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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52
“오, 저기 오는 모양이군.”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마차 한 대가 드디어 커다란 황성 문을 넘어섰다. 분명 기자오가 그 가족들을 거느리고 오는 것이라면 그의 세 아들들까지 적어도 마차가 두 대 쯤은 오리라고 생각했던 고 환관으로서는 조금 의아했지만, 환대하여 맞으라는 황제의 명에 어긋나지 않게 그는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이내 마차가 멈추고 그 안에서는 작지만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다소곳한 중년의 부인이 내려섰다. 그녀를 수행하기 위한 두 명의 시비가 그 뒤를 따랐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애로운 인상의 부인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미소 지으며 목례를 건넸다.
“황제 폐하를 모시는 자로, 극진히 대접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먼 길 힘드셨을 줄로 압니다.”
“어찌 피곤함을 느낄 사이가 있었겠습니까.”
“그럼 곧 황후마마께서 계신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따르시지요.”
막내딸이 홀로 딛고 일어서야 했던 이 드넓고 거친 땅에 발을 내딛는 어미의 가슴이 기대와 흥분으로 뛰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부인에게서 그런 내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앞선 고 환관을 따라 작은 발을 옮겨 조금씩 제 딸이 있는 곳으로 가까워질 뿐이다. 고 환관은 어째서 기자오도, 그 아들들도 동행하지 않은 것인지 많은 것들이 궁금했지만 사정이 있으리라 여기고 말을 아꼈다. 부인의 입장에서야 혼자 오는 길이 쓸쓸했을진 몰라도, 만나고 싶지 않다며 노발대발했던 은으로서는 나은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황후마마께서 거처하시는 곳은 황제 폐하의 모친이신 선황태후마마께서 사용하시던 곳을 새 단장한 곳입니다. 얼마 전 폐하께서 ‘흥성궁’이라는 새 이름을 내리셨지요.”
“광영된 일이로군요.”
그러나 부인의 마음으로는 제 딸이 거처하는 곳에 붙여진 새로운 이름보다는, 제 딸을 지칭하는 ‘황후마마’라는 이름 쪽이 훨씬 감격스럽고 광영된 일이라 여겨졌다. 고 환관이 앞장선 걸음을 다소 천천히 늦추며 말을 이어갔다.
“이미 황손을 회임하고 계시니, 이제 아무것도 염려할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마마는 물론, 복중 태아께서도 건강하시겠지요.”
“그야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부인은 자랑처럼 말을 잇는 고 환관에 대해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면서도, 자신 이외에 또 한 명의 황후를 함께 마주하며 살아야 하는 제 딸의 처지가 그리 행복하진 못하리라 예상했다. 그것은 자손 몇 명을 두고 있다고 해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이 될테니.
“저기가, 흥성궁입니다.”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궁이었다. 부인은 제 딸이 누리고 있는 영화로운 광경에 벌써부터 감격하여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지만, 주책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해 왔던 것처럼 꾹꾹 눌러 참았다. 이 넓은 땅에서 홀로 이만큼이나 우뚝 일어서기까지 고생해왔을 은에게, 자신의 눈물은 속없는 사치일 테니.
...
“황후마마, 대부인께서 듭시옵니다.”
그런 생각은 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절대로 눈물 따윈 보이지 않으리. 아주 태연하고도 의연한 모습으로, 제가 얼마나 강인하게 견뎌왔는지, 대쪽같이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스르륵. 주제할 수 없는 떨림을 감당하기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은아...”
뒤따라 들어선 고 환관이 부인의 떨리는 손을 잡아 부축했다. 얼굴을 보자마자 결국 무너져 내릴 것이란 것을 알았으면서 그리도 숱한 다짐을 해왔던가. 부인은 마음속으로 그런 자신을 책망했다. 그리고 너무도 훌쩍 자라버린 모습으로, 거칠 것 없는 위용으로, 예의 그 상냥함이 사라진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는 제 딸을 본다.
“예를 갖추셔야 합니다. 부인.”
고 환관은 낮게 읊조렸다. 부인은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주책없이 흘러내린 제 감정들을 닦아냈다. 그리고 제 딸 앞에 부복했다.
“황후마마..”
은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감정이 실린 눈에 잔뜩 힘을 주고 고 환관에게는 그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한다. 그가 두 모녀의 해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문 밖으로 나가자, 방 안은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 은은 천천히 바닥에 엎드린 제 어머니를 향해 다가갔다. 그 곁에 쪼그려 앉아 어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그만 일어나세요, 어머니..”
고 환관 앞에서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마음껏 쏟아낸다. 은은 어머니와 눈을 맞추며, 그리워했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하나도 반갑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숱한 날을 미워하고 미워했던 어머니의 얼굴을 이만큼이나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며. 부인은 가만히 은을 안아본다. 그 작았던 어깨를 가만가만 쓸어보았다. 미안하다는 말로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아서 삼키고 삼켰다.
...
“아버님께서 병을 얻으셨답니다.”
감정이 진정된 뒤에, 장 상궁이 차를 가져왔고 두 모녀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부인은 먼 길을 홀로 오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병이라니요.”
“노환이시지요. 늙으면 어딘가 고장이 나게 마련이니까요. 다만 대감께서는 스스로 벌을 받으시는 거라고 말씀하시곤 한답니다.”
“오라버니들께서도 무탈하시고요.”
“물론이지요. 이 길을 무척 따르고 싶어 했습니다만, 대감의 병간도 있고 많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결국 어미가 혼자 나서게 되었답니다.”
“고생하셨어요. 잘 오셨구요.”
촉촉하게 젖었던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바투 앉은 두 모녀가 서로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황제와 함께 만찬을 하게 될 것이었고, 그 전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폐하께서는 잘 대해 주시겠지요.”
“물론이지요. 너무도 자상하신 분이랍니다. 좀 있다 뵙고 나면 아실 거예요.”
“다행입니다. 마마의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군요. 무엇보다도 우겸 도련님이 계셔주신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위안을 삼았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도움을 많이 주고 계시답니다.”
“꾸준히 서신을 통해 마마의 소식을 알려주곤 하셨지요. 마마께서 입후하셨을 때에도 곧장 서신을 주셨구요.”
“오라버니께서요..?”
부인은 사실을 모르고 있는 은을 외려 의아해했다. 은은 미소로 상황을 무마시켰지만 우겸이 베풀어 준 배려들을 알고 난 뒤라서 일까, 까닭을 알 수 없는 죄책감은 배가 됐다. 늘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일이 많이 힘들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한 번도 고마움을 표한 적이 없었는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뭔가 좋은 선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貢女 奇皇后//
“황제 폐하 납시옵니다.”
소홍은 화급히 읽고 있던 서책을 접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장헌궁에 들르는 일은 거의 이렇게 급작스러운 때가 많았지만, 불쾌하다거나 놀란 기색은 전혀 없었다. 늘 그랬듯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로 그를 맞는다. 황제가 방안으로 들어서고, 소홍은 상궁을 향해 눈짓으로 차를 내오기를 명했다.
“어서 오소서, 폐하.”
“황후께서 주시는 차를 마실 수 있을까 하여 들러 보았소.”
“물론이지요. 제가 마실 차가 떨어진데도 폐하께서 드실 것은 늘 준비하도록 하고 있답니다.”
가벼운 웃음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이 마주 앉는다. 황제는 탁상 위에 놓인, 소홍이 읽고 있던 서책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다독하던 습관은 여전하시구려.”
“매일 서책을 읽어도 배울 것 투성이인 것을요. 어릴 적 폐하의 말씀처럼, 신첩은 아직도 영민하지가 못한가보옵니다.”
“수년도 더 된 철없는 농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영민하질 못하다니.”
과거를 회상하며 소홍이 그립다는 듯 미소 지었다. 늘 같은 날, 같은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었던 철없던 어린 날. 저택으로 그가 학문을 하러 오는 날이면 빳빳이 다려진 고운 비단옷을 차려입고 제 시각에도 못 미친 한참 전부터 대문 앞을 서성이곤 했다. 마치 지나치다 우연히 본 것처럼 ‘안녕하세요’하고 수줍게 말을 건네면 가볍게 목례로 답하던 그 미소 한 번을 보기 위해서.
“그러고 보니 오전에 흥성궁으로, 고려에서 반가운 손님이 드셨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폐하.”
“지금쯤 아마 밀린 이야기들을 주고받느라 한참 바쁠 것이오.”
그리 말하는 황제의 너그러운 미소에서 소홍은 황제가 찾아온 이유를 읽어냈다. 평소 같으면 흥성궁을 찾아 차를 즐겼을 시간, 두 모녀의 오랜 해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부러 이리로 걸음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배려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요즘은 연잎차가 좋다고 하여 자주 마시고 있습니다. 드셔 보소서, 폐하.”
상궁이 들여놓고 간 차를 소홍이 직접 우려내 황제에게 건넸다. 연의 향기가 퍼져 금세 코끝을 스치고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황제는 두어 모금 차를 마시고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잠시 다기를 내려두고 말을 이었다.
“좌승상은 장헌궁에 자주 다녀가시오?”
“그렇지도 못하십니다. 너무 자주 들러 다른 사람의 눈총을 받는 일도 그리 좋지는 않다고도 하신데다, 요즘은 또 무슨 일에 골몰하셨는지 아주 바쁘시답니다.”
“그렇다면 이리 적적하게 독서만 하며 지내고 있는 것에 나 또한 일조를 하고 있는 셈이니 미안해지는구려.”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소홍은 그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로 다시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그의 차에 다시 따뜻한 찻물을 쪼르르 따라 내리며 소홍은 말했다.
“신첩이 적적하다, 고 느낄 때 쯤 이리 찾아와주시니 얼마나 다정하신지요. 게다가 오늘은 제 어머님의 기일인 줄을 아시고 부러 찾아와 주셨으니 황은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소홍의 말에도 황제는 시치미를 떼듯 말없이 묵묵히 차를 즐겼다. 그리고 소홍은 그런 말없는 다정함에 다시 한 번 웃었다. 어머니를 하늘로 떠나보낸 기일인 오늘, 고려에서 먼 길을 달려온 어머니를 맞고 있을 흥성궁의 소식에 쓸쓸해 할 저를 위하여 찾아와 준 마음 씀의 깊이에, 고독함을 느낄 겨를도 없다. 어찌 이런 사람을 은애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같은 황성 안에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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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현- 님★ 앞으로도 반복될 예정이지만, 계속 은의 편이 되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수행평가하러 컴퓨터 켰다가 자기 전에 기황후까지 보게 되네요^ ^ 학교에서 늦게 끝나다 보니 제때 못 챙겨보니 슬퍼요ㅠㅠ 오늘은 그리던 어머니를 만난 은이도, 어머니의 기일인 소홍이도 왠지 슬프면서도 기쁜 날일 것 같다는ㅎㅎ
유리별미곰 님★ 저도 자주 못봬서 슬퍼요~ 그래도 수행평가 화이팅! 힘내세요^^ 가끔 들러서 기황후 챙겨봐주시면 더 좋구요ㅎㅎ 꼬릿말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황제는 두명의 황후를 두고 있으니 둘다 배려해야 하는 입장이네요ㅎㅎ 은이에만 관심을 두었음면 좋겠지만 황제니까 그렇진 못하겠네요ㅜㅜ 점차 소홍이란 인물이 궁금해집니다
헤르티아 님★ 소홍은 그리 깊게 다룰 인물이 아니라서 앞으로도 이 정도 선을 유지시킬 생각이랍니다. 제가 한번 파면 끝을 모르는탓에; 계속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젬있게 보고가요..
소희 맘 님★ 다음화도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음...소홍이는 진대인과는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나저나 황제는 참 다정다감하네요^^
Tiare★ 님★ 외아들로 자랐다는 전제하에 황제는 아주 정이 많은 인물로 설정되었답니다. 소홍에게도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죠. 앞으로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소홍이가 변하지만 않으면 ...괜찮은거 같애요 ㅎㅎ 은이는 혼자 사랑받기 원하겠지만요~황제 정말 좋은 사람이네요
까불지마ㅋ 님★ 소홍과는 별개로, 은에게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지 않나요?ㅎㅎ 다음화에서 뵐게요, 꼬릿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