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최범수 공주중앙장로교회 장로 GJ사랑나눔발전소 대표 
1. 공주에서 활동한 34명의 선교사 공주에서 활동한 선교사는 미 침례회 소속 6명의 선교사와 미 감리회 소속 선교사 28명으로 확인되었다. 1896년부터 1948년까지 파악한 것이다. 우리고장 공주에서 34명의 선교사가 활동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다. 선교사의 활동기간은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40년이 넘도록 이 공주와 함께했다. 그 당시 선교사가 찾아온 이 나라는 메마르고 가난한 땅으로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던 땅이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사람들, 왜 묶여있는 지도 고통이란 것도 모르고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이라고 어느 선교사는 기도했다(연재 1회, ‘어느 선교사의 기도문’ 참조). 뿐만 아니라 일제의 악랄한 식민통치는 강제징용, 군량미 수탈, 창씨개명 등 온갖 만행이 자행되던 때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와 함께 신교육과 보건의료, 구제활동을 전개하면서 애국애족과 독립정신을 심었으며, 이 나라 이 민족을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일깨웠다. 이는 1919년 3.1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 16명이 개신교인이요(불교 2인, 천주교 15인) 공주의 3.1독립만세운동도 개신교인들이 주도했음이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2. 영명동산(묘지)에 잠든 선교사 공주지방에서 활동한 34명의 선교사 중에서 샤프 선교사와 선교사 자녀 4명이 영명동산에 잠들어있다(위 사진). ① 샤프(R. A. Sharp) 선교사는 1904년 갓 결혼한 아내 엘리스(Alise H. Sharp)와 함께 공주에 부임한다. 오두막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선교활동을 했다. 벽돌을 찍고 기술자를 불러와 직접 집을 지었다. 1905년 11월 입주한 집이 지금도 현존하는 선교사의 집이다. 새집에서 신혼 3개월만에 강경지방 선교활동 중 풍토병으로 순교했다. 부인 엘리스(한국명 사애리시·史愛理施) 선교사는 1906년 미국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1908년 다시 공주에 돌아와 여성교육에 앞장섰으며, 유관순을 양녀로 삼아 신교육을 주선하는 등 30여년을 활동했다. ② 테일러 선교사의 딸 에스더(Ester, 6세) 1911~1916년, 풍토병으로 사망 아버지 테일러(Corwin Taylor, 한국명 대리오) 선교사는 1916~1922년까지 공주지방 감리사로 활동했다. ③ 아멘트 선교사의 아들 로저(Roger, 2세) 1927~1928년 풍토병 사망 아버지 아멘트(C. C. Ament, 한국명 안명도) 선교사는 1919~1933년까지 공주지방 감리사로 활동했다. ④ 윌리엄스 선교사의 딸 올리브(Olive, 10세) 1909~1919년, 풍토병으로 사망 아버지 윌리엄스(F. E. C. Williams, 한국명 우리암) 선교사는 1906년~광복 이후까지 영명학교 설립운영(교장) 임시정부 농업정책 고문 등을 역임했다. ⑤ 우광복(Geor Zur Williams, 1907~1994) 아버지 윌리엄스(우리암) 선교사와 함께 공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두 살 아래 여동생(Olive, 1919년)이 사망한 후 미국의 할머니에게서 자랐다. 그의 이름 우광복은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빼앗긴 이 나라의 광복을 염원하여 지어준 이름이다. 그는 콜로라도 주에 있는 덴버의대를 졸업하고 해군 군의관이 되어 한국전에 참전하였으며, 당시 하지 중장의 통역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공주에 잠든 동생 “올리브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영명동산에 잠들어 있다. 아버지 윌리엄 선교사는 영명학교 설립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을 뿐 아니라, 애국애족 교육을 통한 광복의 꿈을 심어주었으며, 농업 전문가로서 임시정부의 농업정책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3. 공주의 명예 선교사로 네 분을 추모하며 영명동산에는 다섯 분의 묘가 있다. 우리는 그곳을 선교사 묘역이라 부른다. 샤프 선교사는 우리고장 선교사로서 첫 순교자이시다. 그리고 에스더, 올리브, 로저는 선교사의 자녀로, 이 땅의 복음 전파를 위해 희생된 어린 순교자로 부르고 있다. 특히 우광복은 공주에서 자랐고 한국을 위해 헌신하다 끝내 공주를 찾아와 잠든 진정한 공주의 선교사이다. 이에 공주기독교역사위원회(위원장 이상호 목사)는 지난해 말에 이 네 분을 공주의 명예 선교사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필자는 이따금씩 영명동산에 올라 묘역을 돌아보곤 한다. 샤프, 에스더, 올리브, 로저, 윌리엄스 선교사를 차례로 만난다. 긴 세월 비바람에 묘비의 글자도 지워져가고 묘역은 너무도 초라해 보인다. 보기에 민망하다. 가슴이 아파온다. 눈물이 고인다. 내 마음에 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대 이곳에서 슬퍼마오 우리는 이곳에서 늘 공주와 함께하고 있소 내가 처음 공주를 찾아왔을 그때처럼 지금도 이 공주를 사랑하고 있다오 그대 울지 말고 이 공주를 위해 기도하시오 그때에 우리가 편히 쉬리다 주님은 다 아십니다. 주님은 다 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들의 아름다운 믿음과 순종을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주여, 저도 믿음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이 호흡 다할 때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