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못 전해준 양산의 주인공, 무량심 보살
어떤 사람에게는 수행 이전에 천성적으로 어질고 착한 성품이 있다.
사람을 대할 때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항상 웃는 얼굴을 한다.
평소 화를 내는 것을 못 본다. 억울하고 서운한 일을 당해도 그저 웃고 넘길 뿐 잘잘못을 따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남 앞에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이런 사람을 따르고 그 인품을 고매하게 만든다.
어느 한 때 나는 처지가 매우 곤란하여 산중 절에 있지 못해서 숨고 피해 다니곤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인천의 어느 사찰을 찾아갔었다. 수봉 공원에 있는 영상정사다.
영산정사 신도에 무상각 보살과 무량심 보살이라고 하는 분이 있었다. 이 두 분은 타고난 성품이 그대로 보살이었다.
각별한 사이였으며, 신심도 돈독했던 두 분은 그 사성암자의 신도로서 매일같이 찾아와 법당에서 독경기도를 했다.
인천은 나의 수도 생활에서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은 곳이다. 영산정사는 사형 정우 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하지만 나의 도심 사찰 생활은 몹시 힘들고 궁핍했다.
이렇게 힘들고 궁핍한 나의 처지를 잘 살펴 알아서 보살펴주신 분들이 또 이 두 분 보살님이다.
특히 무량심 보살은 생활이 매우 가난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계란 장사를 하고 있었다.
오전에는 무상각과 같이 절에 와서 기도를 했고 오후에는 행상을 해서 생활비를 벌었다.
처지가 이러한데도 행동거지에 조금도 궁색한 데가 없고 검소한 의복에 고매한 품행을 갖추고 있었다.
영산정사의 대부분의 신도는 무량심 보살의 감화를 받은 분들이다.
단골로 계란을 사먹다 보면 어느 덧 자신이 절의 신도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천성이 착하고 어진데도 딱한 업장이 있었던가, 남편은 일평생 건달로 돈 벌 줄을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게 말하길 “스님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요. 지금도 그 유혹을 떨쳐 버리진 못했지만 참다운 대승보살의 수행은 세속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했다.
그러니까 보살은 어렵고 힘든 삶을 수행으로 알고 살았다고 해야 하겠다.
그 해 여름은 몹시 더웠다.
주지 스님으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별로 못 받고 사는 나는 돈이 없어서 밖에 외출도 못하고
그 무더운 더위를 골방 안에서 싸워 견뎌 내야 했다.
그 때 무상각 보살님과 무량심 보살님은 내 방에 선풍기도 사다주고 용돈도 보태주곤 했다. 무엇보다 무료한 나에게 두 분은 말벗도 되어 주었고, 불자의 맑고 신선함을 보여 주었다. 그 덕에 나는 지겨운 여름과 고행을 견디어 낼 수 있기도 했다.
나는 두 분 보살님께 선물을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무량심 보살님이 행상을 한다는 것을 알고 부터는 무엇인가 행상에 도움되는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 전에 내가 어줍잖은 솜씨로 글씨 하나를 써 준 일이 있었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무량심 보살님은 내게 조용히 “스님. 지난 번에 써주는 붓글씨는 제가 좋아하는 보살님께 선물했습니다.
저의 집은 너무 비좁아 액자를 걸어 놓을 곳이 없거든요.” 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더욱 나는 꼭 필요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양산이었다. 돈이 없어 어렵게 양산 하나를 샀다.
그러나 이미 여름은 다 지나가고 있었다. 양산을 선물하려고 기다리던 그 날 보살은 절에 오지 않았다.
오후 늦게서야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장사를 하다가 길에서 쓰러지셨어요.”
회색빛 하늘은 이런 하늘을 말하는가.
양산을 들고 병원을 찾아갔을 때 보살은 인사불성이었다.
인사불성인 환자에게 양산을 선물 할 수도 없고 해서 그 날은 그냥 들고 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후에 운명하셨다.
오십 중반의 나이에 조용히 열반하신 것이다. 결국 나는 벼르고 별러서 산 양산을 보살님께 전해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