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윤_퍼포먼스, Beijing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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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Gallery TN 기획초대展
책임큐레이터_김미령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Gallery TN
Middle second street, 798 Art Area, No.2 Jiuxianqiao Road, Chaoyang District Beijing China 100015
Tel. +86.10.8459.9550
www.gallerytn.com
亂舞 ● 두 방향의 창문에서 내리쬐는 하얀 햇살 / 바닥과 사방이 하얀 천정 높은 커다란 방 / 검은 옷에 온통 온갖 색의 둥근 꽃을 단 여자가 서 있다. // 정적 한 자락 // 오월의 바람이 창문을 통과하여 그녀의 옷자락을 휘감는다. / 꽃들이 울고 웃는다. 꽃들이 분노하고 슬퍼한다. / 또는 落花한다, 浮游 한다. / 음악 한 줄기 // 천천히 춤을 춘다. / 혼자서 추는 왈츠, 이름하여 우아한 獨舞 / 이내 사방에 놓여있는 물감과 붓으로 휘갈긴다 / 劍을 지 찌르듯 붓을 지른다, 색을 지른다. // 그리하여 // 한 자락 정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모든 꽃들과 / 한 줄기 음악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모든 음표와 / 한 사람 그녀로부터 떨어져 나온 모든 색과 / 劍과 붓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모든 핏빛 액체와 / 점점 떨어져 내리는 씨앗과 피어나는 꽃잎 // 모두 다, 무지개 빛을 가장하여. ■ 홍지윤
홍지윤_가시나무 A Thorn bush_장지에 잉크, 아크릴, 수묵채색_210×150cm_ 2009
활보 (闊步) ● 내가 더 높이 날 수 없다면 네가 날아라 / 내가 더 멀리 뛸 수 없다면 네가 뛰어라 내가 더 멋진 춤출 수 없다면 네가 춤을 춰라 / 내가 더 큰 꽃을 피울 수 없다면 네가 피어나라 // 너는 다름아닌 또 다른 나 (홍지윤, 2009)
홍지윤_활보1 闊步 Striding around_장지에 잉크, 아크릴, 수묵채색_210×450cm_2009
홍지윤의 闊步_ with big stride (황새걸음으로) ● 밤마다 열리는 불꽃들의 연회에서 / 나는 황새의 그 예의 큰 보폭으로 / 느리지만 우아하게 / 춤을 시작한다. // 불꽃들의 춤이 소용돌이 칠쯤 / 나는 가냘프고 여린 긴 다리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 아무도 눈치 체지 못하게 발끝 가득 힘을 주고서, / 당당하게! 제멋대로! 나만의 춤을 만들어 내려 하면서, /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 '우렁우렁' 응어리진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서, / 그 깊은 곳의 웅얼거림이 소리를 내지를 때까지. / 오늘도 나는 허옇고, 앙상한 발끝에 잔뜩 힘을 주고서 / 그 예의 젠체한 춤을 시작한다. // 그러나 그 모습은.... / 잔인하게도 너무나도 예쁘게 화장한 참상(慘狀)!
홍지윤_환희 歡喜 Delight_장지에 잉크, 아크릴, 수묵채색_210×150cm_2009
그녀의 꽃다발 ● 1. 홍지윤의 작업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춤을 추고 위로 솟구쳐야만 하는 불꽃을 닮았다. 필자는 도취한 듯한 야만적인 불꽃, 그 불꽃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화폭 가득히 채우고 있는 2004년 「백만 송이 장미」시리즈 중 하나인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그녀 작업의 시초로 본다. 보는 이에 따라 현재의 작업 느낌과 많이 다르다 할 수 있으나, 필자에게 있어, 커다란 화폭 위에 애틋한 꽃물을 그대로 머금고 애잔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그린 한 송이의 장미꽃은 아마도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당시와 비교하여 작업에 출현하는 꽃들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꽃밭을 이루었으며, 색채 또한 처음의 단색위주의 절제된 듯한 꽃이 아닌 동양의 오방 색을 변용한 현란한 오색 꽃들이 출현되었다. 단지 일관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스케치 없이 먹의 농담으로 형태의 명암을 나타내며 형태를 생산하는 몰골법(沒骨法] 인데, 필자는 작가의 작품의 의미와 이 기법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중점을 두고 싶다. 아는 바와 같이 골(骨)이란 회화성립의 한 요소인 구체적 필선(筆線)을 가리키며, 몰골은 필선의 부정(否定)이라는 뜻이다. 윤곽선을 나타내지 않고 선염(渲染)을 사용하여 화면효과를 올리는 색채주의적인 화법으로 주로 화조화(花鳥畵)에)에 사용된 이 기법은 작가 홍지윤의 작업에 대한 태도와 인생관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구조와 체계라 할 수 있는 하나의 뼈대를 함몰시키면서 팽창하는 모험의 메타포를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애타는 그리움으로 표현해 내는 작가의 작업은 꽃이라는 함의적 도상을 통하여 삶의 안과 밖을 오가려 한다. ● 혹자들은 그녀의 작업에 있어서, 형식적인 부분의 다양한 창의적 성향, 즉 자유로운 매체 사용부분에 대하여, 혹은 동양화에서 문인화가 가진 성격을 현대적으로 잘 해석해서 표현하는 작가로 읽어왔다. 이 또한 그녀의 작업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 것 또한 사실이고 작업에 있어 형식과 내용의 양보할 수 없는 양자 간의 결합으로 보여 진다. 또한 읽힘에 있어서도 그러한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작품에 담긴 내적 의미보다 외적인 것에 치중을 두는 세태가 일반인 지금에서 필자는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결합의 참 읽기가 요구 된다 여긴다.
홍지윤_아무것도 아닌 꽃 Nothing flower_장지에 잉크, 아크릴, 수묵채색_210×150cm_2009
2. 나이 40살 즈음이면 아마도 삶에 대하여 논할 나이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논하는 것이 그렇게 쉽다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리 어렵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이 나이쯤에 인생에 대해 말하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절반쯤에 온 사람들에게 삶은 한편에서 의미 있는 것들이라 불리는 수많은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는 나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것들의 의미는 모호하거나 무시할 만한 것들이라고 어설프게나마 깨닫기 시작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이쯤에 되면 또 다시 사춘기 시절의 열병처럼 정체성과 가치관의 혼란을 겪을 수도 있겠다. 앞서 말한 무시할 만한 것들이 다시 한 번 아직 죽지 않은 감정을 들쑤시면서 어린 시절 잠 못 이루던 사랑의 열병과 같은 증상이 한밤중에 느닷없이 광기 어린 감정의 도가니를 만들어 불쑥불쑥 쳐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진입한 놈들은 오랫동안 평정을 유지하려 했던 그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애송이 시절의 아련한 재회의 떨림을 곱씹으면서 그것과 만나기 위해 몸을 던진다.
홍지윤_취중진담 醉中眞談 Words in drunken_장지에 잉크, 아크릴, 수묵채색_210×150cm_2009
3. 작가 홍지윤의 작업은 이러한 의미에서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인간들의 삶 속에 깊이 파묻혀 있는 소소한 감정들, 그러나 흔히들 진행 중인 삶에서 놓치고 있는 그러한 삶의 희로애락을 꽃이라는 반복적인 도상을 통하여 애닯은 삶의 메타포를 노래하고 있다. ■ 김미령
홍지윤_생멸 生滅 Being and dead_장지에 잉크, 아크릴, 수묵채색_210×450cm_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