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코스 : 미기동 - 상남면 사무소.(13.8km/4시간30분)
우리들이 살아온 삶의 글. 황의순 서울대법대 68학번.
이후 GM 코리아, 한진해운 등 산업 현장에서 실무를 익혔다
현재는 뇌파람 전략연구소 소장 및 경영·성공 전략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허리케인 속에서 왈츠를 춰라" 등이 있다.주로 긍정적인 의식과 전략적 사고를 강조하는 글을 써왔다.
(經濟學者)인 그가 도쿄대학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이 일본수준의 경제를 이루려면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 당시 한국인들조차 이 말에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명백한 현실 이었으니까요. 먹을 것도 없고 일할 곳도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절망의 밑바닥에서 뭔가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세계가 주목하지 않은 곳에서요.
1955년 9월. 한국정부가 이상한 결정을 하나 내립니다.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시작한 겁니다. 나라에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 학교부터 짓기 시작했어요.1956년부터 1960년 사이 한국에 세워진 학교수가 무려 3,247개 였습니다. 하루에 2개씩 학교가 생긴 셈이에요.
판자집 마을에도 학교가 들어섰고 산골 마을에도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57년 8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특파원이 경기도 한 시골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쓴 기사가 흥미로웠어요. 한국정부는 우선순위를 잘못 잡은 것 같다.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빵이다. 그런데 이들은 학교를 짓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맞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교육이 무슨 소용이냐는거죠. 하지만 한국은 멈추지 않았어요.
1958년 서울청계천 판자집마을에 야학이 생겼습니다. 낮에 일하느라 학교에 못 간 어른들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이 밤 9시에 일을 마치고 야학에 모였습니다.
뉴욕타임스 특파원이 1958년 11월에 이 야학을 취재했습니다. 그가 본 광경은 이랬어요.40대 노동자가 10대 학생 옆에 앉아 한글을 배운다.
전구 하나 아래서 30명이 공책에 글씨를 쓴다.
이들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놀랐다.
왜 이렇게까지 배우려 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알았던 겁니다. 배워야 먹고 산다는 걸요. 글을 읽어야 기술을 배울 수 있고,
기술을 배워야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1959년. 놀라운 통계가 나왔습니다.
한국의 문맹률이 78%에서 22%로 떨어진 겁니다. 불과 6년 만에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40% 가까이 늘어난 거예요.
유네스코가 한국의 교육현황을 조사 했습니다.
보고서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요. 한국만큼 짧은 시간에 문맹률을 낮춘 나라는 전례가 없다. 국민의 교육열이 경제수준을 훨씬 초과한다.
경제수준을 초과하는 교육열은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가난했지만 배우는 건 멈추지 않았어요. 굶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습니다.1960년 3월 한국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96%를 돌파했습니다. ,
같은 시기 인도는 61%, 필리핀은 72%였어요.
한국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들이었는데도 취학률은 한국이 더 높았던 겁니다.
하지만 1960년 국제언론의 평가는 여전히 냉정했습니다.
1960년1월 뉴욕타임스 헤드라인이에요.
한국 7년째 원조의존! 자립경제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설계는 여전히 한국을 끝난 나라로 보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아무리 많이 지어봤자 경제가 나아지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들은 몰랐습니다.
1950년대에 학교를 다닌 그 아이들이 1960년대에 공장으로 들어갈 거라는걸요.그리고 그들이 한국을 완전히 바꿔 놓을 거라는 걸요. 1960년이 끝날 무렵 한국은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여전히 원조에 의존했고 여전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씨앗은 뿌려져 있었습니다. 교육이라는 씨앗이오. 그리고 바로 다음에 한국은 세계를 놀라게 할 도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비가 올듯말듯 날씨가 마음 설레이게한다.
9시경 홍천휴게소 도착. 아지까지 비는 오지 않는다.
휴게소에서 건너다 보이는 계곡.
홍천군 대형 카렌더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올라가는 구름.
카렌다 모델 안재현 님.
1961년 1월 1일. 한국의 수출액(輸出額)은 3,290만 달러였습니다.
수입액은 3억 4,300만 달러였어요. 10배 이상 차이가 났죠.
한국이 수출하던 것들은 뭐였는지 아세요?
텅스텐 원석 생선 김 그리고 가발이었습니다.
1961년 1월 13일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 충격적인 선언이 나왔어요.
10년 안에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겠다.
계산기를 두드려 볼까요?
3,290만 달러에서 10억 달러면 30배를 늘리겠다는 겁니다. 10년 만에요.
1961년 9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이 소식을 듣고 기사를 썼습니다.
비현실적인 목표! 한국정부는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원조 없이는 생존도 어려운 나라가 수출 강국이 된다는 건 환상입니다.
냉정한 평가였죠. 실제로 불가능해보였으니까
한국에는 팔만한 게 없었어요. 공장도 별로 없었고 기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그냥 시작했습니다.
1962년 1월. 울산의 첫 공업단지 (工業團地)가 들어서기 시작했어요. 아무것도 없던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그냥 바다와 모래사장 뿐이었죠.
1962년 5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특파원이 울산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쓴 기사예요. 황량한 해변에 공장을 짓고 있다.
인프라도 없고 숙련 노동자도 없다. 대체 무엇을 만들려는 건지 아무도 모른다. 맞았어요. 당시 한국 사람들도 잘 몰랐습니다.
뭘 만들어 팔아야 할지요? 그냥 일단 공장부터 짓고 있었던 거예요.
1963년 11월.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한국인 123명이내렸습니다.
광부들이었어요. 탄광에서 일하러 온 젊은이들이었죠.
1964년 12월에는 간호사 130명이 독일로 떠났습니다.
독일병원에서 일하기 위해서 였어요.
그들이 버는 돈은 고스란히 한국으로 송금됐습니다.
1965년 1월. 독일 쇼피겔지가 한국인 광부들을 취재했습니다.
기사 내용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들은 지하 1000 m 갱도에서 일한다.
위험하고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불평하지 않는다.
모두 조국에 돈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땅밑 깊은 곳에서 석탄을 캐는 일이었습니다.
독일사람들도 꺼리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한국청년들은 그 일을 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서요.
1964년부터1977년까지 독일로 간 광부가 7936명 간호사가 1만 1057명
이었습니다. 그들이 보낸 돈이 1억 달러가 넘었어요.
그 돈으로 공장설립에 투자했습니다.
1965년 6월22일.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이 체결됐습니다. 이게 얼마나 논란 이었는지 아세요? 서울 거리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어요.
왜 일본과 손을 잡는 거예요? 식민지 시절에 당했던 나라잖아요.
그런데 또 일본과 손을 잡는다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거예요.
하지만 정부는 밀어붙였습니다. 1965년 8월 뉴욕타임스가 이렇게 썼어요.
한국은 실용주의를 선택했다. 감정보다 경제를 택한 것이다. 과연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까?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에서 기술과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기술자들이 일본공장으로 연수를 갔어요. 몇 달씩 기술을 배워왔습니다.
1966년 3월. 일본 니케이신문이 한국 연구생들을 취재했습니다.
한국인들은 메모를 엄청나게 한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퇴근 후에도 숙소에서 공부한다. 이런 열정은 전후 일본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배우려는 열망이 대단했던 겁니다. 일본 기술자들도 놀랄 정도였어요.
1965년 10월. 베트남에 한국군이 파병됐습니다. 이것도 엄청난 논란이었어요.
전쟁이 끝난 지 겨우 12년 만에 또 전쟁터로 가는 거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대가로 받은 달러가 또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군인들 월급 군수물자조달 건설프로젝트 까지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돈이 10억 달러가 넘었습니다.
1966년 8월. 미국 워싱턴 포스트 특파원이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느낀 분위기가 독특했어요. 한국 사람들은 미친 듯이 일한다.
공장은 밤낮 없이 돌아간다.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에 홀린 듯 일한다.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한국노동자들의 평균 근무시간은 주 60시간이 넘었어요.
하루 12시간씩 일주일 내내 일했습니다.
포항에 제철소건설이 시작됐습니다. 세계은행이 이 프로젝트를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한국에는 철광석도 없고 석탄도 없다. 제철소를 지어봤자 경쟁력이 없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 투자하지 않는 것을 권고한다.
세계은행이 반대한 겁니다. 경제성이 없다는 거였죠.
그래서 한국은 어떻게 했냐고요?
일본에서 돈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그냥 지었어요.
이동 중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내린천 휴게소.
강물이 상당이 불었네요.
인제 곤충바이오센터 가는길.
지난번에도 건넛던 미기교부터 종주 시작.
지난주 보담 강물이 많이 불었다.
돌아서 가게될 강 상류.
마을입구 巨木들.
그중 엄나무.
벌써 피기 시작한 벼.
지난주 돌아 나왔던 곳.
쉼터 老松.
우리 B조는 도로따라 갑니다.
회장님과 총무님은 제일 후미로 출발.
차량 통행이 아주 뜸 하네요.
사료용 옥수수(아주 크게 자라는군요)
인제천리길 안내.
아주 잘 자라는 더덕.
지난주 차를타고 한번 돌았던 길입니다.
오늘 B조는 총대장님과 해공님, 저 세사람입니다.
심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막 피어오르는 벼.
힘이 팔팔 넘치는 두분.
후평교.
여기까진 지난주 한번 돌았던 곳입니다.
이제 처음인 광주교.
차량통행이 적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높은 옹벽 어마어마 하네요.
강건너 조용한 마을.
그저 아름다운 자연에 푹 빠져 봅니다.
이 옹벽은 더 높네요.
오미재 터널이 가까워진 모양.
자작나무숲도 봅니다.
우리는 구 도로로 따라갑니다.
1968년 2월1일.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됐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28km. 당시로서는 엄청난 프로젝트 였어요.
1968년 3월 영국 로이터통신이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한국은 자동차도 별로 없는데 왜 고속도로를 만드는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1968년 한국의 자동차 등록 대수는 2만 7천 대였어요.
서울인구가 300만 명이 넘는데 자동차는 겨우 2만 대였죠. 그런데도 고속도로를 만들었습니다.
자동차가 없으니까 고속도로를 안 만드는 게 아니라 고속도로가 있어야 자동차가 늘어난다는 논리였어요.
1968년 5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 차이퉁 기자가 경부고속도로
공사장을 찾았습니다. 그가 본 광경이에요. 수천 명의 인구가 삽과
곡괭이로 산을 깎는다. 대형장비가 부족해 사람 손으로 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공사 속도가 놀랍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습니다.
세계건설사에서도 기록적인 속도였습니다. 1969년 들어서면서 놀라운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출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거예요.
1969년 1월.한국의 수출액이 5천만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섬유 가발 전자제품들이 미국으로 쏟아져 나갔습니다.
1969년 11월 30일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한국의 연간 수출액이 10억 달러를 돌파한 겁니다.
정확히는 10억 240만 달러였어요.
1961년에 세운 목표 기억하시죠?
10년 안에 수출 10억 달러. 정확히 8년 만에 달성했습니다.
1969년 12월 2일 영국파이낸셜타임스가 일면에 큰 기사를 실었습니다.
우리가 틀렸다. 비현실적이라고 했던 그 목표를 8년 만에 달성했다.
이것은 경제의 기적이다.
비현실적이라고 했던 그 신문이 틀렸다고 인정한 겁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한국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거예요.
1970년1월 1일 새로운 목표가 발표됐습니다.
1980년까지 수출 100억 달러 달성 또 10배를 늘리겠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외신들이 뭐라고 했을까요? 놀랍게도 조용했습니다. 왜냐하면 1960년대를 지켜본 그들은 알아버렸거든요.
한국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세우고 그걸 진짜로 해낸다는 걸요.
1970년 12월 미국 뉴욕타임스가 한국 특집기사를 냈습니다.
제목이 인상적이었어요.
한국 더 이상 원조대상이 아니라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으로 떠올라
10년전만 해도 자립 불가능하던 나라가 이제 신흥공업국이 된 겁니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건 따로 있었습니다.
1960년대에 학교를 다닌 그 아이들이 이제 공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거예요. 글을 읽을 줄 알고 계산을 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요.
그들이 1970년대 한국을 완전히 바꿔놓게 됩니다.
1971년 3월. 울산 이포만의 모레사장에서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현대조선소 건설기공식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배를 만들어 본 적도 없는 회사가 조선소를 짓겠다고 나선 겁니다.
조선소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설계도도 없었어요.
그냥 모래사장만 있었습니다.
1971년 내년 6월 영국로이드 선급협회 조사단이 울산을 방문했습니다. 로이드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선박 인증기관이에요.
그들이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은 조선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배를 만들려고 한다. 도면도 제대로 없다.
경험 있는 기술자도 거의 없다. 이건 미친 짓이다.
로이드. 조사단의 보고서에 실린 내용입니다.
실제로 미친 짓처럼 보였어요. 보통은 조선소를 먼저 완성하고 그
다음에 배를 만들었습니다.현대는 두 가지을 동시에 하고 있었던 겁니다.
1972년 3월. 현대조선소에 유럽에서 기술자들이 왔습니다.
스코틀랜드 조선엔지니어들이었어요. 한국 기술자들을 교육하러 온
거였죠.1972년 6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패럴드지가 이 엔지니어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한국인들은 하루 16시간씩 일한다. 주말도 없다.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한 가지를 가르쳐주면 10가지를 물어본다. 배우려는 열망이 무섭다.
당시 현대조선소 기술자들은 정말 잠을 안잤습니다.
낮에는 외국엔지니어한테 배우고 밤에는 설계도를 그렸어요.
새벽까지 토론하고 아침이면 다시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1973년 6월 28일. 현대조선소에서 첫 배가 진수됐습니다.
26만톤급 유조선 애틀랜틱베로노였어요.발주한 건 그리스 선주였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 드라마였습니다.
용접이 안 맞아서 수백 번을 다시 했어요?
철판이 휘어져서 밤새워 수리했습니다.
외국엔지니어들이 불가능하다고 한 부분을
한국기술자들이 밤새 연구해서 해결했어요.
1973년 7월. 프랑스 르몽드지가 현대조선소를 취재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들! 매뉴얼에 없는 일이 생기면 스스로
매뉴얼을 만든다. 이들에게 불가능한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일 뿐이다.
정확한 관찰이었습니다.
한국 조선기술자들은 문제를 만나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1974년 들어서면서 한국 조선업의 명성이 퍼지기 시작 했습니다.
납기를 지킨다는 소문이었어요. 다른 나라 조선소 들은 배 건조가 자주 지연됐거든요. 6개월 1년씩 늦어지는 게 흔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달랐어요. 약속한 날짜에 배를 인도했습니다.
심지어 조금 일찍 인도하는 경우도 있었죠.
1975년 3월. 일본 NHK신문이 한국 조선업을 분석한 특집기사를 냈습니다.
한국조선소의 비밀은 완벽주의다.
작은 부품 하나에도 불량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이게 바로 한국식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빠르지만 정확하고 싸지만 품질이 좋은 제품을 만드는 시스템이요.
1975년 7월. 포항제철소가 본격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1968년에 착공해서 7년 만이었어요. 세계은행이 반대했던 그 프로젝트 기억하시죠? 1975년 9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포항제철을 취재했습니다.
설계은행이 틀렸다. 포항제철은 가동 첫 해부터 흑자를 냈다.
철광석도 석탄도 없는 나라에서 만든 철강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췄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비결은 역시 완벽주의였습니다.
포항제철 노동자들은 불량률을 0에 가깝게 만들려고 했어요.
조그만 흠집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1976년 1월. 한국산 전자제품이 미국 시장에 동시에 본격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 없었어요. 또 하나의 싸구려 아시아 제품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몇 년 지나니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산 제품의 고장률이 일본산보다 낮았던 거예요.
1978년 11월 미국 소비자 리포트가 TV의 신뢰도 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결과가 충격적이었어요. 한국산 TV가 일본산보다 고장이 적었던 겁니다.
1978년 12월. 뉴욕 타임스가 한국전자제품 공장을 취재하러 왔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건 드라마였어요. 완벽한 제품을 만들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일본 도요타의 시스템과 비슷했죠. 하지만 한국은 거기에 뭔가를 더했습니다.
바로 속도였어요.문제를 발견하면 멈추지만 해결은 더 빨리 했습니다.
1977년 12월.한국수출액이 1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1970년에 세운 목표가 1980년까지 100억 달러였죠.
3년 일찍 달성한 겁니다. 더 놀라운 건 수출품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거예요.
1960년대에는 가발 생선 김 같은 게 주력이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에는 배 자동차 전자제품 철강이 주력이 됐어요.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특집 기사를 냈습니다.
한국은 더 이상 저임금 국가가 아니다. 이제 그들은 기술국가다.
품질에서 일본을 추격하고 있다.20년 만에 일이었습니다.
1950년대에 희망 없다던 나라가 1970년대에 기술국가가 된 겁니다.
1979년 3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의 차이통이 한국공장들을 취재했습니다. 기자가 가장 놀란 게 뭐였는지 아세요?
현장노동자들이 설계도를 읽을 줄 안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다.
이건 단순 노동자가 아니라 기술자수준이다.
1950년대에 미친 듯이 지었던 그 학교들 기억나시죠?
그 학교를 나온 젊은이들이 1970년대에 공장으로 들어온 겁니다.
그들은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계산을 할 줄 알았어요.
매뉴얼을 이해했고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1979년 여름 현대자동차가 캐나다 수출을 시작했습니다.
포니라는 모델이었어요. 한국이 독자개발한 첫 자동차였습니다.
1979년 8월. 캐나다 글로브 앤 메일지가 포니를 시승한 후 기사를
썼습니다. 놀랍다. 한국차가 이 정도 품질일 줄 몰랐다.
일본차 모델보다 완성도가 높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역시 완벽주의였습니다.
현대자동차 연구원들은 수천 번의 테스트를 반복했어요.
고장 나는 부분을 찾아내서 계산했습니다.
완벽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어요.
1979년 10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700달러를 돌파했습니다.
1953년 67 달러였던게 26년 만에 25배가 된 겁니다.
같은 달 프랑스 파이낸셜타임스가 특집을 실었어요.
한국의 비밀은 교육받은 노동력과 완벽주의의 결합이다.
이들은 단순히 눈이 빠른 게 아니라 정확하다.
하지만 1979년 말 세계경제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습니다.
2차 오일쇼크가 터진 거예요. 석유가격이 3배로 뛰었습니다.
전 세계가 경제 위기에 빠졌죠. 한국도 마찬가지였어요.
석유를 전부 수입에 의존했으니까요.
1979년 12월.월스트리트 저널이 한국 경제를 걱정하는 기사를 냈습니다.
한국 경제 오일쇼크로 위기 성장둔화 불가피!
실제로 1980년 한국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경제가 후퇴합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세계는 다시 한번 한국을 지켜봤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끝인가?20년간의 기적이 그런데 한국은 또 다시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위기 속에서 더 과감한 도전을 시작한 거죠.
그리고 그게 1980년대를 만들게 됩니다.
1980년 한국은 최악의 한 해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경제는 마이너스 5.2% 성장, 오일쇼크로 물가는 치솟고 실업자는
늘어났죠. 거기에 정치적으로도 극도로 혼란스러웠어요.
1980년 5월. 광주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외신들이 한국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했어요.
1980년 6월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한국 특집을 냈습니다.
한국의 고속성장은 끝났다. 정치불안과 경제위기가 겹쳤다.
이제 장기침체가 시작될 것이다. 현실적인 전망이었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습니다.
20년간 달려온 경제가 멈춰 선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1981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경제가 다시 6.4% 성장을 기록한 겁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비밀은 중동에 있었습니다.
1981년 한국 건설사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따내기 시작합니다.
미국월스트리트저널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취재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한국인들이 도시를 만들고 있다.
5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도 공사는 계속된다.
중동발주처들이 한국건설사를 선호하는 이유는 납기를 지키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배와 고속도로를 만들면서 쌓은
건설기술이 1980년대 중동에서 빛을 발한 겁니다.
그 돈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1984년 한 해에만 중동에서 벌어들인 돈이 137억 달러였습니다.
엄청난 금액이었죠.
그런데 한국은 그 돈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또 투자했습니다.
뭐에 투자했을까요? 바로 반도체였습니다.
1983년 2월 삼성이 64KDRAM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현대전자가 설립됐어요.
두 회사 모두 반도체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세계 반도체시장은 일본과 미국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어요.
일본의 NEC 도시바 히타치
미국의 인텔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이들이 시장을 나눠 가졌죠.
한국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1983년 9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이렇게 썼어요.
삼성과 현대의 반도체 도전은 무모하다.
일본과 미국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한국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냉정한 평가였습니다. 실제로 말이 안 되는 도전처럼 보였어요.
반도체는 기술 집약산업이거든요.
막대한 연구개발비가 필요하고 수율을 높이는 데만 몇 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한국은 특이한 전략을 썼습니다.
일본보다 더 빠르게 더 대량으로 생산한 거예요.
속도경쟁이었죠.
1984년 11월.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익스플로러스 기자가 본 거예요.
연구원들이 공장에서 산다. 24시 3교대가 아니라 연구원 상당수가
아예 공장에 상주한다. 문제가 생기면 밤을 새워 해결한다.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원들은 일주일에
80시간 넘게 일했어요. 주말도 없었습니다.
1986년 삼성이 256KDRAM에서 일본을 따라잡았습니다.
그리고 1987년 DRAM에서는 거의 동시에 개발에 성공했어요.
1987년 3월. 일본 NEC의 한 임원이 도쿄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은 무섭다? 우리가 새 제품을 내놓으면
6개월 뒤에 똑같은 걸 만들어 낸다.
그것도 더 싼 가격에... 일본이 긴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1960년대 조선업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이
반도체에서도 맹추격을 시작한 거예요.
한국정부가 특이한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전자전기공학과 정원을 2배로 늘린다는 거였어요.
대학마다 반도체연구소를 만들라고 지원금을 뿌렸습니다.
1985년 9월 미국 뉴욕 뉴욕타임스가 한국대학들을 취재했습니다.
한국대학생들이 반도체 공학에 몰린다.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전자공학과를 선택한다.
10년 후 이들이 산업현장에 나오면 엄청난 기술인력이 쏟아질 것이다.
정확한 예측이었습니다.
1985년에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이
1990년대 초반에 삼성 현대 LG 반도체연구소로 들어갔거든요.
1986년 들어서면서 세계 반도체시장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D RAM 가격이 폭락한 거예요.
1985년 256K D RAM 1986년에는 30%까지 떨어졌습니다.
일본 반도체회사들이 줄줄이 적자를 냈어요.
미국 반도체회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텔은 아예 D RAM 사업에서 철수했어요.
그런데 한국은 달랐습니다.
가격이 떨어져도 생산을 멈추지 않았어요.
오히려 공장을 더 지었습니다.
1986년 11월. 독일이 쇼킹한 내용의 한국 반도체산업을 분석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반도체회사들은 투자를 했습니다.
미친 전략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계산이 있다.
불경기가 끝나면 생산능력을 가진 회사가 시장을 장악한다는 것이다.
정확히 1970년대 오일쇼크 때와 똑같은 전략이었습니다.
지금 손해를 보더라도 미래를 준비하는 거였죠.
1987년 반도체시장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D RAM 가격이 다시 오르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한국 반도체회사들의 정책이 빛을 발했습니다.
1987년 11월 삼성전자가 4차 D RAMS 세계 최초로 성공했습니다.
일본도 미국도 아닌 한국이 처음으로 개발한 겁니다.
1987년 12월 2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일면 헤드라인이었어요.
한국 삼성전자 D RAM 세계최초개발 반도체강국으로 부상..
불과 4년 전만 해도 무모하다고 했던 도전이 성공한 겁니다.
그것도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요.
1988년 2월.일본 NHK 신문이 긴급 특집을 냈습니다.
한국에 추월당했다. 반도체 기술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서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은 추격자가 아니라 선두주자다.
한국 반도체의 비결이 뭐였을까요?
영국파이낸셜타임스가 1988년 3월에 분석 기사를 냈어요.
한국 반도체 엔지니어들의 평균근무 시간은 주 72시간이다.
일본 엔지니어들이 퇴근할 시간에 한국 엔지니어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다.
속도전에서 한국을 따라잡을 나라가 없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었습니다. 품질이었어요.
1987년 11월. 미국 IBM이 한국산 반도체 품질 테스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한국산 D RAM의 불량률이 일본산보다 낮았던 겁니다.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정확하게까지 했습니다.
1970년대 조선업과 자동차 산업에서 만들어진 완벽주의 문화가
반도체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 거예요.
1988년 7월.한국의 반도체 수출액이 2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5년 전만 해도 0에 가까웠던 게 이제 주력수출품목이 된 겁니다.
1988년 9월. 서울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전 세계가 한국을 봤어요.
그리고 놀랐습니다. 1988년 10월1일. 미국 뉴욕타임즈가 올림픽 특집
기사를 냈어요. 이게 30년전 페허였던 나라가 맞나?
서울은 도쿄나 파리 못지 않은 현대 도시다. 전자채점시스템, 대형스크린, 완벽한 중개시스템... 올림픽 자체가 한국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쇼케이스다.
올림픽 기간 내내 단 한 건의 대형사고도 없었습니다.
교통도 막히지 않았고 시설도 고장나지 않았어요.
1988년 10월 3일 . BBC가 서울올림픽 폐막식 생중계에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서울올림픽은 역대올림픽 중 가장 완벽하게 운영된 대회다.
한국인들의 조직력과 완벽주의가 빛났다.
올림픽이 끝난 뒤 한국에 대한 세계의 시선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니었어요. 선진국 문턱에 있는나라였죠.
1989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5432달러를 넘었습니다.
1953년 67 달러였던 게 36년 만에 81배가 된 겁니다.
같은 해 11월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특집 기사를 냈습니다.
제목이 인상적이었어요. 아시아의 네 마리 용 한국이 선두로 나서다.
홍콩 싱가포르 타이완 그리고 한국 이 네 나라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불렀는데 그중에서도 한국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평가였습니다.
1980년대가 끝날 무렵 한국은 더 이상 가난을 극복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기술강국이 됐어요.
반도체 조선 자동차 전자제품에서 세계시장을 위협하는 나라가 된 겁니다.
하지만 1990년대는 한국에게 전혀 다른 도전을 던지게 됩니다.
이번에는 진짜 위기가 찾아올 거였어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한국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이제 선진국 문턱에 섰다는 생각이었죠.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세계는 크게 변했습니다. 냉전이 끝났어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됐습니다.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통합되기 시작했어요.
이게 한국에게는 엄청난 기회였습니다.
이제 전 세계를 상대로 장사할 수 있게된 거였으니까요.
1992년 8월 .삼성전자가 런던의 디자인 센터를 열었습니다.
도쿄에도 뉴욕에도 센터를 만들었어요. 더 이상 값싼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게 아니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거예요.
1993년 6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삼성 런던 디자인센터를 취재했습니다.
삼성연구소에는 30개국에서 온 디자이너들이 일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이제 글로벌 인재를 채용한다.
한국이 세계로 나간 게 아니라 세계가 한국으로 들어왔다.
1993년 12월. 현대자동차가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했습니다.
엑센트라는 모델이었어요.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싸구려 아시아차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현대는 놀라운 전략을 썼습니다. 10년 10만 마일 보증이었어요.
이 차가 10년 안에 고장나면 우리가 다 책임진다는 겁니다.
미국 자동차회사들도 안 하던 걸 한국회사가 한 거예요.
1994년 3월 .미국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썼습니다.
현대 10년 보증은 도박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믿는다.
1970년대 일본차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차도 미국시장을 잠식할 것이고
1995년 10월 12일. 한국이 경제협력 개발기구 OECD에 가입했습니다.
선진국 클럽이라고 불리는 것이죠. 한국은 OECD 역사상 처음으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회원국이 된 케이스였습니다.
1950년대에 UN 원조를 받던 나라가 40년 만에 선진국 반열에 오른 겁니다.
1995년 10월 13일 영국 이코노미스트 헤드라인이었어요.
한국 마침내 선진국 반열에 42년 만에 기적 완성 한국은 환호했습니다.
드디어 해냈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정말 선진국이 됐다고요?
하지만 바로 이 순간 한국경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빨리 성장한 대가였을까요?
1996년 1월.한보철강이 부도위기에 몰렸습니다. 부채가 5조원이 넘었어요.
그해 3월 한보철강이 결국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연쇄반응이 시작됐어요.
7월에 삼미그룹이 쓰러졌고 11월에는 진로그룹이 무너졌습니다.
1997년 1월 한보사태특검이 시작됐습니다.
정치권과 재벌의 유착이 드러났어요.
외신들이 불안한 신호를 포착하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3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기사를 냈어요.
한국기업들의 부채비율이 위험수준입니다.
대기업들이 무리하게 차익 경영을 하고 있다. 금융시스템이 취약하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괜찮다고 했습니다.우리는 다르다고 했어요.
외환 보유고도 충분하고 경제 펀더멘털도 튼튼하다고 말했습니다.
1997년 7월 2일 태국에서 금융위기가 시작됐습니다.
태국 바트가 폭락했어요. 그리고 그 위기가 아시아 전역으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7월 인도네시아가 흔들렸습니다. 8월 말레이시아가 위기에 빠졌어요.
필리핀도 위험했죠. 한국은 아직 괜찮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와 다르다고 했어요.
그런데 10월 들어서면서 이상한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외국자본이 한국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겁니다.
10월 23일 기아자동차가 부도처리됐습니다.
대마불사라는 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1997년 11월 들어서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됐습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예요.
11월 17일 외환보유고가 60억 달러까지 떨어졌습니다.
한 달 전만 해도 300억 달러가 넘었는데 말이에요.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습니다. 은행들도 위험했어요.
달러가 없어서 수입대금을 못내는 기업들이 속출했습니다.
1997년 11월 21일 저녁 정부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부총리가 나와서 발표했어요.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습니다.
그 순간 한국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IMF 그건 망한 나라가 가는 곳이었어요.
42년간 쌓아올린 모든 게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997년 11월 22일 미국 뉴욕 타임스 1면 헤드라인이었어요.
한국의 기적이 끝나다.
IMF 구제금융 신청한 같은 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가장 강했던 한국이 무너졌다.
이것은 단순한 금융 위기가 아니다. 한국식 자본주의의 실패다.
11월 말 IMF 조사단이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한국경제를 샅샅이 조사했어요.
그리고 12월 3일 구제금융 조건을 발표했습니다.
총 550억 달러 지원 그대신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했어요.
금리인상 긴축재정 기업구조조정 금융 개혁
1997년 12월 18일. 한국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IMF 위기 한가운데서 치러진 선거였어요.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199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IMF와 최종합의문에 서명했습니다.
조건은 가혹했어요.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1998년 1월 상황은 끔찍했습니다. 기업들이 대량해고를 시작했어요.
하루에 수천 명씩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1월 한 달 동안만 30만 명이 실직했습니다.거리마다 명예퇴직 안내문이 붙었어요.
40대 가장들이 짐을 써서 회사를 나왔습니다.
1998년 2월 영국 한국 이코노미스트가 특집을 냈습니다.
한국은 최소 10년은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됐다.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1998년 3월 실업률이
7%를 넘어 섰습니다. 실업자가 15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1년 전만 해도 2%대였던 실업률이 3배 이상 뛴 겁니다.
상당히 높은 곳인데도 계곡이 있으니 당연 교량도 있는법.(오미재교)
오미재 고개에있는 현리지구 전투 전적비.
여기서 잠깐 쉬면서 두분이 준비해온 간식후 담은 흔적입니다.
고개를 넘자 바로 비가 내리네요.
해발 500m 면 상당히 높은 곳입니다.
아래 터널이 생기니 폐도나 다르없네요.
터널입니다.
우리도 그진 다 왔습니다.
회전로타리.
상남면사무소와 소방서가 같이 있네요.
거리에는 노숙자가 늘어났습니다.서울역대합실에서 자는
사람이 생겼어요.
IMF 극복캠페인 현수막이 곳곳에 붙었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1998년 4월 .독일 기자가 서울을 취재했습니다.
한국인들의 눈빛에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42년간의 기적이 2년 만에 무너졌다. 이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세계는 한국이 끝났다고 봤습니다. 10년은 걸릴 거라고 했어요.
어떤 전문가들은 20년도 후도 모자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국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그 움직임이 세계를 또 다시 놀라게 만들게 됩니다.
1998년 1월 5일. 이상한 광경이 서울 곳곳에서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금을 들고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집에 있던 금반지 금목걸이
금돼지 저금통까지 모두 들고 나와서 나라에 기부했습니다.
우리가 모은 금으로 빚을 갚자는 운동이었어요.
1998년 그가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어요. 서울거리 곳곳에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금을 기부하기 위해 줄을 선 것이다.
할머니가 결혼반지를 내놓는다. 학생들이 돼지저금통을 깨서 가져온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다.
금모으기 운동! 이건 정부가 시키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거였어요.
방송국에서 처음 제안했고 시민들이 호응한 겁니다.
3개월 만에 모인 금이 227톤이었습니다.
350만 명이 참여했어요.
돈으로 환산하면 22억 달러였습니다.
1998년 4월.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이 현상을 분석한 특집기사를 냈습니다.
한국인들은 국가 위기를 자신의 위기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국민적 단합은 전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들다.
이것이 한국의 진짜 저력이다. 금모으기만이 아니었습니다.
기업들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1998년 2월부터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됐습니다. 삼성은 자동차사업을 포기했어요.
그 대신 반도체와 휴대폰에 모든 걸 걸었습니다.
현대는 기아를 인수했습니다. 두 회사를 합쳐서 규모를 키운 거죠.
LG는 석유화학 부문을 정리하고 전자와 통신에 집중했어요.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잘하는 것에 집중하는 전략이었습니다.
1998년 6월.일본 미케이신문이 한국 기업들을 취재했습니다.
한국기업들이 스스로를 해체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른다. 이런 과감함은 일본기업에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습니다. 1998년 한 해 동안 3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어요. 실업률이 8.6%까지 치솟았습니다.
가족을 부양하던 가장들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습니다.
40대, 50대가 거리로 내몰렸어요.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 곳이 없었습니다.
1998년 9월. 프랑스 르몽드지가 서울을 취재했습니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들이 벤치에서 잔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회사원이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럽지만 개혁을 밀어붙였어요.
1998년 7월.금융구조법이 통과됐고 부실 은행을 정리하고 금융시스템을 투명하게 만드는 법이었어요. 5개 은행이 문을 닫았습니다. 10개 은행이 합병됐어요. 은행원 1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1998년 12월 .놀라운 신호가 나타 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출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한 거예요. 반도체수출이 회복됐고 자동차
수출도 증가했습니다. 외환보유고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어요.
1999년 1월 .한국 경제가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습니다.
전년 같은 기간 대비 5.4% 성장이었어요. 외신들이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10년은 걸린다던 회복이 1년 만에 신호를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1999년 6월 .미국 뉴욕타임스가 한국 특집을 냈어요.
믿을 수 없는 회복속도다. 1년 전만 해도 한국은 끝났다고 봤다.
그런데 이미 회복의 기미가 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비결은 역시 국민들이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이었어요.
1999년 말 .인터넷 벤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MF로 실직한 젊은이들이 창업에 나섰어요.
네이버가 1999년에 시작됐고 다음도 같은 해에 출범했습니다.
NC소프트 넥슨 같은 게임 회사들도 이때 성장하기 시작했어요.
2000년 3월 코스닥지수가 폭발적으로 올랐습니다.
벤처열풍이었어요. 20대 청년들이 100만 장자가 됐습니다.
2000년 6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한국의 벤처 붐을 취재했습니다.
한국이 실리콘밸리를 만들고 있다. IMF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됐다.
젊은 인재들이 대기업 대신 창업을 선택한다.
2001년 1월.역사적인 날이 왔습니다.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조기 상환한 겁니다. 원래 2004년까지 갚기로 했던 빚을 2001년에 다 갚아 버린 거예요.
3년 9개월 만이었습니다. 세계가 10년은 걸린다고 했던 회복을 3년 만에 완료한 겁니다.
2001년 8월 24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일면 헤드라인이었어요.
불사조 한국 IMF 초기상황 세계 경제사에서 가장 빠른 회복,
같은 날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의 차이통은 이렇게 썼습니다.
한국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법을 안다. 이것이 한국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다. IMF 위기는 한국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한국을 더 강하게 만들었어요.
2002년 들어서면서 한국 경제는 완전히 회복됐습니다.
실업률이 3%대로 떨어졌고 성장률은 7%를 넘어섰어요.
그런데 2002년에 한국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예약한 식당 2층 87 국밥집.
식당을 찾아놓고...,,면소재지를 한바뀌 돌아봅니다.
고층 아파트도 있구요.
읍내를 관통하는 시냇물도 깨끗해 보입니다.
내린천의 심장부 상남면.
집들이 깨끗하지요?
다음 가게될 용소폭포 구간.
한일월드컵이었어요.
2002년 5월 31일 월드컵이 개막했습니다.
한국대표팀은 16강 진출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폴란드를 이기고 포르투갈을 이기고
이탈리아를 이겼어요. 스페인까지 꺾고 4강에 올랐습니다.
광화문에 100만 명이 모였습니다.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 응원을 했어요. 대한민국 함성이 서울을 뒤덮었습니다.
2002년 6월 26일 .미국 뉴욕타임스가 한국의 거리응원을 일면에 실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음원이 아니다. 하나의 거대한 퍼포먼스다.
100만 명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인다. 단 한건의 사고도 없다.
한국인들의 조직력이 놀랍다.
월드컵이 끝난 뒤 세계는 한국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IMF위기를 극복한 나라. 그리고 이제 축구에서도 4강에 오른 나라.
2003년 3월. 한국드라마가 일본에서 히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연가였어요. 일본 중년여성들이 배용준에게 열광했습니다.
2004년 중국에서 한국가수 보아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류라는 단어가 국제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2004년 9월 .영국 BBC가 한류현상을 다룬 특집을 방송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 한류열풍이 불고 있다.
한국드라마 한국음악 한국음식 아시아 젊은이들이 한국문화에 열광한다.
2005년 삼성전자가 반도체부문에서 세계1위에 올랐습니다.
인텔을 제치고 1위가 된 거였어요.
2006년 현대자동차 판매량이 400만 대를 돌파했습니다.
세계 5위 자동차회사가 됐어요.
2007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섰습니다.
1953년 67 달러였던 게 54년 만에 300배가 된 겁니다.
2007년 10월 월스트리트저널이 한국특집을 냈습니다.
이로서 한국은 두 번이나 기적을 만들었다.
도서관이 넘 멋집니다.
점심은 순대국밥, 친절한 주인에 맛도 좋아 다음 또 가기로 했다.
회원여러분!
오늘도 고맙고 감사합니다.
고르지못한 일기속 험한길 어려움딛고 당당하게 무사히 완주하신 여러분께 감사와 함께 박수를 보냅니다.
벌에 쏘이고 찰과상을 입으신 회원님 모두 무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구순을 넘기신 우리 총대장님과 바쁘신 일정에도 격려차 찾아주신 인제천리길 김호진 대표님 수박 너무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조금 부족해도 감사하며 살아가면 기쁨이되고
조금 모자라도 만족하며 살아가면 고마움이 되고
조금 서운해도 무탈하게 살아가면 행복이 된답니다.
서두의 글은 내용에 공감이 가기에 여러분께 소개한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자만하지말고 더욱 살기좋은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우리 힘을 모웁시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