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는 2015년 8월 19일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 아래에 새로운 성지를 지정하였다. 1801년 8월 25일에 대흥과 예산에서 순교한 ‘의좋은 순교자’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의 신앙과 성덕을 현양하고, 2014년 8월 16일에 시복된 124위 중에 대전교구 연고와 예산 출신 복자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조성된 성지이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 사무소 옆에 있는 대흥 관아는 복자 김정득 베드로가 친척인 김광옥 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홍주에서 엄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고향인 이곳 대흥으로 압송되어 참수 순교한 곳이다.
조선시대 역참제도에서 보듯이 대흥군은 홍주목과 공주목을, 호남과 충청도 서남 지역과 한양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부터 대흥은 예산과 홍주, 공주, 청양 지역으로 선교사들과 많은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지나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이 같은 이유에서 흥선대원군은 대흥과 홍주와 신창에 ‘척화비’를 세워 외세가 상륙하고 천주교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기록상 밝혀진 대흥 순교자는 복자 김정득 베드로 한 분뿐이지만,수많은 신자들의 신앙고백과 증거가 예당호 물속에 수몰되어 있다.
대흥 성지에서 순례해야 하는 장소는 복자 김정득 베드로가 신앙을 증거하고 위주 치명한 대흥 동헌과 옥터, 참수터 들이다. 대흥 동헌은 박해시대에 교우들이 임성아문(任城衙門)으로 끌려 들어와 동헌 마당에서 심문과 고문을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하고 배교에 대한 유혹을 받았던 곳이다. 동헌 뒤뜰에 ‘척화비’가 있다.
대흥 옥 터는 순교자들이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갈등을 겪었지만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던 곳이다. 현재 대흥농협 창고터로 알려져 있다. 대흥 참수터는 교우들이 순교 직전까지 배교에 대한 유혹과 인간적인 한계를 체험하지만, 마침내 위주 치명함으로써 세상과 생에 대한 애착과 육정을 남김없이 버리고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던 순교터이다. 현재 의좋은 형제 공원 입구 연못가나 그곳에서 멀지 않은 대흥공인중개소(예산군 대흥면 예당로 883) 뒤편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예당저수지와 붙어 있는 순교 터에는 수풀이 무성할 뿐이다.
■ 의좋은 형제 이야기 고장
이곳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실제 현장이다.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벼 베기를 끝낸 가을 밤 형제가 서로의 살림을 걱정해 자신의 볏단을 몰래 가져다주다 도중에 만나 얼싸안고 울었다는 우애담이다. 대흥 관아 앞에는 이성만, 이순 형제의 효제비(孝悌碑)(충남유형문화재 102)가 있다. 관아 옆 대흥면 사무소 앞에는 1956~2000년까지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청소년들의 교육 자료로 활용되어 온 '의좋은 형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민간에 전설처럼 구전되어 왔으나, 1978년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서 이성만, 이순 형제의 효제비가 발견되고, 최근에 이두문자가 해독됨으로써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 이 비는 고려초 효자로 이름난 이성만과 이순 형제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연산군 3년(1497년) 지신사(知申事) 하연(河演)의 주청에 의해 대흥면 상중리 개뱅이다리(佳芳橋) 옆에 세워졌으며, 조선초기 양식의 화강암 비석에 이성만 형제의 갸륵한 행실에 대하여 왕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모범되게 하라는 173자가 기록되었다.
예산군은 개뱅이다리 근처에 있던 효제비를 예당 저수지 수몰 위험을 염려하여 현 위치인 대흥면 사무소 앞으로 옮겼다. 의좋은 형제상 앞에 놓여진 12개의 돌에는 1964년에 발행된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있는 '의좋은 형제'이야기 전문이 새겨져 있다.
■ 임존성과 봉수산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위치한 임존성은 삼국시대의 테뫼식 토축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2,450m이며 봉수산과 그 주위의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높이 483.9m의 봉수산(鳳首山) 정상과 거기서 동쪽으로 900m 정도 떨어져 있는 해발 423.2m의 봉우리를 따라 북쪽 성벽이 축조되고, 남향한 경사면과 계곡의 상단부를 에워싼 일종의 테뫼식 산성으로 동서 방향으로 길다란 부정장방형(不定長方形)에 가까운 평면을 이루었고, 일명 봉수산성(鳳首山城)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주류성(周留城)과 함께 백제부흥운동군(百濟復興運動軍)의 거점지로서 잘 알려져 있다. 즉 백제의 멸망 뒤 주류성을 근거로 사비성 탈환 작전에 실패한 부흥군의 최후의 거점지로서, 이 성에서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지수신(遲受信)등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하여 신라군의 군량수송로를 차단하여 나당연합군을 괴롭히는 한편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 성에서 공주와 부여가 각각 90여 리쯤 떨어져 있어 백제가 수도를 웅진과 사비로 천도한 뒤부터 수도 방어의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후삼국 시대 당시 왕건(王建)과 견훤(甄萱)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고도 전(傳)한다. 그러나 백제부흥운동은 유인궤[劉仁軌] 등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의 공격과 내부분열로 이 성을 빼앗김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 순교자
◆ 복자 김정득 베드로 ( ?∼1801년)
김정득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대흥 고을 태생으로 친척인 김광옥(안드레아)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베드로는 김광옥과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그는 홍주로,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그는 김광옥과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마주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는 예산에서 얼마를 더 가 대흥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튿날 읍내로 끌려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이었다.
◆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 ( ? ∼1801년)
충청도 예산 여사울의 중인 출신의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面長)을 역임하였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희성(프란치스코)은 그의 아들이다. 안드레아는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베드로)과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았으나 포졸들은 그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냈다. 이후 그는 예산으로,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되었다. 얼마 후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신공을 바쳤다.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 참수 치명하였다. 당시 60세 가량이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