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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편무당(毋偏毋黨)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패거리를 짓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이념이나 어떤 편이나 어떤 무리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 입장을 지킨다는 의미의 말이다.
毋 : 말 무(毋/0)
偏 : 치우칠 편(亻/9)
毋 : 말 무(毋/0)
黨 : 무리 당(黑/8)
(유의어)
불편부당(不偏不黨)
출전 : 사기(史記) 卷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第8
이 성어는 중국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무너뜨리고 주(周)나라를 세우고서, 은(殷)나라의 왕족이며 충신이었던 기자(箕子)를 찾아가 백성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경영(통치)하는 방법을 물으니, 기자가 대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毋偏毋頗, 遵王之義. 毋有作好, 遵王之道. 毋有作悪, 遵王之路. 毋偏毋党, 王道蕩蕩. 毋党毋偏, 王道平平. 毋反毋側, 王道正直.
편향되어 분열시키지 말고 왕의 올바름을 지키고, 좋고 나쁨을 가려 미움을 쌓지 않는 왕의 길을 걷고, 편갈라 파당을 짓지 않아야 왕도가 풍성해집니다. 당파가 없는 것이야 말로 왕도가 고르다는 걸 의미하며 반대나 편향됨이 없는 것이 왕의 정직함입니다.
기자(箕子)는 중국 상나라 문정(文丁)의 아들, 왕족이자 기자조선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성은 자(子), 이름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이며, 기자는 작위명인 동시에 별칭이다. 상나라 말기에 왕족으로 태어나 주왕 제신 시기를 살았으며, 상나라가 주나라에게 멸망당하자 조선으로 망명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으로 망명한 후에는 조선의 군주가 되어 그의 후손이 1천여 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전해지나, 사실 여부는 논란이 많다.
기자(箕子)는 상나라 말기 주왕이 사치를 부리는 것을 보고 주왕에게 간언했으나 주왕은 오히려 기자를 옥에 가두었다. 이때 유명한 상아 젓가락 고사가 나온다. "주왕이 매우 귀한 코끼리 상아로 만든 젓가락을 얻게 되자, 기자는 '상아 젓가락을 쓰면 그릇도 흙으로 만든 그릇이 아니라 뿔이나 옥그릇을 써야 할 것이고, 그 그릇에 담는 음식도 코끼리나 표범의 고기처럼 진귀한 음식을 차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비단옷을 입고 고대광실에서 살아야 할 것이니, 젓가락에 맞는 격을 찾다 보면 천하의 재물을 동원해도 모자를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사치를 그만둘 것을 간언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한비자'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주왕이 제멋대로 쾌락에 빠지자, 기자가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떠나야함이 마땅합니다.” 기자가 말했다. “신하된 자가 간언했는데도 듣지 않는다고 떠나면 이는 군주의 잘못은 드러내고 자신은 백성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니 나로서는 차마 그렇게 못하겠다.” 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여 노예가 되었다. 마침내 숨어서 스스로 슬퍼하면서 거문고를 연주하였으므로 이 곡조가 ‘기자조(箕子操)’라고 전해지고 있다.
箕子操(기자조) : 기자가 슬퍼하면서 거문고로 연주한 곡.
嗟嗟紂爲無道殺比干. 嗟重復嗟. 獨奈何.
漆身爲厲. 被髮以佯狂. 今奈宗廟何.
天乎天哉. 欲負石自投河. 嗟復奈社稷何.
슬프도다! 슬프도다! 주(紂)가 무도하여 비간(比干)을 죽였도다. 슬프고 또 슬퍼라. 나 홀로 어이 할꼬.
온몸에 옻칠하여 문둥이로 변신하고 머리 풀어 광인으로 가장하였네. 지금의 이 종묘를 누가 받들 것인가?
하늘도 야속하오. 돌을 지고 깊은 물에 빠져나 볼까. 슬프다. 이 사직을 어이 할꼬.
아득하기만 한 탕평(蕩平)
음탕 무도했던 은나라 마지막 왕 주(紂)를 꺾은 주나라 무왕(武王)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주의 신하였던 기자(箕子)를 찾아간 것이다. 무왕은 기자에게 백성들을 화집(和集)시킬 지혜를 물었다.
이 짧은 일화에 이미 리더십의 핵심 두 가지가 담겨 있다. 무왕은 기꺼이 불치하문(不恥下問)할 줄 아는 리더였다. 둘째, 정치하는 궁극적 요체가 화집(和集), 백성들을 화합시켜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다만 그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기자는 그 유명한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말한다. 유학이 제시하는 최고의 제왕학이라는 평가를 듣는 이 짧은 글은 서경(書經)에 실려 있다.
아홉 가지 중에도 가장 중요한 범주는 가운데[中]인 다섯 번째 '황극(皇極)을 세우라'라는 것이다. 임금 스스로 만백성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편무당(無偏無黨)하면 왕의 도리가 탕탕(蕩蕩)해지고 무당무편(無黨無偏)하면 왕의 도리가 평평(平平)해집니다."
예로부터 법 기술자들은 정치를 하나의 테크닉으로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공자는 송사 자체를 없게 하는 것이 정치라는 생각으로 이 '서경'을 편찬했고 '홍범구주'를 포함시켰을 것이다.
한편으로 기울거나 쏠려서는 탕탕(蕩蕩)할 수 없고 패거리를 지어서는 평평(平平)할 수 없다. 여야를 막론하고 지금 국민들을 화집(和集)시키려 힘쓰는 정치인이 하나라도 있는가? 되레 편 가르기와 민망한 수준의 충성 경쟁 행태가 하루 하루 국민들 불쾌지수를 높일 뿐이다.
특히 이럴수록 여당이라는 지도자들은 더 큰 책임을 가져야 한다. 의석수가 적어도 명색이 정권을 맡은 여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대표 선거 과정은 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돌리게 하고 있다. 화집(和集)은커녕 국민들을 유리(流離) 이산(離散)으로 내몰고 있다. 군주가 탕평(蕩平)을 모르면 어느 때고 백성들은 이런 처지에 놓였다.
사기(史記) 세가(世家) 권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이 편은 30세가(世家) 중 여덟 번째 편으로 주(周)나라의 제후국인 송(宋)나라의 흥망과정을 기록하였다. 송나라는 주 성왕(周 成王)이 은나라 주(紂)왕의 아들 무경(武庚)을 주벌한 후 미자(微子)를 송(宋)에 봉하여 은나라의 뒤를 잇게 하여 성립되었다.
사마천은 태사공 자서에서 “아아, 기자(箕子)여! 아아, 기자(箕子)여! 바른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노예가 되었구나. 무경(武庚)이 죽자 주 왕실은 미자(微子)를 송(宋)에 봉했다. 후세에 송 양공(宋 襄公)이 홍수(泓水)에서 초나라와 싸우다 부상을 입고 패했는데 군자라면 그 누가 인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송 경공(宋 景公)이 겸양의 덕을 쌓으니 좋지 않은 징조인 화성(火星)이 서쪽으로 물러났다. 척성(剔成)이 포악하여 송나라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미자(微子)가 기자(箕子)를 태사(太師)로 삼아 자문을 구하여 정치를 행한 것을 칭송하여 제8편 ‘송세가(宋世家)’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
微子開者, 殷帝乙之首子而帝紂之庶兄也. 紂既立, 不明, 淫亂於政, 微子數諫, 紂不聴.
미자(微子) 개(開)는 은(殷)나라 제을(帝乙)의 큰 아들이자, 주왕(紂王)의 배다른 형이다. 주왕이 즉위하였으나, 현명하지 못한데다 정치도 음란했다. 미자가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다.
及祖伊以周西伯昌之修徳, 滅仇国, 懼禍至, 以告紂. 紂曰: 我生不有命在天乎? 是何能為?
주(周)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이 덕을 닦고 구(仇)라는 나라를 멸망시키자 조이(祖伊)는 그 화가 미칠까 겁이 나서 이를 주왕에게 일러바쳤다. 주왕은 '내가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천명 아닌가? 그가 무얼 어쩌겠는가?' 라고 했다.
於是微子度紂終不可諫, 欲死之, 及去, 未能自決, 乃問於太師少師曰: 殷不有治政, 不治四方. 我祖遂陳於上, 紂沈湎於酒, 婦人是用, 亂敗湯徳於下.
미자는 주왕은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죽이려 하다가, 떠나려고 마음을 먹은 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태사(太師)와 소사(少師)에게 가서 말했다. '은나라는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해 사방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우리 선조들께서는 세상에 공업을 이루었지만 주왕은 술에 빠져 부인 말만 듣다가 탕(湯)의 덕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렸습니다.
殷既小大好草窃姦宄, 卿士師師非度, 皆有罪辜, 乃無維獲, 小民乃並興, 相為敵讎. 今殷其典喪! 若渉水無津涯. 殷遂喪, 越至于今.
은나라는 높거나 낮거나 할 것 없이 도적질을 하고 법을 어기며 난을 일으키기 좋아했습니다. 왕실의 경사들은 서로를 본받으며 법도를 지키기 않으니 모두가 죄를 짓고도 누구 하나 응분의 대가인 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 모두 서로를 적이나 원수처럼 여깁니다. 지금 은나라는 나라의 법과 제도를 상실하여 마치 나루터도 없이 물을 건너려는 것 같습니다. 은나라가 마침내 망할 것 같으니 지금이 바로 그런 것 같습니다.'
曰: 太師, 少師, 我其発出往? 吾家保于喪? 今女無故告予, 顛躋, 如之何其?
그리고는 묻기를, '태사, 소사! 내가 도망쳐야겠소? 아니면 조상제사를 지며야겠소? 남아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겠소? 지금 그대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아 잘못된다면 어찌할 셈이오?' 라고 했다.
太師若曰: 王子, 天篤下菑亡殷国, 乃毋畏畏, 不用老長. 今殷民乃陋淫神祇之祀. 今誠得治国, 国治身死不恨. 為死, 終不得治, 不如去. 遂亡.
태사는 이렇게 말했다. '왕자시여! 하늘이 엄중한 재앙을 내려 은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는데도 (주왕은)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늙은이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지금 은나라는 인민들조차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지금 진실로 나라를 다스려 잘 다스려진다면 몸이 죽어도 여한이 없겠으나, 죽어도 끝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떠나는 것만 못합니다.' (미자는) 마침내 도망쳤다.
箕子者, 紂親戚也. 紂始為象箸, 箕子歎曰: 彼為象箸, 必為玉桮; 為桮, 則必思遠方珍怪之物而御之矣. 輿馬宮室之漸自此始, 不可振也.
기자(箕子)는 주왕의 친척이다.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쓰기 시작하자 기자는 '그가 상아로 만든 젓가락을 사용했으니 틀림없이 옥으로 만든 잔을 사용할 것이고, 옥으로 만든 잔을 사용한다면 틀림없이 먼 곳의 진기하고 괴이한 물건들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수레와 말 그리고 궁실의 사치가 이리 시작되어 되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고 탄식했다.
紂為淫泆, 箕子諫, 不聴. 人或曰: 可以去矣.
주왕이 제멋대로 굴자, 기자가 충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누군가가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箕子曰: 為人臣諫不聴而去, 是彰君之悪而自説於民, 吾不忍為也. 乃被髪詳狂而為奴.
기자는 '신하된 자가 간언했는데도 듣지 않는다고 떠나면 이는 군주의 잘못은 드러내고 자신은 인민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니 나로서는 차마 그렇게 못하겠소'라 하고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척 하며 노예가 되었다.
遂隠而鼓琴以自悲, 故傳之曰箕子操.
드디어 숨어서 스스로 슬퍼하면서 거문고를 연주하니, '기자조(箕子操)'로 전해지고 있다.
王子比干者, 亦紂之親戚也. 見箕子諫不聴而為奴, 則曰: 君有過而不以死争, 則百姓何辜! 乃直言諫紂.
왕자 비간(比干) 역시 주왕의 친척이다. 기자가 간언해도 듣지 않고, 기자가 노예가 되는 것을 보고는 '군주에게 허물이 있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따지지 않는다면 무고한 백성들만 피해를 입지 않겠는가?'라 하고는 주왕에게 바른말로 충고했다.
紂怒曰: 吾聞聖人之心有七竅, 信有諸乎? 乃遂殺王子比干, 刳視其心.
주왕이 노하여 '내가 듣기에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던데 정말 그런가?'라며 왕자 비간을 죽여 그 가슴을 열고 심장을 보았다.
微子曰: 父子有骨肉, 而臣主以義属. 故父有過, 子三諫不聴, 則随而号之. 人臣三諫不聴, 則其義可以去矣.
미자가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골육의 정이 있고, 군주와 신하는 의리로 맺어져 있다. 그래서 아비에게 잘못이 있으면 자식은 세 번을 간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자식은 계속 통곡할 따름이다. 신하된 자가 세 번을 충고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그 의리상 떠나도 된다'고 했다.
於是太師少師乃勧微子去, 遂行.
이에 태사와 소사가 미자에게 떠날 것을 권하니 마침내 떠났다.
周武王伐紂克殷, 微子乃持其祭器造於軍門, 肉袒面縛, 左牽羊, 右把茅, 膝行而前以告. 於是武王乃釈微子, 复其位如故.
주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여 은나라를 물리치자 미자는 바로 제기를 들고 군문(軍門)으로 가서는 웃통을 벗고 등 뒤로 손을 묶는 다음 (사람을 시켜) 왼편으로는 양을 끌고 오른편으로는 소꼬리로 장식한 깃발을 쥐게 했다. 그리고는 무릎으로 기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이에 무왕은 미자를 석방하고 전과 같이 자리를 회복시켰다.
武王封紂子武庚祿父以続殷祀, 使管叔蔡叔傅相之.
무왕은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에게 은나라 왕조의 제사를 잇게 하고,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시켜 그를 가르치도록 했다.
기자와 '홍범구등'
武王既克殷, 訪問箕子.
무왕이 은을 물리친 다음 기자를 방문했다.
武王曰: 於乎! 維天陰定下民, 相和其居,我不知其常倫所序.
무왕이 '오호! 하늘은 조용히 천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서로 화목하게 살게 하는데 내 그 이치의 순서도 몰랐다니'
箕子対曰:在昔鯀陻鴻水, 汨陳其五行, 帝乃震怒, 不従鴻範九等, 常倫所斁. 鯀則殛死, 禹乃嗣興. 天乃錫禹鴻範九等, 常倫所序.
기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옛날 곤(鯀)이 홍수를 막으면서 '홍범구등(鴻範九等)'을 따르지 않고 오행의 질서를 어지럽히자 상제께서 크게 노하여 곤이 죽임을 당하고 우가 그 일을 이어받으니 하늘이 우에게 홍범구등을 내려 주어 일상의 이치가 순서를 찾게 된 것입니다.
初一曰五行, 二曰五事,
三曰八政, 四曰五紀,
五曰皇極, 六曰三徳,
七曰稽疑, 八曰庶徴,
九曰嚮用五福, 畏用六極.
(홍범구등의) 그 처음을 오행(五行)이라 하고, 두 번째를 오사(五事)라 하며, 세 번째를 팔정(八政), 네 번째를 오기(五紀), 다섯 번째를 황극(皇極)이고, 여섯 번째를 삼덕(三德), 일곱 번째를 계의(稽疑), 여덟 번째를 서징(庶徵), 아홉 번째를 향용오복(嚮用五福)과 외용육극(畏用六極)이라 합니다.
五行: 一曰水, 二曰火, 三曰木, 四曰金, 五曰土. 水曰潤下, 火曰炎上, 木曰曲直, 金曰従革, 土曰稼穡. 潤下作鹹, 炎上作苦, 曲直作酸, 従革作辛, 稼穡作甘.
오행(五行)은 물, 불, 나무, 쇠, 흙입니다. 물은 아래로 젖어들며, 불은 위로 타오릅니다. 나무는 굽거나 곧으며, 쇠는 모양을 바꿉니다. 흙은 뿌리고 거둘 수 있습니다. 아래로 젖어들면 짠 맛을 내고, 위로 타오르면 쓴맛을 냅니다. 굽거나 곧으면 신맛을 내고, 모양을 바꾸면 매운맛을 내며, 뿌리고 거두면 단맛을 냅니다.
五事: 一曰貌, 二曰言, 三曰視, 四曰聴, 五曰思. 貌曰恭, 言曰従, 視曰明, 聴曰聡,思曰睿. 恭作粛, 従作治, 明作智, 聡作謀,睿作聖. 八政:一曰食, 二曰貨, 三曰祀, 四曰司空, 五曰司徒, 六曰司冦, 七曰賓, 八曰師.
오사(五事)란 몸가짐, 말, 보기, 듣기, 생각을 말합니다. 몸가짐은 공손해야 하고, 말은 (이치에) 맞아야 합니다. 보는 것은 밝아야 하고, 듣는 것은 총명해야 하고, 생각은 (사리를) 통달해야 합니다. 공손하면 엄숙해지고, 이치에 맞으면 다스릴 수 있고, 밝으면 지혜로워지고, 총명하면 일을 꾀할 수 있고, 통달하면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팔정이란 식(食), 화(貨), 사(祀), 사공(司空), 사도(司徒), 사구(司寇), 빈(賓), 사(師)를 말합니다.
五紀: 一曰歳, 二曰月, 三曰日, 四曰星辰, 五曰暦數.
다섯 개의 벼리는 세(歲), 월(月), 일(日), 성신(星辰), 역수(曆數)요.
皇極: 皇建其有極, 斂時五福, 用傅錫其庶民, 維時其庶民于女極,錫女保極. 凡厥庶民, 毋有淫朋, 人毋有比徳, 維皇作極.
황극은 제왕이 추구해야 할 지극한 법칙으로, 오복을 추려 서민들에게 가르치고 베풀게 될 때 서민들도 그 극진함을 따라 제왕에게 극진하게 대하게 된다. 무릇 모든 백성들이 극진하면 사악한 패거리를 짓지 않고, 사람들이 서로 덕을 비교하지 않게 되므로 제왕의 극진함과 통하게 됩니다.
凡厥庶民, 有猷有為有守, 女則念之. 不協于極, 不離于咎, 皇則受之. 而安而色, 曰予所好徳, 女則錫之福. 時人斯其維皇之極. 毋侮鰥寡而畏高明.
무릇 백성들 중 꾀도 있고, 실행력도 있고, 지조도 있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제왕의 극진함을 따르지도 않고 허물이 있더라도 제왕은 거둘 줄 알아야 합니다. 안색이 평안해야 왕이 덕이 있다 보이고 왕이 복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은 제왕의 극진함과 통하여 홀아비나 과부를 모욕하지 않으며 높은 지위나 현명한 자를 두려워 않습니다.
人之有能有為, 使羞其行, 而国其昌. 凡厥正人, 既富方谷. 女不能使有好于而家, 時人斯其辜. 于其毋好, 女雖錫之福, 其作女用咎.
능력있고 실천력있는 사람들에게 그 처신을 살피게 하면 그 무리가 번창하고, 바른 사람들이 재능을 펼치게 하면 나라는 번창 할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들이 개인의 부를 천하에 베풀어야 합니다. 왕이 장점이 있는 이들을 부리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허물을 지을 것이며 선한 이들에게 선히 대해 주어도 그를 빌미로 허물을 지을 것 입니다.
毋偏毋頗, 遵王之義. 毋有作好, 遵王之道. 毋有作悪, 遵王之路. 毋偏毋党, 王道蕩蕩. 毋党毋偏, 王道平平. 毋反毋側, 王道正直.
편향되어 분열시키지 말고 왕의 올바름을 지키고, 좋고 나쁨을 가려 미움을 쌓지 않는 왕의 길을 걷고, 편갈라 파당을 짓지 않아야 왕도가 풍성해집니다. 당파가 없는 것이야 말로 왕도가 고르다는 걸 의미하며 반대나 편향됨이 없는 것이 왕의 정직함입니다.
会其有極, 帰其有極. 曰王極之傅言, 是夷是訓, 于帝其順.
극진함에 합해야 극진함으로 돌아가는 법이니 말하자면 왕의 말에 극진함이 있는 것이니 이를 큰 가르침이라 하며 선대 임금들이 따르던 것입니다.
凡厥庶民, 極之傅言, 是順是行, 以近天子之光. 曰天子作民父母, 以為天下王.
백성들이 가르침에 극진하면 순조로이 실행되며 천자의 덕에 가까워 지는 겁니다. 이를 다른 말로 천자가 백성들의 부모가 된다는 말이요, 이를 천하왕이라 하는 겁니다.
三徳: 一曰正直, 二曰剛克, 三曰柔克. 平康正直, 彊不友剛克, 内友柔克, 沈漸剛克, 高明柔克.
삼덕(三德)이란 정직, 굳세게 이겨냄, 부드럽게 이겨냄으로 정직함은 고르고 건강한 고집이 아니어야 하며, 강한 것과 굳건한 것과는 다른 것이며, 안으로 유연하게 상대를 이기며 점점 굳건해지는 것이며 왕보다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꺾으려 들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維辟作福, 維辟作威, 維辟玉食. 臣無有作福作威玉食. 臣有作福作威玉食, 其害于而家, 凶于而国, 人用側頗辟, 民用僭忒.
왕의 역할은 선을 베푸는(복) 것이며 왕만이 권위를 세울 수 있으며, 제왕 만이 진귀한 음식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신하에게는 복을 지을 권리도 권위를 내세울 권리도 진귀한 음식을 맛 볼 자격이 없습니다. 신하가 그리 된다면 집안 나아가 나라에 해악이요 흉조이니 사람들이 파당과 이간을 제왕의 권리로 생각하면 백성들도 복을 내릴 권한과 죄를 다스릴 위엄과 좋은 음식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면, 그 피해는 집안에 미치고 나라에 해를 가져다 줄 것이며 사람들도 그리 서로 헐뜯고 싸울 것입니다. (신하들이 사치해선 안됩니다)
稽疑: 択建立卜筮人. 乃命卜筮, 曰雨, 曰済, 曰涕, 曰霧, 曰克, 曰貞, 曰悔, 凡七.
계의(稽疑)란 점복에 능한 사람을 뽑아 점복을 하도록 명하는 것인데 비, 갬, 구름, 안개, 상극, 내괘, 외괘의 일곱 가지를 봅니다.
卜五, 占之用二, 衍貣. 立時人為卜筮, 三人占則従二人之言. 女則有大疑, 謀及女心, 謀及卿士, 謀及庶人, 謀及卜筮.
복(거북점)은 다섯 가지, 점(산가지점)은 두 가지로 점괘를 살핍니다. 점복을 행하는데는 세 사람이 점을 쳤을 경우 결과가 같은 두 사람의 말을 따르고 왕께서 의심이 든다면 먼저 자신을 깊이 생각하시고 그 다음에 대신들의 마음을 살피고 민의를 살피고 맨 나중 점사나 무당의 의견을 듣습니다.
女則従, 亀従, 筮従, 卿士従, 庶民従, 是之謂大同, 而身其康彊, 而子孫其逢吉.
왕의 마음도 합하고 점복도, 대신들도, 백성들의 마음에도 합하면 이를 대동(大同)이라 부릅니다. 그러면 몸도 건강해지고 자손들도 크게 길할 것입니다.
女則従, 亀従, 筮従, 卿士逆, 庶民逆, 吉. 卿士従, 亀従, 筮従, 女則逆, 庶民逆, 吉. 庶民従, 亀従, 筮従, 女則逆, 卿士逆, 吉.
왕과 점복이 같고 대신과 백성들의 반대가 있어도 길상으로 보고, 대신들과 점복의 결과가 같다면 왕이나 백성들이 반대해도 길상으로 보고, 백성의 뜻과 점복이 같다면 왕과 대신들이 반대해도 길합니다.
女則従, 亀従, 筮逆, 卿士逆, 庶民逆, 作内吉, 作外凶. 亀筮共違于人, 用静吉, 用作凶.
왕께서 하려는 일에 거북점은 좋다고 나왔는데 산가지 점과 대신들, 관리들, 백성들이 반대하면 내부 일은 길하지만 외부 일은 흉합니다. 점복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어긋난다면 가만히 있으면 길하지만 뭔가 하려고 하면 흉합니다.
庶徴: 曰雨, 曰陽, 曰奥, 曰寒, 曰風, 曰時. 五者來備, 各以其序, 庶草繁廡. 一極備, 凶. 一極亡, 凶.
서징(庶徴)이란 비, 태양, 따스함 추움, 바람 그리고 시기로서 이 다섯 가지가 잘 맞아 떨어지면 만물이 무성하고 그중 하나라도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길흉이 갈립니다.
曰休徴: 曰粛, 時雨若, 曰治, 時暘若; 曰知, 時奥若; 曰謀, 時寒若; 曰聖, 時風若.
좋은 징조란 이렇습니다. 비올 때처럼 정숙하고, 다스림이란 태양이 비치듯 해야 하며, 지식이나 베풂은 따스해야 하며, 뭔가 도모할 때에는 냉정해야 하고, 거룩함이란 바람처럼 모두를 보듬는 것입니다.
曰咎徴: 曰狂, 常雨若; 曰僭, 常暘若; 曰舒, 常奥若; 曰急, 常寒若; 曰霧, 常風若.
나쁜 징조란 이런 것들입니다. 비가 멈추지 않듯 하면 미친 것이요, 너무 해처럼 비추기만 하면 참람한 것이요, 따스하기만 하면 느슨해지고 늘 냉랭하면 성급한 것이요, 바람이 그치지 않으면 아리송해지는 법입니다.
王眚維歳, 卿士維月, 師尹維日.
제왕이 잘못 판단하면 1년이, 대신들이 잘못 판단하면 한 달이, 하급 관리들 잘못 판단하면 하루가 갑니다.
歳月日時毋易, 百谷用成, 治用明, 畯民用章, 家用平康. 日月歳時既易, 百谷用不成, 治用昏不明, 畯民用微, 家用不寧.
한 해, 한 달, 하루에 거스름이 없으면 백곡이 풍성해지고 정치가 현명하게 되고 가정이 평안하고, 그렇듯 판단이 자주 바뀌면 백곡이 익지 않고 정치력도 미미해지고 가정도 편치 못합니다.
庶民維星, 星有好風, 星有好雨. 日月之行, 有冬有夏. 月之従星, 則以風雨.
어떤 별은 바람을, 어떤 별은 비를 좋아하듯 백성들은 뭇별들 같습니다. 해와 달의 운행에 따라 겨울이 있고 여름이 있습니다. (계절이 변합니다) 달(재상)이 별(백성)을 좇으면 시절없이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립니다.
五福: 一曰寿, 二曰富, 三曰康寧, 四曰攸好徳, 五曰考終命.
오복(五福)이란 목숨, 부귀, 건강, 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함, 제명대로 편히 죽는 것을 말합니다.
六極: 一曰凶短折,二曰疾, 三曰憂, 四曰貧, 五曰悪, 六曰弱.
육극(六極)은 요절, 질병, 근심, 가난, 추함, 허약함을 말합니다.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朝鮮) 제후에 봉하되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
其後箕子朝周, 過故殷虚, 感宮室毀壊, 生禾黍, 箕子傷之, 欲哭則不可.
그 뒤 기자가 주나라에 조회를 드리러 은나라의 폐허 은허(殷墟)를 지나다가 궁실이 무너진 자리에 벼와 기장이 자라고 있는 것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기자는 상심하여 통곡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欲泣為其近婦人, 乃作麦秀之詩以歌詠之.
울고도 싶으나 아녀자 같을까봐 '맥수(麥秀)의 시'를 지어 노래를 부르니,
其詩曰: 麦秀漸漸兮, 禾黍油油. 彼狡僮兮, 不與我好兮!
그 시는 이랬다. '보리 이삭은 패고, 벼와 기장은 무성하구나! 저 악동아, 나와 가까이 지내긴 글렀구나!'
所謂狡童者, 紂也. 殷民聞之, 皆為流涕.
이른바 악동이란 주왕을 말한다. 은나라의 유민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史記/卷38 宋微子世家)
탕평책(蕩平策)
개요
탕평책(蕩平策)은 조선후기 붕당간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추구한 정치 이념이다. 이것은 붕당 간의 갈등을 조정하여 정치적 공공성과 책임성을 촉구함으로써 점차 보수화되어 가던 정치세력의 내적 모순을 극복하고 사회적 갈등과 모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탕평책은 숙종 대에 탕평론(蕩平論)이 제시되고, 영조·정조 대에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전개되었다. 영조와 정조에 의한 탕평책은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인재등용이었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천명하면서 제시한 원칙은 관직을 위해 사람을 선택한다는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원칙이었다.
즉 그가 속한 당파가 아닌 그가 지닌 능력에 따른 인재 중용을 내세웠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정치를 통해 특정 당파의 집권으로 초래될 수 있는 국정혼란과 갈등을 완화시키고 백성들을 위한 위민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권55, 영조 18년 3월 26일.
命將命以下諸執事入侍 以勿事黨習之意 諄諄面飭 以御筆書一紙授儒生 使歸傳大司成曰 使後世 當知予心也. 其文曰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其下書年月 仍命刻碑 立之泮水橋上.
(영조가) 장명(將命) 이하 모든 집사에게 입시(入侍)를 명하고 당습(黨習)을 일삼지 말라는 뜻으로 순순(諄諄)히 면칙(面飭)하고 어필(御筆)로 쓴 한 장의 종이를 유생에게 주어 돌아가 대사성에게 전하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후세로 하여금 마땅히 나의 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글에 쓰기를, ‘원만하고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심(公心)이요, 편벽되고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의(私意)이다.’라고 하였다. 그 아래에 연월(年月)을 쓰고 비(碑)에 새겨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웠다.
정조실록(正祖實錄) 권2, 정조 즉위년 9월 22일.
噫! 蕩平卽祛偏黨 無物我之名 … 自上視之 均是一室之人同胞中物. 善則賞之 罪則罰之 有何愛憎之別? … 昔諸葛亮猶曰 宮中府中 俱爲一體. 況一天之下 一國之內 共尊一人 同事一君者乎? … 從今以後 凡玆事我廷臣 無曰老論少論 偕底大道. … 惟其人是視 用賢而捨不肖.
(정조가 말했다.) 아! 탕평이란 곧 편당(偏黨)을 버리고 남과 나를 구분하지 않는 이름인데, … 위에서 본다면 다 같은 한 집안의 사람들이고 다 같은 동포이다. 착한 사람은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벌을 주는 것에 어찌 좋아하고 미워하는 구별이 있겠는가? … 옛날 제갈량은 궁중과 부중(府中)이 모두 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한 하늘 아래 한 나라 안에서 한 사람을 높이며 함께 한 임금을 섬기는 자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지 아니한가? … 지금 이후로 나를 섬기는 조정의 신하는 노론이나 소론 할 것 없이 모두 대도(大道)에 나오도록 하라. … 오직 그 사람을 보아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이를 버릴 것이다.
정조실록(正祖實錄) 권36, 정조 16년 11월 6일.
肆予導箕聖斂時敷福之範 承先王聖功神化之緖 特書燕寢之扁曰 蕩蕩平平室 而庭衢八荒四大字 遍題八牕之楣 昕夕顧諟 作我息壤. 於是乎蓽路藍縷 披自草萊.
(정조가 말했다) “드디어 내가 기자(箕子)께서 복을 모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신 홍범(洪範)을 길잡이로 하고, 선왕께서 남기신 거룩한 공적과 신비로운 교화를 계승하게 되자, 침전의 편액에 특별히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크게 쓰고 ‘정구팔황(庭衢八荒)’ 네 대자(大字)를 여덟 개의 창문 위에다 두루 써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이를 돌아보며 나의 식양(息壤, 굳게 맹세한 약속)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한미한 집안의 누더기를 걸친 자들을 초야에서 뽑아 올렸다.”
성격과 운영
조선의 정치이념은 백성의 공공복리를 최대화하려는 위민(爲民)의 정치였고, 봉공멸사(奉公滅私)를 추구하는 소통과 공감의 정치였다. 조선의 국왕은 전제적이고 소유적인 독점적 지배자라기보다 공공성의 실현이라는 천명을 수행하는 최고의 역할자로 기능했다.
조선의 공론정치는 공론을 중시하는 정치 또는 공론화 과정을 통한 신중한 정책 결정, 국가의 원기(元氣)인 공정한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정치, 지식인 관리와 유생들로 이루어진 양반들이 형성한 공론이 국왕과 언관을 주축으로 하여 조정에서 공식적이고도 공개적으로 소통되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는 선조 대 이후 사림들의 붕당이 생겨나면서 당론이 공론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붕당 간의 극단적인 적대와 분열 속에서 백성의 공공복리는 설 자리가 없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은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하였다. 영조는 일찍이 “군자와 소인의 구별은 논할 것도 없고, 붕당이 나라를 망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탕평을 표방하고, 국왕의 정치 원칙에 부합하는 온건한 인재들을 골라 탕평정치를 운영했다.
영조는 당파에 관계없이 실무에 밝은 사람을 추천하되 반드시 당파별로 안배해서 올리게 하고 다른 당파의 인물들이 서로 한 조를 이루어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는 인사원칙, 이른바 호대쌍거론(互對雙擧論)에 따라 관리를 선발했다. 즉, 정국운영의 규칙을 유연화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파당을 참여시킴으로써 붕당 간의 공조체제를 구축하려 한 것이다.
정조는 자신만의 원칙을 적용한 탕평정치를 구사했다. 정조는 각 당파의 강경파를 기용하여 참된 탕평을 성공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정조는 당파를 가리지 않고 ‘청명한 견해를 고집하며, 준엄한 정치원칙을 지키는 인물’에게 권력을 주어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다. 정조는 붕당 간의 의리와 인재를 혼합하되 정당성을 중시하는 것으로서 ‘의리탕평(義理蕩平), 준론탕평(峻論蕩平)’이라 불린다.
1776년(정조 즉위년) 9월에 정조는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탕평윤음을 발표하였다. 그는 탕평이란 편당을 제거하고 남과 나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라 규정하였다.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신민(臣民)이 한 가족 한 동포이므로 갈등이나 분쟁 국면에서 어느 쪽도 편들지 않은 채 대도(大道)의 차원에서 공정하게 시비를 가리고 중재하겠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또한 정조는 분열과 대결의 정치를 종식하고자 하였다. 그는 '오직 그 사람을 보아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이를 버릴 것'을 인사기준으로 내세웠다. 그가 속한 문벌이나 당파가 아닌 그가 지닌 능력에 따른 인재 중용을 천명한 것이다. 실제로 정조는 지역 간 계층 간 소통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실시했다. 소외되고 배제된 지방의 인재가 등용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최대한 고르게 사람을 씀으로써 정치적 주체를 확대하였다.
정조가 탕평을 펼쳤던 이유는 각 붕당의 명분과 개인의 명예를 회복하고 존중해 줄 때 비로소 인재들의 국정 참여가 가능해지고 참된 통합의 정치도 이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거듭된 당쟁과 환국정치의 여파로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고 처벌된 각 당파의 영수들과 후손들이 많았기에 다양한 인재들을 공적 영역으로 흡수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정조는 정치적 수적이었던 노론 벽파 중에서도 의리가 철저하고 정밀한 인물이라면 오래도록 중용하였으며, 의리를 가리기 위해 그 누구와의 공적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은 문벌이나 당파 같은 출신 성분이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오직 그가 지닌 능력에 따라 사람을 쓰는 공정한 인사정책, 지역 간 소통 및 계층 간 소통을 극대화하는 정치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탕평책과 민주주의
영조와 정조는 탕평정치를 통해 여론의 경청, 민의의 수렴, 회의의 활성화 등과 같은 공론 중시를 통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결정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함께 모여 토론하고 지혜를 모으는 것이 공공성을 확인하고 실현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신하들을 비롯하여 일반 백성들과 늘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여론 수렴은 백성의 대표 의사이자 정의로운 공적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는 곧 백성의 공공복리를 위한 위민의 정치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탕평책은 백성을 위한 소통과 협력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잘 보여준다.
영조와 정조의 공정한 인사정책은 오늘날 정부의 주요 보직 인사에 시사점을 준다. 오늘날 정부의 인사정책은 코드인사 혹은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을 받으며, 지역 차별과 학벌로 인한 논란도 나타난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정치를 통해 능력 위주의 인재등용을 추진했던 것처럼, 오늘날 정부 고위직 인사에서도 인재의 발탁, 정책의 이념적 계층적 갈등 조정, 추진동력의 배가를 위해 당색에 따른 인재의 안배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조가 자신의 침전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적힌 편액을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자신의 정치기조로 삼은 것처럼 오늘날 최고인사권자는 자신의 국정철학에 적합한 인물을 공정하게 발탁하고, 국정 수행과정에서 능력과 자질이 부적격으로 판단될 경우 과감한 인사 개편을 단행하여 정당한 인사권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탕탕평평(蕩蕩平平)
교육계의 가장 큰 이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일 것이다. 교육부는 현행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 줄 수 없고, 우리 사회의 여건과 상황을 고려할 때 국정화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찬반은 교육계는 물론 온 국민의 관심과 함께 갈등과 분열을 불러왔다.
지금의 좌편향 교과서로 인한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고, 일관성 있는 역사교육을 위해 국정화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독재와 친일 미화에 대한 우려와 다양성을 주장하는 반대론은 극심한 대립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로 인한 국민적 합의나 간극이 좁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진행되고 있다.
정부가 국정화 방침을 최종 확정해 고시하고 집필진을 구성해 집필을 시작함으로써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이제 관심은 어떻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역사를 교과서에 담을 수 있느냐로 모아지고 있다. 공정성은 모든 사안에 대한 판단 기준의 근본이며, 상호 신뢰와 협력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고전의 백미인 사서오경 중 하나인 서경에도 사회 통합의 첫째 미덕으로 공정성을 꼽고 있다. 의인으로 중국 역사를 빛낸 백이와 숙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주의 희발은 군사를 일으켜 폭정을 일삼던 상나라의 紂(주)왕을 무찌르고 천자가 됐다.
천자가 된 무왕은 어떻게 정치를 해야 이전 나라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고민 끝에 당시의 현자 箕子(기자)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기자는 정치의 요체를 아홉 가지 洪範(홍범)으로 정리했다고, 書經(서경) 周書(주서) 洪範(홍범)편에 수록돼 있다.
그 가운데 공정성에 해당되는 蕩蕩(탕탕)과 平平(평평)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의미심장하다.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말라 정치의 길이 탕탕하리라(無偏無黨무편무당 王道蕩蕩왕도탕탕). 한쪽을 편들지 말라. 정치의 길이 평평하리라(無黨無偏무당무편 王道平平왕도평평). 거스르지 말고 기우뚱하지 말라. 정치가 바르고 곧으리라(無反無側무반무측 王道正直왕도정직)."
蕩(탕)은 공정함에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떠드는 소리를 씻어 버린다는 뜻이고, 平(평)은 규칙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고르게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탕탕평평(蕩蕩平平)은 영조와 정조가 당쟁이 치열하던 정국 수습을 위해 탕평책을 실시함으로써 우리에게 더욱 친근해졌다. 왕세자 시절 당쟁의 폐해를 직접 경험한 영조는 1742년(영조 18) 탕평책을 표방하고 다음과 같은 친서를 비에 새겨 성균관 반수교 위에 세움으로써 탕평의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두루 친하되 편당 짓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周而弗比주이불비 乃君子之公心내군자지공심), 편당만 짓고 남과 두루 친하지 않는 것은 소인의 마음이다(比而弗周비이불주 寔小人之私意식소인지사의)."
오늘 우리 사회가 민초들의 삶과 안위는 도외시한 채 당리당략에 따라 치열한 당쟁을 일삼던 영조시대와 유사한 상황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민생 걱정과 상생, 배려와 협력은 상투적인 말과 구호일 뿐, 실천하고 행동하는 모습은 갈수록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가 앞다퉈 공정을 주장하고, 공정한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이 공정하고, 다른 주장은 옳지 않다고 비난하고 화를 내며, 불순한 방법이나 심지어는 폭력적 수단까지 동원해 분노를 표출한다.
매사를 옳고 그름의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배려와 협력이 불가능하다. 사회는 옳고 그름만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다. 같지 않다는 것은 다름일 뿐 틀림이 아니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타협과 상생의 길은 열리는 것이다. 탕평은 곧 공정으로 이어진다.
탕탕평평(蕩蕩平平)은 정치나 인재 등용은 물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근원이기도 하다. 상호 신뢰와 통합의 하모니로 아름다운 사회를 추구하는 주춧돌인 것이다.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 정신과 행적의 기록인 역사교과서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그야말로 탕탕평평(蕩蕩平平)의 바탕 위에 집필되기를 기대해 본다.
▶️ 毋(말 무, 관직 이름 모)는 ❶지사문자로 母(모)에 一(일)을 더하여 여자(女子)를 범하는 자를 一(일)로 금지함의 뜻이다. ❷지사문자로 毋자는 '말다'나 '없다', '아니다'와 같이 무언가를 금지하거나 부정하는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毋자는 '어머니'를 뜻하는 母자에서 파생된 글자이다. 금문에 나온 毋자를 보면 母자의 가슴 부위에 획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금지하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금지하다'라는 것은 간음(奸淫)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금문이 등장했던 은(殷)나라 후기는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여성의 정조를 강조했던 시대로 접어들면서 母자의 가슴 부위에 획을 긋는 방식으로 금지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毋(무, 모)는 ①말다 ②없다(=無) ③아니다(=不) ④(의심쩍어)결심(決心)하지 아니하다 ⑤발어사(=차라리) ⑥앵무새(앵무과의 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 그리고 ⓐ관직(官職)의 이름, 무추(毋追) (모)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말 물(覅)이다. 용례로는 말할 것도 없음을 무론(毋論), 아저씨 아저씨 하고 길짐만 지운다는 뜻으로 겉으로 존경하거나 아끼는 체하면서 부려 먹음을 이르는 말을 무왈숙존 등장녕부(毋曰叔尊等長寧負), 급하면 바늘 허리에 실 매어 쓸까라는 뜻으로 아무리 급하더라도 일의 순서는 밟아야 한다는 말을 무이용급 선박침요(毋以用急線縛鍼腰), 곗술에 낯 내기라는 뜻으로 남의 것을 가지고 제 생색을 냄을 이르는 말을 무장사주 이열오우(毋將社酒以悅吾友), 동냥은 아니 주고 쪽박만 깬다는 뜻으로 요구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고 도리어 해를 끼치거나 나무라기만 한다는 말을 수불급량 무파아표(雖不給糧毋破我瓢), 뜻하지 않게 닥친 화라는 뜻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생기는 재앙을 이르는 말을 무망지화(毋望之禍) 등에 쓰인다.
▶️ 偏(치우칠 편)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한쪽 가의 뜻(邊)을 가진 扁(편)으로 이루어졌다. 사람이 한쪽으로 치우쳐 중정(中正)치 못한 것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偏자는 '치우치다'나 '쏠리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偏자는 人(사람 인)자와 扁(넓적할 편)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扁자는 널빤지에 글이나 그림을 그려 문 위에 걸어 놓는 편액(扁額)을 그린 것이다. 偏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戶자이다. 戶자는 외닫이 문을 그린 것인데, 偏자는 이렇게 한쪽으로만 열리고 닫히는 문을 그린 戶자를 응용해 사람의 마음이나 언행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偏(편)은 편(便). 편짝의 뜻으로 ①치우치다, 쏠리다, 기울다 ②편향되다(偏向--), 편중되다(偏重--) ③먼저 실례하다(失禮--) ④속이다 ⑤나부끼다 ⑥곁, 가 ⑦반, 절반(折半) ⑧한쪽, 한편 ⑨하나, 한 사람 ⑩보좌(補佐) ⑪남은 겨레 ⑫반신불수(半身不隨) ⑬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동류(同類), 동아리(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무리) ⑭시골, 궁벽(窮僻)한 곳 ⑮외곬 ⑯한자(漢字)의 변(邊) ⑰기어코, 일부러, 꼭 ⑱마침, 공교(工巧)롭게, 뜻밖에 ⑲조차, 마저도 ⑳한쪽 면의, 측면(側面)의 ㉑비정식의, 비정규의 ㉒보좌(補佐ㆍ輔佐)의, 버금(으뜸의 바로 아래)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궁벽할 벽(僻)이다. 용례로는 치우쳐 공평하지 못함을 편파(偏頗),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편견(偏見), 생각이나 도량이 좁고 편벽됨을 편협(偏狹), 한 쪽으로 치우침을 편향(偏向),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침을 편벽(偏僻), 한 쪽으로 치우쳐 무거움을 편중(偏重), 일정한 목표나 표준에서 벗어난 차이를 편차(偏差), 기울어져 있음을 편의(偏倚), 편견을 고집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음을 편집(偏執), 한쪽에 치우쳐 사랑함을 편애(偏愛), 성미가 편벽되고 좁음을 편애(偏隘), 한쪽 다리가 짧거나 탈이 나서 뒤뚝뒤뚝 저는 사람을 편파(偏跛), 성질이 편벽된 사람 또는 별난 짓을 잘 하는 사람을 편인(偏人), 성질이 편벽하고 곡함을 편곡(偏曲), 짐을 운반하는 작은 손수레를 편거(偏車), 편벽되게 얽매임을 편계(偏係), 치우치게 고통을 당함 또는 그러한 고통을 편고(偏苦), 공평하지 아니하게 물품을 한쪽에 치우치게 줌을 편급(偏給), 한 글자로 된 이름을 편명(偏名), 변방의 작은 나라를 편비(偏鄙), 편을 갈라 활쏘기를 겨루는 일을 편사(偏射), 편벽되고 막힘이나 융통성이 없음을 편색(偏塞), 편벽되고 인색함을 편색(偏嗇), 치우치게 받음을 편수(偏受), 아버지가 죽거나 하여 홀로 있는 어머니를 편모(偏母),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것을 편파적(偏頗的),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것을 편향적(偏向的),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아주 공평함이나 중립의 태도를 가짐을 불편(不偏), 서쪽으로 기울어짐을 서편(西偏), 물고기나 곤충 따위 몸이 옆으로 납작한 모양을 측편(側偏), 아첨하여 한쪽으로 치우침을 아편(阿偏),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처지를 일컫는 말을 편모시하(偏母侍下), 남보다도 더 고통을 받으면서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편고지역(偏苦之役), 홀로 된 어머니나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처지를 일컫는 말을 편친시하(偏親侍下),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고 중정 공평함을 일컫는 말을 무편무당(無偏無黨),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짐 없이 중정 공평함 또는 늘 그러한 자연의 길의 본질을 일컫는 말을 불편부당(不偏不黨), 사심이나 편파됨이 없다는 뜻으로 매우 공평함을 이르는 말을 무사무편(無私無偏), 아첨하여 한쪽으로 치우침을 일컫는 말을 아유편파(阿諛偏頗), 그릇되고 온당하지 못한 여러 가지 정욕을 일컫는 말을 사욕편정(邪慾偏情), 두 쪽 가운데의 한 쪽 말이나 한쪽으로 기운 말을 일컫는 말을 일편지언(一偏之言) 등에 쓰인다.
▶️ 黨(무리 당)은 ❶형성문자로 党(당)은 통자(通字), 党(당)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검을 흑(黑; 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尙(상, 당)으로 이루어졌다. 尙(상)은 높은 창문에서 연기가 나가는 모양을, 黑(흑)은 창문에서 붙는 그을음을 나타낸다. 黨(당)은 연기 나는 창문에 그을음이 뭉쳐서 검게 묻다, 똑똑하지 않음을 뜻한다. 본디는 쓸데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모임을 黨(당)이라고 했던 것인데, 나중에는 같은 목적으로 모이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黨자는 '무리'나 '일가', '친하게 지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黨자는 尙(오히려 상)자와 黑(검을 흑)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尙자는 집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아궁이를 그린 黑자가 결합한 黨자는 집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연기가 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黨자의 본래 의미는 '선명하지 않다'였다.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주(周)나라 때 500가구를 '一黨'으로 묶는 호적제도가 도입된 이후부터는 '무리'나 '일가'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黨(당)은 (1)무리. 동아리 (2)친족(親族)과 인척을 이르는 말 (3)중국(中國) 주(周)나라 때의 500집의 일컬음 (4)주의(主義), 사상(思想) 등이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조직되는 정치(政治) 결사(結社). 정당(政黨) (5)붕당(朋黨) 등의 뜻으로 ①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한동아리 ②마을, 향리(鄕里) ③일가(一家), 친척(親戚) ④바(所), 곳, 장소(場所) ⑤혹시(或是: 그러할 리는 없지만 만일에), 아마도 ⑥거듭, 빈번(頻繁)히 ⑦접(接)하다, 사귀다 ⑧친하게 지내다 ⑨돕다 ⑩치우치다, 편들다 ⑪아첨(阿諂)하다, 아부(阿附)하다 ⑫착하다, 아름답다 ⑬곧다, 바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속(屬), 무리 휘(彙), 무리 도(徒), 무리 대(隊), 무리 훈(暈), 무리 조(曹), 무리 등(等), 무리 군(群), 무리 중(衆), 무리 배(輩), 무리 류(類), 붙을 부(附), 떼 부(部)이다. 용례로는 정당 특히 여당과 정부를 당정(黨政), 당 안의 분파로 붕당 또는 정당의 나누인 갈래를 당파(黨派), 정당 같은 곳에서 주로 사무를 맡아보는 사람을 당료(黨僚), 당의 직책을 당직(黨職), 당파를 이룬 사람이나 당적을 가진 사람을 당원(黨員), 당의 의견이나 의논을 당론(黨論), 정당의 사무소로 쓰는 건물을 당사(黨舍), 당파를 이루어 서로 싸움을 당쟁(黨爭), 그 당이 해야 할 임무나 사무를 당무(黨務), 당의 기관지를 당보(黨報), 옳다고 여기에 확정되어 있는 그 정당의 방침을 당시(黨是), 당의 윤리를 당륜(黨倫), 어느 한 당의 이익을 당리(黨利), 같은 무리끼리의 의(誼)를 가깝고 두터이 함을 당비(黨比), 당파의 위세나 세력을 당위(黨威),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여 이것에 편을 드는 정당을 여당(與黨), 정당 정치에서 현재 내각을 조직하지 않은 정당을 야당(野黨), 정치 상의 당파를 정당(政黨), 당원이 당적을 떠남을 탈당(脫黨), 정당에 가입함을 입당(入黨), 정당을 새로 만듦을 창당(創黨), 정당 등에서 자격을 박탈하고 내쫓음을 출당(黜黨), 당을 해롭게 함을 해당(害黨), 이해나 주의 따위를 함께 하는 사람끼리 뭉친 동아리를 붕당(朋黨), 당파가 갈라지거나 당파를 가름을 분당(分黨), 남의 재물을 마구 빼앗으며 행패를 부리고 돌아다니는 무리를 한당(汗黨), 새로 조직한 당을 신당(新黨), 행동 목적을 같이 하는 무리를 일당(一黨), 당에서 제명 되었거나 탈당했던 사람이 본래의 당에 다시 입당함을 복당(復黨),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같은 의견의 사람끼리 한패가 되고 다른 의견의 사람은 물리친다는 말을 당동벌이(黨同伐異),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고 중정 공평함을 이르는 말을 무편무당(無偏無黨), 여러 사람이 모여 패를 지어 무리를 이룸 또는 그 무리를 일컫는 말을 성군작당(成群作黨)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