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7:17-24 부르신 그대로 2005. 6. 19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 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1)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1) 혹 자유 할 수 있어도 그대로 지내라.
교회 홈페이지 신앙상담 란에 경기도에 계시는 분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공개된 글이라서 인용을 합니다. 그분의 질문이 이러하였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등
요즘 같은 살기 힘든 세상에 먹고, 사는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럽니다.
힘이 듭니다.
잘사는 사람들은 가진 아파트가격이 너무 올라 주체를 못 합니다
그들 중에도 신자가 물론 있겠죠.
그런데 성경은 "너희들이 있어야할 것을 다 아신다며 그런 것들은(먹고 사는 것)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대적배경이 틀린 현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쉽게 가르쳐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답변을 이렇게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잘 사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특히 사두개인들이 부자로 살았지요! 부자로 살아가는 현실이 좋아서 부활도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짜 현실을 진짜 현실인 성경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손성식 목사님이 자주 쓰는 표현으로는 묵시가 역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진짜 현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계가 진짜 현실입니다.
즉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이 진짜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도다"(눅9:58)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는 예수님 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전세집이나마 있다면 그것은 다 과분한 것입니다.
시원한 답변이 아니라 더 답답하게 해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으로만 만족하는 것이지요!)
다시 질문이 왔습니다.
(그럼 어떤 삶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입니까? 쉽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경기도에 사시는 이분의 질문과 오늘 우리의 질문이 동일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먹고 살기 힘든 이때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하셨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는 부족한 것뿐인데 어떻게 나의 필요가 다 채워졌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나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좋은 것을 받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가 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나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고, 병든 사람은 고침을 받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지위가 높아지고, 윤리나 도덕적인 면에서도 더 훌륭한 사람이 되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괄시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고린도전서 1장부터 보아온 것만 해도 그런 내용들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놀라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되지만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면서도 세상에 무언가 나아지는 것이 없는데 무엇 하려고 내가 예수를 믿는가 하게끔 십자가란 배타적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도록 장치해 두신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 하는 곳인가 하고서 기웃거려보다가 십자가의 도를 이야기 하면 도망가게 되는 곳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한번 신에게 빌어서 좋은 것을 얻고 싶었는데, 그 신이 가신 길이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자기의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다고 하시는 분을 따라 간다는 것이 사람으로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이 따라가려고 나섰지요! 무언가 역전의 인생을 기대하면서 따라갔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다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9-13절입니다.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예수를 믿고 따르면 이런 꼴이 난다고 하면 사람들이 다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너희가 세상에 미움을 받는다면 세상이 먼저 나를 미워한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것이나 세상에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입었다면 세상의 것으로 높아지고 성공하고 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절입니다. “봉독” 무엇이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나가는 세상에서 영원하신 주님을 만났다면 그것으로 완성이라는 말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 안에 들어있는데 더 나음이라든가 발전 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일들이 다 지나가는 그림자 같음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의 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할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는 그들의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반드시 할례를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혹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여도 반드시 할례를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무어라고 합니까?
17-19절에서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복음을 듣고서 할례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긴다고 해서 그 할례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무 할례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할례를 받지 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이들에게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한 일에 대하여 바울사도가 대단히 책망을 합니다. 할례나 무 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혁명적인 발언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려도 유대인들에게는 이 말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이런 것으로 인하여 더욱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율법을 지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할례를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종과 자유자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다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하여는 민감합니까? 가난하냐. 부자냐는 아주 민감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한 복판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 돈을 잘 버는가, 못 버는가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결혼 선호도에서 무엇이 1위가 나왔는가 하면 나이도 외모도 이혼경력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경제적인 능력이 최고로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교인도, 교회도 무엇이 있어야 축복받았다고 하면서 큰소리치겠습니까? 좋은 대학에 합격하였다. 좋은 회사에 취업하였다. 승진하였다. 성공하였다. 부자가 되었다. 발전하였다. 수입이 늘었다. 이러한 것들이 다 축복으로 말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반면에 저주란 평생 말단 사원신세를 못 면하고, 자기 집도 한 채 마련 못하고, 취직도 제대로 못하고, 목사라면 개척실패하고, 자기 건물도 하나 갖지 못하고, 평생 지하에서 겨우겨우 지내고 이런 것들은 무언가 잘못 신앙생활을 해서 그렇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어떤 기도입니까? 하나님 이것만 이루어 주소서 그러면 하나님도 영광이요 저도 보란 듯이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저만 좋으라고 이루어 달라는 말이 아니라 다 하나님 좋으라고 이런 기도하는 것이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 바울사도는 무어라고 하고 있습니까?
20-24절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네가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평생 그대로 지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이란 노예입니다.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사용하라고 하는데 다른 번역에서는 혹 자유 할 수 있어도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 어떤 환경을 막론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막아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능력은 평생 종으로 살면서도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종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자라는 것입니다. 그 종의 형적도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자유입니까? 다른 세상을 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란 종과 얼마나 대비가 됩니까? 그 자유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임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고 자유자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종이라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자요, 자유자라도 그리스도의 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부르신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할 때에 그리스도의 종이지만 세상에서는 참된 자유자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목에서 자유 합니다. 사람의 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주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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