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과연 성직자인가?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목사는 성직자(聖職者, clergy) 라는 개념과 그 말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왜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에 의해서 학문적으로 성직자라는 말이 사용된 역사적 기원은 고대종교에서부터 봅니다. 고대종교의 활동은 원시종교로부터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이때의 종교는 샤머니즘 성격의 종교이기 때문에 여기서 활동했던 무당은 곧 여러 가지 역할을 맡았는데 제사장이며, 또 예언자이었고, 또한 의사였습니다. 그리고 무당, 곧 제사장은 다른 말로는 사제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사제는 앞날을 내다보고 예언하는 역할을 비롯하여 제사를 주관하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훗날의 사람들은 성직자 라고 평가하고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한편 그리스도교와 관련해서 성직자의 개념은 유대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유대교에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할 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세 부류가 있는데,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 나라가 로마의 지배를 받는 국가가 되어서 유대의 왕으로는 로마에서 유대의 통치를 위하여 세운 왕이 있게 됨으로 다시 오실 ‘유대인의 왕’을 기다리는 시기에 있게 되지만(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기다려 온 다윗의 나라를 다스릴 주, 곧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 선지자와 제사장의 활동은 계속 있어왔습니다. 이때의 제사장은 번제의 제사를 통해 유대교 방식의 예배를 주관하였으며, 예수님 당시에 이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존재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의 사람들은 유대교의 제사장을 사제의 인식 속에서 성직자라고 평가하고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교회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성직자라는 말이 공식적인 용어로 사용되어 온 것은 로마카톨릭교회에서입니다(영국국교회인 성공회와 러시아정교회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카톨릭교회는 교계제도(敎階制度)라는 것에 의해서 조직을 갖추고 있습니다. 교계제도는 교회 질서인 위계(位階)를 뜻합니다. 이 제도에 의해서 로마카톨릭교회는 상하부층의 관계를 가집니다. 최상부층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승한다는 교황이 있으며, 그 아래의 상부층에는 성직자층인 주교와 신부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교는 사도들을 계승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신부는 사제와 부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 둘을 합해서 사제로 부르기도 하며, 또한 신부라는 말로도 부르고도 있습니다. 그리고 상부층 아래에는 하부층이 있는데 이 하부층에는 신자층, 곧 평신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황-주교-사제-부제-평신도의 교계제도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카톨릭교회는 이 두 위계가 합쳐져서 교회를 형성한다고 봅니다. 로마카톨릭교회는 교회 질서인 교계제도에서 “교회의 정점에 교황이 존재하지만, ‘하느님의 백성’으로서는 교황·주교·신부·평신도가 다같이 그 일원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신들은 교계제도를 계급층으로서 보고 또한 그렇게 말하고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카톨릭교회는 교계제도를 신자들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체계가 아니고 교회에 봉사하는 제도라고 하면서 주교직은 독재 권력이 아닌 횡적인 협력과 조정을 통한 단체적(Collgialis)인 것이며, 신부는 개인적인 주교 대리역이 아닌 주교를 중심으로 한 단위를 이루는 단체(Presbyterium)이며 부제는 그 자체로 독립된 직책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교계제도는 언제부터 유래되었는가? 하는 기원 문제는 그 시기를 말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기원을 말해주는 근거 자료가 될 수 있는 기록 문서라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 견해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카톨릭교회는 성직자의 기원을 열 두 사도에게서부터 봅니다. 이는 교황과 주교의 기원을 이 열두 사도에게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이 성직자와 평신도로의 상,하부층으로 구분하여 나가기 시작한 것은 2세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시점에 이를 때까지 교회는 감독의 위상을 높여 왔으며,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후에 감독들에게 많은 특권을 주면서 성직자의 개념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후에 이 특권들을 확대하여 ‘데오도시우스 법전’(Theodosian Code, 438)으로 성문화했으나 그 뒤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을 개정하여 성직자들이 누리던 특권을 없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A.D.323년에 있은 니케야회의에서는 감독 외에 대감독의 칭호를 줄 것을 결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에 로마의 감독은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아 대감독의 칭호를 거절하였습니다만, 그 후 콘스탄틴노플회의(A.D.381)에서는 콘스탄틴노플 감독에게도 대감독의 칭호를 주기로 결정하였으며, 그 뒤 칼케돈회의(A.D.451)에서는 예루살렘 감독에게도 대감독의 칭호를 줄 것을 결정함으로써 감독의 위상은 더욱 강화 되었습니다.
로마카톨릭교회에서 성직자의 개념이 두드러지게 된 것은 4세기경부터 사제가 되고자 할 경우에는 독신을 강요하게 된 데에서도 찾게 됩니다. 로마카톨릭교회는 기혼자가 아닌 미혼자에게서 일생을 독신자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서만 사제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일반인들과 차별을 두게 되었으며, 이것은 12세기에 이르러서는 부제 서약이나 사제 서약을 할 때 독신서약도 함께 하게 함으로써 더욱 굳어졌습니다. 이후 이 독신 제도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에 간에는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의 로마카톨릭교회는 부제의 경우에는 독신자나 기혼자 모두가 맡을 수 있도록 하는 변화가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사제 이상의 경우에는 예외 없이 독신 서약을 하게 하여, 이것이 성직자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성직자의 개념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 요인은 교계제도에 있어서 교황 아래에 두고 있는 상부층에 있는 주교(Bishop), 사제(Priest), 부제(Deacon)의 직제에 종사하는 자들은 ‘종신제’로 함으로써 종신토록 자신을 헌신하는 이들을 카톨릭교회 성직제도를 이루는 것으로 제도화 한데 있습니다. 로마카톨릭교회는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부제(Transitional Deacon, 사제가 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거쳐가는 것으로서의 잠정적 부제. 부제에는 잠정적 부제와 함께 종신부제(Permanent Deacon가 있는데 종신부제에 종사하는 자들은 일생을 부제성직에 종사하기 위하여 서품을 받은 자들로 잠정적 부제와는 구분이 된다.)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종신’이 단서로 붙습니다. 그것은 종신 독신과 함께 종신 헌신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생을 종신토록 자신을 헌신하여서 수도 생활을 하거나 또는 사목의 일에 종사함으로 성도들과 구분하여 이들이 하는 일을 ‘성직’이라고 말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4세기부터 사제들에게 독신을 강요했으며, 12세기에는 부제서약이나 사제서약을 할 때 독신서약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카톨릭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사제들의 활동을 사도직에 의한 성직 활동으로 말하고 있으며, 교회와 수도원의 활동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이 되게 하신데 따라 자신들은 그 혈업을 상속받은 자로서의 거룩한 직분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성직자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카톨릭교회에서는 이렇게 교회의 일을 위하여 독신이며 종신으로 직분을 맡은 자들을 ‘성직제도’에 의해서 ‘성직자’라고 불러 왔으므로, “이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라는 질문에 카톨릭신자들은 당연히 ‘성직자’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성직자인가? 하는 문제에 들어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분명 로마카톨릭교회에서 주교, 사제, 부제에 의한 교회 직분의 제도는 ‘성직’으로 있는데, 이렇게 제도적으로 성직으로 다루어가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지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제만 성직이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부엌에서 하는 일이나 강단에서 설교하는 일은 똑 같이 거룩하다. 노동이 설교하는 것보다 거룩하지 못하다는 관념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루터는 주교이든 사제이든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는 신자이며, 신자는 모두 거룩한 제사장이고 신자들이 범사에 믿음으로 하는 일에는 성(聖)과 속(俗)의 차별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루터 자신이 사제의 신분으로 있는 자로서 사제를 성직으로 여기고 다루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하였습니다.
루터가 한 말은 옳습니다. 신자가 교회를 봉사하여 섬기기 위하여 맡은 어떤 직분에 ‘거룩하다’는 개념을 갖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에서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과 정결 의식을 통하여 ‘거룩’과 ‘부패한 죄’를 설명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 구분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말해지는 것이며,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성도’, 곧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려 집니다. 그런 것이지, 이 성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인 신자가 하는 일에는 성과 속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과 속의 구분 또한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신자가 종신토록 자신을 부제로, 사제로, 주교로, 교황으로 교회의 일을 봉사하여 섬긴다고 해서 그 직분이 거룩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가 하는 맡은 일은 성직이 아니며, 그 또한 성직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정작 개신교(개혁신교)의 목사에게서 자신들을 ‘성직자’라고 말하며, 그렇게 생각하게 하고, 그렇게 부르게 하다니요!. 이는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가령 장로교회의 교단 헌법 어디에서도 목사를 ‘성직자’라고 규정하고 그렇게 지칭하는 곳은 없습니다. 아마도 타교회의 교단 모든 헌법에서도 동일할 것이라고 봅니다.
목사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종’이라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라거나 하는 말로 표현하여 말하기는 하지만, 결코 목사의 직분을 성직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또한 자신을 성직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서 세워진 개혁교회는 로마카톨릭교회가 구약의 제사적 의미를 가지고서 행하는 미사를 집례하는 자를 '성직‘의 개념을 가지고 ‘사제'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하여 칼빈의 교회 직분론에서 가르치고 있는 '목사'를 교회의 직분으로 세워 예배 설교를 하게 하였던 바, 목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설교하는 직임을 맡고 있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러한데, 과연 모든 목사에게서 그런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는데 문제가 있으며, 이는 우려할 만큼 심각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님이 모세미나에 참석하여서도 읽은 것에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님은 ‘목사=성직자’ 라는 글을 보았다니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님은 목사는 과연 성직자인가? 하면서 이것의 성경적인 답은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경은 목사의 직분 자체를 “성직자이다” 라거나 “성직자가 아니다”라거나 하는 식으로의 가르침은 주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다만 목사가 어떤 자인가를 알게 해 줄 뿐이죠. 그런데 그 알게 해주시는 가르침에서 우리는 목사가 성직지인지 아니면 성직자가 아닌지에 대하여 충분히 그리고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것에서 목사는 성직자 라고 하는 개념을 갖고 그렇게 부를 수 있게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분명 없습니다. 그러니 단언하여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하는 직분인 목사의 직을 맡아 섬기는 봉사자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성직자라고 자신을 말하고 그렇게 부르게 하며 그렇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성직자가 아닌 목사이요, 목사는 남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위치의 자리에 있는 자가 아닌 남을 섬기는 위치의 자리에 있는 봉사자입니다.
그러한 것을 목사를 성직자라고 말하며, 그렇게 부른다면 그것은 성경에서의 가르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나 그가 속하고 있는 교회 스스로가 그렇게 여기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로마카톨릭교회에서 사제(신부)를, 그리고 개신교에서도 목사를 성직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말들을 자신들에게 적용하여서 잘못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2세기에까지 올라가는데 클레멘트(Clement of Rome)와 안디옥의 익나시우스(Ignatius of Antioch) 같은 분들이 한 말의 영향이 큽니다. 클레멘트는 감독직의 제도를 사도들이 시작한 것으로 보았으며, 익나시우스 또한 감독직이 사도직의 계승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듯 감독에게 복종할 것을 말했으며, 감독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처럼 존경하라고 말하면서 그렇듯이 장로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 하듯 하고 집사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특히나 그는 감독에게와 장로들을 강조하여 “이것들이 없이는 교회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서머나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감독이 없이는 교회에 관계되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 감독이나 감독이 위임한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성찬을 집례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공교회가 있듯이 감독이 있는 곳에 회중이 있다. 감독 없이 세례를 베풀거나 애찬(Agape)을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라고 말하여 감독의 권위를 높여 강조하였습니다. 익나시우스는 이렇게 감독의 권위를 높여 회중과 분리를 하였습니다. 이는 감독을 특별한 계급으로 인정받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에 키프리안(Cyprian of Carthage)이 “감독들은 사도들의 후계자이며 주님 자신에 의하여 직접 택함을 받았다. 교회는 감독들의 모임이며 그들에 의하여 매사에 다스람을 받는다”는 교회관이 크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다가 앞에서도 언급하였습니다만,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 A.D.313년부터 그레고리가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 590년까지의 사이에 로마교회 감독의 위치가 점차 높아질 수 있게 각종 특권을 준 것도 한 요인이 됩니다.
게다가 목사가 자신들을 성직자라고 스스로 말하며 그렇게 부르게 하는 것은 무지(무식)의 소치이기도 합니다. 목사는 신학 수업에서 누누이 ‘만인제사장론’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습니다. 본래 성경에서의 만인제사장이 갖는 의미와 사상은 성경의 복음 진리를 이루는 중심 사상의 하나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은 온 땅에 택하신 자들을 불러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복음 사역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일군된 직분을 맡은 자[교회적 직분의 의미에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은 자의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임]라고 하는 것과 관련하여서 쓰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러한 만인제사장 사상은 교회 직분에서의 ‘만인제사장론’으로도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는 동일한 제사장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목사만이 제사장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장로도, 집사도, 직분을 맡지 않은 성도도 다함께 제사장입니다. 이것은 속죄와 관련해서 그리스도만이 대제사장이 되시고 그분을 따라 우리 또한 제사장이 되어서 속죄의 은혜에로 함께 나아감을 얻었다는 것에서이며, 여기에 교회의 직분인 목사의 직을 맡은 자도 장로의 직을 맡은 자도 집사의 직을 맡은 자도 그리고 직분을 맡지 않은 성도도 구분(또는 계급)이 없으며, 그래서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서는 배운 바 그 확신에 거하지 않고서 목사인 자신을 성직의 계급 속에서 성직자의 권위 속에서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얼마나 크게 잘못된 것인지요!. 그러니 말입니다. 목사는 성직자인지를 물으셨습니까? 단언하여서 답변을 드립니다만, 목사는 성직자가 아닙니다. 이것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을 요구하셨습니까? 성경에서는 목사가 성직자인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그렇게 가르친 바가 없습니다. 성경은 단지 교회와 더불어 존재해야 할 직분으로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말씀하셨으며, 이것이 교회의 어떤 일의 사역을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가르침을 줄 뿐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목사는 성직자 개념이 아니니까 성직자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목사 자신이 스스로 성직자라고 말하지 않는데, 사회라는 영역이 사회 통념상 목사를 성직자의 그룹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가 종교인 중에서 종교의 일을 맡아 하며, 직분을 가진 자들에 대해 갖는 통념상 개념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단순히 불자가 아닌 승려를 성직자라고 말합니다. 또한 카톨릭교회(천주교)의 단순히 신자가 아닌 교회의 직분을 맡아 섬기는 자인 신부(사제)를 성직자라고 말합니다. 그와 같이 교회(개신교)에서 단순히 신자가 아닌 교회의 직분을 맡아 섬기는 자인 목사를 성직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국어사전은 성직자를 “종교적 직분을 맡은 교역자. 신부, 목사, 선교사, 승려 따위이다.”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력서나 경력란에 직분을 기록하는 곳이 있어서 목사인 것을 기록하게 되면, 그들은 물어봅니다. “성직자이십니까?“ 이렇게 목사를 승려나 신부와 함께 하나의 종교 지도자의 그룹으로 묶고 ‘성직자’의 개념으로 보고 또한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대사관에서 인터뷰 할 때에나, 공항에서 물어봅니다. ”당신은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답하죠. “목사입니다.” 그러자 “성직자이시군요”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뭐라고 다시 대답을 해야 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성직자라고 여겨서가 아니라, 사회에서 목사를 승려와 신부와 함께 성직자라고 여기고 그렇게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성직자이시군요”. 여기에 대해 역시 사회 통념상 대답하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그들에게서는 목사는 승려이니 신부이니 이런 분들과 함께 성직자인 셈입니다. 그들에게서 목사는 성직자인 것이며, 따라서 성직자로 부릅니다. 그러니 그들에 의해서 이렇게 성직자로 불려진다면 이것은 하등의 이상할 것도 없고, 잘못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렇게 사람들에 의해서 목사가 성직자라고 불려지는 것을 문제 삼거나 시비를 걸 일이 아니며, 또한 그들이 성직자이냐고 묻는 말에 자신을 성직자라고 대답하는 것도 문제 삼거나 시비를 걸 일이 아닙니다. 전혀 문제거리가 아닌, 그러니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주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세계에서의 경우는 문제가 다릅니다. 목사는 자신을 성직자라고 생각하거나 또한 말하거나, 그렇게 불려지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 또한 목사를 특정한 계급층으로 있는 성직자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부르며 대우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목사는 말이죠.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는 일을 설교를 통해서 하는 일을 위하여 그 직분을 맡아 봉사하여 섬기는 자일 뿐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성직자의 계급 개념으로 불려질 것이 아닌 것은 목사는 교회의 다른 직분들인 장로와 집사와 함께 ‘사역상 동등한 자’입니다. 장로는, 그리고 집사는 성직자라고 부르지 않는데 목사는 성직자라고 부른다면 이런 형평성에도 맞지 않고 모순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목사와 성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성도와의 관계에서도 그들 위에 있는 특정한 계급층의 성직자가 아닙니다. 목사는 성도 위에 군림하며 다스리는 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긍휼을 봉사하여 섬기는 것에서 나타내는 자입니다.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답글에서의 설명이 좀 더 자세하게 해 나가려다 보니 의외로 길어졌습니다만, 이 글을 읽는 님과 독자는 잘 정리하시고 핵심을 잘 요약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는 중에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많이 배우고 복사해갑니다. 기회가 되면 저희교회 게시판에 옮기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며칠 전 동남아에 선교사로 가 있는 친구 하나가 잠시 귀국했을 때 들은 말이 이 글을 읽는 도중 내내 떠올랐습니다. 국내 모 큰 신학대학교 총장님이 그 지역을 방문해서 선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총장님이 그 집회의 설교에서, 그곳 지도자를 대제사장, 선교사들을 제사장, 그곳 성도들은 백성이라고 했다 합니다. 이 선교사가 한숨을 크게 내쉬니, 마침 그 지역을 방문했다가 그 집회에 참석해서 옆에 앉았던 국내 한 목사님이 "선교사님! 그 한숨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했다 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저에게 잘 정리가 되었습니다
좋은 질문으로 말미암아 저도 잘 공부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많이 배우고 복사해갑니다. 기회가 되면 저희교회 게시판에 옮기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며칠 전 동남아에 선교사로 가 있는 친구 하나가 잠시 귀국했을 때 들은 말이 이 글을 읽는 도중 내내 떠올랐습니다. 국내 모 큰 신학대학교 총장님이 그 지역을 방문해서 선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총장님이 그 집회의 설교에서, 그곳 지도자를 대제사장, 선교사들을 제사장, 그곳 성도들은 백성이라고 했다 합니다. 이 선교사가 한숨을 크게 내쉬니, 마침 그 지역을 방문했다가 그 집회에 참석해서 옆에 앉았던 국내 한 목사님이 "선교사님! 그 한숨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했다 합니다.
실제로 그곳 목사 선교사들은 자기들을 대제사장, 평신도(?)선교사들을 제사장, 그리고 성도들을 백성이라고 하기도 한다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선교사들이 해외에서 제발 모세나 목사를 증거하지 말고 예수님만을 증거해달라고 당부했다가 답으로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숭사리의 "개혁관련 펌글"방으로 스크랩해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서로 서로 섬겨야 하는 그 분의 제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