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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와 사울의 박해
사도행전 8 : 1 - 3
스데반은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한창 부흥하던 예루살렘교회가 구제하는 일로 인해 원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재정 관리와 구제하는 일을 위해서 집사 일곱을 뽑았습니다. 당시 교인들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으니 상당히 많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중에서 뽑힌 일곱 집사들은 사도들 못지않은 믿음이 좋은 분들이었을 것입니다.
일곱 집사를 뽑아 구제하는 일을 맡기므로 더 이상 원망의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므로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믿게 되었습니다(6:7). 당시 유대교의 ‘허다한 제사장 무리’ 믿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집사를 세우므로 예루살렘교회는 매우 은혜롭고 크게 부흥 성장하였습니다.
일곱 집사 중에 스데반과 빌립은 사도들처럼 말씀전하는 사역도 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들어가서 복음 전하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8:38). 특별히 스데반은 큰 기사와 표적도 행하였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온 자유민들은 회당에서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을 했지만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해서 고소하므로 스데반은 공회에 잡혀가서 결국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스데반이 집사로 뽑힌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교회사에 최초의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예루살렘교회의 큰 충격이었으며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무리가 일어나 예루살렘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구나 젊은 청년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려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습니다. 교인들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사마리아로 다메섹으로 더 멀리 온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만 남고 다 흩어졌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에게 자신을 돌을 들어 치는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7:60). 스데반의 죽음과 무릎을 굵고 기도했던 그 기도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응답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스데반의 죽음과 기도가 응답이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가 없고 기도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스데반의 죽음과 기도는 교회사에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의 죽음과 기도로 말미암아 크게 두 가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로 복음이 세계적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권능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들은 많은 무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병든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걷지 못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급성장하였습니다. 집사 일곱을 뽑아 구제하는 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성령 충만하였습니다. 재산을 바치고 가난한 자들과 과부를 도왔습니다. 매일 같이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떡을 떼고 음식을 먹고 교제를 했습니다. 한 마디로 당시의 예루살렘교회는 지상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이 예루살렘 안에서만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예루살렘 안에서만 전해졌습니다. 이를 지켜 본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교회를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스데반의 죽음과 동시에 예루살렘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사울이 일어나 교회를 잔멸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교인들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 외에 그 많은 교인들이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으졌습니다(8:1). 이렇게 흩어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세계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과 동시에 등장합니다. 사울은 바리새인이며 유대교에 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에게 직접 돌을 던지지는 않았지만, 돌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맡았습니다(7:58). 그리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마땅히 여겼습니다(1).
그런데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보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땅으로 흩어졌습니다(1). 그런데 흩어진 교인들이 두려워서 숨든지 하지 않고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인들은 각기 흩어진 지역을 돌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말미암아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세계 복음화에 문이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우리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스데반의 순교가 없었고,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 없었더라면 아직도 복음은 예루살렘 안에만 머물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세계적인 복음화가 되지를 못하였을 것이며 우리 역시 복음을 듣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스데반의 죽음과 예루살렘교회의 박해는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세계적으로 퍼져 나갈 수가 있게 되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저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는 스데반의 기도로 말미암아 당시 스데반을 돌을 던졌던 사람들이 얼마나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다만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었다는 것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스데반의 죽음과 동시에 사울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울은 철저한 유대주의 율법주의자요 바리새파였습니다.
이때까지의 사울이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물론 온 유대와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살아나심과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소문이 있었기에 사울도 어느 정도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일들을 들었을 때 사울은 어쩌면 예수님에 대한 악한 생각을 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행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예루살렘교회가 성장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잡혀 공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사울은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사울은 분명히 지켜보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것도 사울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릎을 굵고 기도하는 것도 보았고 들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하는 소리도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완악한 그의 마음은 조금도 감동이 없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것을 보고 사울은 더욱 악해져서 일어나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8:3)는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섰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잔멸하고 남녀를 끌어다 옥에 넘기는 것만으로 한이 차지 않았습니다. 살기가 등등하여(악이 머리끝까지 찼다‘는 치를 떨었다는 의미)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했습니다. 사울의 영적 상태는 최악이였습니다.
요즘 북한에 김정은의 하는 행동을 보면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안 상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독선과 고립으로 심리적인 불안은 최악의 상태입니다. 온 세계가 자금줄을 막지요, 외교관들은 탈북하지요, 백성들은 굶어 죽어가지요, 뚜렷한 대책이 없으니까 공포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그슬리는 자는 무조건 총살해서 백성들을 두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사일을 열흘이 멀다고 펑펑 쏘아 올리고 핵실험을 해서 온 세계를 경악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장성들을 매일 같이 불러 모아 박수를 받아야 하며, 평양 거리에서 수만 명이 행진하면서 자신을 찬양하는 것을 보면서 만족을 채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심리적 고통을 이길 수가 없어서 하는 짓들 입니다.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핵실험을 하고 온 세계가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김정은이는 즐기는 것 같습니다. 유엔의 안전보장 이사회가 모여서 최고의 압박을 가한다 해도 눈도 깜짝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최악의 상태인 김정은이는 하나님이 치시든지, 붙잡든지 해야지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사울의 영적 상태는 최악이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잔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라면 무조건 잡아 가두고 죽이고자 하는 것은 사울의 정신적 심리적인 상태가 매우 불안한 최악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울을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지 않으면 아무도 멈추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스데반이 기도가 허공을 치는 헛된 기도가 아니였습니다. 주님께서 스데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살기등등한 사울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빛으로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현현입니다. ‘나는 빛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이 빛으로 나타나셔서 사울을 붙잡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사울 자신만이 경험한 빛이라면 사울의 심리적 형상으로 헌 것을 보았다든지 아니면 환상이라 할 수 있지만 사울의 주위 사람들도 다 같이 경험하였습니다.
사울은 그 빛으로 인해 땅에 엎드러졌습니다(9:4). 그리고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 라고 물었고 주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서셨던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빛으로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데반의 기도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사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스데반이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 한대로 예수님은 사울에게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사울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정감어리면서 호소력 있는 소리였습니다. 무서워 떨어야 하는 책망의 소리가 아니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사울에게 직접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울은 개심을 하였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쫓아 복음의 증인이 된 사울의 변화는 장차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는 사역을 수행하여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엄청난 사건이 된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었지만 스데반의 신학은 바울에게 이어졌습니다.
스데반의 기도는 사울을 바울 되게 하는 기도였습니다. 스데반의 기도는 헛된 기도가 아니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은 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스데반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기도는 사울을 바울로 바꾸셨던 것처럼 악마와 같은 사람도 천사와 같은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원수를 친구로 바꾸어 주십니다. 대적하는 사람을 협력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교회를 해치는 사람도 신실한 주의 일꾼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기도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힘으로 안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