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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經 五家解
佛 經
부처의 가르침 또는 佛敎의 가르침을 收錄한 冊에 대한 總稱.
佛敎에서 말하는 경(經) 또는 經典은 釋迦牟尼가 弟子에게 말한 것을 직접 記錄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現在 傳하는 經典은 釋迦牟尼의 言行에서 發端되었다고는 하나,
오랜 전승(傳承) 뒤에 기록되었으므로 後代의 要素도 들어 있다.
古代 印度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 또는 학술의 기본설을 간추린 짧은 문장을 수트라(sutra)
라고 했는데, 佛敎도 이를 본받아 釋迦牟尼의 가르침을 문장으로 정리한 것을 수트라라고
하였다. 수트라의 원뜻은 실〔絲〕이며 강요서(綱要書)라는 뜻으로 전의(轉義)되었고,
수다라(修多羅)라고 음사(音寫)하며, 經·經典·계경(契經)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佛敎의 성전(聖典)이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번역자는 수트라의 역어(譯語)로 經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佛敎가 전래하기 이전의 중국에서는 고대의 성인(聖人)들의 말을 기록한
것을 經이라고 하였다. 經의 원뜻은 직물의 날실〔經絲〕인데, 날실이 根本이고 여기에
씨실〔緯絲〕을 짜 넣음으로써 직물이 만들어지므로, 근본의 의(義)를 가르치는 책을 일컬어
經이라고 하였다. 또 經은 영원한 도(道)를 나타낸다는 뜻도 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수트라의
번역어로 經을 붙인 번역자의 意識에는 聖人의 가르침을 적은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좁은 뜻의 불경은 부처가 가르친 교의(敎義)를 적은 책을 말하나, 드물게는 부처의 弟子가
말한 교의를 담은 책도 포함된다. 넓은 뜻의 불경은, 교단의 생활규율을 규정·해석하고,
규율을 위반한 경우의 처리 方法을 적은 율(律, 또는 律典)과 후대의 佛敎徒가 經典에 관한
해석, 사색심의 전개를 하여 지은 논문인 논(論, 또는 論書)에다가 고승들이 이러한 經·律·論의
3장(三藏)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을 붙인 저술들까지 모두 포함한 佛敎의 성전·전적
(典籍) 전부를 가리킨다. 즉 佛敎의 전적을 집성하는 것이라 하여 대장경(大藏經)이라 하고,
모든 전적을 망라해 있다 해서 일체경(一切境)이라고 하면,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Ⅰ. 불경의 十二分敎
부처의 가르침을 그 내용이나 서술의 형식에 따라 12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십이부경(十二部經)이라고도 한다. 이 분류법은 불경의 最初 편찬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다.
① 經: 계경이라고도 한다. 산문(散文)에 의하여 설교된 가르침의 요강, 즉 사상적으로
그 뜻을 완전히 갖춘 경문(經文)을 말한다. 수트라(修多羅).
② 중송(重頌): 응송(應頌)이라고도 한다. 經(수트라)을 게송(偈頌)으로써 재설(再說)한 것으로
云을 붙이지 않은 시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산문으로 된 본문의 뜻을 거듭 설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게야(geya, 祗夜).
③ 수기(授記): 기별(記別)이라고도 한다. 부처가 弟子의 질문에 대해서나, 그 未來에 대해서
기설(記說)한 것이다. 즉 부처가 弟子들에게 다음 세상에 어떤 환경에서 成佛하리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예언한 경문의 부분이다. 뱌카라나(vyakarana, 和伽羅那).
④ 고기송(孤起頌): 송(頌)·풍송(諷頌)이라고도 한다. 가르침을 게송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즉 본문과는 관계없이 노래한 운문을 말한다. 가타(gatha, 伽陀).
⑤ 무문자설(無問自說): 자설(自說)이라고도 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질문을 기다리지 않고,
부처가 우희(憂喜)의 감흥에 의해서 스스로 說法한 것, 즉 부처가 체험한 감격을 누구의 질문에
依하지 않고 스스로 說한 經典을 말한다. 우다나(udana, 優陀那).
⑥ 인연(因緣): 연기(緣起)라고도 한다. 經이나 율이 說法된 연유를 밝힌 것이다. 즉 어떤
經典을 說法하게 된 사정이나 동기 等을 서술한 부분을 말한다. 니다나(nidana, 尼陀那).
⑦ 비유(譬喩): 부처 외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과거세(過去世) 이야기이다. 즉 經典 가운데서
비유나 우언(寓言)으로 교리를 해석하고 설명한 부분을 말한다. 아바다나(avadana, 阿波陀那).
⑧ 여시어(如是語): <이와 같이 세존(世尊)은 說法하였다>라고 시작되는 부분, 즉 經典의
첫머리의 <여시아문(如是我聞)>, 곧 <이와같이 내가 들었노라>라고 적혀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말 속에는 부처가 이와 같이 說法한 것이므로 그대로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다만 過去世 이야기의 한 가지로 보는 전승도 있음)·
이티브리타카(itivr·ttaka, 伊帝目多伽).
⑨ 본생(本生): 부처의 전생 이야기, 즉 부처가 전생에 修行하였던 이야기를 적은 경문을
말한다. 자타카(jataka, 潭陀伽).
⑩ 방광(方廣): 방등(方等)이라고도 한다. 심원한 법의(法義)를 넓게 說法한 것이다.
즉 그 의미를 논리적으로 더 깊고 넓게 확대, 심화시켜 가는 철학적 내용의 성격을 띤
경문을 말한다. 바이풀랴(vaipulya, 昆佛略).
⑪ 미증유법(未曾有法):희법(稀法)이라고도 한다. 부처나 불弟子들의 공덕이 희유(稀有)·최승
(最勝)인 것을 說法한 것, 즉 經典 가운데 不可思議한 일을 말한 부분이다.
⑫ 논의(論議):부처의 가르침을 논의·解說한 것, 즉 해석하고 논술한 연구논문 형식의 경문을
말하는데, 부처가 논의하고 問答하여 온갖 법의 내용을 명백히 밝힌 부분이다.
九分敎(또는 九部經)는 이상에서 ⑥ ⑦ ⑫를 제외한 것, 또는 ⑥ 대신에 ⑤ 나 ⑨ 나 ⑪을
제외하는 것 等 몇 가지의 전승이 있다.
Ⅱ. 한 經典의 일반적 구성형식
三分法에 따르고 있는데, 3분과경(分科經)·1경(經) 3단(段)이라고도 한다. 經典이나 論書를
해석함에 있어서 내용에 따라 문단(文段)을 짓는 것을 과문(科文)·과장(科章)·과절(科節)·과단
(科段)·분과(分科) 等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 經典의 일반적인 구성 형식은 서분(序分)·정종분
(正宗分)·유통분(流通分)의 3단으로 되어 있는 3分法을 따르고 있다.
① 序分은 經 전체의 취지를 말하는 총서(總序)이다. 즉 經의 첫머리의 <이와 같이 내가
들었노라> 以下의 그 經을 說法한 시간과 장소, 설법의 대상 等 모든 주변 여건을 서술한
부분이다.
② 正宗分은 本論이 되는 부분이다. 즉 부처의 설법을 서술한 중심부분을 말한다.
③ 流通分은 경의 공덕을 說法하고 널리 유포시킬 것을 권하는 결론부분이다. 즉 그 설법을
들은 大衆의 감격이나 계발의 정도, 그리고 앞으로 이 經을 읽는 사람들의 利益이나 공덕,
그리고 그 경의 이름 따위를 기록한 끝 부분을 말한다.
經典을 3分하는 것은 인도에서는 《불지경론(佛地經論)》 권1에서 설명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진(晉)나라의 도안(道安)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序分·正宗分·流通分 모두 各各 그 일에서
더욱 상세히 나누어졌는데, 중국에서는 과문의 發達이 불전의 해석에 효과가 컸지만,
반면에 너무 번쇄해짐으로써 폐해도 컸다. 장편의 經典은 반드시 이 3分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序分과 流通分이 分明히 서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편의 經典은 正宗分만
있는 것도 있고, 序分과 流通分이 매우 간단한 것도 있다.
Ⅲ. 불경의 成立과 종류
①경장(經藏) : 부처의 교의(敎義)를 집성한 것이다. 佛敎의 經典이 最初로 成立된 것은
釋迦牟尼의 涅槃 직후에 열린 제1결집(結集)에서였다. 가섭(迦葉)이 초집하고 우바리(優婆離)가
율(律)을, 아난타(阿難陀)가 교법을 편집했는데, 500여 명의 비구(比丘)가 모였으므로 五百結集
이라고도 한다. 제2결집은 不滅(釋迦牟尼의 涅槃) 100年 後 바이샬리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명확하지 않으며, 칠백결집이라고도 한다. 제3結集은 不滅 200年 後 아소카왕
18年에 이루어졌으며, 천인결집(千人結集)이라고도 하는데 이때 비로소 文字化되었다.
제4결집은 2세기 무렵 카니슈카왕 아래 파르시바·바수미트라를 중심으로 3장(藏)을 편집했다.
②율장(律藏) : 부처가 제정한 교단생활의 규칙이며 계본(戒本)·건도부·경분별(經分別)·부수
(附隨)로 이루어진다. 율장이 最初로 成立된 것은 釋迦牟尼의 涅槃 직후 제1結集 때의 일이며,
이때 結集된 율이 그 後 점차 정리, 조직되어 오늘에 전해진 율장이 되었다.
③논장(論藏) : 弟子들이 경설(經說)을 조직화하고 대계화(大系化)한 논의를 說하는 것으로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아비담장(阿毘曇藏)이라고도 한다. 초기의 것으로는 팔리어(語)의
칠론서(七論書), 한역(漢譯)의 육족論(六足論)·발지論(發智論) 等을 들 수 있다.
Ⅳ. 중국의 역경(譯經)
인도에서 成立되고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에 들어온 佛敎經典이 중국인에게 알기 쉽게
처음으로 한역(漢譯)된 것은, 중국에서 最初로 佛敎를 믿었던 후한(後漢) 때의 일이었다.
안식국(安息國)에서 환제(桓帝) 때(148年 무렵) 뤄양〔洛陽〕에 온 안세고(安世高)는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아비담오법경(阿毘曇五法經)》 等 선관(禪觀)과 小乘佛敎의 經典을
번역하였다. 안세고와 같은 무렵에 뤄양에 온 지루가참(支婁迦懺)도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等의 大乘經典을 번역하였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때는 담가가라(曇柯迦羅)·강승개(康僧鎧) 等의
역경승이 들어왔고, 오(吳)나라에서 활동한 역경승으로는 지겸(支謙)과 강승회(康僧會)가 있다.
서진(西晉)의 축법호(竺法護)는 역경부수에서 단연 앞섰는데, 《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
《정법화경(正法華經)》 等 若 150부 300권을 번역하였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때에는
중국佛敎의 기반을 쌓은 도안이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신뢰를 얻어, 불전의 교정과 주석·
경록의 편찬 및 의궤(儀軌)의 제정 等에서 크게 활동하였다. 중국의 佛敎와 역경의 역사를
성장과 발전의 시대로 바꾼 후진(後奏)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은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等의 大乘經典과, 《중론(中論)》《십이문론(十二門論)》 等의
논서·율전을 번역했는데, 그것들은 중국佛敎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唐)나라 때의 가장 유명한
역경승 현장은 인도에 갔다가 돌아올 때 산스크리트로 된 불서를 많이 가지고 돌아왔으며,
그 自身도 76부 1347권의 經典을 번역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성유식論(成唯識論)》에 의해서
成立된 것이 법상종(法相宗)이다.
Ⅴ. 한국의 佛敎 經典
중국의 구마라습과 현장의 번역은 특히 한국의 佛敎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그 역경서는
거의가 바로 한국으로 전해졌다. 한국·중국·일본의 佛敎는 다 같이 한역(漢譯) 대장경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한국의 佛敎는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佛敎로 발전하였다.
고구려에는 372年(소수림왕 2)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가 佛敎를 전래하면서 불상과 같이
불경을 전하였으며, 395年에는 중국의 전도승 담시(曇始)가 와서 經·律 數十卷을 전했다고
한다. 백제의 佛敎는 384年에 동진(東晉)으로부터 온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전래함
으로써 시작되었고, 그 後 526年에 겸익(謙益)이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5분율(五分律)》을
전함으로써 율전 연구가 본격화하였다. 신라의 佛敎는 5세기 前半(19대 눌지왕 때) 묵호자
(墨胡子, 또는 阿道)가 고구려로부터 전래한 것이 처음이며, 527年(法興王 14) 국가적으로
공인되었는데, 통일 이전의 신라에 佛敎經典이 많이 들어온 것은 眞興王 때에 중국에 갔던
유학승들이 돌아오면서였다. 통일신라 전기(前期)는 교학연구가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였는데,
원효(元曉)·원측(圓測)·의상(義湘) 等의 많은 고승들이 經典 연구를 본격화함으로써 어느 때
보다도 經典 流通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경덕왕 이후에는 經典 연구가 차차 둔화되어
《華嚴經》 《法華經》 等 外에는 널리 유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신라 말 선문구산(禪門九山) 成立 이후 經典을 연구하는 교종은 크게 위축되었다.
고려 때에 와서 佛敎는 국가종교로서 보호·정비됨으로써 한국의 佛敎 역사를 통하여 가장 큰
變化를 일으켰다. 經典의 정비도 진전되어 《고려대장경》의 간행이 2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현종∼문종 때에 간행된 《초조(初彫) 대장경》과 뒤이어 간행된 의천(義天)의
《속장경(續藏經)》이다. 두번째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두고 완성시킨 《재조(再彫) 대장경
(1236∼51)》이다.
현재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는 이 《고려대장경》의 판목은 엄밀한 교정(校訂)으로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며 95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조의 배불정책으로
불경 연구는 활발하지 못했으나, 《金剛經》 《楞嚴經》 《華嚴經》 等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다.
法 脈
불교 선종(禪宗)의 심법전승(心法傳承) 계보.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 혈통을 밝히고 있듯이,
선종에서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통(法統)을 중요하게 취급
했는데, 이와 같은 법통의 전승을 법맥이라고 하였다. 인도의 경우 법맥은 석가모니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누구의 법맥을 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됨에 따라 과거
칠불설(過去七佛說)과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생겼다. 과거칠불은 지난 세상에 출현한
일곱부처로서, 비바시불(毘婆尸佛)을 시작으로 제2 시기불(尸棄佛), 제3 비사부불(毘舍浮佛),
제4 구류손불(俱留孫佛), 제5 구나함모니불(俱那含牟尼佛), 제6 가섭불(迦葉佛),
제7 석가모니불로서, 이들의 법맥이 차례로 이어져 석가모니불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진귀조사설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닫고 7일 동안 보임(保任)을 했는데,
그때까지 석가모니는 여래선지(如來禪旨)를 중독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7일이 지난 후
석가모니는 우연히 총림방(叢林房)을 지나다가 한 성자를 만났는데, 성자는 석가모니를
기다린 지 오래임을 밝히고 과거칠불 중 여섯번째인 가섭불로부터 위촉받은 여래밀인(如來
密印)을 전해주고, 조사선지(祖師禪旨)를 깨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진귀조사설은
중국의 선종에 널리 유포되었고, 한국에서는 입당구법(入唐求法)을 하고 최초로 선종을 들여온
범일(梵日)에 의해 전해졌다. 석가모니 이후로는 인도에서 28祖가 차례로 배출되었다.
그 법맥은 석가모니불 -① 마하가섭(摩訶迦葉) -② 아난(阿難)- ③ 상나화수(商那和修) -
④ 우바국다(優婆麴多) -⑤ 제다가(提多迦) -⑥ 미차가(彌遮迦) -⑦ 바수밀(婆須密) -⑧ 불타난제
(佛陀難提) -⑨ 복타밀다(伏馱密多) -⑩ 협(脇) -⑪ 부나야사(富那夜奢) -⑫ 마명(馬鳴) -⑬ 가비
마라(迦毗摩羅) -⑭ 용수(龍樹) -⑮ 가나제바(迦那提婆) -???? 라후라다(羅候羅多) -???? 승가난제
(僧伽難提) -???? 가야사다(伽耶舍多) -???? 구마라다(鳩摩羅多) -???? 사야다(도夜多) -????
바수반두(婆修盤頭) -???? 마노라(摩拏羅) -???? 학륵나(鶴勒那) -???? 사자(師子) -???? 바사사다
(婆舍斯多) -???? 불여밀다(不如密多) -???? 반야다라(般若多羅) -???? 보리달마(菩提達磨)로
이어진다.
이러한 이십팔조설(二十八祖說)은 북위시대(北魏時代)에 길가야(吉迦夜)와 담요(曇曜)가 함께
찬술한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에 의거한 것이며, 후대에 불조법통(佛祖法統)으로 확정
되었다. 이와 같은 인도의 선종법맥은 제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중국에 와서 선법(禪法)을
전함에 따라 전승되었는데, 중국에서도 인도와 같이 초기에는 한 제자에게만 밀인(密印)을
전해 제6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보리달마(菩提達磨)를 제1조로 한 중국의 법맥은 제2조 혜가(慧可), 제3조 승찬(僧璨), 제4조
도신(道信), 제5조 홍인(弘忍), 제6조 혜능(慧能)에까지 이어진 뒤, 혜능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선종이 널리 전승되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 선종의 법맥 대부분이 제6조 혜능의
법맥을 잇고 있다. 단 신라의 법랑(法朗)은 제4조 도신의 법맥을 이었고,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는 희양산문(曦陽山門)만이 일부 북종선(北宗禪)에 속하는 신수(神秀)의 법맥을 이어받고
있다. 혜능의 남종선은 남악(南嶽)과 청원(靑原)에게 이어졌고, 남악의 법은 마조(馬祖)에게로
이어졌다.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은 신라의 도의(道義)가 마조의 제자인 지장(智藏)의
법맥을 이어서 개산(開山)했으며, 동리산문(桐裏山門)은 혜철(惠哲)이 지장의 법맥을 이어
개산한 문파이다. 또 수미산문(須彌山門)은 청원-석두(石頭)-운암(雲巖)-운거(雲居)로 이어지는
중국 조동종(曹洞宗)의 법맥을 신라의 이엄(利嚴)이 전승, 개산한 종파이다.
한국의 법맥에 있어서 논쟁이 되는 것은 중국 임제종(臨濟宗)의 법맥을 누가 이었는가 하는
문제인데, 도안(道安)의 《불조종파도(佛祖宗派圖)》에 의하면, 중국 임제종의 개조 의현(義玄)의
18대 법손인 석옥(石屋)은 고려의 보우(普愚)에게 법맥을 전했고, 보우의 법맥은 혼수(混修)-
각운(覺雲)-정심(正心)-지엄(智嚴)-영관(靈觀)-휴정(休靜)의 순으로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학자들 중에는 혼수가 나옹의 법맥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남원승련사기(南原勝蓮寺記)》에 의하면, 각운은 연온의 법맥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종익(李鍾益)의 주장인데, 연온은 복구(復丘)의 법맥을 이었으므로 한국의 정통 선맥은
지눌(知訥)의 수선사(修禪社) 법맥을 따라야 하며,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조차 잘못이라고 보고 있다. 즉 중국의 임제종은 흥화(興化)-남원(南院)-풍혈(風穴)-수산(首山)-
분양(汾陽)-자명(慈明)-양기(楊岐)-백운(白雲)-오조(五祖)-원오(圓悟)-대혜(大慧)로 이어지고,
대혜의 법맥을 사상적으로 전수한 고려의 지눌이 수선사를 만들었으며, 그의 법맥이 혜심
(慧諶)-몽여(夢女)-혼원(混元)-천영(天英)-정열(晶悅)-복구-연온-각운-정심-지엄-영관-휴정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의 법맥은 영관의 법맥을 이은 청허문(淸虛門)과 부휴문(浮休門)이 양대 산맥을
이루었고, 이 두 문파에서 여러 문파가 생겨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법맥은 선법의 진수를
제자에게 전하는 것으로서, 스승은 법맥을 전할 참된 제자를 구하여야만 그 임무를 다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總 論
漆夜의 昏夢이 한 태양에 의하여 밝아지듯 우리 부처님의 위대한 깨달음이 萬古의 冥暗을
하루아침에 밝혔다. 그러나 귀 먹은 자 듣지 못하고 눈먼 자 보지 못하니 슬프다. 菩提道場의
一大光明이 봄눈, 아지랑이와 무엇이 다르랴! 梵天의 勸請에 의하여 般若의 배를 끌고 生死의
바다를 건네주는 한 사공이 되었으나 타는 이가 없으므로 먼저는 양수레, 사슴수레로 유혹
하고 다음은 소수레로 유혹하다가 마침내 큰 흰 소의 수레를 꼭 같이 끌게 하시니 마치 몸
안에 無價의 寶珠를 가진 거지가 無價寶를 깨닫지 못함으로서 천지를 유랑하다가 마침내
어진 아버지의 智慧로운 方便에 의하여 그것을 깨닫고 三界의 주인이 된 것과 같다.
金剛經1) 은 梵名 Vaira-Cchedika로서 敎判上으로 보면 六百部 般若經 四處十六會 가운데
第九會(能斷金剛分) 五七七卷에 해당되고 敎理上으로 보면 眞空無我의 空思想에 해당된다.
*1) 금강경,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經, 金剛般若波羅蜜經) : 범어 Vajracchedika prajnaparamita.
반야경전의 하나. 산스크리트본(本)·티베트역(譯)·한역(漢譯)이 현존한다. 한역은 여섯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1권, 5세기 초)》이 널리 쓰인다.
약칭 《금강경》 또는 《금강반야경》이라 한다. 본경(本經)은 다른 반야경전에 앞서 쓰여졌다는
사실과, 뒤늦게 다른 반야경전을 요약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이 있다. 내용은 기원정사(祇園
精舍)에서 부처와 수보리(須菩提;Subhuti)의 대화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반야의 근본사상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본경에서는 <공(空)>이라는 술어는 사용되고 있지 않으나, 그 사상은 <공(空)>사상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원시불교 이래 추구되어 온 갖가지 종교적 가치가 고정화(固定化)되고 집착됨을
부정하고, 부정을 통해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종교적 가치를 실현하려 하고 있다. 인도의 유가
행파(瑜伽行派)와 중국의 선종에 의해 중시되었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의 불교유입 초기에 전래
되었으며, 고려 중기 보조국사(普照國師)에 의하여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경에 대한
주석서를 쓴 사람은 800여 명에 이른다고 하며, 한국에는 14종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⑴ 1363년(공민왕 12)에 간행된 고려 때의 목판본. 전라남도 남원에서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
설사덕(薛師德)과 판관 김영기(金英起)의 주관 아래 신지(信之)가 글을 쓰고 법계(法戒)가
그림을 그렸으며 신명(信明)과 법공(法空)이 판각했다. 이 경은 상단에 변상도(變相圖), 하단에
본문을 새긴 것이 특징인데, 변상도는 각품(各品)의 핵심이 되는 주제를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 판각한 것이다. 그리고 책끝에는 호법선신(護法善神)을 판각하여 장엄하게 마무리
하였다. 책머리의 진언(眞言)·계청보살문(啓請菩薩文) 등이 결락되고 표지와 배접을 거칠게
하였으나 발원문(發願文)에 이어 본경의 제1분부터 제32분까지 완전하게 원형을 지니고 있다.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 소장. 1책. 목판본. 보물 제 696호.
⑵ 고려시대의 목판본으로서 불교학 연구에 기본이 되는 금강경(金剛經).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역한 《금강경》 본문에 당(唐)나라 혜능(慧能)의 구결(口訣)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이 판본의
본문은 권자본(卷子本)의 형식으로 판심(版心) 없이 간행한 것이나, 책끝의 발문(跋文) 1장만은
광곽(匡郭)이 크고 판심이 있는 별도 체제의 판형이다. 책머리에는 금강경계청(金剛經啓請)·
청사보살(請四菩薩)·발원문(發願文)이 있고, 이어 금강경의 본문 및 쌍항의 협주, 그 끝에 반야
진언(般若眞言)·금강심진언(金剛心眞言)·보궐진언(補闕眞言)·영험찬(靈驗讚)이 있다. 책 끝의
발문에 의하면 1387년(우왕 13) 유구와 강인부(姜仁富)가 왕비에게 전각유통(傳刻流通)을
계청하여 필공(畢功)한 것인데, 본문은 번각하고 발문만 각지(角之)가 새로 써서 새겨 붙인
것이다. 더구나 글자에 나뭇결이 생겨 인쇄가 깨꿋하지 못하고 끝부분에 마멸이 심한 점
등으로 보아 이 판본은 14세기 전반에 새겨진 판에서 조선 후기에 후쇄(後刷)된 것으로
여겨진다.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1책. 목판본. 보물 제721호.
⑶ 조선시대에 간행된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의 국역본. 이 책은 《금강경》의 주석서인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중 당(唐)나라 종밀(宗密)과 종경(宗鏡), 조선 초기의 고승인
기화(己和) 등 3인의 주석을 뽑아서 수록한 《금강경삼가해》에 구결(口訣)을 붙이고 국역한
것이다. 책끝의 한계희(韓繼禧)와 강희맹(姜希孟)의 발(跋)에 의하면, 세종의 명을 받아
문종·세조 및 자성대비(慈聖大妃;세조의 비)·성종을 거쳐 35년만인 1482년(성종 13)에
정문대자는 정축자(丁丑字), 중·소자는 을해자(乙亥字)를 사용하여 300부 찍어낸 것이다.
이 《금강경삼가해》 국역본은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권 2∼5의 낙질본과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권1의 낙장본, 성암문고(誠庵文庫) 소장권3·4의 복본이 알려졌으나,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소장 권1(보물 제772호)의 완본이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완질을 갖추게 되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 왕실의 계승사업으로 이루어진 점과 더불어 한글 표기형식의 혼용으로 한글연구에
자료가 된다. 권1은 보물 제772호, 권 2∼5는 보물 제773호. 서울대학교도서관 소장.
⑷ 1357년에 간행된 고려시대의 목판본. 전주(全州)에 살던 김저(金貯)가 덕운사(德雲寺)의
지선(志禪)과 조환(祖桓)에게 부탁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책머리에 변상도(變相圖)가 있으며,
보공양진언(普供養眞言)·발원문(發願文)·운하범(云何梵)과 경문이 실려 있다. 그 밖에 보궐진언
(補闕眞言)·반야심경(般若心經)·묘법연화경심(妙法蓮華經心)·사제법(四諦法)·십이인연법(十二因緣
法)·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 등의 내용이 있다. 자체(字體)는 송설체(松雪體)이며, 경문과 진언·
발원문은 대자(大字)로, 반야심경 등은 중자(中字)로, 주석·해의(解義)는 소자(小字)로 새겼다.
책 끝에는 간행기록이 있는데, 권자본(卷子本)의 판식(板式)으로 간행된 것을 선장(線裝)으로
했다가 다시 해책하고 각 장(各張)을 이어붙여 권자본으로 하였다. 고려시대 불교경전 가운데
특이한 형식의 판본이며, 특히 신앙의례용으로 간행된 《금강경》으로서 의의를 가진다.
김종규(金宗圭) 소장. 1책. 목판본. 보물 제 877호.
⑸ 1387년(우왕 13)에 간행된 고려시대 목판본. 천로(川老)가 주해한 것으로 표지는 감색이며
금니(金泥)로 <금강경천로해(金剛經川老解)>라고 쓴 경명(經名)이 있다. 진원군(晉原君) 유구와
진천군(晉川君) 강인부(姜仁富)가 우왕비(禑王妃)에게 계청(啓請)하여 이색(李穡)이 발문을 짓고
각지(角之)가 필사하였다. 이 판본은 범망경·금강반야바라밀경합본(梵網經·金剛般若波羅蜜經合本,
보물 제919호)과 같은 판본이나, 자구(字句)의 결락이 없고 인쇄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이양재(李亮載) 소장· 1책. 목판본. 보뭍 제9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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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小乘佛敎2)의 有我法執을 하루아침에 打破하고 無所入 無所住 無所得으로서
金剛無垢의 淸淨佛心을 開發하여 大乘의 一性圓通의 道理에 바로 들어가 自利利他 覺行圓滿의
菩薩道를 圓滿히 成就할 수 있도록 敎導한 글이다.
*2) 소승불교(小乘佛敎) : 범어 Hinayana. 사람들을 인도하여 해탈(解脫)을 얻도록 하는 불교
유파(流派). 소승은 열소(劣小)한 수레라는 뜻으로 많은 사람이 함께 타고 피안(彼岸)에 이를 수
있는 큰 수레가 아니라고 한다. 인도의 불교사를 보면, 첫째로 석가모니 재세(在世)의 BC 6∼
BC 5세기의 근본불교와, 둘째, 석가모니 멸후(滅後), 갠지스강 유역에 교단을 넓히고 《아함경
(阿含經)》 등의 원시경전이 성립된 약 2세기 간의 원시불교(여기에는 근본불교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셋째, 아소카 왕의 불교 귀의(歸依)로 불교교단이 급속히 발전 확대됨과 동시에
교단분열이 일어났던 부파(部派)불교, 넷째, BC 2∼BC 1세기경에 대두되기 시작한 대승불교로
대별된다. 대승불교는 부파 중에서 진보적·혁신적이었던 대중부(大衆部) 및 재가신자 집단,
즉 보살중(菩薩衆)이 중심이 되어, 그 당시까지 우세한 세력을 유지하던 전통적·보수적 불교에
대항하였던 종교운동이며, 그때 스스로를 대승(大乘)으로 자칭하고 기성불교를 소승으로
낮추어 불렀다. 따라서 후자가 스스로를 소승으로 자칭하는 일은 없다. 그 기원에서 소승불교
는 원시불교를 포함하여 말하는 경우와 직접 대승운동의 상대방이 되었던 보수적인 모든
부파만을 일컫는 경우의 두 가지 용법이 있다. 부파는 처음 불멸(佛滅) 100여 년 후 상좌부
(上座部)와 대중부의 2파(根本·部)로 나뉘고, 그후 약 1세기 동안에 대중부 계통이 계속하여
그 후 약 1세기 동안에 상좌부 계통이 분열하였다. 이 분열의 사정과 명칭은 제전(諸傳)이
일치하지 않으나, 북전(北傳)의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의 기록에 따르면 [표]와 같다.
이 [표]에서 새로이 성립한 18부파(枝末十八部)를 근본 2부와 합해 ‘소승 20부’라 한다.
그러나 남방소전의 《도사(島史)》에서는 불멸 후 약 100년 동안에 상좌대중부의 근본분열이
있고, 그후 약 100년 동안 대중부 계통의 5부, 상좌부 계통의 11부로 분열하여 도합 18부의
부파를 전하고 있다. 각 부파는 자파의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각각의 입장에서
종래의 성전을 편집 집대성하였는데, 이로써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이 성립되었다. 또한 이에
대한 해석·주석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깊은 이해에 의해 체계화되어 논서가 성립하였다. 이를
아비달마(阿毘達磨)라고 부르며, 논장(論藏)으로 총칭한다. 경·율·논의 3장은 각 부파에 의해
정비되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주로 스리랑카상좌부의 3장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속하는 논장에 지나지 않는다.
부파 중 가장 유력하였던 설일체유부는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에 의해 일체의 법이
실유(實有)라고 주장하며(法體恒有), 그 법은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실재한다(三世實有)고
하였다. 또한 법의 체계를 5위(位) 75법(法)으로 정비하였으며, 동시에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자기 일신의 정진, 덕목의 실천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 수행의 단계를 세분하였을 뿐 아니라
열반(涅槃)을 유여(有餘)·무여(無餘) 열반으로 2분하여 수행의 구극에 도달한 아라한(阿羅漢)도
유여열반에 이를 뿐이라 하였다. 이러한 설일체유부의 번쇄한 교학은 《아비달마대비바사론
(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서 집대성되었다. 비바사는 광해(廣解)의 뜻으로 당시의 학자 또는
학파의 다수의 이견(異見)을 열거하여, 소승불교의 모든 문제를 망라하고 있는 것으로 후에는
불론의 연구·정리가 이 학파의 주된 과제가 되고 있다.
그 외 경량부(經量部)는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설에 대하여 과미무체설(過未無體說)을, 법체
실유설(法體實有說)을 부정하고 가유설(假有說)을 주장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종자설로서
종자는 식물의 종자가 발아의 능력을 내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업력(業力)을 업과
(業果)로 이끄는 힘을 말한다. 우리의 업과를 일으키는 종자가 현세에서 내세까지 멸하지 않고
존속할 때, 이것을 세의식(細意識) 또는 일미온(一味蘊)이라 하며, 이것이 윤회의 주체로 간주
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자·훈습(熏習)은 후세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사상의 원류가 되는 것으로 주목된다.
또한 무루(無漏)의 종자는 범부(凡夫)에게도 내재하며, 이것이 계발되면 불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대중부의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에 통하며, 대승불교의 불성론(佛性論)의 원류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경량부 계통에서 발달한 것이 하리바르만[訶梨跋摩]의 《성실론(成實論)》 및
바수반두[世親:320∼400?]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다. 특히 후자는 그후 인도·
티베트에서도 깊이 연구되었으며, 소승불교의 전형적인 대표작으로 인정되었고, 중국에 전래
되어서는 ‘구사종’이라는 일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경량부는 설일체유부의 설을 비판적으로 수정하여 실유의 범위를 한정하였지만,
대개 상좌부의 실재론적인 법의해석(人無我·法有)과 실천의 자기 중심적 경향[自利]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공격도 완전히 이 두 가지에 집중되어 각각 법무아(法無我)에서
공(空)으로, 이타(利他)에서 자비(慈悲)로 발전하였으며, 보살(菩薩)사상이 형성되었다.
성불(成佛)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이 보살에 대해 소승불교에서는 성문(聲聞:석존의 가르침을
직접 들어 열반에 이르는 성자)과 연각(緣覺:스스로 깨달아 열반에 이르는 성자)이 이상적인
인간상이 되고 있다. 소승불교 중, 상좌부 계통은 스리랑카·미얀마·타이·라오스 등에 전해져
현재에도 민중 속에 확고한 기반을 잡고 있다.
한편 대중부 계통은 후에 대승불교로 발전하여 중국·한국·일본 등 북방에 널리 유포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교철학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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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槪 經은 上下 兩卷으로 區分한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如是我聞= 第一法會因由分)로
부터 [果報도 또한 생각하지 못한다.](果報亦不可思議 =제十六 能淨業障分)까지의 前半은 上卷,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하시기를 (爾是 須菩提 白佛言=제十七 究竟無我分)로부터
끝까지를 下卷으로 친다.
그러나 이 두 卷의 金剛經은 말귀와 글 뜻이 아주 비슷하므로 이에 관하여 僧肇3)는 [前半은
衆生空 後半은 法空을 說했다.]하고 智의4)와 吉藏5)은 [重說重說이라]하여 前半은 前會衆 後半
은 後會衆, 또 前半은 利根 後半은 鈍根을 위하여 설한 것이며, 또 前半은 緣을 다하고 後半은
觀을 다한 것이며, 또 前半은 觀行을 밝히고 後半은 觀圭를 除滅한 것이다.]말하고 있다.
* 3) 승조(僧肇/374~414) : 중국 진(晉)나라의 승려. 산시성[陝西省] 장안[長安:西安] 출생.
가난하여 소년시절부터 서사가(書寫家)로 고용되어 생계를 꾸려 나가는 동안에 유교와 역사의
고전에 통할 수 있게 되었는데, 특히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노자의 《도덕경
(道德經)》도 흡족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느꼈는데, 《유마경(維摩經)》을 읽고서 환희가 넘쳐나
불문에 귀의하여, 20세 무렵에는 벌써 장안[長安]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때마침 구자국
(龜玆國)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고장(姑臧)에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인도 용수계(龍樹系)의
대승불교를 공부했다. 401년 구마라습이 장안에서 후진 왕의 명을 받고 국가사업으로 불전의
대번역과 강술을 시작하자, 그의 가장 훌륭한 제자로서 활약하였기에 승략(僧I)·도항(道恒)·승예
(僧叡)와 함께 구마라습 문하 사철(四哲)로 일컬어진다. 《물불천론(物不遷論)》 《부진공론(不眞空
論)》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 등을 담은 그의 논문집 《조론(肇論)》
은 대승의 공(空)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 것으로서, 뒤의 중국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저서 중에도 《보장론(寶藏論)》(1권)은 당시 그가 얼마나 높이 평가되고
있었던가를 보여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 4) 지의(智의/538~597) :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개조(開祖). 천태대사(天台大師)·지자대사(智者
大師)라고도 한다. 속성 진(陳). 자 덕안(德安). 진(陳)나라 말과 수(隋)나라 초의 유일한 학장
(學匠)으로 불리며, 천태교학(天台敎學)의 대성자이다. 18세에 법서(法緖)에서 출가하여 560년
광주(光州) 대소산(大蘇山)의 혜사(慧思)에게 사사하였다. 568년 이후 7년간 진링[金陵:南京]의
와관사(瓦官寺)에서 《법화경(法華經)》과 《대지도론(大智度論)》을 강의하였다. 575년 이후는
천태산에 머물면서 천태교학을 확립하였다. 진제(陳帝)와 그의 후계자들로부터 신임이 두터
웠는데, 칙명으로 10년 후에는 다시 진링으로 나와 광택사(光宅寺)에서 《법화문구(法華文句)》를
강의하였다. 진(陳)나라의 병란을 루산산[廬山]에서 피하고, 591년에는 진왕(晉王) 양광(楊廣)의
간청에 따라 왕에게 보살계(菩薩戒)를 베풀고 왕으로부터 지자대사의 호를 하사받았다.
그 후 징저우[荊州]의 옥천사(玉泉寺)를 개창하고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을 강의하였는데, 이 세 저서는 천태 3대부(天台三大部)로 불리었다.
그 밖에 《관음현의(觀音玄義)》 《관음의소(觀音義疏)》 《금광명현의(金光明玄義)》 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방생회(放生會)를 최초로 시행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 5) 길장(吉藏/549~623) : 중국 수(隋)나라의 삼론종(三論宗) 승려. 금릉(金陵) 출생.
속성 안(安). 안식국(安息國) 사람 안세고(安世高)의 후손으로 가상대사(嘉祥大師)라고도 한다.
13세에 출가하여 흥황사(興皇寺) 법랑(法郞)에게 《백론(百論)》을 배웠는데, 19세에는 이를 덮어
놓고 강연도 하였다. 그 뒤 진망산 가상사(嘉祥寺)에 있으면서 《중론(中論)》 《백론》 《십이문론
(十二門論)》 등의 주석서를 내놓았다. 606년 양제(煬帝)의 청으로 양주 혜일도량(慧日道場)에
있다가 일엄사(日嚴寺)로 옮겨 교법(敎法)을 펴는 한편, 경전 편찬과 불상 만드는 데도 노력
하였다. 그 뒤 병상에서도 《사불포론(死不佈論)》을 펴내고 75세에 죽었다. 평생동안 《삼론》을
100여 번 강설했는데, 삼론종의 중흥조(中興祖)로 추앙받는다. 그의 중심사상은 공(空)·가(假)·
중(中)을 관련지은 일종의 변증법적 논리에 의한 절대부정으로 요약된다. 저서에 《삼론현의
(三論玄義)》 《유마경의소(維摩經義疏)》 《대승현론(大乘玄論)》 등 40여 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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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佛滅 後 約 九百年頃 無着菩薩 6)은 이 經을 解釋하려 하였으나 너무 어려운 部分이
많아 日光定에 들어 兜率天 7)에 올라가 彌勒菩薩 8)에게 물으니 彌勒菩薩이 八十首의 詩를
지어 이를 解釋해 주었다 한다. 그래서 無着은 이에 依하여 [無着論]二卷을 지었는데 여기서는
金剛經을 總 18住位로 科判하였고 그의 俗弟子인 天親菩薩 9)은 이 [無着論]에 의하여
[天親論] 3卷을 짓고 金剛經을 다시 二十七疑로 科判하였는데, 梁武帝의 아들 昭明太子는
이를 三十二分 10)으로 나누어 解說하였다.
* 6) 무착보살(無著 ?∼?) :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활약한 인도의 불교학자.
산스크리트명은 아산가(Asa·nga). 간다라의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부파불교(部派佛敎)의
일파에 속했다가 후에 중인도의 야요디야에 이르러 대승불교로 전향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미륵보살에게서 유식(唯識)의 논전(論典)을 배웠다고 하는데, 그가 자신보다 앞선 유가사
(瑜伽師)들로부터 이 계통의 사상을 계승한 것은 틀림이 없다. 그것을 기반으로 종래의
부파적 해석학도 답습하면서 인간의 심층의식에 기초한 언어활동을 분석·조직한 점에서
인도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요 저작에 《섭대승론(攝大乘論)》 《아비달마집론(阿毘達磨集論)》 등이 있다.
* 7) 도솔천(兜率天) : 불교의 우주관에서 분류되는 천(天)의 하나.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머무르고 있는 천상(天上)의 정토(淨土)이다. 범어 듀스타(tusita)의 음역으로서, 의역하면 지족천
(知足天)이라고 한다. 도솔천은 내외(內外)의 두 원(院)이 있는데, 외원은 천중(天衆)의 환락의
장소이며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로서, 미륵보살이 석가의 교화를 받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면서 남섬부주(南贍部洲)에 하생하여 성불(成佛)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도솔천에 상생하기를 바라고 미륵불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용화회상(龍華會上)에서
설법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되기를 바라는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했다. 특히 백제 무왕은 미륵
보살이 있는 도솔천을 이 땅에 실현시키려고 익산(益山)의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했다.
현재 한국에는 도솔암·지족암·내원암이라는 명칭의 암자가 많이 있는데, 이는 도솔천과 내원궁
을 상징하는 것으로, 도솔천을 중요시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 8) 미륵(彌勒 ?∼?) : 인도 대승불교 유가행파(瑜伽行派;唯識派)의 개조(開祖).
산스크리트 이름으로는 마이트레야나타(Maitreyanatha)나 또는 마이트레야(Maitreya)라고 한다.
생몰년에 관해서는 270∼350년이라는 설과 350∼430년이라는 설 등이 있다. 유식설(唯識說)은
미륵―무착(無著)―세친(世親)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운데 대성되었다고 한다. 無着은 도솔천
으로 올라가 미륵보살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유식파의 개조인 미륵은
바로 그 미래불인 미륵보살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미륵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문헌의 대부분을 無着에게 돌리는 것도 곤란하다. 현재는 無着에 선행하여 유식설을
설한 논사(論師)가 실존했고, 그가 곧 미륵이었다고 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중국에서는 미륵의 작품으로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변중변론송(辨中邊論頌)》
《금강반야경론송(金剛般若經論頌)》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5가지가 전하고 있으며, 티베트에서는 앞의 2책 외에 《법법성분별론(法法性分別論)》 《현관장
엄론송(現觀莊嚴論頌)》 《보성론송(寶性論頌)》의 5가지가 전하고 있다. 이것을 미륵의 5법이라
고 한다. 그러나 《유가사지론》 《보성론송》은 극히 의문시된다. 미륵의 유식설의 특징은 공관색
(空觀色)이 짙다는 점이다.
☆미륵불(彌勒佛) : 불교의 미래불.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든 뒤 56억 7000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이다. 그때의 세계는 땅은 유리와 같이 평평하고 깨끗하며
꽃과 향이 뒤덮여 있다고 한다. 인간의 수명은 8만 4000세나 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있고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세계에 케투마티(Ketumati)라는 성이 있고, 상카(Sankha)라는 왕이 정법(正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이 나라에는 수많은 보배들이 길거리에 즐비하지만, 사람들은 이 보배를 손에
들고 <옛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서로 싸웠으나 오늘날은 이것을 탐하거나 아끼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세상에 미륵이 수범마와 범마월을 부모로 삼아 태어난다.
그는 출가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에 걸쳐 사제(四諦)·십이연기(十二緣起)
등의 법문을 설한다. 6만 년 동안 중생을 교화한 뒤 미륵불은 열반에 든다.
그런데 미륵불의 세계인 용화세계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에서의 갖가지 노력이 요청
된다. 즉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독송하거나, 옷과 음식을 남에게 보시하거나,
지혜와 계행(戒行)을 닦아 공덕을 쌓거나, 부처의 향화(香華)를 공양하거나,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하여 깊은 자비심을 내거나, 인욕과 계행을 지켜 깨끗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기르거나,
절을 세워 설법하거나, 탑과 사리를 공양하며 부처의 법신(法身)을 생각하거나,
사람들을 화해시켜 주거나 하는 등의 공덕으로 용화회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이 미륵신앙은 미륵불이 출현하는 국토의 풍요로움과 안락함에 대해 설함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죄악의 종자와 모든 업장과 번뇌의 장애를 끊고 자비심을 닦아서 미륵불의
국토에 나도록 하자는 데 그 진의가 있다.
고구려에서는 죽은 어머니가 미륵삼회에 참석할 수 있기를 발원하면서 미륵불상을 조성하였고,
백제에서는 미륵삼존이 출현한 용화산 밑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신라에서는
진자(眞慈)라는 승려가 흥륜사(興輪寺)의 미륵불 앞에서 미륵불이 화랑으로 현신하여 세상에
출현할 것을 발원한 결과 미시(未尸)라는 화랑이 나타났다거나, 김유신(金庾信)이 그의 낭도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던 것 등도 모두 이 미륵신앙의 긍정적인 일면이다.
반면 후삼국의 궁예(弓裔)가 정치적인 계산으로 자칭 미륵불이라 한 것이나,
고려 우왕 때 이금(伊金)이 미륵불로 자칭하며 혹세무민한 일 등은 모두 미륵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들이다.
* 9) 천친(天親, Vasubandhu ?∼?400∼480년 무렵(또는 320∼400년 무렵)의 중기불교(中期佛敎)
의 학자. 당시 인도 북서부 간다라의 페샤와르 출신. 세친(世親) 또는 천친(天親)이라고 한다.
부파불교(部派佛敎)중 최대의 학파이며 보수파를 대표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이 계통에서
분파한 경량부(經量部)에게 배웠으며, 그 배운 것을 저서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
제시하였다. 이 책은 부파불교의 중심이 되는 여러 사상(불교철학이나 세계관 등)을 조리 있게
정리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강요서(綱要書)이며, 중국·인도·일본에서 널리 읽혀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에, 그의 형인 아상가(Asa·nga;無着)의 권유로 대승불교로 전향하여 마이트레(彌
勒)로부터 아상가에게 계승되어 확립된 유식사상(唯識思想)을 《유식 이십론(唯識二十論)》과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으로 결집하였다. 그 외의 저서에는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
《대승오온론(大乘五蘊論)》 등이 있으며, 《불성론(佛性論)》과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
이 알려져 있다. 그 밖에 중기 대승의 주축이 되는 핵심적인 논서(論書)와 주요한 경전에 대해
뛰어난 주석서를 많이 남겼다.
* 10) 삼십이분, 32분(三十二分) : 불교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한 중국 梁나라 武帝의 아들
昭明太子(501~532)는 금강경을 三十二분으로 나누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讀誦하는 科判은
이 소명태자의 과판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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