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길- 쇼펜하우어 묘지/ 김정희
망설임 없이
초록으로 더 깊은
초록으로 빠져 드는 길
우리의 삶은 전부 아니면 8할쯤
길 위에 펼쳐지지만
조각별처럼 흩어져
흙의 거름이 되는 이 꽃길은
스스로의 의지만 쓸쓸히 빛나는
쇼펜하우어의 묘지를 향하는
뜨거운 길
꽃향기 눈부셔 숲 그림자 깊고
세상을 울던 새의 울음만 종종종
돌멩이 하나, 잎새 둘, 낡은 비문이 셋...
하찮아서 경이로운 것들
꽃 덤불에 덮인
흐린 그대의 이름 묘비명
살아서 외로웠고 미움으로 괴로웠던
철학자의 길, 뜨거운 길의 끝
누구일까 검은 대리석에
기억의 잎과 줄기로 꽃을
바치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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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놓은 집- 달팽이에게/ 김종
풀잎 끝 이슬을
찾아가라고
내 살아갈
검푸른 날들을
둥 둥 둥
물 위에
띄워 보낸 집
받쳐 올린 두 뿔로
물무늬 그리다가
정처는 따로 없어도
그저 구만리 같은
구름에 싣고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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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박판석
사과나무인 줄 알았다
나무 아래 오래 서 있었다
머리 위에 감이 무수히 떨어졌다
아이들이 놀려댔다
바보야, 그건 처음부터 감나무였어
나무 아래 잠이 불편하다
뒤돌아봤다
감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온몸에 감물이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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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꽃 당신/ 서춘기
할미꽃과 마주앉은 아침 밥상 위
둘 중 많이 풀어진 계란프라이 하나
별생각 없이 손이 거기로 가려 하자
할미꽃께서 대뜸
이쁜 놈 드세요
그래도, 내가 먹는 게 낫겠다 싶어
요리조리 젓가락 재간 부리고 있는데
할미꽃 혼자 두런두런
이쁜 놈 잡숴야 이쁜 성질 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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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값/ 전원범
언제는 성주 참외를 똥값으로 만들더니
지금은 소금 값을 금값으로 만드는구나
다음엔 즈그들을 또 쓰레기로 만들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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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거미줄 사유
원탁시 68호/ 1997년 창간/ 원탁시회/ 2023
바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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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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