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의병전쟁사,의성의 독립운동사
김상종 의병장
가계
호(號)는 운산.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생원 김수익(金壽翼)이고, 어머니는 한산인 이덕(李悳)의 딸이다. 부인은 도사 이만기(李晩起)의 딸인 진성 이씨(眞城李氏)이다. 김회종은 동생이다.
활동 사항
김상종[1847~1909]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출신으로, 안동 의병 주역인 정재학파 문인인 김흥락과 김도화의 문인이었다. 김상종은 당시 점곡면 서변리 사촌에 세거하고 있던 선(先)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의성에서 을미의병 봉기를 주도한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김상종의 동생 김회종이 당시의 사정을 기록하여 남긴 『병신창의실록(丙申倡義實錄)』에는 의성 의진의 진용으로 의병장 김상종, 중군장 권대직, 선봉장 김수담, 우익장 이희정, 소모장 김수욱, 관향장 김수협으로 편성하였다. 김수담·김수욱·김수협은 그의 족숙(族叔)들이었다. 김상종 의진은 거의한지 8일 만에 구봉산(九峯山)에서 첫 전투를 치렀으나 역부족으로 밀려 황산에 진을 쳤다. 그러나 미처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5월 10일 관군의 습격을 받아 김수담·김수협 등 2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후 김상종 의진은 청송으로 들어갔고, 이 때 청송 의진, 이천 의진과 연합 의진을 구축하였다. 이 무렵에 의성 출신이면서 이천에서 거의하였던 김하락(金河洛)은 조승학(趙承學)·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함께 이천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는데, 관군에게 몰려서 제천·단양·안동 등지로 의진을 옮겨 투쟁을 하다가 의성에 이르러 김상종 의진에 합류한 것이다.
그즈음 의성 주변에서는 안동부 의병진의 김도화(金道和), 영양(英陽)의 김도현(金道鉉), 진보의 허훈(許薰), 선성(宣城)의 이인화(李仁和), 그리고 김상종 의진이 서로 호응하여 유기적인 전략을 전개할 것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의성 의진·이천 의진·청송 의진의 연합 부대는 1896년 5월 14일 청송 감은리(甘隱里)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여 10여 명을 사살하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의성 의진·이천 의진은 청송 의진과 헤어지고 의성의 금성산 수정사에 진을 쳤다가 관군과 비봉산에서 전투를 치렀다. 5월 25~26일 비봉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김상종은 의진의 해산을 명하였다. 김상종과 일행은 관군의 추적을 피하여 경상도 일대를 전전하다가 9월 6일 의성으로 돌아 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그 내용이 알려지게 되자 영남 지방에서 사림(士林)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 운동을 재개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 때에 중심 인물은 전기 의병장들이 주축이 되었다. 특히 김상종과 김도현이 앞장서서 주선하고 선성(宣城)에 모여서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서울에 올라가 대궐 문 앞에 나가 울부짖으며 상소하여 결사투쟁하기로’ 결의하고 길을 떠났다. 이 때 경상도의 의기 있는 유림들은 서울에서 상소 항쟁함과 아울러 각 도에 격고문(檄告文)을 돌리고, 서양 각국에 포고하는 글을 발송하며, 역적들의 처단과 매국 조약의 무효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신기동 내곡 유좌(酉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병신창의실록(丙申倡義實錄)』
- 『독립운동사』1(국가 보훈처, 1971)
- 『독립운동사 자료집』1(국가 보훈처, 1971)
-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 공훈록』1(국가 보훈처, 1986)
- 『항일 독립운동 의성군 자료집』(의성 문화원, 1992)
- 김희곤 외, 『의성의 독립운동사』(의성군, 2002)
- 『운산소운 이체창의록(云山小雲 二棣倡義錄)』(김태덕, 2004)
- 김원석, 「『병신창의실록(丙申倡義實錄)』을 통해 본 의성 의병」(『안동 사학』 3, 안동대 사학회, 1998)
[네이버 지식백과] 김상종 [金象鍾]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의성의병사-의성의 독립운동사 책이다.의성군에서 펴냈는데 김희곤 교수외 편저자이다.아마도 의병부분은 대구 대경대의 권대웅 교수께서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의성 의병항쟁사를 제대로 알려면 청송의 심성지沈誠之 선생이 쓴 적원일기赤猿日記와 예천 의병장 박주대할배(나의 고조부다.미산고택,저상일월=검색해보시라)의 나암수록羅巖隨錄(1980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책이다)까지 봐야 한다.
거기에 경암 서상렬 호좌의진 영남소토사의 자료(춘수당일기와 의암 류인석 호좌의병장 자료등),원용정 선생이 쓴 '종의록','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기',안동의 이긍연이 쓴 '을미일기'도 의성의 의병항쟁사를 연구하자면 꼭 봐야한다.
김상종 의병장의 아우인 김회종 선생이 쓴 '병신창의실록'과 중군장 권대직 선생의 '망금성백오십운'도 물론 봐야한다
그리고 중요한 '해운당 김하락'의 '김하락 진중일기' 와 '조성학 정토일록'이 있다.김하락 진중일기는 80년대에 진작에 발굴되어 번역정리되어 학계에 알려졌지만 이상하게도 성남과 이천,의성과 경주에는 문화원이나 향교,향토사 하는 분들이 전혀모르고 있다.그래서 안타깝게도 기념비하나 못세웠다.후손이 피폐해져서 그렇다면 국가나 지자체가 해야하는데 그것도 아니면, 지역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본다.
아직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조성학 장군의 정토일록이 제대로 알려지면 의성군으로서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다른 모든 자료가 원본이 다른 곳에 있지만, 의성에 의병기념관이 들어선다면 조성학 의병장의 자료는 원본을 전시할 수 있다.후손의 바램이지만 의성인들의 관심없이는 불가능하다.조성학 의병장은 김하락 장군의 이종제姨從弟로서 이천수창의소와 남한산성전투를 함께했고...영남으로 내려와서도 함께한 분이다.
일율적 잣대로는 뭣하지만,의성의 독립운동사 책에서 색인을 찾아보니 김상종 의병장은 23번 등장하고 독립장을 받으셨고,김하락 의병장은 21번 등장하고 대통령장을 받으셧다.조성학은 7번 등장한다(아직까지 일기인 '정토일록'이 알려지지 않은 때문인 것 같다).
(서훈등급: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대통령표창)
안동부 주변 지역의 의병 진영
예천의병 부장은 '장문근'인데...20년째 오류다...원전은 '운강선생창의사실기'이다.
(장문근 검색)
첫댓글 의성의진의 전투 상황을 좀더 확인이 필요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징비록 특별전'을 보러 서울가는 중입니다!
의성의병전쟁사를 향토사연구회,학예사,군청,문화원,지역주민들이 답사하셔야 됩니다!
병신의병의기록으로는 병신창의신록이유일한데 여기에보면소모장이김수욱이아닌서상렬로기록되여있는 데?아시는 분
의성의진(김상종) 소모장은 김수욱 선생이 맞고요....서상렬 선생은 '호좌의진 영남소토사(영남소모사)'입니다.
@범털과개털(미산고택 박갑로) 호좌는 서상렬선생의호입니까?
소모장은 김수욱이 맞습니다.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은 것으로 나와있습니다.
우리나라훈장받았다고 다?
그기록이어디에있습니까알려주세요
의성의진 소모장 김수욱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훈장 서훈자로 등록 되어있습니다.
@범털과개털(미산고택 박갑로) 그걸모르는것은아닌데 서훈받는데 근거가되는 기록을찾지못해서입니다
@하늘 註·조선환여승람(보문사, 1934) 27면 ·문소의 얼(의성군 교육청, 1979) 56∼58면 ·義얼의 메아리(박인걸, 1983) 58면 ·의성군지(의성군지편찬위원회, 1987) 106면 ·의원(의성항일독립운동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 1991) 13·27면 ·항일독립운동의성군자료집(의성문화원, 1992) 483면
@하늘 위 글씨가 작으면...새로 쓴 글을 보십시요....큰글씨로 올려 놨습니다.
병신의병기록은 병신창의신록이유일합니다 그후기록된것은 신록과 연관이없는한이야기에불과한것아닙니까 이야기는 계속만들어질수있습니다 우리는 근거있는 신록을근거로관련인사의문집등찾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