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5년전 떠났던 서울...
친구들, 그리고... 내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이 살고 있는 서울...
그 서울에 도착하려면 아직 8시간이나 더 하늘에 떠있어야 한다.
정면에 보이는 스크린 위에서 깜박거리고 있는 작은 비행기는 전혀 움직이고 있는 것같지 않다. 아까부터 계속 태평양 바다 위 어느 한 지점에 눌어붙어서는 깜박 깜박...
죽기 전에 도착할 수나 있을런지 의문이다.
"하아... 돌아버리겠다 진짜..."
고개를 돌려 창문 블라인드를 살짝 올려본다.
파란 하늘, 눈부신 햇빛, 하얀 구름... 아까부터 똑같은 풍경이다.
"저... 죄송합니다만, 다른 승객분들 주무시니까 창문 덥개 좀 내려주시겠습니까?"
"아, 네... 죄송해요..."
승무원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얘기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잠들어있다. 개중엔 음악을 듣거나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앞좌석의 주머니에서 헤드폰을 꺼내 귀에다 꽂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본다. 흘러간 팝송, 클래식, 그리고...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
가만히 눈을 감고 의자에 고개를 기댄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처럼...
[몇 일 사이 야윈 널 달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지막까지도 하지 못한 말 혼자서 되뇌었었지,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나를 봐 이렇게 곁에 있어도 널 갖지 못하잖아...]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동안 언제나 머릿속을 맴돌았던 그 노래.
사람들과 노래방에 가게되면 언제나 나도 모르게 부르게 되던 그 노래.
그렇게 3년동안 이 노래를 부르면서 내 마음을 달랬었는데...
이 노래 참 오랫만이다. 지난 5년간 단 한번도 부르지도 듣지도 않았으니까...
가슴속에 깊은 상처가 되어버린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불현듯 떠오른다.
...
"오빠 못믿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가라앉은 목소리의 성준오빠가 물어왔다.
바보같은 질문...
선배는 이미 나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 믿죠."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지으면서 내 얼굴을 얼마간 들여다보던 성준오빠.
이내 나의 손을 잡고는 어두운 밤... 여관들이 즐비한 뒷골목 안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룻밤이요."
여관 입구의 작은 창문 뒤 남자에게 오만원을 건네는 것이 밖에서 보인다.
설마...
성준오빤 정말 밤새도록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것뿐이야...
그런거야...
나처럼...
성준오빠를 혼자 좋아한지 3년...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줄곧, 나는 같은 과 두 학년 위 선배인 성준오빠를 짝사랑해오고 있었다. 그가 다른 여자를 사귀는 동안에도, 그 여자와 헤어지고 또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동안엔도, 그리고 지금 군대에 가있는 동안에도...
신입생 시절의 어느날...
집으로 가던 중 우연히 함께 타게된 지하철...
그가 내려야했던 역까지 함께했던 30분...
그 짧은 순간... 나는 지독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좁고 가파른 여관의 계단.
성준오빠의 뒤를 쫓아 한 층 한 층 끝없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성준오빠의 손에 쥐어진 열쇠가 딸강딸강 소리를 낸다.
빨간 카펫트가 깔려있는 좁은 복도.
불안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작은 방.
한쪽으로는 화려한 꽃무늬의 이불이 펼쳐져 있는 침대가 놓여있고, 그 앞으로는 커다란 TV도 보인다. TV 밑으로는 비디오같이 생긴 검은 상자가 빨간 불빛을 깜박이고 있다.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며 문 옆쪽에 자리잡은 작은 의자 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리고 그 때 성준오빠가 나에게 했던 한 마디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왔었다.
"먼저 씻을래?"
난...
나는요 오빠...
마지막까지 ... 오빠를 믿어보고 싶었어요.
3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내 주위의, 그리고 당신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그 어떤 나쁜 말을 해와도 그랬던 것처럼...
나만은 오빠를 끝까지 밎어주고 싶었어요. 아니... 믿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빠는...
오빠는 나와 함께 있고 싶었던게 아니었나보네요.
내가 아니라 그 어떤 여자였다 하더라도 아마 상관없었을테죠...?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오빠만을 바라보고 있는 바보같은 후배...
그런 여자만큼 간편한 상대는 없었을테니까...
단지 그것뿐이었던 것일테니까...
"아뇨... 오빠 먼저 씻으세요..."
그를 볼 수는 없었지만 나를 쳐다보고 서있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혹시 내 말을 의심하는 걸까...
혹시 나에게 다가오는건 아닐까...
가슴이 아픈 만큼 두려움도 커져갔다.
"그럼 먼저 씻고 나올게. TV라도 보고 있어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내 벨트를 끄르기 시작하는 성준오빠.
벨트와 함께 군복바지가 땅에 벗겨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네..."
문 옆으로 나있는 또 다른 작은 문으로 그가 들어가고 잠시 후, 샤워기 트는 소리 그리고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 나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방 안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들어 최대한 똑바르고 깨끗하게, 오빠가 마음 상하지 않도록 너무 짧지 않게, 내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에 글씨가 번지지 않게...
그렇게 조심스럽게 오빠에게 쪽지를 남기고 그 방에서 뛰쳐나왔다.
[오빠...
저 아무래도 그냥 집에 가야할 것같아요.
제가 오빠를 못믿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을 못믿겠어서에요.
오늘... 오랫만에 오빠 얼굴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휴가 잘 보내고 들어가세요...
-은혜-]
여관의 계단을 구르듯 뛰어내려와 사람 하나 없는 새벽 골목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오빠는 아직도 샤워 중이었을텐데...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같았다.
...
3년간 아무리 애를 써봐도 접을 수 없었던 오빠를 향한 내 마음...
그 날 집으로 돌아오던 총알택시 안에서 너무나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 후 오빠가 제대하기 직전, 나는 유학길에 올랐다.
친구들이나 선배들과 별다른 작별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스텐포드 법대에 들어가 3년간 죽어라 이를 악물고 공부만 했다.
오히려 성준오빠한테 고맙다고 해야하는걸까...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던 나는 미국 굴지의 러펌에 들어가 2년동안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리운 한국땅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비행기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자리에 앉아계시기 바랍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기장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창문 덥개를 열어 창밖을 내다보니 활주로 위의 다른 비행기들이 보인다.
한국의 가을 하늘...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맑고 푸르다.
드디어... 한국에 돌아왔다.
"김은혜씨?"
짐을 찾아 공항밖으로 나오자 검은 양복의 사내가 나를 맞는다.
"네... 제가 김은혜예요."
"회장님께서 계실 곳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짐은 저희에게 주시죠."
나에게는 가족이 없다.
중학교 2학년의 어느 일요일, 오랫만에 외식이나 하자며 집을 나섰던 우리 가족 모두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 나만이 혼자 끔직했던 그 사고에서 살아남았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회장님이란 사람이 나를 돌봐주고 있다.
생활비도 등록금도 매달 꼬박꼬박 내 이름으로 된 통장으로 송금돼 들어왔다.
대학 다니는 동안에는 한동안 회장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혼자 힘으로 살아보고 싶었고, 또 그동안 빚진 돈들도 차근차근 갚아나가야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통장엔 언제나 쓰고도 남을만큼의 돈이 매달 송금돼 있었다.
유학을 결심했을 때 처음으로 회장님과의 접촉을 시도했었다.
웬지 회장님이란 사람이 나를 보고있을 것이란 생각에 아파트 베란다에다 직접 만든 플랭카드를 걸어 붙였다.
[회장님. 저 유학가고 싶어요. 스탠포드 법대 합격통지서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부터 내 통장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 매달 송금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러펌에서 일하기 시작할때까지 단 한차례도 빠짐없이...
러펌에 입사하면서부터는 조금씩이나마 회장님께 진 신세를 갚아나갈 수 있다는 기쁨에 정말 열심히 일에만 매달렸고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올라갔다. 그럴수록 연봉도 차츰 높아져갔고 회장님에게로의 송금액수도 다달이 늘어만갔다.
그러던 어느날 나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와 나를 위해 일해주지 않겠니?]
바로 그 날로 회사에 사표를 냈고, 그 다음 날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
검은 색의 고급 승용차 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회장님께 가는건가요?"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따로 연락하실 때까지는 편히 쉬고 계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실 곳은 회장님께서 새로 마련해주셨습니다."
"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의 꼭대기 층.
혼자 지내기엔 좀 넓은 집이다.
집안은 이미 새 가구들과 식기들, 생활용품등으로 잘 꾸며져있다.
"그럼 쉬쉽시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짐을 옮겨다 놓아준 검은 양복의 사내가 현관을 나선다.
"저... 까만 아저씨!"
감정 없어 보이던 사내가 순간 멈칫한다.
"오늘 고마웠어요...
그리고 회장님께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불러주셔서... 감사하다구요..."
"네. 그러겠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짧은 대답을 남기고는 사라져가는 남자...
저 사람을 따라가면 회장님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혼자 피식 웃는다.
...
샤워를 마치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바깥으로 내려다보이는 한강의 야경이 참 예쁘다.
서울이... 이렇게 예뻤던가...?
그렇게 오랫동안 서울을 떠나있을 수 있었던 내 자신이 새삼스럽지만 믿어지질 않는다.
"현호선배한테 전화해볼까..?"
현호선배는 내가 유학기간동안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이다.
선배이면서도 친구같았던 현호선배...
바보같이 짝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를 옆에서 잠자코 지켜봐주었다.
나의 대학생활은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짝사랑의 기억으로 반, 그리고 유쾌하고 즐거웠던 현호선배와의 일상으로 반 채워져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지금은 KBC 방송국에서 PD로 일하고 있다. 결혼해서 예쁜 딸도 하나 있다고 한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여보세요."
"현호선배 전화 맞죠?"
"그런데요... 누구시죠?"
"선배. 저 한국 왔어요."
"어! 은혜?? 너 은혜야?!"
"응."
"야! 너!!! 너 어디야?? 너 정말 한국에 있는거야?"
"네. 지금 방금 도착했어요."
"진짜로 왔나보네?! 크하하하...
너 나 만나면 내 손에 죽을줄 알아라. 알았냐? 크하하하하..."
"지금 그거 반가워하는거야 화내는거야 뭐야?
선배는 여전히 상태가 안좋네?"
"시끄러워...
아무말 없이 사라져서 5년만에 돌아온게 그냥 넘어갈 일이야? 늙은 오래비를 혼자 내팽겨치고서는..."
"ㅋㅋ...
선배. 나 시차때문에 잠 안와요. 나 지금 선배 만나러 가면 안될까?"
"지금?? 나 지금 일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오락프로 녹화중이야."
"그래...? 그럼 뭐... 다음에 보지 뭐..."
"야, 은혜야. 너 나 일하는거 구경올래?
오늘 밤샐건데 와서 구경하고 싶음 그렇게 해라. 대신 놀아주진 못한다."
"어! 나 구경하러 갈래! KBC 방송국으로 가면 되는거야?"
"어. 강현호PD 만나러 왔다고 말하면 어디로 가라고 말해줄거야. 못찾겠으면 전화하고."
"오케이! 지금 간다 그럼!"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보는 방송국...
찢어진 청바지에 아끼는 쭈글이 남방을 걸쳐입고 집을 나선다.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시작 ]
*듀엣 (Duet) - 01
단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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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0.01 14:38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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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왠지 재밌을 것같은... ^^
1편은충분히재밌었습니다.^^담편도왠지기대되네요.^^
재미 있어요~~
와... 꼬릿말 감사드려요. 힘이 불끈 불끈 솟아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