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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빈서원泗濱書院의 개관槪觀
사빈서원泗濱書院은 청계靑溪 김진金璡(1500~1580)선생과 그의 다섯 아들의 덕德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조선 숙종 36(1710)년에 사림과 자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묘호廟號는 경덕사景德祠이다. 고종高宗 5(1868)년 조정朝廷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터만 남게 된 것을 동왕 19(1882)년에 영남사림의 공론에 의하여 강당講堂과 주사廚舍만 중건하였다.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인해 임하면 사의리에서 임하면 임하리로 옮겼다가, 2011년 다시 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였다.
사빈서원(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비리실)
사빈서원의 제향인물祭享人物
1) 주향主享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청계靑溪 김진金璡 선생
사빈서원의 주향主享은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청계靑溪 김진金璡 선생이다. 선생의 자字는 영중瑩仲이요 본관은 의성義城이니, 연산군燕山君 6년, 1500년 2월 3일 천전川前 본가에서 출생하여 선조宣祖 13년, 1580년 윤 4월 23일 청기靑杞 흥림초사興霖草舍에서 향년 81세로 졸卒하였다.
크게 진취하였고, 기묘명유己卯名儒인 민세정閔世貞 공과 교유함으로써 문견을 넓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에는 제생들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고, 특히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는 도의로써 친교를 맺는 등 당시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유학 중 문득 느낀 바 있어 과거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을 열어 자제와 향중鄕中의 어린 선비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심력을 다하여 이끌어 도와주기를 수 십 년 동안 그치지 아니하니, 학풍이 크게 진작하였다. 1550년 후반 무렵부터는 영양英陽 청기靑杞 초동椒洞에 들어가, 농장을 경영하면서 영양 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창건하여 향풍을 교화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다섯 자제로 하여금 가문의 기본교양을 닦게 한 다음, 도산으로 보내어 퇴계退溪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영오한 자질을 길러 그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그 가르침의 근간은 충忠과 효孝였으니, 일찍이 여러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믿음을 얻은 다음에라야 면전面前에서 간언諫言하더라도 가납될 수 있다.”라고 한 바 있고, 또 “사람은 정도正道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도를 굽혀 도생圖生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너희가 군자가 되어 죽으면 나는 오히려 산 것으로 볼 것이요,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오히려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 영양 청기의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마침내 집을 짓고 살다가 그 곳에서 임종臨終했다. 청기에서 초종初終과 성복成服을 마치고 그 해 7월 임하臨河 경출산景出山 진향원震向原에 장사했다. 학봉은 묘지墓誌를 짓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묘갈墓碣이 있다. 정조正祖 2년, 1778년 유림의 발의로 선생과 다섯 자제분의 문고文藁를 모아 5권 3책의 연방세고聯芳世稿를 간행하였다. 序文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썼다.
청계 김진선셍 유묵
2)배향 配享
∙내자시정內資寺正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선생
선생의 휘諱는 극일克一이며 자는 백순伯純이니 청계靑溪 선생의 장자長子이다. 중종中宗 17년, 1522년에 나서 선조宣祖 18년, 1585년에 졸卒하니 향년이 64세였다. 1546년 병오丙午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성균사성成均司成 사도시정司導寺正 성주목사星州牧使와 밀양부사密陽府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어려서 부터 호매豪邁․준일俊逸하였고, 자라서는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였는데, 문학文學의 방면에서 우뚝 남 먼저 성취하니, 퇴계 선생께서 그 기국器局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일찍이 “지난날이 잘 못 되었음을 이제야 알았노라.”라 라고 한 말을 인하여 편지를 보내어 권면하기를, “작은 것을 얻음에 만족하지 말고 깊이 작철作輟(하다 말다 하는 태도)을 경계하되 노력이 오래 쌓이면, 끝내 터득하지 못할까봐 걱정할 일이 왜 있겠는가?” 하였으니, 그 기대하는 바의 원대함이 이와 같았다.
선생은 발군拔群의 뛰어난 재능으로 문학의 분야에서 높은 성취를 보였고, 이미 문과에 올라서도 명성名聲과 중망重望이 남달랐으니, 깨끗하고 우러러 보이는 관직에 올라 국가의 성대한 혜택을 누리고 명예를 떨쳐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하여 총애를 취할 것을 탐내지 아니하고 오직 한직閒職을 구하여 부모님을 봉양하는 일을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벼슬한지 40년에 관직이 불과 주州와 군郡의 목사牧使 군수郡守에 지나지 않았으며, 끝내 유학儒學을 흥기하고 선행善行을 표창함으로써 풍속과 교화를 이루는 데 조력하였으므로, 다스린 다섯 고을의 치적이 당세 수령 중에 으뜸이었다.
선생의 문장은 높고 깨끗하며 예스러워서 결코 진부한 말이 없었으며, 더욱 시詩에 뛰어나 짙고 옅음과 맑고 아름다움에 각각 그 의취意趣를 극대화하였다. 그러므로 한 시대에 시와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분들이 모두 선생을 맹주盟主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난리 중에 다 흩어져 없어지고 겨우 약간 권卷 만이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가 연방세고에 올려 간행하였다. 영가지永嘉誌와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에 사적이 실려 있고, 방후손傍後孫 귀주龜洲 김세호金世鎬가 지은 묘갈명이 있다.
약봉 김극일선생 유묵
3)배향配享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선생
선생은 휘諱가 수일守一이요, 자는 경순景純, 호는 귀봉龜峯이며 청계선생의 둘째 아드님이다. 중종 23(1528)년에 나서 선조 16(1583)년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56세였다. 을묘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만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자여도 찰방을 배수하였다.
자품姿禀이 영명하며 모습이 단정하고 엄숙하여 청수한 풍격風格이 있었다. 문장을 짓는 데는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습기習氣가 전혀 없었으며, 더욱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일찍이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심학心學에 성열誠熱을 기울여, 선생께서 자주 명백하고 통철하다는 말로 칭찬하였다.
명종明宗 10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오르고 향시鄕試에 여러 번 장원한 뒤, 아우 명일明一, 복일復一과 문과文科에 나아갔는데, 명일의 객중客中 병고가 위급해졌다. 선생이 가료加療 수호하며 환고還故하던 중, 끝내 병이 더해진 아우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때, 막내 아우 복일은 급제及第하여 어버이의 기대에 부응하였으나, 선생은 이로써 과거科擧를 통한 입신立身의 뜻을 접었다. 이후로 향촌사회의 흥학興學과 기풍氣風의 진작을 위해 서당을 세우고, 후진을 불러 모으는데 진력하는 아버지 청계 선생을 도우는 한편, 부암傅巖 서쪽에 백운정白雲亭을 지어 명절가신名節佳辰에는 노인들을 모시고 잔치를 열고, 집안의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쳐 성취시켰다.
경진(1580)년에 아버지 청계 선생의 상喪을 당하고는 보잘 것 없는 죽과 거친 밥으로 삼년을 시묘侍墓하며 애훼哀毁하였다. 복服을 벗을 무렵에는 병이 장부臟腑에 들어 날로 심해 졌으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에 제수除授되자 병고를 무릅쓰고 사은숙배謝恩肅拜 길에 올랐다. 숙배 후, 귀로에 가료하던 여관에서 몰하니 향년이 56세였다.『연방세고』에 유문이 전한다. 장자 용涌이 행장을 쓰고 6세손 세호世鎬가 묘갈명을 지었다.
귀봉 김수일선생 유묵
4)배향配享
∙성균생원成均生員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선생
선생은 휘諱가 명일明一이요, 자는 언순彦純, 호는 운암雲巖이다. 청계선생의 셋째 아드님으로 중종 29(1534)년에 나서 선조 3(1570)년에 돌아가니 향년이 37세였다. 갑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독서와 학문에 기울이는 공력功力이 남달라 일찍이 문장으로 명성이 크게 드러났다. 아버지 청계선생의 명으로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독서할 때는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공이 한번 보고 큰 그릇임을 알아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이때 퇴계退溪 선생이 도산陶山에서 강도하고 있어, 아우 문충공文忠公과 함께 경서經書를 가지고 문하에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퇴계 선생께서 손수 잠명箴銘을 써 주신 것은 선생에게 거신 기대가 크고 높았던 까닭이었다. 형제분이 이 기대에 부응하여 서로 강마하며 질의하고, 사처에 돌아와서도 배운 바를 정련精鍊하여 거의 침식寢食을 잊기에 이르렀다. 또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게 되었을 때 진학進學의 지취志趣를 시로 읊어 퇴계 선생께 보내었는데, 선생께서도 친절하게 장려하고 권면하는 뜻을 시로 화답和答하여 보내었다. 유학하는 동안 말씀과 행동이 조용하며 사람과 사귀기를 화목하고 순수하게 하여 사우士友의 중망重望을 한 몸에 받았다.
산수자연을 사랑하여 일찍이 아버지 청계선생이 낙연落淵 남쪽에 지은 선유정仙遊亭의 승경勝景을 특히 애호하여 노닐었다. 또한 거소居所 부근 추월리秋月里의 강안江岸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어 사람들이 운건암雲褰巖이라 하였는데, 선생은 그 위에 대를 쌓고 즐기면서 유연자득悠然自得하는 흥취를 누렸다. 운암雲巖이라 자호한 것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기사(1569)년에 중형 귀봉공, 막내 아우 남악공과 함께 대과大科를 보기위해 경사京師에 올라가 동당東堂에 체류하다가, 이듬해 경오庚午에 병고가 심하여 귀환하던 중 경기도 용인龍仁의 금량역金亮驛에서 37세를 일기로 조서早逝하였다. 연방세고에 유문이 전한다.
선생의 현손玄孫 금옹錦翁 학배學培 공의 행략行略과 문경공文敬公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선생의 묘명墓銘이 있다.
5)배향配享
문충공文忠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
선생은 휘諱가 성일誠一이요,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이니, 청계선생의 넷째 아드님이다. 중종 331538년에 나서 선조 261593년 진주晉州의 진중陣中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6세였다. 갑자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진(1568)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봉교奉敎 때에는 단종端宗 복위소復位疏를 올렸는데, 나중, 단종이 복위되고 사육신死六臣과 금성대군錦城大君 등이 신원伸寃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경연經筵 주대奏對에서는 왕과 고관의 잘못을 가차 없이 지적하여 전상호殿上虎라는 별호로 불리기도 하였다.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使와 황해도 순무어사로 파견되어 국방실태와 민정을 살피고, 시정책時政策을 건의하였다. 나주목사로 재직하면서는 목민牧民의 도리를 실천하는 데 힘썼으며 오랫동안 적폐積弊가 되어온 토반土班의 발호跋扈를 막고 까다로운 송사訟事를 명쾌하게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고,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선현先賢을 제향하는 한편, 성학십도聖學十圖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비롯한 퇴계선생의 주요 저술을 간행하여 지방 유생들의 진취를 독려함으로써 지향할 바를 알게 하였다.
명나라 사은사謝恩使 행에서는 국초國初 이래 조정의 미제未濟였던 종계宗系를 바로잡았으며,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을 다녀 올 때는 명절名節과 도의道義에 입각한 엄정한 언동으로 국가의 체모를 세웠다. 통신사 행에서 돌아와 복명復命할 때, 정사正使의 보고와 달리 일본이 반드시 군사를 일으키리라는 정황을 보지는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복명도 하기 전, 동래東萊에서부터 발설한 정사의 내침설來侵說 때문에 극도에 달한 관민의 동요를 진정하려는 것이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공이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상공과 나눈 대화에도 보이지만, 나중에는 왕과 비변사備邊司에 왜가 장차 쳐들어올 것이라 한 왜사倭使의 말을 보고하여 국방에 대비토록 진정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이 되어서는 민심을 얻는 것이 국사國事의 최급무最急務가 되어야 함을 거듭 주청하였으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던 길에 왜군 선발대를 격살하고 물리쳐 임란壬亂 최초의 승전을 이루었다. 통신부사 복명의 책임을 묻는 나명拿命이 있자 지름길로 환경還京하는 길에 다시 초유사招諭使로 제수하는 상명上命을 받았는데, 경상도로 돌아가서는 일도 의병義兵을 분기奮起시키고 전의를 잃고 흩어진 관군官軍의 기강紀綱을 다시 세워, 함께 왜적을 격퇴하도록 하는 데 진력하였다. 임란 초기의 승전인 진주대첩晉州大捷으로 나라의 보장保障인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의 길목을 확고히 지켜 국가 보전의 계기를 확보한 것은 모두가 선생의 주모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계사년(1593) 봄, 왜군의 재침을 맞아 진주성을 수보修補하고 병마의 군기를 엄정히 하고 있을 때 불행히 역질疫疾이 창궐하여 진주 공관에서 운명하니, 향년이 56세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묘방석墓傍石에 새긴 생애를 요약하면, “일본에 사신으로 가셨을 때 바르고 곧고 흔들리지 않아서 임금의 위엄이 멀리 떨쳤다. 초유사의 명을 받아서는 지극한 정성으로 도민道民을 감동시켜 적을 막고, 한 지방을 장악하여 충성으로 사직社稷을 지키니 이름이 죽백竹帛에 올랐다. 일찍 퇴계 이선생의 문에 들어 심학의 중요한 이치를 깨달았으며 덕행과 훈업이 모두 백세에 빛났다.”로 간명하게 정리된다. 호학독행好學篤行의 대선현의 말이니 그대로 일부 돈사敦史이다.
학봉 김성일선생 유묵
6)배향配享
∙증조부시정贈宗簿寺正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선생
선생은 휘諱가 복일復一이요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으로 청계선생의 다섯째 아드님이다. 중종 36(1541)년에 나서 선조 24(1591)년에 돌아가니 향년이 51세였다. 갑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경오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전적典籍 형조좌랑刑曹佐郞 호조정랑戶曹正郞 성균관 사예司藝 사성司成과 외직으로 강원도사江原都事 창원부사昌元府使 풍기군수豊基郡守 등을 역임했다.
어릴 때부터 뜻을 세움이 범상치 않아 형이신 학봉선생과 순흥順興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독서하고 퇴도退陶 문하에 등문登門하여 학문의 요지를 깨우쳤다. 평소에 거처할 때도 반드시 의대衣帶를 갖추고 책상을 대하여 주서절요朱書節要, 대학연의大學衍義,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일거일동을 사훈師訓에 의거하였다. 일찍이 예천 금곡金谷에 살면서 문서로 부로父老들을 권하여 덕진동德進洞에 서당을 세우고 많은 선비들이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곳이 뒤에 정산鼎山으로 옮겨 서원으로 승품陞品이 되었는데, 학문을 일으키고 선현의 교훈을 밝힘으로써 예천醴泉이 영남 일역一域의 명촌名村이 되게 한 데 그 공이 컸다.
경오(1570)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몇 해 뒤 안동 호계虎溪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워 퇴계선생을 제향할 때 사액賜額을 청하는 정문呈文을 지으니 그 글을 읽은 사람마다 “도학道學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유현儒賢의 덕을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성품이 검박한 것을 좋아하고 과단성이 있었는데, 임금의 명으로 경기재상경차관京畿災傷敬差官이 되어 기전畿甸을 안무按撫할 때는 강화유수江華留守가 중신重臣으로서도 쫓겨났으며 호남湖南을 안찰按察할 때는 전주부윤全州府尹이 귀척貴戚이면서도 꾸짖음을 당하니 사람들이 듣고서 혀를 내둘렀다.
창원부사昌原府使가 되어서는 부내의 갖가지 악폐를 제거하였음에도 끝내 감사監司와 의견이 맞지 않아 고과考課에서 불리함을 당하였다. 고을 선비들이 조정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을 올려 방백의 처사가 부당함을 성토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을 백성들이 순영에 구금되고 형장을 맞는 일까지 있었으나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송덕비를 세워 그 덕을 추모하였다. 풍기豊基 군수에 제수 되어서는 병고에 신음하면서도 석 달 치적에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 고을 백성 중에 이후에도 선정비를 볼 때마다 눈물을 떨어뜨리는 이가 많
아, 이를 듣는 사람마다 고금에 드문 일로 여겼다.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 상국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은
남악 김복일 선생 유묵
신묘(1591)년 8월 17일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1세이다. 사빈서원泗濱書院과 예천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향사되었다. 유문遺文이 연방세고에 실려 전한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선생이 행장行狀을 쓰고,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선생이 묘갈명을 썼다.
「泗濱書院 復設 意義와 활용도 」
◆復設 意義
사빈서원은 朝鮮 明宗, 宣祖 年間에 敎育者이자 經世家로 지역 士林의 興起에 크게 이바지한 當代의 著名한 儒賢인 청계 김진선셍을 主享으로 하고 그 五賢者를 함께 配享한 전국에서 唯一無二한 특이한 서원이다. 청계 김진은 小科만 하고 大科를 포기하고 다섯 자제를 훌륭히 교육시켜 세분은 大科에 두분은 小科 及第하였고 특히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은 퇴계 이황선생의 道學淵源 正脈을 이은 분으로 임진왜란시 진주성을 守禦하다 殉節하였다. 따라서 육부자의 學問과 精神을 繼承 發展시키는 君子道場으로서 사빈서원을 활용할 價値性를 부여하는데 主力하도록 한다
◆活用度 方案
-精神文化 首都 安東에서 典範 書院이 되게 하는 役割 增大
書院의 本來 機能이 尊賢養士 이나 안동을 비롯한 餘他 書院 대부분이 尊賢만 하는 儀禮에 머물고 있고 있는 實情이다. 따라서 사빈서원은 정부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복원된 만큼 존현과 養士 機能의 兩面을 眞正하게 追求하는데 主力함
가>독립운동의 聖地 안동 내앞마을에 있는 안동독립기념관과 연계하여 청소년을 대상으로불어 愛國愛族과 民族 主體性 회복을 위한 敎育場으로 活用
나>청소년을 대상으로 儒敎精神의 根幹인 忠,孝,仁 情神의 涵養을 위한 敎育을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커리컬륨을 교육과목을 설정, 교육지원청과 協議, 강사를 초빙하여 施行함
다>全國에서 安東이 亭子 ,樓, 臺, 書院등 儒敎 建造物을 가장 많이 保有하고 있는 고장이다. 따라서 사빈서원이 선비문화의 典範이 되는 서원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다하는데 연구와 노력을 倍加하여 정신문화의 首都 안동의 觀光特需 효과를 늘리는데 일익을 담당하고자 함
【 사빈서원 복설고유 및 중건 준공식 행사 】
주최 : 사빈서원 복설중건 위원회
주관 : 의성김씨 천상문화보존회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경상북도(道費 2억6천만원 지원)
안동시(市費 2억6천만원 지원 행사비 별도 5천만원 지원)
복설고유 및 중건 준공식 順序
복설고유(08:30)
■ 位牌 奉安(육부자)
■ 各位 헌관 獻酌(육부자)
■ 奉安 告由文 朗讀
준공식(11:00)
式辭 : 이용태(퇴계학 연구원 이사장, 博約會長)
祝辭 : 김관용(경상북도지사)
권영세(안동시장)
김광림(국회의원)
門中代表 人事
김길홍(의성김씨 천상문화보존회장)
參席 來賓
불천위 宗家 종손. 각 문중의 지도자
각 서원 원장. 향교 전교 및 유림인사
퇴계학회. 담수회· 박약회· 도운회· 공산회 유림단체 대표
경북대학교 부설 영남유학연구원 회원
청계선생 육부자분과 학맥, 연비, 연고가 있는 친지
義城金門 일가 어른. 내앞 5파의 후손과 가족
서책 배부
참석 손님에게는 의성김씨 천상문화보존회가 발간한 사빈지, 내앞오백년, 청계선생 일록을 贈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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