로 복무케 하여 군악경험을 쌓게
하였고, 우선 급한대로 군악대에서 악기소리는 나야하니까 1993년5월부터 7인조 Combo Band를 조직
운영하게 된다. 이 캄보밴드는 군악병 모집으로 입대한 신병 5명과 제1사단과 제2사단 군악대에서 1명씩
차출한 2명등을 합해 7명으로 어렵게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사령부에서는 군악대 정원을 20명으로 배정했지만 그 인원으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할수없는 관계로
사령관과 참모장에게 계속 건의하고 설득하여 같은해 11월에야 그동안 모집하여 제1사단과 제2사단
군악대에서 실무경험을 쌓고 있던 군악병들을 사령부로 발령하고 사령부군악대원으로 42명을 1차적
으로 확보, 합주연습을 계속하면서 사령부군악대 해체로 부터 21년 후인 1994년4월15일 해병대 창설
기념일에는 58명의 대원으로 드디어 사령부체육관에서 사령관을 비롯한 모든 장성,장교,장병들이 모인
가운데 대망의 첫 공연을 열게 되었다. 실로 사령부군악대가 해체된지 만22년만의 일이었다.
[1994.4월15일 사령부체육관에서 22년만에 첫공연하는 사령부군악대
자료제공: 박흥선 前사령부군악대장]
군악대 재창설의 역사를 정리하자면 1993년1월4일부터 사령부가 봉담읍의 신청사로 옮겨 온 1994년4월
5일 이전까지의 1년3개월이란 기간은 군악대 재창설의 준비 기간이었고 1994년4월5일이 해병대사령부
군악대 재창설기념일이 되는것이다. 1994년4월5일 당시 군악대의 구성원을 보면 사령부에서 배정한
정원은 20명(상사 1명,중사 1명, 하사 1명,대원17명)이었으나 이 인원으로는 도저히 군악연주가 불가능
하기에 또다시 사령관과 참모장에게 건의하고 설득하여 드디어 58명의 군악대원을 확보, 잠정 운영하여
오던 중 2003년대에 와서 40명선으로 감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군악대 전용 현대식 건물의 탄생]
1993년1월 해병대사령부에는 군악대가 사용할 건물이 없었기때문에 사령부군악대 재창설의 명을 받은
박흥선(상사)군악대장은 당시 서울영등포구신길동에 있던 해군본부군악대에 부탁을 하여 작은 사무실을
하나 얻어 책상 하나 놓고 업무를 보기 시작한지 5개월만에 임시군악대 건물로 옮기게 된다.
해군본부가 1993년6월17일 계룡대로 완전 이전하기 1개월 전인 5월에는 미리 이전한 해군헌병대 건물을
군악대가 임시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전기와 수도,난방시설등이 다 끊긴 상태인지라 그 어려움이 이루
형언할수 없는 지경이었다. 전기는 곧 연결되었지만 수도는 해결이 안 되어 급수차를 동원해서 큰 드럼
통에 저장하여 사용하였고 겨울에는 난방시설이 없어서 제2사단 전방에서 쓰던 난로를 갖다가 사용하는
등 불편을 겪으며 8개월동안 많은 고생을 하며 지냈다.
1994년2월 군악대와 의장대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경기도화성군봉담읍 소재의 사령부 신청사로 사령부
전체부서가 입주하기 전에(사령부 전체 부서는 4월에 이전) 미리 입주하게 된다. 군악대 건물이 별도로
없어서 임시로 기무부대 건물을 군악대 사무실로 사용했으며 1994년4월, 사령부 전체가 신청사로 이전할
때에는 군악대사무실을 본부대대와 함께 사용하면서 내무실은 본부대대 통합막사를 사용하고 연습실은
체육관 부속건물을 사용하는등 그 불편함은 계속 이어졌다.
군악대 사정은 이 지경에 있고 개선의 기미조차 보이지않으니 다급한 박흥선군악대장은 사령관과 참모장
에게 3년동안 끈질기게 건의하고 또 건의하여 1998년4월에는 현재 사용중인 2층짜리 군악대 단독 건물로
옮기게 되는데 사령부에서 군악대 전용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정이 난 후 박흥선(원사)군악대장은 타군의
군악대 시설(3군군악대가 모두 계룡대에서 신축건물을 사용중이었음)들을 꼼꼼히 관찰하고 나름대로의
군악대 건물을 상상하며 타군 군악대 시설의 보완점을 파악하여 해병대군악대 건물의 건축설계에 반영
하였다.
[사령부군악대 전용 단독 건물 자료제공: 박흥선 前사령부군악대장]
이 건물에는 1층에 70평 규모의 방음시설을 갖춘 대형합주실(녹음실포함)과 캄보밴드 연습실 1개,타악기
연습실 1개와 개인연습실 6개등의 연습실 시설 및 악기실,악보보관실등을 갖추었고 2층에는 12명이 사용
할 수 있는 침상마루식의 내무실 4개와 8명이 사용할수있는 침상마루방 2개등의 내무실시설 그리고
대장실,보좌관실,행정실,당직실등 행정요원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등 비교적 현대식 건물을 군악대 전용
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더구나 내무실에서 동화에서 처럼 호수가 보이는 등 음악과 연결되는 낭만적인
분위기의 군악대가 된 것이다. 3군군악대중 가장 후발 주자인 우리 해병대군악대가 이제는 3군에서 가장
훌륭한 군악대 전용 건물을 갖게 된것이다.
[사령부군악대 합주실 연습광경 자료제공: 박흥선 前사령부군악대장]
박흥선군악대장은 이 재창설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고 한다. 군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생각을 해본다해도 그것은 너무나 힘들었던 고난의 시간들인 것이다.
고급장교도 아니고 부사관의 입장에서 너무나 크고 벅찬 일을 수년간에 걸쳐서 과감히 이루어 낸
것이다.
[악기 구입과 악보 확보 및 군악대 행사예복의 교체]
군악대에서 가장 필요한 악기를 들여와야 하는데 그 과정은 시장조사는 해군군악대 자료를 참조
하였고 여러 악기점을 다니며 악기종류와 그 악기 종류 하나하나에 대한 사양서와 가격,사진,카다로그등
엄청나게 많은 서류들을 준비하는것도 박흥선(상사) 군악대장 혼자서 해야 했다. 이 서류로 1993년
4월에 구입신청을 해서 해병대-해군경리단-국방부 등을 거치며 입찰과정 결과 최종적으로 코스모스
악기점이 결정이 되어 1993년9월말경 코스모스악기점으로부터 군악대에 악기를 납품받게 되었다.
악기는 신청한데로 최신 제품,최고급악기로 수입되었으며 이때에 악기구입 총액은 약1억2천만원이었다.
악기가 군악대로 납품될때에는 해군경리단,해군헌병대 그리고 박흥선군악대장이 검수를 담당했다.
(Piccolo,Flute,Oboe,Bassoon,Alto Sax.Tenor Sax,Baritone Sax.Horn,Euphonium,Trumpet,
Trombone,Tuba,Sousaphone,Percussion 일체,Set Drum,Tube Bell,Marimba,Xylophone,
Vibraphone,Elec.Guitar, Elec.Bass,Synthesizer,Grand Piano,Double Bass,)
악보로는 기존의 관악곡들은 해군군악대에서 빌려 복사를 해서 사용했으며 연주는 타군 군악대와 차별화
할 필요가 있기에 악보구입과 편곡료 예산을 세워, 국내의 수입악보음악사를 통해서 외국의 유명 편곡자
들이 현대감각에 맞게 최근에 편곡한 악보를 주문 구입하여 새로운 레퍼토리를 한곡 한곡 늘려 갔고,
국내 곡들이나 군가들은 국내의 유명 편곡자에게 의뢰하여 연주하므로서 연주회때마다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는 해병대군악대가 되었다.
해병대군악대가 오래전부터 착용하던 행사예복(과거 고적대만이 착용하던 접고펴고하는 빨간 칼라가
부착된 의상)이 주위사람들로부터 호텔보이 같다는 부정적인 평도 들리고 他군악대와 행사때 어울리다
보면 명찰이 없어서 식별이 안되는등 불편한 점이 많아 거의 2년간 행사복장 변경을 계속 건의하여
해병대-해군본부-국방부 복제규정심의위원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국방부장관의 재가를 얻어 1998년도
부터 현재의 행사예복으로 바꿀수 있었다.
[군악대의 연주활동과 연주력 향상을 위한 실기교육]
주년 기념일에 58명의 대원으로 사령부체육관에서 사령관을 비롯한 모든 장성,장교,장병들이 모인 가운데
대망의 첫 공연을 열게 되었다. 이때의 감동은 비록 군악대뿐이 아니라 해병대 사령부 전체가 기쁨에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에서 군악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해병대
모두가 느끼는 날이었다.
1995년4월20일에는 해병대군악대 제1회 정기연주회를 수원에 있는 경기도립 문화의 전당에서 예비역과
합동공연으로 치루었다.
{그때 연주에 참석한 예비역연주자는 김용기(병72기-Bassoon)김광길(군악4기-Trumpet)최선배
(군악5기-Trumpet)김병두(군악6기-Sax.)김창원(군악6기-Clarinet)장경성(군악6기-Trumpet)한창복
(군악6기-Trombone)이익재(군악8기-Percussion)서병익(군악14기-Set Drum)강남규(군악20기-
Clarinet)맹완일(군악24기-타악기)김하일(군악25기- )님등이 참여했다. }
[1995.04.20.제1회정기연주회 후의 보도내용 자료제공: 박흥선 前사령부군악대장]
이때에도 군악대에 정기연주회 예산이 없어서 박흥선군악대장이 해병대전우회경기도연합회와 청룡
라이온즈클럽의 협찬을 받아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치루었다.
{이날의 군악대 편성은 Piccolo 1, Flute 2, Oboe 1, Clarinet 6, Bassoon 1, Sax.Section 6, Horn 3,
Euphonium 2, Trumpet 6,Trombone 6, Tuba(Sousaphone) 3, Percussion 7, Elec.Guitar 1, Elec.
Bass 1, Keyboard 1, Vocal 3.}
해병대사령부 자체 행사는 수시로 있지만 매년 정기연주회를 년1회로 설정하여 서울이나 수원의 대형
공연장에서 공연을 마친후 모병선전을 겸하여 그 프로그램으로 전국 대도시 순회공연을 하고 있으며 이
이외에도 서해도서부대 주민 및 장병위문공연,2000년대 중반부터는 "찾아가는 음악회"로 소도시나 문화
소외지역 주민을 위한 공연을 함으로서 대민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1973년에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된 이후 해병대군악대는 해군군악대의 예하부대가 된 관계로 해병대에서
뽑은 군악병은 해군군악대군악교육대에서 8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해병대군악대로 배치되었었는데 이것도
불편사항이 많은지라 상부에 계속 건의한 결과,1996년부터는 해병대군악대 자체에 군악교육대를 신설
하여 4주간 교육을 수료하면 군악대로 배치되도록 변경했다.
군악대에서는 군악병의 연주력 향상을 위해서 자체적으로 실기교육을 별도로 하고 있다. 악기별로 정기적
으로 국내 교향악단의 유명 연주자를 강사로 초빙해서 대원들의 연주기능 발전에 노력을 하고 있다. 초빙
강사중 해병대군악대 출신으로서는 김광길(군악4기-트럼펫 지도)김병두(군악6기-색소폰 그룹지도)
맹완일(군악24기-타악기 지도)등이 강사로 참여했었다.
해군군악대에서는 1954년부터 매년 해군사관학교졸업반 생도들의 원양항해훈련함대에 동승하여 약
3개월간 기항지마다 그 나라 항구도시에서 의장대시범과 시가행진 및 군악연주를 하고 있는데 2000년
대에 들어와서는 해군참모총장이 해병대군악대도 함께 가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해군군악대의 반대로
성사가 안되었으나 2002년에는 해병대군악대에서 6명이 원양훈련팀에 동참하기도 했었다.
[사령부군악대 재창설과 군악동우회]
사령부군악대가 재창설된다니까 가장 반기는 사람들이 바로 군악대 예비역들이었다. 그동안 자신들의
젊은 시절 군악대 생활을 통해 음악을 배우고 합주를 통해 선후배간의 우정을 쌓았고, 또 많은 추억들이
담겨있던 제2의 고향이랄수 있는 군악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창설된다니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해병대군악동우회(당시회장:군악1기 배봉환 예비역상사-동아연필 전무이사)에서는 배봉환회장을 중심
으로 박흥선군악대장을 도와서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려고 물심양면으로 애를 썼다. 군악대 공연때나
군악대 방문시에 사령부의 높은 분들을 꼭 만나서 군악대를 관심있게 봐달라고 부탁도 하고 군악대장을
빨리 진급시켜서 사령부군악대의 체면을 세워야 한다며 군악대장의 진급을 열망했고 군악대 방문시에는
대원들에게 작은것 하나라도 나누어 주려고 애를 썼고 연주회때는 대원들에게 회식을 제공하는 등
군악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박흥선군악대장은 그동안 사령부군악대 재창설에
이어 군악대를 계속 발전시킨 공이 인정되어 1996년9월에는 원사로 1998년8월에는 준위로 진급이 되어
전보다 더 자신감과 긍지를 갖고 군악대를 이끌어 갈수 있었다.
[1994년7월27일 사령부군악대 현판식에 참가한 예비역과 해병대측 인사들-임시사용건물임
자료제공: 박흥선 군악대장]
음악분야에서는 재창설 초기 김병두(군악6기)는 악기구입에 관한 정보와 자신이 소유하던 악보를
군악대에 기증했으며 독일 오스나부르크가극장관현악단에서 수석트럼펫주자로 활동하다 서울시향으로
옮긴 김광길(군악4기-트럼펫)과 수원시향의 타악기주자인 맹완일(군악24기로서 사령부군악대 재창설시
부터 현재까지 군악대의 타악기색션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봉사함 )등이 군악대 실기교육 초빙강사
로서 군악대 발전에 크게 이받이했다.
1997년 해병대사령부(사령관 전도봉중장)에서는 다음 해의 해병대 창설 제50주년을 기념하여 군가를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사령관의 관심있는 요청에 의해 과거와 달리 해병대 출신 음악인에게 해병대군가
작곡을 의뢰하였다. 이때에 만들어진 곡이 "우리는 해병대" (김영방-前사령부군악대장-관악연맹이사장)
"의로운 해병대" (복기호-창설기-KBS편곡자)"영원한 해병대" (서봉석-군악5기 병118기-KBS편곡자)
등 3곡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서봉석(병118기)은 군악대 공연에 필요한 연주곡의 편곡을 했으며 2008년에는
해병대군악대 계획에 의해 해병대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연주용행진곡 "해병의 힘" 을 작곡하기도 했다.
1973년에 입대하여 37년간 해병대군악대를 위해 헌신한 박흥선군악대장은 2010년3월29일, 군악동우
회원 31명을 포함, 많은 친지와 전우들의 축복속에서 정년 퇴임식을 가졌다. 사령부군악대장으로 복무한
17년동안 해병대사령부군악대를 타군 군악대 부럽지않게 발전시키므로서 위상을 높여 놓았고 새로 뽑은
군악장교가 후임 군악대장으로 임명되었으니 이제는 자신이 군악대장으로 있었을때 보다 더욱 군악대를
발전시켜 줄것을 바라는것이 그의 간절한 마음이다.
=========================================================================================================
베네치아 야상곡-연주- 론도 베네치아노 악단
첫댓글 글을 읽어내려가니 눈물이납니다, 1966년육군군악대 입대를 마다하고 대한민국의 멋진 해병대군악대로 입대하여 최고의 자부심으로 27개월복무하였는데
육방부 개새끼들의 간교로 해병대가 해체되며 음악을하던 군악대병사가 보병(이때 해군은 해병대를 버렸으니까)????????? ? 마침내 2011년 군악대창설
60주년 군악연주회가 9월에 개최됩니다. 국군군악대중 최고의 연주회가(각계에서 일인자로 활동중인 예비역참가) 될것입니다.
해병대 예비역여러분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지요, 대한민국 해병대에 힘이되어 주십시요.
우리 해병은 지금까지 황야 또는 들판에서 자라는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금까지 견뎌왔습니다. 그런가운데도 국난이나 국가가 어려움에 처해있을땐 3군에 앞장서는 귀신잡는 해병으로 거듭나곤했지요. 지금까지 군악대가 걸어온길을 읽다보니 어쩌면 해병대의 역사의 단편을 읽는것처럼 어렵게, 어렵게 살아오며 그자리를 지켜오신것같네요. 역시 그대~ 해병의 이름으로 영원무궁하게 커나갈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