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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으로부터 매우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제주 4·3과 강정 해원굿, 용산 해원 굿 등에서 가슴 깊은 울림을 느끼게 하는 굿을 보여주셨던 제주 심방이자 문화 운동가 정공철 선생님께서 오늘 2013 년 6월 13일, 목요일, 오후 6시경 갑자기 세상을 뜨셨다 합니다. 고인께서 최근 후두암을 앓고 계셨다 들어 매우 안타깝던 차 였습니다.
지인에 의하면 장지는 제주시 부민 장례식장 (제주시 도남동 1237)이며 6월 15일, 토요일, 오후 6시에 일포를 행한다 합니다.
2012년 9월 5일 세계 자연 보전 총회 개막일 전 날 묏부리에서 제를 진행하시던 정공철 선생(출처: 제주 소리)
2012년 9월 5일 세계 자연 보전 총회 개막일 전 날 묏부리에서 제를 진행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해군 기지 건설로 주민들의 별포제가 막힌 묏부리에서 붉은발말똥게, 제주새뱅이, 맹꽁이, 산호, 돌고래등 멸종위기 생물들을 비롯, 강정 뭇 생명의 해원을 비셨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 많은 주민 분들과 지킴이들, 외국인들도 선생님의 굿을 감명 깊게 본 바 있습니다. (관련 기사)
선생님은 그 외에도 2011년 5월의 강정 마을 문화 난장과 같은 해 세밑 생명평화기원 강정마을 해돋이 축제 전야 제등에서 강정을 위한 기원굿을 진행하기도 하셨습니다. 강정과는 인연이 깊은 분입니다. (관련 기사 1, 2)
'문화공연에 앞서 제주칠머리당굿 전수자 정공철 심방이 강정포구에서 액맥이 굿을 하고 있습니다.' (출처: 제주 소리)
'문화공연에 앞서 제주칠머리당굿 전수자 정공철 심방이 강정포구에서 액맥이 굿을 하고 있습니다.' (출처: 미디아 제주)
선생님의 소천이 매우 안타까운 것은 시대가 그 어느 때보다 선생님같은 심방을 절실히 원하고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대의 심방이요, 예술인이요, 문화운동가인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그의 자취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할 것입니다.
부디 하늘에서 편히 영면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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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산천의 애도
사진: 진달래 산천/ 2012년 9월 5일 묏부리에서 제를 지내던 정공철 선생
작년
9월 5일 묏부리.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해군기지 철회와 뭇 생명들의 해원과
상생을 비는 굿이 있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어버렸다.
마당극 배우, 연출가, 영화배우, 광대였던 그,
“없는 사람의 없는 살림에도 밝은 웃음이 깃들고, 억울한
사람 억울함 풀고, 더불어 사는 맛을 되찾아 보자는 것이 문화운동이요,
바로 그것이 광대정신”이라고 말했던 그,
난세의 예술가는
심방이 될 수밖에 없어 심방이 되었다던 그.
정심방
예수나 믿었으면
천당에나 갈 걸
부처나 믿었으면
극락에나 갈 걸
사범대학에 다니다
돈에 밀려 그만두고
고향 내려와
제재소에 일 다니다
전기톱에 감겨
손가락 두 개 잘리운 날
푸르딩딩한 손가락
하얀 무명으로 둘둘 말아
저만 아는 양지녘에
묻어 시왕전 보내고
대포잔 가득
쓴 소주 부어 아픔을 삼켰다.
아들네 형제
뒤치닥꺼리로
먹지도 입지도
못한 어머니
팔자궂은 전생
무슨 악연인지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사별하고,
편찮은 아버지
시중들던 셋째 아우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험악한 전갈을 받고,
먼저 가신 어머님
곁으로
후여 후여 먼길
떠나신 아버지.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눈물겹도록 모지게
살기로 했다.
이제는 철저하게
아주 철저하게
팔자 그르친
신의 성방이 되어
이승에 없는
부모 형제 가슴으로 부르듯
이승에 남아
눈물로 살아가는 이웃과 함께
넉넉하게 끈질기게
분노의 바다 일구어 내는
우리 시대의
광대로 살기로 했다.
넓고 크게 살아가기로
했다.
해마다 사월이
오면
무자기축년 사삼시절이
되돌아오면
저승도 못가고
이승도 못오는
팔만 영혼을
부르는 심방이 되어
흩어진 봉두난발
송락에 감추고
갈적삼 도포에
오색요령 감상기 들고
신칼 잡아 초혼
이혼 삼혼을 부른다.
/김수열
너무 이른 정공철선배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영면하소서.
(진달래 산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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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기사
지난 4월 7일 제주도의 강정마을에서는 64년 전 서귀포 서쪽의 이 조그맣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105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해원상생굿이 펼쳐졌다. 나는 이 마을이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한 동네 사람들이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미워하는 곳으로만 알았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비극의 현장인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굿의 절정은 심방이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의 한 맺힌 사연들을 엮어나가는 대목이었다. 옆 자리에서 연신 눈물을 찍어내고 있던 80살이 훨씬 넘은 듯한 할머니가 어느 순간 마음의 빗장이 풀렸는지 허공을 향해 팔을 내저으면서 나를 향해 뭐라고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주도 사투리로 된 심방의 사설과 그 할머니의 말씀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함께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교감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관에서 주도하는 공식적인 위령제나 기념식과는 달리 굿은 가슴 깊이 맺히고 응어리진 민초들의 한을 풀어주는 치유의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치유의 기능은 바로 예술의 본질이며, 그런 점에서 이날의 해원상생굿을 이끈 심방 정공철이야말로 어떤 제도권의 유명 예술가보다 더 예술의 본질에 근접한 진짜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공철은 세습무가 아니다. 국립 사대를 나온 그가 교단을 외면하고 마당판의 광대로서 심방 역할을 탁월하게 해낸 것은 타고난 끼나 팔자 탓이라고 해야겠지만, 고은 시인의 말대로 ‘안덕 계곡을 닮은’ 그의 기이한 외모와도 어울리는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는 영화 ‘이재수의 난’에서도 심방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그는 심방 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진짜 심방이 되기로 결심하고 피나는 수련 끝에 제주 큰굿의 전통을 잇는 심방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광대 시절에 그는 어떤 자리에서 “없는 사람의 없는 살림에도 밝은 웃음이 깃들고, 억울한 사람 억울함 풀고, 더불어 사는 맛을 되찾아 보자는 것이 문화운동이요, 바로 그것이 광대정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해마다 사월이 오면/ 무자기축년 사삼시절이 되돌아오면/ 저승도 못 가고 이승도 못 오는/ 팔만 영혼을 부르는 심방이 되어/ 흩어진 봉두난발 송락에 감추고/ 갈적삼 도포에 오색요령 감상기 들고/ 신칼 잡아 초혼 이혼 삼혼을 부른다.” (김수열 시인의 〈정심방〉 부분)
가슴 깊이 응어리진 한을 풀어내어 다시 살아갈 힘과 희망을 주는 심방의 일은 때로 제주도를 벗어난 육지로 그를 불러내기도 한다. 가령 지난 2009년 3월 용산참사 진혼굿을 주도하면서 변방의 심방 정공철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의 절절하고 애끓는 사설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광막한 벌판(제주 말로 ‘미여지뱅뒤’)의 가시나무에 이승의 옷을 걸어 놓고 떠나지 못한 채 헤매는 중음신들을 달래 나비와 바람으로 환생하도록 도와주는 그의 애틋한 심성이 가슴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짐작할 뿐이다.
정공철 같은 심방의 위무와 진혼을 기다리는 가엾은 영혼들은 지금도 ‘미여지뱅뒤’를 떠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된 수백 명의 시민들과 당시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수많은 5월 증후군 환자들, 해고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22명의 쌍용차 노동자들, 망국과 식민지배의 고통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한 평생을 살다 간 정신대 할머니들, 지금도 자살 충동으로 내몰리고 있는 농민과 학생들….
난세의 예술가는 심방이 될 수밖에 없다. 제주 변방의 심방 정공철, 그는 해원 상생의 본분을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우리시대의 예술가이다.
〈영남대 독문과 교수〉
첫댓글 삼가 명복을 빕니다.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