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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찰 스크랩 (안성기행 )꺽정불을 모신 안성 칠현산 칠장사(1/2)
현림 추천 0 조회 331 16.04.19 21:36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꺽정불을 모신 안성 칠현산(七賢山) 칠장사(七長寺)(1/2)

@경기도 금광면과 죽산면, 삼죽면에 걸쳐있는 칠현산은 해발 492m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 산 자락에 위치한 안성 칠장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진덕여왕 2(646)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찰안내서에 따르면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532~647) 대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덕여왕(?~654)은 신라시대 3인의 여왕 중 한 사람으로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유언에 의해 즉위한 여왕이다.

천년고찰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에게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안성 칠현산 칠정사가

세간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에서

일곱 도적과 병해대사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기에 날개를 달았다.

임꺽정은 장길산, 홍길동과 더불어 조선 3대의 의적 중 한명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료에는 근거가 미약하고, 주로 구전을 통해 그 활약상이 전해진 인물이다.

이에 더하여 칠장사가 소장하고 있는 임꺽정이 만들었다는 꺽정불이란 불상에 대해 그 진위를 놓고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사실도 한 몫을 했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에 위치한 칠장사는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에 속한다.

고려 현종 5(1014)에 해소국사가 왕명으로 중창하였다고 한다.

칠장사와 칠현산이란 이름은 해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7명의 악인(惡人)을 교화하여 선인(善人)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칠장사의 지난 역사를 보면 고려 우왕 9(1383)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의 역조실록을 이곳으로 옮겼을 정도로 당시 교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던 절이었다.

인조 원년(1623)에는 인목대비가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 김제남을 위한 원찰로 삼아 크게 중수하였고,

현종 15(1674), 숙종 30(1704), 영조 원조(1725), 고종 15(1878) 등 수차례 중건을 하였으며

1970년대 이후 지속적인 수리를 통해 지금의 가람을 이루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인목대비의 친필 족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 보물제1220),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 천왕문 안에 있는 소조사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15),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보물 제488), 삼불회괘불탱(보물 제1256)이 있다.

이밖에 절 입구에 고려시대의 철제 당간지주와 부도 14기 등이 있다.





전각으로서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15동의 건물과 석탑, 동종 등이 있으며,

오랜 역사와 함께 칠장사에는 여러 구전이 내려오는데,

궁예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가 남아 있으며

의적 임꺽정이 갖바치스님 병해대사에게 바친 꺽정불 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나한님이 과거시험 구절을 가르쳐주어 장원급제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천왕문


대개의 사천왕상은 나무로 조성하는 데 칠장사의 사천왕은 소조(塑造)로 빚었다고 한다.

소조는 점토를 빚어 만든 것을 의미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쪽을 수호하는 이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이다.

그는 안민(安民)의 신으로서 수미산 동쪽 중턱의 황금타(黃金?)에 있는 천궁(天宮)에서 살고 있다.

얼굴은 푸른빛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었고 오른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또는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는 휘하에 팔부신중의 하나로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 건달바(乾達婆)를 거느리고 있다.

  



  

서쪽을 방어하는 신으로 수미산 중턱 백은타(白銀?)에 살고 있다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이다.

그는 흔히 잡어(雜語비호보(非好報악안(惡眼)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의 남다른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의 몸은 여러 가지 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입을 크게 벌린 형상을 함으로써 웅변으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고 한다.

 또 눈을 크게 부릅뜸으로써 그 위엄으로 나쁜 것들을 몰아낸다고 하여 악안·광목이라고 하는 것이다.  

광목천왕의 근본 서원은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도심(道心)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세워 끝이 셋으로 갈라진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보탑을 받들어 쥐고 있다. 그의 권속으로는 용()과 비사사(毘舍?) 등이 있다.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수미산 남쪽의 유리타(瑠璃?)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구반다 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린 증장천왕은 온몸이 적육색이며 노한 눈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그의 모습은 대개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잡아 가슴 바로 아래에 대고 있고,

왼손에는 용의 여의주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달리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이라고 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인데 한때 불법에 귀의하여 광명신(光明神)이 되었으나,

본래 자신의 원을 지킨다 하여 금비라신(金毘羅神)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다문천왕은 왼손에 늘 비파를 들고 있다. 그는 수미산의 북쪽 수정타(水精?)에 살며,

그의 권속으로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다.





범종각


<범종각주련>

願此鐘聲遍法界(원차종성편법계)

鐵圍幽暗悉皆明(철위유암실개명)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철위산의 어두움이 햇빛처럼 밝아지고

  



  

三途離苦破刀山(삼도이고파도산)

一切衆生成正覺((일체중생성정각)

 

삼악도의 고통 벗고 도산지옥 부수어

모든 중생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게 하소서.




홍제관(제중루)

<홍제관과 5불괴불탱>

사찰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제중루(濟衆樓)는 현재 혜소(慧炤927~1054)국사 비가 있었던 자리에 지은

홍제루를 중개축시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으로 편액도 제중루(濟衆樓)로 바꾸어 달았다.

혜소국사가 수도를 할 때 7명의 악인을 교화제도(敎化濟度)하여 나한의 경지로 이끌었다는 곳이 홍제관(弘濟館)이며

이에 비롯하여 산 이름도 칠현산(七賢山)이라 했다.

그 뜻을 굳이 풀이하자면 홍제(弘濟)와 제중(濟衆)은 둘 다 백성이나 중생을 두루 넓게 구제한다는 의미다.

    



 

@누각 안 벽에는 국보제 296호 지정된 칠장사 오불회괴불탱화의 복사본이 걸려있다.

칠장사 오불회괘불탱는 1628년 인조 때 화승 법형비구가 세로 6.6m, 가로 4m 비단에 그린 탱화라 한다.

위쪽에는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을 중간에 약사불좌상, 아미타불좌상, 미륵보살입상을,

그리고 그 아래 쪽에는 관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을 그렸다.?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다섯 부처를 <5()>이라고 한다.

원본은 큰 법회 때만 대웅전 괘불대에 내걸고 평소엔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목대비>

조선의 역사는 내외적인 환란으로 변천하지만 광해군과 인목왕후와의 악연은 그 시작부터 재앙을 잉태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인목왕후(仁穆王后)는 연안 김씨 김제남(金悌男)과 광주 노씨의 딸로, 15841215(음력 1114)에 태어났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사망한 뒤 1602년에 왕비로 간택되어 19세의 나이로 51세의 선조와 가례를 올렸다.

1603년 정명공주(貞明公主),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선조와 가계를 치룰 그때에 세자였던 광해군보다 9살이나 연하였다.

광해군은 자기보다 9살이라 어린 왕비를 어머니로 모시게 된 셈이다.


@ 인목황후의 '인목(仁穆)'은 죽은 뒤에 받은 시호(諡號)로 선조 때는 '소성(昭聖)'이라는 존호를,

광해군 때 '정의(貞懿)'라는 존호를 받아 통칭 소성대비(昭聖大妃)라 불렸다.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 뒤 대왕대비가 되어 '명렬(明烈)'이라는 존호가 더해졌고,

죽은 뒤 '광숙장정(光淑莊定)'이라는 휘호와 '인목'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고종 때에 '정숙(正肅)'이라는 존호가 추가로 더해짐으로써, 정식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正肅仁穆王后)이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大北)이 집권하였는데,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賜死)하고

이어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하였다. 인목왕후 역시 폐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인목대비가 훗날 영창대군과 아버지 김제남을 위해 원찰로 지정한 사찰이 바로 칠장사인 것이다.

 

1632813(음력 628) 49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선조와 의인왕후와 함께 경기도 구리시의 목릉(穆陵)에 묻혀 있다.

인목왕후의 서궁 유폐 생활은 그녀의 궁녀로 추정되는 작가가 쓴 계축일기(癸丑日記)에 전해진다.

금강산 유점사에 인목왕후가 친필로 쓴 보문경일부가 남아 있다.

 

극락전 앞에 있는 인목대비의 이 친필7언시의 원본은 현재 보물 제1220호로 지정되어 있다.

 

老後用力已多年(노후용역이다년)

領破皮窄只愛眠(영파피착지애면)

??已休春雨足(이파이휴춘우족)

主人何若又加鞭(주인하약우가편)

 

늙은 소 힘쓴 지 이미 여러 해

목 부러지고 가죽 헐었어도 잠 잘 수만 있다면,

쟁기질, 써레질 이미 마쳤고 봄비도 충분한데

주인은 어찌하여 괴롭게 또 채찍질 하는가.

 

@1618(광해군 10) 인목대비는 폐서인되어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좌의정 한효순, 공조판서 이상의,

예조판서 이이첨 등 17인이 폐비절목을 만들어 대비의 특권과 예우를 박탈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폐서인의 고명이 내려오지 않아 인조반정 때까지 인목대비는 대비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162212, 이이첨은 강원감사 백대형을 시켜 이위경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에 들어가

인목대비를 시해하려 했으나 박승종 등이 가로막고 나서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때부터 인목대비는 경운궁에서 맏딸 정명공주와 함께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궁에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물건을 버릴 만한 빈터가 없어 그것이 쌓여 악취가 가득했으며,

구더기가 방안과 밥 지어 먹는 솥 위에까지 끼어 물로 씻어내도 없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생필품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바가지가 없어 소쿠리로 쌀을 일어야 했다.

솜옷이 없어 7,8년 동안 추위에 시달리다가 목화씨를 심어 간신히 솜옷을 마련할 수 있었다.

궁녀들이 궐내에 텃밭을 일궈 나물을 재배하여 반찬으로 삼을 정도였다.

이 시는 아마도 그때의 핍박받았을 때의 심경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극락전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전각이다. 중앙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좌우로 6분의 지장보살을 두고

그 앞에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좌우에 따로 모셨다.

극락전 중앙에 봉안되어 있는 부처를 일명 꺽정불이라고 한다.

꺽정불은 임꺽정이 스승 병해대사를 위해 조성했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 것이다.



홍명희씨의 대하소설에 의하면 임꺽정은 칠정사에 주석하고 있는 갖바치출신의 병해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여기서 무예를 익히고 말타기 등을 배웠다고 한다. 임꺽정이 타던 말을 칠장마라고 불렀다.

임꺽정은 안성에 처가를 둔 길막봉이 안성관아에서 잡혀가자 이를 구출하고자 불상 앞에서

 칠형제 결의'를 맺었다고 하는 데 그 불상이 바로 병해대사를 위해 임꺽정이 만든 불상이라고 한다.

이 불상은 갓바치 스승을 위한 부처라 해서 일명 <백정부처>라고 일컬어졌는데

 병 있는 사람은 병 낫게 하고, 자손 없는 사람은 손보게 된다고 하는 영험한 부처로 세간에 회자했다고 한다.



꺽정불은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는 일반적인 아미타여래불상의 형태다.

다만 몸집이 좀더 큰 듯 보여 임꺽정을 모델로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안성시에 따르면 안성시의 용역을 받아 충북대학교 산학협력단(조사책임자 박원규 교수)에서 실시한

칠장사 목조문화재 연륜연대측정과 방사선 연대측정 결과

 꺽정불의 조성연대가 15~17세기(1540년을 중간연대로 ±100)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꺽정불의 하단에 붙어 있는 봉안 임꺽정(奉安 林巨正)’이라고 쓰여진 삼베조각이 있는 점과 함께

이번 연대 측정 결과가 임꺽정의 활동시기인 16세기 중반과 일치하고 있어

꺽정불이 실제로 임꺽정이 만들었을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응향각



대웅전 앞 삼층석탑





대웅전 계단 앞에는 양쪽으로 괘불석주가 세워져 있다. 괘불대는 주로 법당 앞마당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은데

긴 막대를 양쪽에 세우고 막대의 꼭대기에 장대를 가로질러 묶은 뒤 거기에 괘불를 매어단다.

괘불을 내걸기 위해 법당 앞에 세운 돌기둥을 괘불석주, 또는 괘불지주라 하고,

괘불을 높이 걸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대를 괘불대라 한다.


    

@@괘불석주와 당간지주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당간지주는 절의 입구, 즉 중문 또는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에

한 쌍이 세워지지만, 괘불지주는 사찰 경내의 본당(주로 대웅전) 앞에 두 쌍의 돌이 대웅전 앞의 절 마당에

좌우로 나란히 세워진다. 따라서 절의 입구, 즉 일주문이나 중문을 들어가기 전,

절의 바깥에 세워져 있는 한 쌍의 돌기둥은 당간지주이며

사찰에 들어가서 주존불이 있는 대웅전(대적광전, 극락전 등)의 앞마당에 세워져 있는 것은

괘불지주라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대웅전주련>

海底泥牛含月走(해저니우함월주)

巖前石虎抱兒眠(암전석호포아면)

鐵蛇鑽入金剛眼(철사찬입금강안)

崑崙騎象鷺鶴牽(곤륜기상노학견)

 

바다밑의 진흙소는 달을 품고 달아나고

바위 앞의 돌호랑이는 새끼안고 졸고 있다.

쇠뱀은 금강안을 뚫고 들어가는 데

곤륜산은 코끼리를 타고 해오라기와 학이 끌고 있구나.

 

@대웅전은 세월을 무게을 느꼈는지 단청이 모두 색이 바랬다.

색이 바랜 대웅전과 이 선시와 어울어저 더 고풍스러운 맛을 낸다.

대웅전 주련은 대개 석가모니불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내용인데

칠장사 대웅전에는 중국 원나라 고봉원묘(高峰原妙:1238~1295)선사의 선시(禪詩)가 걸려있다.

선시(禪詩)는 모두 난해(難解)하기도 하지만 이 선시는 그 중에서도 더욱 그렇다.

그래서 선시란 본래부터 풀이를 하지 않고 직관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칠장사 대웅전의 주련은 일반 여늬 사찰의 주련과 달리 높은 경지의 선시가 걸려 있기에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눈 밝은 이의 질타와 쇠물매를 각오하고 허튼 알름알이 이지만 감히 사족을 달아 본다.

첫구의 <바다밑의 진흑소>는 어리석은 중생을 의미하는 것 같고

<달을 품고 달아난다>는 말은 강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질타한 것이고,

2귀의 <바위 앞의 돌 호랑이>는 아둔한 중생을 의미하며 <새끼를 안고 졸고 있다>는 것은

내 안의 부처를 두고 밖의 우상에 메달리는 것을 질타한 의미 같고,

3귀의 <쇠뱀>은 알음알이에 고착한 어리석은 중생을 의미하며

<금강안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삿된 견해로 참된 불법(佛法)의 진리를 해()하는 것을 의미하며,

마지막 4구의 <곤륜산이 코끼리를 탄다>은 말은 위없는 최상의 법문을 득하고 대오(大悟)함을 의미하며

<해오라기와 학이 끌고 있다>는 것은 입불이법(入不二法) 하여 초탈의 경지를 이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곤륜산(崑崙山)은 중국 절강성에 있는 산을 가리키며

옥이 많이 나오며 불사(不死)의 선녀 서왕모가 산다는 서방의 낙토(樂土)라 일컫는 전설의 산이기도 하다.







@안성 칠장사 대웅전 목조석가삼존불좌상(安城七長寺大雄殿木造釋迦三尊佛坐像)

<기록>시대/조선

문화재 지정 (지정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2009311)

건립시기/1685(숙종 11)

크기/석가불 : 전체높이 132무릎폭 94미륵보살 : 전체높이 127무릎폭 83

제화갈라보살 : 전체높이 117무릎폭 81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 칠장사

 

칠장사 대웅전(大雄殿)에 봉안되어 있는 석가삼존불좌상은 2007년 삼존불에 대한 개금을 진행하던 중

좌협시보살상에서 좌보처미륵보살(左補處彌勒菩薩)이라고 기록된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이 발견되면서

이 삼존불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미륵보살(彌勒菩薩), 제화갈라보살(提花竭羅菩薩)로 이루어진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임이 새롭게 밝혀져 2009311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제작 시기는 강희(康熙) 21, 1685(숙종 11)이며,

조각승(彫刻僧)은 마일(摩日), 천기(天機), 법준(法俊), 신학(信學), 회신(懷信), 명옥(明玉),

인문(印文), 상현(尙玄) 등 모두 8명에 의해 제작되었음도 확인되었다.




석가모니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로 이루어지는 삼존불의 형태는

주로 응진전(應眞殿)과 나한전(羅漢殿)

불법(佛法)의 사자상승을 강조하는 전각에서 많이 조성되지만,

조선후기에는 여수 흥국사 대웅전이나 범어사 대웅전 등의

사찰의 주불전인 대웅전의 삼존형식으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대웅전 내에 봉안된 석가여래삼존좌상은 모두 결가부좌한 좌상의 형태로,

그 제작은 나무를 이어 붙어 제작하는 접목조(接木造)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본존인 석가불은 높이가 132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불상 가운데 중형에 속하는 불상이다.

뾰족한 나발을 가진 머리에는 육계(肉?)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머리 정상과 중앙에는

원형과 반원형의 계주(?珠)가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각이져 방형에 가까우며,

눈꼬리가 약간 올라가 반쯤 뜬 눈, 콧등이 편평한 삼각형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얇은 입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엄숙한 인상을 준다.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어 무릎에 두었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펴고 바닥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다. 불신에 두텁게 걸친 대의(大衣)는 오른쪽 어깨를 살짝 드리운

변형통견으로, 대의 끝단이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히 걸쳐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으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가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하반신에 S자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노출된 가슴에는 치마의 끝단인 군의자락을 수평으로 접어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석가여래의 좌·우에 위치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은 본존과 같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사바세계를 굽어 살피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구름과 불꽃무늬가 가득히 장식된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정수리 부분에도 보계가 높이 솟아 있다. 보계에서 이어진 두 가닥의 보발(寶髮)이 두 귀를 지나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그러나 동일한 조각승이 제작하였기 때문에 상호 표현이나 조각기법, 그리고 착의(着衣)방법까지

모두 동일하게 표현되었다. 다만, 연꽃을 들고 있는 손의 위치나 크기에서는 차이가 있다.





칠성탱

<칠성탱화>

사찰에서는 칠성각(七星閣)을 따로 건립하여 이를 봉안하는 것이 관례인데 칠장사는 대웅전에 두었다.

원래 불교에서는 칠성신을 신중의 하나로 보고 신중탱화(神衆幀?) 속에서만 묘사하였다.

그러나 칠성에 대한 신앙적 기능이 조선 초기부터 강화되면서 독립된 신앙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중탱화에서 분화된 별개의 칠성탱화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 칠성 신앙의 대상은 칠여래(七如來)의 화현(化現)인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칠여래의 증명을 거친 칠성신이다. 따라서 칠성탱화를 그릴 때에는 칠여래와 함께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반드시 묘사하게 된다. 이 탱화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지만

중앙에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두고 좌우보처로서 일광보살(日光菩薩월광보살(月光菩薩)

그리고 상단 좌우에 칠여래, 하단 좌우에 칠원성군을 도설하는 구도를 보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칠성탱화가 널리 봉안된 것은 칠성의 주불(主佛)인 치성광여래가 약사여래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자식이 없는 부인이나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부인, 자식의 수명을 비는 신도들에게서 큰 인기를 모았다.

 

현존하는 칠성탱화 중 가장 오래된 우리 나라 작품은 현재 일본 고베(神戶) 다몬사(多聞寺)에 있는 것과

일본인 개인 소장품인 1569(선조 2) 작 칠성탱화를 들 수 있다.

이들 탱화는 그 구도법이나 존상들이 복잡하고 배치도 특이하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의 칠성탱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구도를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밖에도 국내에 있는 대표적인 칠성탱화로는 1749(영조 25)에 제작된 천은사(泉隱寺) 탱화와

1895년에 제작된 선암사(仙巖寺) 탱화를 꼽을 수 있다.




@안성 칠장사 범종(安城七長寺梵鐘)

시대조선/조선후기

문화재 지정 (지정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8(2010323)

크기/높이 120, 밑지름 75

재질/금속

제작/시기1782(정조 6)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칠장사

요약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에 전하는 조선시대 동종.

 

동종의 몸체 하단에 명문이 양각되었으며, 1782(정조 6)에 제작되었다.

 201032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8호로 지정되었고 안성 칠장사에 소장되어 있다.












~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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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4.20 16:38

    첫댓글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16.04.21 17:13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 16.04.21 22:12

    藥師如來佛 藥師如來佛 藥師如來佛
    감사 합니다

  • 16.04.22 06:38

    _()_
    나무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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