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겨우겨우 일어나서 짐을 또 챙겼다. 전날 저녁과 이날 아침은 뭘, 어떻게 먹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제처럼 비옷 입고 덮개 씌운 배낭을 짊어지고 현관 쪽에 놓인 큰 바구니에서 삶은 달걀 하나씩을 챙겨서 어제 보았던 작은 정자 앞으로 모였다. 그곳에서 약간의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그리 가볍지는 않았다. 시골로 가면 버스 정류장이 특이하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내리쬐는 햇볕이나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직육면체 모양.. 거기에 동네 아낙들끼리 버스를 기다리다 지치지 않으며 담소를 나눌 수 있게 하는 나무 의자.. 그곳에서 몇몇이서 아까 집어온 삶은 달걀을 까먹었다. 껍질을 바닥에 버렸는데 그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기도 했다. 국토를 걷는 사람들이 이래서야 되겠냐고 그랬던가.. 암튼 찔렸다.
참.. 민홍오빠랑 명희가 없었다. 아니 없어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었다. 결국 나중에 밝혀(?)졌지만 두 사람은 새벽에 먼저 떠난 거란다. 밤에 떠났다는 말도 있고..
비가 하염없이 왔다. 어제와 같이 걸었고... 어떤 다리 같은 거 아래에서 쉴 때 남자들끼리 뭐라고 한다. 서로 킬킬대고 웃으면서.. 나중에 생각해보건데 쓸린 것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또 터널을 지났다. 길었다. 아니 길게 느껴졌다. 또 자동차 빵빵소리.. 호루라기 소리.. 소리란 소리는 모두 터널 안에서 울렸다. 두 번째라고 해서 괜찮은 것은 전혀 없었다. 어제만큼 힘들었다. 터널은 정말 지루하면서 미칠 것 같은 곳이다.
비 때문에 웃옷은 괜찮지만 반바지의 아랫단은 다 젖었다. 그래서 조금 접어 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걸을 때마다 허벅지가 아팠다. 걷다보니 배가 너무 고팠다. 보통 때라면 그냥 견딜만했겠지만 비가 와서 체온도 떨어지고 지쳐서 그랬나보다. 점심을 사먹기로 했단다. 돈이 빠듯하다고 하던데.. 암튼 제일 먼저 나오는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저 멀리 휴게소가 보인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려면 길을 건너야 했다. 위험하니까 다음에 나오는 휴게소에서 먹기로 했다. 몇몇 사람이 한참을 앞으로 가서 음식점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다가 주유소 비슷한 게 나타났다. 그쪽으로 오라고 해서 모두 열을 지어 갔다. 그러나 식당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다시 아스팔트로 들어오고.... 괜히 에너지만 소비했네... 넘 힘들었다. 배가 너무너무 고팠다. 하지만 멈출 수 없고 계속 걸어가야 한다. 식당이 나타날 때까지.... 잠깐 쉬게 되었다. 좁은 도로 양끝을 차지하고 쉬었던 것 같다.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한다. 전라도엔 왜 이렇게 휴게소도 없고 식당도 없냐고... 전라도 왜 이래?!라고... 괜시리 신경쓰였다. 나 때문도 아닌데 괜히 미안하고.... 근데 토마토가 어디선가 초코파이를 사왔다.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곤 남관오빠한텐가 돈 달라고 해서 마토는 한소리 듣고야 말았다. 말없이 가서 사오더니 돈 달라한다고.... 남관오빠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마토가 그걸 사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걸 먹지 않았다면 진짜 우린 식당을 찾기 전에 쓰러졌을 것이다. 남관오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말 몰라서 그런거였다. 사실 아무도 몰랐지만...
초코파이 한 개 반을 그렇게 맛있게 먹구 음식점을 찾으러 계속 걸었다. 글구 조금만 걸으면 될꺼라는 우리의 예상을 깨고 우리는 걸어걸어.. 두시간을 더 걸어서 2시 반경에 "청솔가든"에서 4,000원짜리 백반을 먹을 수 있었다. 까만콩, 김치, 콩나물, 무무침, 고구마 줄기, 된장찌개, 멸치, 김치찌개.. 까만콩이 진짜 맛있었다. 밥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조금 쉬었다. 참.. 정은인가가 다섯잎 클로바를 보여줬다. 동이언니도 네잎크로바를 여러개 가지고 있었던가.. 아까 길에서 쉴 때 찾은 거라고 했던가.. 정은이는 민권오빠에게 받은거라고 했던 것 같고... 신기했다. 다섯잎 클로바면 행운이 따블인가..? 알롱이가 늦는다.. 몸이 많이 안좋은가 보다. 운영진에서 누군가 다시 걸어야 한다고 할 때 진짜 눈물 나올 것 같았다. 힝.. 힘들어... 우리가 다시 출발할 채비를 할 때 알롱이는 식당에 도착했다. 남관오빠랑 나중에 오라고 남겨놓고 우리 먼저 출발했다. 글구선 한참 걸었다.
화장실이 갑자기 가고 싶었다. 이미 쉬는 타임은 지났고 또 마땅한 화장실(휴게소나 주유소)도 나타나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급해졌다. 햇볕이 쨍쨍할 때는 몸안의 수분이 땀으로 다 배출됐었는데 비가 오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열심히 걷고 있는데 혜련언니가 막 달려간다. 그리고 뒤에서 막 놀리고.. 언니도 화장실 문제였나보다.. 어... 저기 주유소가 보인다. 쉬기로 했다. 다행이다. 허벅지를 보니 빨간 것들이 울긋불긋 생겼다. 무지 아팠다. 동이언니한테 "언니, 나 허벅지가 이상해.. 아파.."라고 말했더니 언니가 막 웃으면서 몰랐냐고.. 그거 쓸린거라고.. 아까 뒤에서 쓸린 사람들 놀리고 그랬는데 너도 그러냐고.. ㅜㅜ 쓸림의 고통을 여기서 이루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물집의 고통의 배이다. 진짜 아프다. 사람들에게로 돌아왔을 때 나의 아픔을 다른 이들도 알게 되고 같은 고통을 가진 이들이 나를 위로해줬다.. ^^; 그 때부터 난 걸을 때 무지하게 조심조심 걸었다. 쓸린 사람이 걷는 걸 뒤에서 보면 웃기다던데.. 안그런척 열심히 걸었다.
구례에 들어갔다. 들어가는 길목에서 광주은행을 봤다. 괜히 무지하게 반가웠다. 오른편에 약국이랑 빨래방도 보인다. 이따가 필요할 것 같아서 눈여겨 봐뒀다. 구레읍사무소가 우리의 숙영지로 잡혔단다. 읍사무소 옆 체육관을 쓸 수 있었다. 꽤 넓은 강당이었다. 우와..
짐 풀고 허벅지가 바지에 쓸려서 엄청 아팠던 나는 약국에서 압박붕대 두 개랑 탈지면이랑 샀다. 글구 몇몇 여자들끼리 뭉쳐 목욕탕 갔다. 빨래방이 전주와는 달리 무지 비싸다고 해서 빨래감도 몽땅 챙겨들고 나섰다. 3,000원이나 했다. 디게 꼬졌는데.... 먼저 빨래부터 했는데 목욕탕 아줌마가 갑자기 들어와서 우릴 보고는 엄청 꼬라지 냈다. 겁나 무섭게... 우린 진짜 순간 쫄았지만 거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연달아 이틀이나 비가 와서 오늘 빨래를 하지 않으면 낼 입을 옷도 없다. 우린 또 사우나실에 빨래 널었는데 아줌마한테 또 혼났다. 그런데 목욕비 계산할 때 우유 산 게 날짜가 이틀이나 지나있었다. 역시 꼬진 목욕탕이라 우유도 안팔리나보다.. 주인도 별로 신경안쓰고... 장사를 그렇게 하면 안되지... 그냥 얼굴 각질이랑 코피지 없애는데 썼다. 다른 사람들도 나눠 주구.. ?구 선풍기바람에 머리 말리구 손톱, 발톱도 깎구. 나오면서 정은이는 날짜 지난 우유를 환불했던가 다른걸로 바꿨던가... 다시 읍사무소로 오는 중간에 수퍼에 들러서 동이언니가 콜라사구 비닐 봉지 두 개만 달라구 했는데 사야된다구.. 와.. 인심 디게 각박.. 진짜 속상했다. 전남 들어와서 휴게소, 음식점이 없어서 얘들 배 고파하구 또 목욕탕, 빨래방 사람들도 엄청 불친절하고....
체육관 안에는 의자가 무지하게 많았다. 접었다 폈다하는 그 의자... 모두들 의자에 짐 올려놓구 빨래두 널구.. 모두들 비옷을 빠짐없이 걸어놔서 이곳저곳에 노란색 물결이다. 에어컨이 있어서 좋았다. 에어컨 쪽에 미루신이랑 짐 나란히 놨었는데 미루신 디게 혼잣말 잘 한다. 혼자서도 잘 노는 스타일인가부다..
그리고.. 국토지기를 봤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수도 많고 차량도 많고 잠은 돈주고 빌려서 잔단다. 여관 같은 곳에서.. 어떻게 생각하면 기죽을 이야기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또 그게 아니다. 뭐얌.. 대장정이야.. 그냥 도보여행이야..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 쪽일이라 별로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고...
바닥에 어디서 얻어왔는지 모를 박스들을 펼쳐 깔았다. 운동화에는 성모인가가 얻어온 신문지를 가득 넣어두었다. 여기 저기서 모여 군것질도 하고 물집도 짜고 짐도 다시 챙기고... 대성이 아저씨랑 놀다가 사진도 찍고...
밥을 당번들이 해놓구 기다리고 있었던가... 밥을 맛나게 먹었던 것 같다. 대장정에 와서 난 식충이가 된 것 같다. 한끼도 안빼놓고 잘 먹고 있으니...
바로 앞에 있는 공중전화로 친구랑 잠깐 통화를 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우체통에 친구에게 쓴 편지도 넣고...
누군가가(정은이었던가..) 자기 마니또에게 줄 초코파이 한박스를 샀는데 어떻게 줘야할지 몰라 함께 머리썼던 것도 같고... 아마 그걸 받을 사람이 진우오빠였던 것 같다. 오빠가 선발대라서 그랬던 것 같은데..
참.. 남관오빠가 며칠 집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단다. 사람들에게 들으니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오빠가 떠나는데 맘이 좀 그랬다. 오빠가 총무직을 맡고 있어서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오빠의 비중은 컸으니까... 며칠 후에 돌아오기로 했다.
나도 발바닥 물집을 수술 받았다. 아빠한테.. 아빠가 무지하게 꽉짜서 아팠지만 참기로 했다. 참아야하느니라... 그렇게 해야 옆으로 퍼지지 않는단다. 물집이 잘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다. 태연이를 보니 장난이 아닌데.. 은지도 그렇고....
잘 잤는데 이불이 발에 닿지 않아 좀 추웠다. 근데 옆에서 자던 대성아저씨가 신문지로 발 싸줬다. 덕분에 무지하게 따뜻했다. 역시.. 난 발이 차면 무슨 일을 잘못한다. 아저씨 덕분에 정말 잘 잤다. 글구 불침번은 그냥 자래서 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