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예배당에 십자가를 달며,
그 십자가에 천을 달아 거는 행위는 정당한가?
언제부터인가 개신교의 교회 이곳저곳에서 교회 예배당의 강단에 십자가를 달더니, 요즘은 교회 절기로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지키면서 이 기간에 십자가에 천을 거는 행위를 하는 교회가 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그 옳고 그름을 시시비비하는 문제로 확대되었습니다.
혹자는 십자가에 천을 걸어 M자 형태를 띠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한 것과 함께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께서 수의만 남기신채 부활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을 상징하는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반해 혹자는 이러한 행위를 비성경적이요 비복음적인 것으로 로마카톨릭교회의 전통에 의한 것이라고 일축하며, 개신교의 교회가 이러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합니다.
그러자 십자가에 천을 거는 행위를 정당하다고 보는 사람들은 이것이 로마카톨릭교회와는 무관한 것으로 본래 개신교의 전통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논란과 논쟁을 대하면서 개신교의 교회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는지 참으로 탄식스럽습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달고 그 위에 천을 거는 행위는 정당한가? 부당한가?
십자가에 천을 거는 행위의 정당성과 부당성 논란과 논쟁 이전에, 먼저 교회에서 설교하는 강단에 십자가를 거는 행위에 대한 이해부터 제대로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개신교는 소위‘화상예배’에 대하여 강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져왔습니다. 지금은‘영상예배’, 또는‘동영상예배’까지 등장한 상황입니다만, TV 모니터에 의한 영상으로 예배실황을 방영하는 것을 시청하여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있게 될 때부터 영상예배에 대한 반대가 있어왔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는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천주교라고 말하는 로마카톨릭교에는 우상숭배와 미신적 의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는 마리아를 비롯하여 성인들의 화상숭배가 있어왔으며 심지어는 유골숭배에까지 있어왔습니다. 마리아나 성인들의 형상을 만들어놓고 그것들 앞에 절하거나 기도하는가 하면, 죽은 자의 유골과 유품을 숭배함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성경이 기독교인 전체에 보급되어 있습니다만, 과거 그렇지 못한 시대에서는 교회에서도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특정한 사람만이 성경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성경이 자국민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된 번역 성경이 아니라,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었으며, 나중에 새로 번역된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이었기 때문에, 이 언어를 알고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라틴어를 공부하여 배운 사람 만이었습니다. 더욱이 로마 교황청은 라틴어 성경인 벌게잍역만을 성경으로 인정하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금지시킨 까닭에 당시 로마를 비롯한 서유럽 교회들은 라틴어 성경과 라틴어를 교회의 공식 예배용어로 사용함으로써, 라틴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으며, 따라서 성경의 내용을 스스로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한데 일반인, 곧 백성들의 상황은 어떻겠습니까?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 성경을 읽어주고, 라틴어로 설교를 하고, 세례와 성찬 등 교회의 모든 의식을 라틴어로 진행할 때 그 모두에서 알아듣고 이해하겠는지요. 당연히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배 참여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떻게 기쁨과 그에 따른 감동이 있겠는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 생기기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화상예배’(畵像禮拜), 또한 ‘성상숭배’(聖像崇拜)의 등장입니다. 화상예배란 그림에 의한 것이든 또는 조각에 의한 것이든 어떤 형태에 의한 것이든지 간에 숭배함에 있는 상(像)에 의해 예배를 드려가는 것인데, 예수님의 얼굴, 마리아의 얼굴, 성자나 종교적 인물들의 얼굴, 곧 얼굴의 상을 내세우고 이를 통해서 예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숭배와 마리아 숭배, 그리고 사도 숭배가 시작됐습니다. 이는 로마교회를 이루고 있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되어 갈라서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동방교회는 철저하게 화상, 또는 성상 숭배를 배격했습니다만 서방교회는 화상 또는 성상 숭배를 아예 교회 안에서 제도화시켜 정착되게 하였습니다. 서방교회가 이렇게까지 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라틴어로 진행되는 예배에서 기쁨과 감동의 만족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화상예배의 형식을 사용해서 예배 참여의 기쁨을 갖게 하고 마음에 만족을 얻게 하는 의도입니다. 그러한 것에서 교회 안에 십자가를 다는 행위로까지 나아가게 되는데, 십자가를 바라보며 거기에서 머리에 가시관이 쓰인 예수님을 떠올리고 창에 허리가 찔려 피와 물을 다 쏟으시며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떠올림에 있는 이 모두는 비성경적이요 비복음적인 예배의식이라고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2:6-23에서 이야기 해나가는 것에서 그러한 행위는 그리스도이신 예수와 하나 되기를 거부하는 행위로 자의적 숭배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인데, 교회가 화상예배를 이어가는 것에 있는 영상예배, 동영상예배를 해서야 되겠으며, 또한 교회에 십자가를 다는 행위에 있어야겠으며, 거기에다가 더해 십자가에 천을 다는 행위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것입니다.
십자가에 천을 다는 행위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전통인가? 개신교의 전통인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생명을 생각하려면 그러한 미신적이고도 우상적인 것을 행함에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가져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목사를 세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주게 하셨는데, 이 복음 외에 또 무슨 십자가를 달며 그 십자가에 천을 다는 행위로까지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로마카톨릭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든, 로마카톨릭교회와는 무과한 개신교의 전통이든, 그 짓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 그래야하는지를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가르칩니다.
1. 본성의 빛(light of nature)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하나님은 만물에 대하여 통치권과 주권을 행사하신다. 그는 선하시며, 만물에게 선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를 경외하며, 사랑하며, 찬양하며, 부르며, 신뢰하며, 그리고 섬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이 친히 정해 주셨으므로 그 자신의 계시된 뜻 안에서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탄의 지시에 따라 어떤 가견적(可見的)인 구상(具象)을 사용하거나,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는 다른 방법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다.
2. 종교적 예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또한 오직 그에게만 드려야 한다. 천사나, 성자들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들에게도 드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 이후로는 중보가 없이 드릴 수가 없고, 또한 다만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다른 중보로도 드릴 수가 없다.
이렇게 신앙고백 함에 있으며, 이를 가르치고 있는데도 교회 안에 십자가를 다는 행위를 하며, 거기에다가 천을 다는 행위를 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않기로 작정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 올바른 신앙에 있어야겠습니다.
해서, 종교개혁의 정신에 있으면서 칼빈의 신학과 그 사상을 따르는 개혁교회에서는 형상화 한 비성경적이요 비신앙적인 상(像)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하며 또한 예배 때에 사용되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켜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개혁교회의 중요한 신앙 유산의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제109문답에서도 보게 됩니다. 이곳에서 다음과 같이 다루며 이를 가르쳐 화상 예배에 대해 주의하며 경각심을 갖게 하며, 참된 예배에서 떠나 헛된 예배의 추구에 있지 않게 해 줍니다.
제2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 의논하며, 명령하고, 사용하고, 어떤 모양으로 인정하는 것들이며, 거짓 종교를 용납하는 것과 하나님의 삼위(三位)나 그 중 어느 한 위의 형상이라도 내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가지든지, 외적으로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으로 만든 것 - 그림, 조각상, 영상화 - 이며, 이 형상이나 혹은 이 형상 안에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일이며, 거짓 신들의 형상을 만들고, 그들을 예배하거나 또는 그것들에 속한 것을 섬기는 것이며, 우리 자신들이 발명하고 취하든지, 전통을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받았든지, 옛 제도, 풍속, 경건, 선한 의도, 혹은 다른 어떤 구실의 명목으로 예배에 추가하거나 삭감하여 하나님의 예배를 부패케 하는 미신적 고안, 성직 매매, 신성 모독,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와 규례들에 대한 모든 태만과 경멸, 방해, 반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는 바대로“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 곧 하나님의 삼위나 그 중 어느 한 위의 형상이라도 내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가지든지 외적으로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으로 만드는 것과 이 형상이나 이 형상 안에서나 이것에 의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거짓 신들의 형상을 만들고 그들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은 제2계명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는 개신교 – 개혁교회 : 개혁파 교회 및 장로교회 - 의 신앙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상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림에 의한 것이든 또는 조각을 한 것이든 그 어떤 방법으로도 형상화하여 허용하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함에 있어온 개신교인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 신앙에서 떠나 로마카톨릭교회의 악한 풍습과 전통을 따름에 있는 것에 다름 아닌 성경에서도 그리고 신앙고백서에서도 금하고 있는 종교적 헛된 상과 그와 관련된 것들을 고안해 내서 성경 외의 요소들을 예배에 도입하는 잘못을 행하여 옴에 있어 왔습니다. 이는‘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에 있음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소 귀에 경 읽기’식으로 있는 것이며, 악함의 흔적을 따라가는 죄의 길에 있는 것입니다.
경건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동기에서나 선한 의도에 의한 좋은 뜻으로 시작한 것이라고 하여 그것이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배에나 또는 신앙의 행위에 도입해서는 안 됩니다. 16세기에 종교개혁 –교회개혁 – 운동을 일으킨지도 1세기가 지난 17세기에 이르렀는데도 웨스트민스터 삼대 표준문서에서 이를 다루고 있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것일 만큼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보다 더한 참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심각한 행위들을 만들어내서 마치 믿음의 행함에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인 양 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태가 우리 주위의 교회에서 자행되는 것을 대하면서 우리는 개혁주의자들이 의식적으로 배제한 모든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매우 주의하면서 그것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회에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악성 바이러스인 코로나19와 그로 인한 변이 바이러스와 같아서 침투하여 들어왔을 경우 그에 따른 해를 겪음이 참으로 크며, 이를 퇴치하여 몰아내는 데는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서서 일치된 신앙으로 대항하여 싸워야 하므로 그로 인한 해를 당하며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애초에 이를 대처하며 막음에 굳은 신앙에 있어야겠습니다. (*)
첫댓글 “중세 때 그리스도교는 상당히 타락했습니다. 당시 ‘예수로 돌아가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생겨났습니다. 당시 개신교는 가톨릭에 전해져 내려오는 숱한 전통을 거부했습니다. 그때 가톨릭의 수도와 명상의 전통도 덩달아 거부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개신교는 가톨릭에 비해 ‘기독교식 명상법’이 너무나 빈약합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게 묵상과 큐티(Quiet Timeㆍ성경 읽기와 짧은 묵상) 정도입니다.” ....어떤 신부의 글을 발췌한 것인데요.이분 얘기처럼 개혁을 하면서 믿음생활에 유익을 줄 수 있는 좋은 전통마저 구별없이 마구 버려져서 개신교가 좁아지고 빈약해 지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요? 한번 생각해 봅니다. 물론 작금에 천주교의 문제점도 개신교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천주교에 다니는 후배의 말을 듣다보면 문제있는 신부들은 문제있는 개신교 목사와 대동소이 합니다.
저는 워쉽도 상당히 불편합니다. 엑스타시를 통해서 누군가를 만나고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는듯한 주술적인 모습이 느껴지고 주님에대한 지식이나 앎을 통해서 교제를 가져가기보단 감정적이고 신비적인 접근이 느껴지기 때문이죠.염려가 됩니다.제가 겪어봤던 워쉽 리더자 들은 깊이가 없었습니다.남앞에 나서는 만큼 본이 되지도 않았고요,또한 주님을 빙자해 자신들을 드러내는듯한 모습도 보여지기도 . 저의 성향과는 맞지 않다고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건 아닌지 좀 걱정도 되지만요. 목사님 글에 대한 댓글과는 좀 거리가 있지만 감히 개신교의 높은 학문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제가 알고있는 얕은 지식으로 그런줄 알고 판단하는것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긴 역사속에서 삭혀지고 정제된 카톨릭의 부분적인 장점에 대해선 인정해 줘도 되지 않을까요? 좀 여쭤 봅니다.=3
목사님이 글을 짧게 쓰시니깐 하마님이 또 긴글을 쓰시네요 ㅎㅎ
안녕하세요, 하마(허 승호)님! 님이 소개한 어떤 신부의 글을 발췌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세 때 그리스도교는 상당히 타락했고, 개신교는 카톨릭에 전해져 내려오는 숱한 전통을 거부했습니다. 그때 카톨릭의 수도와 명상의 전통도 덩달아 거부했습니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왜인지요? 신부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교가 상당히 타락한 그 내용에 카톨릭의 수도와 명상의 전통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에 대하여 거부하며 그러하 교회의 개혁에 있어나간 것이지요. 지금 개신교는 카톨릭에 비해 '기독교식 명상법'이 빈약해 보이는지요. 먼저 명상은 달리 표현하면 사색인데, 이는 복음의 진리를 사색하며 그 신앙에 있는 것입니다. 이를 '명상법', 곧 명상의 방법으로 가져나가야 하는지요. 명상, 곧 사색신앙에 방법이 있는가요? 그리고 개신교의 명상이 빈약하다니요? 이는 누구의 관점인지요. 카톨릭교회의 신부가 보는 관점입니다. 과연 빈약한지요. 아닙니다. 정말 부요한 명상에 있어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존 파이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말씀이 기도가 되게 하라. 이것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 후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에서 사도가 전념했던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 라고 하신 말씀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명상(사색)을 '묵상과 큐티'에 의해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긴 역사속에서 삭혀지고 정제된 카톨릭의 부분적인 장점에 대해선 인정해 줘도 되지 않을까요?" 라고 하셨는데, 그러한 것이라면 복음의 진리와 상충되지 않고 부합, 곧 일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있으면 제시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있어서 개신교가 이를 적극 인정하고 수용하여 교회에 유익을 주는 선을 도모하는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 위에 언급한 '카톨릭교회의 수도와 명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 수도가 카톨릭교회에서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금욕과 고행'은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명상과 기도가 카톨릭교회에서는 어떤 것이었는지도 아셔야 합니다. 그 명상과 기도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삶에 있어 간 것이 아니라, 그 명상과 기도에 삶이 종속
(속박) 됨에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의 생활을 해 나가는 것에 신앙하는 것을 장점이라고 여기며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그럼에도 그렇게 여기고 생각한다면, 과연 님께서는 그러한 삶의 생활을 해 나갈 마음을 가져나가며, 그 자신감에 있으며, 지속적으로 그리고 좀 더 나아지게 해 나갈 수는 있겠는지요. 그래서 그렇게 사신다면 그 삶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믿음의 의에 있는 것이겠는지요. 아니면 자기 신념에 의해서 성취한 믿음의 의에 있는 것이겠는지요. 이 정도로 답변을 드립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내가 먼저 바로 알아서 바로 행해야 할듯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