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산품이라도 가져오는 게 낫지 않았나?”라는 물음이 나올 법도 했다. 지방의 벼슬을 지내는 자로서 수도에 올라올 때면 금은보화는 아닐지라도 특산품 한둘 정도는 가지고 와서 중앙의 고관들에게 상납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힐문. 때는 명(明)대 영종(英宗) 시기다. 당시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던 왕진이라는 환관에게는 온갖 뇌물이 잇따랐다. 수도에 올라온 지방관이 왕진을 만나는 데만 은 100냥이 필요했을 정도니 말이다. 지금의 산시(山西)를 총괄하던 지방 수장이었던 우겸이 수도인 베이징에 올라온 뒤 친구가 “왕진에게 잘 보이라”는 충고를 하자 보인 반응이다.
석회를 두고 읊은 시 한 수에서는 그의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천 번 만 번 두드려서야 깊은 산 속에서 나오니/ 뜨거운 불에 태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뼈와 살이 뭉개져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니/ 사람 사는 세상에 청백함을 남기기 위함이리라[千錘萬擊出深山,烈火焚燒若等閑,粉身碎骨渾不怕,要留靑白在人間:천축만삭출심산,열화분소약등한,분신쇄골혼불파,요류청백재인간)]”.
석회라는 물체를 두고 지은 일종의 영물시(詠物詩)다. ‘석회음(石灰吟)’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시에서는 석회가 캐어지는 과정과 제련을 거쳐 석재로 만들어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우겸은 공무를 수행하며 수많은 난관에 닥쳐 자신의 모든 것이 다 깨어지고 없어지더라도 늘 깨끗함을 유지하겠다는 일종의 맹세를 시에 담았다. 본문에는 석회석의 색깔에 빗대 청백(靑白)이라는 글자가 쓰였지만 이는 후대에 오면서 청아하고 깨끗함을 나타내는 청백(淸白)으로 해석된다. 혐의가 사실이라면 나라의 곳간이 돈 밝히는 관리에게 그저 내맡겨졌던 셈이다. 비리와 부정을 눈가림하려고 정부는 기자실 폐쇄를 서둘렀나. 이제 참여정부는 어떤 변명을 더 내놓을 것인가.
출처:중앙일보 글.유광종 국제부문 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