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분심.의심에 찬 22명의 납자들 ‘우뢰같은 침묵’ 타파하기 위해 정진 “수행기간 길고 짧음은 중요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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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방일과 나태를 절복시키고 화두와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는 문수선원 정진대중. |
“휘이잉… 휘이잉….” 날카로운 바람이 호거산 계곡을 휘몰아친다. ‘바깥의 바람’이야 지나가는 나그네. 문제는 끝없이 움직이는 ‘내면(內面)의 바람’. 잡았다 싶으면 저 멀리 날아가 있다. 멀리 가 있나 싶으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항상 주변에 서성거리는 ‘이 놈’은 무엇인가. 아니 누구인가. ‘이 놈’을 찾으려 조심(操心).조심(調心)하기 몇 년이던가. 입선(入禪) 시간에는 코끝도 보이지 않다가 공양시간엔 불쑥 나타난다. 손끝에서 머물기도 하고, 머리 끝에서 농락하기도 하는 이 놈 화두(話頭).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덩어리는 스스로 드러난다’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출가 이래 365일 24시간을 이 놈과 씨름했지만 이 놈은 여전히 손끝.머리끝을 맴돈다.
지난 14일 찾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69-1번지에 위치한 호거산 운문사 문수선원(文殊禪院). 쭉 뻗은 소나무 사이에 놓여있는 선원은 그야말로 깨달음의 요람이다. 360개의 뼈마디와 8만4000개의 털구멍을 온통 의문의 덩어리로 뭉쳐, 화두타파를 통해 참 나를 찾자는 생각 이외 다른 것이 없는 곳. 22명의 납자들이 모여 조어장부(調御丈夫)가 되고자 정진중이다.
산 속의 차가운 바람도, 못골과 학소대에서 흘러내리는 양수(兩水)도 이들을 비켜간다. 치열한 정진에 입선시간과 방선(放禪)시간이 따로 없고, 밤낮의 구별도 없다. 선방 안과 밖의 구분, 차담시간과 공양시간의 구별도 물론 없다. 24시간 정진에 정진, 화두와 씨름할 따름이다.
학소대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는 순간, 문수선원의 정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리를 건너기 전과 건넌 후의 분위기는 천양지차, 마치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처럼. 하늘을 향해 촘촘히 서있는 소나무 사이를 지나 선원 마당에 들어서니 살 끝이 파르르 떨린다.
선객(禪客)들의 정진에 긴장됐다 보다. 선객과 검객(劍客). 싸움은 그들의 숙명이다. 선객은 내면의 적과 검객은 외면의 적과 주로 싸운다. 그러기에 그들이 내뿜는 선기(禪機)와 검기(劍氣)는 일반인들을 긴장시킨다. 참선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선객들의 기용(機用)이 부드러우면서 강하다면, 검술 수련 과정에 얻어지는 검기는 날카롭고 삼엄하다. 둘 다 긴장과 수행 속에서 얻어진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용처(用處)는 천양지차. 선기가 온전히 중생들을 살리는 데 쓰인다면 검기는 상대방을 제압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전신을 압도하는 선기를 이겨내고 가까스로 문수선원 앞에 섰다. ‘ㄷ’자형의 선원은 견고했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치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 정진대중들이 어떻게 수행하기에 선원이 이처럼 견고해 보일까. 도감 대훈(大勳)스님의 설명. “새벽 3시 기상, 3시30분부터 5시까지 입선, 5시 방선, 6시 아침 공양, 7시부터 10시까지 입선 정진, 11시 사시예불, 오후1시부터 4시까지 입선, 5시 저녁공양, 오후6시부터 10까지 입선 순으로 하루 일과가 진행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가행정진(加行精進, 정해진 시간 이상으로 수행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일정기간을 보통 이상으로 맹렬히 정진하는 것)하는 스님들은 공식적인 일정을 넘어 개인 일정에 따라 수행한다. 더 열심히 정진하겠다는 납자를 말릴 선원은 없다.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는 곳, 그래서 이곳엔 방일(放逸)과 나태(懶怠)라는 사기(邪氣)가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리라.
참선 정진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뭘까. 선원장 혜은스님은 “발심(發心).분심(憤心).의심(疑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마음을 낸다는 것. 보통 마음이 아니고, 출가자로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믿고 조사처럼 되겠다는 확고한 발심. 화두에 대한 큰 믿음이 발심이다. “발심이 없으면 중간에 정진은 끊기고, 납자생활도 시들해진다”고 대훈스님이 보충한다. 원수를 만났을 때 원수를 당장 요절낼 것 같은 심정으로 수행하겠다는 분심(憤心), 화두에 대한 끝없는 의심(疑心)도 필요한 마음이다. 이를 ‘간화선의 삼요(三要. 세 가지 중요한 요소)’라 한다.
남송 말 원나라 초기시대를 살았던 고봉원묘(1238∼1295) 스님도 〈고봉대사어록(선요)〉에서 이를 지적했다. “만약 진실로 참선하고자 하면 반드시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갖춰야 한다. 첫째는 크게 믿는 마음(大信心)이니, 이 일은 수미산을 의지한 것과 같이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둘째는 크게 분한 마음(大憤心)이니, 마치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났을 때 원수를 당장 한 칼에 요절내려는 것과 같다. 셋째는 커다란 의심(大疑心)이니, 마치 어두운 곳에서 한 가지 중요한 일을 하고 곧 드러내고자 하나 드러나지 않은 때와 같이 하는 것이다. 온 종일 이 세가지 요소를 갖출 수 있다면 반드시 하루가 다하기 전에 공을 이루는 것이 독 속에 있는 자라가 달아날까 두려워하지 않겠지만, 만일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마치 다리 부러진 솥이 마침내 못 쓰는 그릇이 되는 것과 같다.”
무문혜개(1183∼1260) 스님 역시 〈무문관〉 제1칙에서 ‘의심’을 강조했다. “조사의 관문을 뚫고자 하는 사람은 없는가. 온 몸을 다 들어 의단(疑團)을 일으켜야 한다. 무자를 참구하되 이 무자를 밤이나 낮이나 항상 들고 있어야 한다. 마치 뜨거운 쇳덩어리를 삼킨 것과 같아서 토하고 토해내도 나오지 않 듯이 하여 이제까지의 잘못된 알음알이를 몽땅 없애야 한다. 이와 같이 꾸준히 지속하여 공부가 익어지면 저절로 몸과 마음이 무자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어 타성일편(打成一片)을 이룰 것이다.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었으나 오직 스스로만 알 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선원과 납자에게 필요한 것은 당연히 발심.분심.의심 세 가지입니다.” 선원장 혜은스님과 도감 대훈스님의 설명은 지극히 간단했다. 간단한 것이 생명력이 긴 법이다. 이런 말 저런 말 줄줄이 늘어놓는 것은 자신이 없다는 또 다른 징후다. 대개 거짓이 붙기에 말이 길어지고, 줄줄이 설명이 늘어진다. 봄.여름.가을 온 산의 나무들이 피워낸 무성한 잎은 겨울에 내린 단 한번의 서리에 시들고 만다. 서리 같은 존재가 선(禪)이다. 선림(禪林)의 난만한 백화도 서리 같은 존재다. 물론 서리처럼 차가운 것만은 아니다. ‘중생의 고통과 눈물’을 가슴에 안고자 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도감스님의 설명이 계속됐다. “수행기간의 짧고 길고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발심이 중요합니다. 출가와 가출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집을 나오는 것은 똑 같은데. 출가에는 자리이타(自利利他)하겠다는 발심이 있고, 가출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발심의 유무가 출가자와 유랑자들을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발심에 살고, 발심에 죽는 사람들이 선원 납자들입니다. 출가한 사람이 절에서 설겆이를 해도 행복한 것은 발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좌복 위에 앉아 있으면 답답할 때가 없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좌복 위에 앉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착(着)이 떨어지기 때문에”라는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입승 종범스님에게도 여러 질문을 드렸다. 스님은 종내 답하지 않았다. 말은 쓸데없고, 수행이 필요한 것이라고 경책하는 것 같았다.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선원을 빠져 나왔다. 사실 ‘대도(大道)를 깨닫는 고정된 문’(大道無門)은 없다. 그러나 ‘그 문은 어떤 길에도 통한다(千差有路)’. 문 없는 이 관문을 통과하기는 진실로 쉽지 않지만, 통과하기만 하면 천지를 활보할 수 있다. 문 없는 마음의 관문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문수선원 스님들은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선원에 들어올 때의 날카롭던 칼바람 소리도, 콸콸거리던 물소리도 어느 새 잠잠해져 있었다. ‘외면의 소리’가 선원에 있는 동안 이미 정제되고 정리된 탓이리라.
문수선원은 2003년 하안거때 개원
명성스님 원력의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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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2003년 하안거때부터 개원한 문수선원 전경. |
80여 평 되는 운문사 문수선원(文殊禪院)은 지난 2003년 하안거 때 개원됐다. 문수선원 개원은 운문사 승가대학장 명성스님의 원력의 결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명성스님은 수년간의 정성을 선원 개원에 쏟았고, 문수선원이란 이름도 직접 지었다.
문수보살은 문수사리(文殊師利).만수시리(滿殊尸利) 또는 만수실리(曼殊室利) 등으로 음역되는데, 문수와 만수는 묘(妙), 사리.실리는 두(頭).덕(德).길상(吉祥) 등의 뜻. 때문에 문수보살은 항상 반야 지혜의 권화(權化)처럼 표현되어 왔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협시보살(脇侍菩薩)로, 보현보살(普賢菩薩)과 더불어 삼존불(三尊佛)의 일원이 되어 있다.
보현보살이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활동한다면, 문수보살은 지혜의 좌표가 된다. 따라서 ‘중생들을 널리 제도할 문수보살의 지혜를 배우고 닦는 곳’이 문수선원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운문사 승가대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교의 바다’(敎海)라면 문수선원은 부처님의 마음을 파악하기 위해 수행하는 ‘선의 숲’(禪林)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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