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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오른쪽)가 22일 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우즈베키스탄과 8강전에서 기록한 어시스트는 차범근의 골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 더팩트 DB |
유쾌하고 상쾌하며 통쾌한 8강전이었다. 이 표현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한자 '快'의 훈(訓)은 '쾌할 쾌'인데 '쾌하다'는 마음이 유쾌하다·병이 다 나은 상태에 있다·하는 짓이 시원스럽다 등의 뜻을 갖고 있다. 또 다른 훈은·시원하다·빠르다, 날래다·즐겁다·기쁘다·즐기다·좋아하다 등인데 쾌감(快感) 쾌속(快速) 등 '쾌'가 들어가는 여러 낱말을 떠올리면 바로 알 수 있는 의미다. 22일 한국이 2-0으로 이긴 우즈베키스탄과 경기 결과를 한 글자로 나타내면 '쾌'다.
1956년 출범한 아시안컵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대륙을 떠나 남반구에 있는 호주에서 열리고 있는 2015년 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에서 한국은 23일 현재 전승 행진을 하고 있다. 조별 리그를 포함해 한국이 이날 현재 치른 4경기 가운데 우즈베키스탄과 8강전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전·후반 경기 내내 가슴을 졸였고 연장전 전반 초반까지만 해도 4년 전 카타르 대회 일본과 4강전 승부차기 패배를 떠올린 축구 팬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시아 나라 가운데 인도네시아(1938년 프랑스 대회, 당시 이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이어 두 번째로 월드컵 본선(1954년 스위스)에 나섰고 2002년 한일 대회에서 아시아 나라로는 세 번째(1966년 잉글랜드 대회 북한, 1994년 미국 대회 사우디아라비아)로 월드컵 1라운드를 통과했으며 내처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월드컵 4강에 오르며 아시아의 맹주로 자부해 온 한국이 아시안컵과는 유독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아시아 지역 축구 대회 성적은 썩 자랑스럽지가 않다. 아시아 지역의 최대 스포츠 잔치인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1970년 방콕 대회에서 버마(오늘날의 미얀마), 1978년 방콕 대회에서 북한과 공동 우승했고 1986년 서울 대회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2-0으로 꺾고 비로서 단독으로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 30년 가까이 금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하다가 지난해 인천 대회에서 북한을 1-0으로 누르고 정말 오랜만에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인천 대회에서 패권을 차지해 아시안게임에서는 통산 우승 횟수에서 이란(1974년 테헤란 대회 1990년 베이징 대회 1998년 방콕 대회 2002년 부산 대회)과 어깨를 나란히 해 그런대로 체면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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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의 플레이는 아버지 차범근과 여러모로 닮았다. / 더팩트 DB |
그러나 아시안컵으로 얘기를 돌리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1956년 제1회 홍콩 대회와 1960년 제2회 한국 대회에서 연속 우승한 뒤 반세기가 넘도록 패권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그 사이 일본(4회)과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이상 3회)이 통산 우승 횟수에서 한국을 앞질렀다. 아시아의 맹주라는 말이 무색한 결과다.
그런 가운데 맞이한 이번 대회다.
아시안컵 8강전은 한국으로서는 고난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중년층 이상 축구 팬이라면 누구라도 기억할 1996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대회를 비롯해서. 아시안컵에서 처음으로 열린 그 대회 준준결승에서 한국은 알리 다에이에게 4골을 내주는 등 2-6으로 크게 졌다. 그런데 이 참패는 어느 정도 예고돼 있었다. 조별 리그에서 개최국 UAE와 1-1로 비긴데 이어 인도네시아를 4-2로 잡았으나 쿠웨이트에 0-2로 져 3개 조 3위 가운데 시리아(1승 2패)를 제치고 이라크(2승 1패)와 함께 가까스로 8강에 오른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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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은 1972년 말레이시아와 치른 메르데카배대회 결승전에서 환상적인 드리블 솜씨를 발휘했다. / 더팩트 DB |
2000년 레바논 대회에서 한국은 3위를 차지했지만 조별 리그에서 중국과 2-2로 비긴데 이어 쿠웨이트에 0-1로 졌으나 인도네시아를 3-0으로 누르고 3개 조 3위 가운데 태국(2무 1패)을 따돌리고 카타르(3무)와 함께 와일드카드로 힘겹게 8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맞이한 준준결승에서 이란에 0-1로 끌려가다 경기 종료 직전 김상식의 동점 골로 연장으로 들어섰고 이동국의 결승 골에 힘입어 2-1로 겨우 이겼다.
2004년 중국 대회에서 난타전 끝에 알리 카리미가 해트트릭을 기록한 이란에 3-4로 진 경기, 2007년 동남아시아 4개국(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대회에서 이란과 접전 끝에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4-2로 이긴 경기, 직전 대회인 2011년 카타르 대회에서 역시 연장 접전 끝에 윤빛가람의 결승 골로 이란에 1-0으로 이긴 경기들은 신세대 축구 팬들의 기억에 생생할 것이다. 한국은 모두 이란과 맞붙은 5차례 아시안컵 8강전에서 2승1무(승부차기 승리는 무승부로 기록) 2패였는데 이기든 지든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현재 가치보다는 미래 가치가 훨씬 더 큰 손흥민과 30대 중반의 나이에 1972년 말레이시아와 치른 메르데카배대회 결승전에서 아버지 차범근이 펼쳤던 탱크 같은 드리블을 재현한 차두리가 앞장서서 이끈 우즈베키스탄과 경기는 상당 기간 역대 아시안컵 최고의 8강전으로 기억될 것이다.
1972년 메르데카배대회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결승전을 복기해 보면 하프라인에서부터 치고 나가는 장면은 부자(父子)가 거의 같다. 위치도 상대 진영 왼쪽으로 같다. 43년 전에는 아버지가 오른발로 대포알 같은 2-1 결승골을 넣었고 22일 경기에서는 아들이 오른발로 골과 다름없는 도움을 기록했다. 흑백 화면이긴 하지만 당시 경기 영상이 어디엔가 있을 것 같은데…
더팩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