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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 참판 전공 묘표(參判全公墓表)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 몹시 혼란스러운 때를 당하여 선묘(宣廟)께서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듯이 인재를 급히 구하면서 초조하고 고심하였는데, 전유형(田有亨) 공이 포의의 신분으로 초야에서 떨쳐 일어나서 위로 밝은 군주의 지우를 입었으니, 지금도 옛일을 논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뜻이 계합하는 성대한 만남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라고 하였다.
애초부터 공은 식견과 사려가 심원하여 강개한 마음으로 시대를 걱정하였는데, 왜구가 아직 쳐들어오기 전에 먼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환난을 대비하는 경계를 미리 진언하였다. 조정에서는 한창 안일에 빠져 공의 진언을 귀담아 듣지 않다가 이듬해 난리가 일어나자 비로소 공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공은 중봉(重峰) 조헌(趙憲) 공과 함께 손을 잡고 통곡하며 격문(檄文)을 지어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이때 마침 공이 부친상을 당하였다.
공은 또 적을 방어할 계책을 올리려고 생각했으나 결국 올리지는 못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593, 선조 26), 충주(忠州) 의병장 박정란(朴廷蘭)이 행재소로 가서 상소를 올리고자 하면서 공에게 상소문을 대신 써줄 것을 부탁하니, 공이 이전에 써두었던 상소문을 보여 주자 박정란은 마침내 그것으로 바꾸어 올렸다.
성상께서 상소문을 보고 가상히 여겨 감탄하며 호서(湖西) 도신(道臣)에게 유지를 내리기를,
“이 사람은 필시 초야에 숨어 지내는 훌륭한 선비일 것이다. 내 장차 그를 기복출사(起復出仕)시킬 것이니 경은 극진한 예우로 서울로 전송하라.”
하였다.
공은 아직 부친을 장사 지내지 않았다고 하여 사양하였다. 성상이 또 하교하기를,
“지금은 신하가 평상시의 도리를 지킬 때가 아니니, 힘을 다해 적을 토벌하는 것이 바로 효도하는 길이다.”
하고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도록 명하니, 공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장사를 지낸 다음 대궐로 달려가 상례를 지킬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성상이 허락하지 않고 군자감 참봉에 제수하였는데 공이 또 상소를 올려 사양하니, 성상이 특별히 불러서 마주하여 시무를 묻고 이어 술과 음식을 내리되공식(公食)에서 고기를 제외하였다.
성상이 말하기를,
“소반에 먹을 만한 채소가 있느니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천자도 필부와 벗하니, 나는 지금 그대와 벗일 뿐이다.”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물러나오니 밤은 사고(四鼓사경(四更))를 지났다. 곧 청안 현감(淸安縣監)에 발탁되었다.
사흘 뒤에 성상이 또 불러서 마주하여 조용히 묻기를,
“옛날 무너지고 위태로운 나라를 부지한 신하 가운데서 누가 가장 으뜸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제갈량(諸葛亮)입니다.”
하였다.
성상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틀렸다. 사람을 알아봤다고 하자면, 마속(馬謖)은 용렬한 재주를 지녔는데도 제갈량이 그를 등용하였다. 병법을 잘 알았다고 하자면,진창(陳倉)은 작은 성인데도 제갈량은 승리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가장 으뜸이란 말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요(堯) 임금의 밝음으로도사흉(四凶)을 등용하였는데, 제갈량이 요 임금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러나 제갈량이 병법을 몰랐다고 말한다면 신이 할 말이 있습니다. 당시 북쪽에는 조조(曹操)가 있고 남쪽에는 손권(孫權)이 있었습니다.
제갈량은 비록 용병에 능했으나 협소한 익주(益州) 땅으로 어떻게 몇 년 사이에 수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진창(陳倉)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일은 군량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지 그의 재주가 모자랐던 탓이 아닙니다.”
하였다.
성상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전단(田單)은 즉묵(卽墨) 하나만 가지고 제(齊)나라의 70여 성을 수복하였는데,그대는 익주를 작다고 하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즉묵은 비록 작은 곳이나 제나라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익주는 비록 큰 땅이나 한(漢)나라는 이미 망하였습니다. 망해가는 제나라를 회복하기는 쉽지만 이미 망한 한나라를 회복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성상이 옳다고 여기고, 청안(淸安)의 공물을 견감하고 또 곡식을 옮겨 구제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공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활과 화살,
납약(臘藥)을 하사하였다. 이해 여름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또 기복출사하라고 명하였으니 당시 왜적의 경보가 다시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공이 장사를 지내고 다시 임지로 돌아간 다음 곧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조방(助防)의 임무가 중하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공은 끝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가 상례를 마쳤다. 계묘년(癸卯年, 1603, 선조 36), 또 만언소를 올려 붕당(朋黨)의 폐해를 극론하고, 또 노추(奴酋: 누르하치)가 조만간 침범할 것이니 응당 미리 대비할 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훗날 과연 하나하나 신기하게 징험되었다.
을사년(乙巳年, 1605, 선조 38),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여 사복시 주부,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거상 중에 조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을 탄핵한 자가 있어 공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 변론하였는데, 얼마 뒤에 특별히 서용되었다. 또 공을 저지하는 자가 있어 오랜 뒤에야 서용되었고, 얼마 뒤에 선묘가 승하하였다.
혼조(昏朝: 광해군)를 만나서는 낮은 벼슬을 전전하였는데, 내직으로는 성균관 전적, 예조ㆍ병조ㆍ형조 삼조(三曹)의 낭관(郎官)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연서(延曙)ㆍ대동(大同) 찰방, 황주(黃州)ㆍ함흥(咸興)ㆍ안악(安岳)ㆍ안성(安城)ㆍ옹진(瓮津)ㆍ장연(長淵)ㆍ울산(蔚山)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황주를 다스린 것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정승의 추천 때문이었다.
치적이 제일 뛰어나 통정대부로 승진하였으며, 승지, 병조 참의,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냈다. 기미년(己未年, 1619, 광해군 11), 가선대부에 올랐다. 당시 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아 전횡하였는데, 공이 자기 사위 신지익(申之益)을 대신시켜 상소를 올려 이이첨을 논핵하면서괴리 영(槐里令)의 고사를 본받고자 하였다.
이이첨은 공이 사주했다고 말하면서 양사(兩司)로 하여금 합계하여 공을 반역자로 지목하고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하게 하니,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공은 결국 연좌되어 삭탈되었다. 이이첨이 공을 매우 미워하여 또 몰래 무뢰배를 보내어 공을 해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1) 인조반정 때 공은 형조 참판에 제수되고 비변사의 직책을 겸임하였다. 가을에 도독 모문룡(毛文龍)이 군량미가 고갈되었다고 문서를 보내어 임진년(壬辰年)의 군량 산동미(山東米) 수만 섬을 요구하니, 공을 가도 문안사(椵島問安使)에 특별히 차임하였다.
공이 가도에 도착하여 문서를 올려 견감해 줄 것을 요청하니, 도독이 문서를 읽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진(秦)나라 궁전의 뜰에서 통곡한 일과가생[賈生: 가의(賈誼)]의 지극한 상소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다.”
하고 결국 없던 일로 하였다.
공은 이어 순검사로서 양서(兩西황해도와 평안도)의 성지(城池)를 순찰하고 조정에 돌아와 그 형편과 오랑캐를 방비할 상책(上策)ㆍ중책(中策)ㆍ하책(下策) 세 가지를 조목조목 아뢰었다. 갑자년(甲子年, 1624, 인조 2), 이괄(李适)의 변란이 일어나자 흉도 이우(李佑) 등이 고(故) 정승 기자헌(奇自獻), 판서 유량(柳亮) 공 등 38명을 무고하였는데 공도 거기에 포함되어 함께 투옥되었다.
적이 갑작스레 쳐들어오자 대가(大駕)가 공주(公州)로 몽진하려고 했다. 판의금부사 김류(金瑬)가 투옥된 이들을 모두 죽여 내응(內應)하지 못하도록 청하였는데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공이 쟁론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은 마침내 정월 24일에 죽음을 당하였으니 모든 이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이듬해 이귀 공이 공의 원통함을 아뢰어 곧 관작을 회복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공은 키가 크고 머리털과 수염이 수려하였으며 외모가 헌걸차고 풍채가 빼어났다. 어려서부터 여러 책들을 두루 읽었으며《주역》의 이치에 정밀하였다. 위로는 천문(天文)부터 아래로는 의약(醫藥)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충효는 평소 함양한 것이었으니 남들과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이 ‘충효’ 두 글자로 면려하였다.
선묘의 더없는 은혜를 입고서는 스스로 면려하는 글을 써서 문 위에 첩으로 붙여두고 아침저녁으로 스스로 반성하여 말하기를,
“유형(有亨)이여, 유형이여. 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지어다.”
하였으니, 순국하겠다는 일념이 선혈처럼 빛났다.
혼조를 만나 낙척하여 불우하게 지내다가 성조(聖朝인조)의 반정에 이르러 차츰 크게 쓰이고 있었는데 불행하게 뜻밖의 화에 걸려 원통함을 품고 지하에 묻혔다. 가령 수명이 연장되어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의 난리를 볼 수 있었다면 교만한 오랑캐의 창궐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 원대한 포부가 만분의 일도 다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그러나 사방에 힘을 펼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였으니 또한 선왕의 밝은 지우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전씨(全氏)는 정선(旌善)에서 나왔다. 고려 말에 시중을 지낸 우화(遇和)가 있으며, 그 손자 빈(賓)이 본조의 간의대부를 지내고 공로가 있어 평강(平康)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그대로 본적으로 삼았다.
증조 휘 수산(壽山)은 104세까지 살아서 중종조에 양로연(養老宴)에 참석하고 품계가 올라 대호군이 되었다. 조부 휘 성로(誠老)는 현량과에 급제하고 조 정암(趙靜菴조광조) 선생의 천거로 형조 정랑이 되었다. 부친 휘 인(絪)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덕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다. 모친 하양 허씨(河陽許氏)는 종사랑 희철(希哲)의 따님으로 좌의정 허조(許稠)가 그 선조이다.
공의 부인은 인동 장씨(仁同張氏)로, 아들 익(𨦫)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딸은 참봉 신지익(申之益)에게 시집갔다. 재취 태원 안씨(太原安氏)는 부사 봉(鳳)의 딸로, 강(鋼), 감역 현(䥪) 두 아들을 두었다. 기수(起洙)ㆍ기렴(起濂)ㆍ중추부 도사 기한(起漢), 영안군(靈安君) 목(沐)과 현감 윤채(尹埰)에게 시집간 두 딸은 장남 익(𨦫)의 소생이다.
차남 강(鋼)은 외동딸을 두었는데 생원 장명(張溟)에게 시집갔다. 기연(起淵)ㆍ기징(起澄)ㆍ감찰 기제(起濟)ㆍ기문(起汶), 통덕랑 박안계(朴安繼)에 시집간 딸은 삼남 현(䥪)의 소생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자가 숙가(叔嘉)이고 호가 학송(鶴松)이니 가정(嘉靖) 병인년(丙寅年, 1566, 명종 21)에 태어났고 향년 59세이다. 괴산(槐山) 우암(牛巖) 오향(午向)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이곳은 공이 살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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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참판 전공 묘표:
저자가 전유형(全有亨, 1566~1624)을 위해 쓴 묘표이다.
[주02] 공식(公食):
임금이 초빙한 신하에게 향응을 대접하는 것을 뜻한다.
[주03] 마속(馬謖):
촉한(蜀漢)의 장수로, 제갈량과 절친한 마량(馬良)의 동생인데 제갈량에게 중용되었다. 제갈량이 위(魏)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기산
(祈山)을 공격할 적에 군량 보급로인 가정(街亭)의 수비를 자원하고 나섰다가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무리한 작전을 편 나머지 크
게 패하였으므로 군법에 따라 처형되었다.《三國志 卷39 蜀書 馬謖傳》
[주04] 진창(陳倉):
옹(壅)과 양(梁) 땅 사이의 요충(要衝)으로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이래로 공수(攻守)의 요지가 되었다. 삼국 시대 촉(蜀)나라의
제갈량이 수만 명의 군사로 진창을 포위하였으나 위나라의 장군 학소(郝昭)가 수천 명의 군사를 가지고 굳게 지켰기 때문에 20여 일
동안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고 철군하였다.《三國志 卷3 魏書 魏明帝》
[주05] 사흉(四凶):
요순(堯舜) 시대에 있었던 악명 높은 네 부족의 수령들로서 공공(共工), 환도(驩兜), 삼묘(三苗), 곤(鯀)을 말한다. 이들은 요(堯)
임금 말년에 나라의 중임을 맡고 잘 시행하지 못하므로, 순(舜) 임금이 정사를 보살피면서 공공을 유주(幽洲)에, 환도를 숭산(崇山)
에, 삼묘를 삼위(三危)에 내쫓으며, 곤을 우산(羽山)에서 베었다.《書經 舜典》
[주06] 전단(田單)은 …… 수복하였는데:
전단은 연(燕)나라 장군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공격할 때 즉묵(卽墨)에서 맞서 싸운 제나라 장군이다. 연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70여 성을 함락시켰는데, 전단이 즉묵을 지켜내 연나라를 물리치고, 이 승세를 타고 삽시간에 빼앗겼던 제나라의 70여 성을 수복하
여 거의 망해 가던 제나라를 재건하였다.《史記 卷82 田單列傳》
[주07] 괴리 영(槐里令)의 고사:
임금이 물리쳐도 끝까지 버티고 간언한다는 일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괴리 영 주운(朱雲)이 안창후(安昌侯) 장우
(張禹)를 참(斬)할 것을 청하였는데, 성제가 대노하여 주운을 죽이고자 하여 어사로 하여금 끌어 내리게 하니, 주운이 어전(御殿)의
난간을 붙잡고 버티고 서서 계속 간언하다가 난간이 부러져서 아래로 굴러 떨어졌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漢書 卷67 朱
雲傳》
[주08] 진(秦)나라 …… 일:
춘추 시대 오(吳)나라가 초(楚)나라를 침공하자 초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가 명을 받들고 진(秦)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였는
데, 진백(秦伯)이 곧바로 허락하지 않자 궁전의 뜰에 서서 7일 밤낮을 통곡한 끝에 마침내 구원병을 얻어내었다.《春秋左氏傳 定
公4年》
[주09] 가생(賈生)의 지극한 상소:
한(漢)나라 때 가의(賈誼)가 비통한 심정으로 문제(文帝)에게 올린〈치안책(治安策)〉을 가리킨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