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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이 순국선열들의 헌신과 연합국의 승전으로 얻어진 것임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연합국에서 어느 나라의 공이 가장 크냐고 하면 단연 미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중국 역시 중요한 공헌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미국의 공만 부각되고, 반대로 중국의 기여에 대한 부분은 잊혀지고 중국에 대한 혐오의 풍조가 퍼지고 있어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그에 관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들이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공약한 카이로 선언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지하듯이 카이로 선언은 1943년 12월1일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수상, 중국의 장제스(蒋介石) 총통 등 연합국의 영수들이 이집트의 카이로에 모여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처음으로 일본에 대한 전략과 처리방침을 공약한 선언입니다.
바로 이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최초로 공약됩니다. 카이로 선언이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 가운데 (중국 영토를 제외하면) 유독 한국만 명시적으로 거명하며 자유와 독립을 공약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유독 한국에 대하여만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미국의 공을 얘기하고 특히 이승만 박사의 대미 외교의 결실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분명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주석 김구)의 노력 그리고 그것을 수용한 중국 장개석 총통의 제안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카이로 선언의 전문을 소개합니다.
<카이로 선언(1943. 12. 1)>
3국(미국, 영국, 중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 행동을 합의하였다.
세 주요 연합국은 해로와 육로, 항공로로 야만적인 적국에 대하여 끊임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 압박은 이미 증대하고 있다.
세 주요 연합국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연합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도 요구하지 않으며, 영토를 확장할 의도 역시 갖고 있지 않다. 연합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전쟁 이후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타이완 및 펑후 제도와 같이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일체의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세 주요 연합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념하며,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되어야 함을 결의한다. 이를 위해 세 주요 연합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기에 필요한 중요한 작전을 장기적으로 계속 수행할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카이로 선언",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143_0010)
카이로 회담이 성사된 것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상주의 대통령으로서 세계 대전이라는 참화 후에 평화와 인권의 세계질서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주도로 그와 같은 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리더십을 발휘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 악화되는 상황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영국의 처칠 수상과 함께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를 발표하여 자유로운 국제질서와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기구(향후 유엔으로 구체화됨)의 설립을 제안하였습니다. 이어서 1943년 유럽에서 나치가 소련 전장에서 패퇴하고, 태평양 전장에서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승기를 잡으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의 세계 구상을 구체화하고자 미 영 중 소의 연합국 영수회담을 추진합니다. 중국 장개석 총통도 미국과의 회담을 반겼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의 일원이라는 위상을 확보할 수 있고, 일본과의 전쟁에서 미국과의 연합 전략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개석은 소련 스탈린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스탈린이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한 것, 중국 내 공산당을 지원하고 있는 것 등이 거슬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은 먼저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 영국, 중국이 만나고, 이어서 이란의 테헤란에서 미국, 영국, 소련이 만나는 이 단계 일정을 기획합니다. 당시 영국은 이집트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따라서 카이로 회담의 행사 준비는 영국이 맡게 됩니다. 이란은 당시 영국과 소련의 공동 점령 상태였고, 테헤란 회담은 소련이 호스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미 영 중의 3개국 영수회담이 개최됩니다. 그러나 영국 처칠은 내심 중국을 동등한 연합국 수뇌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처칠은 장개석이 인도를 방문하여 인도의 독립에 대하여 얘기한 것에 대하여 매우 불만이었고, 또 중국이 일본 패퇴 후 홍콩도 반환받으려 하는 것에 대하여도 불만이었습니다. 처칠은 대영 제국의 수상으로 제국주의를 버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장개석 국민당 정부를 폄하하고 불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루스벨트의 구상을 막을 수는 없었고, 카이로 회담에 참여하게 됩니다. 영국은 미국과 회담에 주력하고, 중국과의 양자 회담은 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영국의 제국주의적 태도는 후에 한국의 독립 문제에 있어서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미 영 중 카이로 영수회담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당시 중경(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긴박하게 행동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임시정부는 이미 미국과 영국 사이에 전후 처리 문제로 한반도 신탁통치 안이 나오고 있다는 소식에 크게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카이로 회담 소식이 전해지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일제히 중국 장개석 총통에게 대한민국 즉시 독립의 총의를 전달하게 됩니다. 김구(주석), 조소앙, 이청천(지청천), 김규식, 김원봉(김약산) 등 임시정부의 양대 축이었던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 요인들이 모두 찾아가 장개석 총통을 직접 면담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장개석 총통은 미국과 영국의 신탁통치 움직임을 인정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을 수용하여 한국의 즉각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합니다. 또한 중국도 내부적으로 동아시아 지정학을 염두에 두면서, 특히 전후 또 다른 승전국이 될 수 있는 소련의 팽창을 우려하며, 중국이 먼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입장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은 자신들의 문제와 함께 한국 문제를 의제로 제안하게 되고, 그것이 마침내 앞서 본 최총 문안으로 귀결되게 됩니다. 장개석은 한국 임시정부의 요청대로 전후 즉각 독립을 제안하였지만, 애석하게도 최종 문안은 한국을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에 독립시키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이에 그 과정을 간단히 살펴 보겠습니다.
장개석은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만찬 회담에서 다른 의제들과 함께 전후 한국의 독립을 중요 의제로 제안하였고, 양 정상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회담 내용의 한국 관련 부분을 중국 측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일본 패전 후 당연히 한국으로 하여금 자유와 독립을 획득하게 한다(日本潰敗後,應使朝鮮獲得自由與獨立), ... 그리고 어떻게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重建)케 할 것인지에 대해서 한국인이 목적을 달성케 하는 데 중국과 미국 양국이 협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쌍방은 양해했다(而如何使朝鮮重建自由與獨立, 則雙方諒解, 應由中, 美兩國協助朝鮮人民達成目的)."
미국 대통령 보좌관 홉킨스는 그 회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습니다:
"We are mindful of the treacherous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by Japan, and are determined that that country,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 shall become a free and independent country"
(우리는 일본에 의한 한국 인민의 기만적 노예상태를 유념해, 일본의 패망 후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의 국가가 될 것임을 결의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에 대하여 가장 이른 순간을 "적당한 순간(proper moment)"로 바꾸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측은 다음과 같은 초안을 제안하였습니다:
"We are mindful of the treacherous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by Japan, and are determined that that country, at the proper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 shall become a free and independent country".
그러나 이와 같은 한국의 독립 약속에 대하여 영국은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한국의 독립은 영국 제국주의 식민지배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영국 대표단은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시키되 그 독립은 유보하는 새로운 제안을 하였습니다. 영국 제안에 대한 중국 보고는 다음과같습니다:
"日本對朝鮮人民之奴隷待遇, 吾人初未忘懷. 日本潰敗後, 於適當時期, 吾人決定使朝鮮 脫離日本之統治." (우리는 일본에 의한 한국 인민의 기만적 노예 상태를 유념해, 일본의 몰락 후 적절한 시기에 일본 통치에서 이탈시킬 것임을 결의한다".
중국은 이러한 영국의 안에 반대하였습니다. 한국을 일본 통치에서 이탈시킨다는 것은 독립과는 거리가 있으며 이는 향후 독립의 국제적 공약을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항의하였습니다. 영국의 반대는 완강했습니다. 자신들의 제안이 수용되지 않는다면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부분은 삭제할 것을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국 측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다만, 영국은 원문안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였습니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세 주요 연합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념하며,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되어야 함을 결의한다.)
영국은 원안에 있던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의 기만적 노예화'라는 부분을 단지 '한국인들의 노예상태'로 바꾸었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사악함은 빼고, 단지 한국 인민들의 고난만 남겨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적당한 순간(proper moment)'을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로 바꾸었습니다. 보다 세련된 표현을 구사하면서 모호성이 가중된 것입니다. 이는 향후 한국의 즉각 독립이 아니라 신탁통치를 통한 독립이라는 식으로 해석되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영국의 수정안은 미국에 의하여 최종 승인되고, 12월 1일 미국 백악관을 통하여 발표됩니다.
이상 보았듯이,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문제가 주요 의제 중의 하나가 되고, 자유와 독립이 연합국에 의하여 보장된 것은 하나의 역사적 성취였다고 할 수 있고, 이는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은 원래 한국의 전후 처리에서 강대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생각하였고, 영국은 한국의 독립에 대하여 의제로 삼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카이로 선언에서 다른 식민지 국가들은 전혀 거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명백하게 천명하게 된 것은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헌이며, 그에 협력한 중국 국민당 장개석 총통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가장 크게 지원하고,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사실상 인정하고 협력한 나라는 바로 중국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요 참고문헌>
정병준,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 과정", 역사비평(제107호, 2014)
한시준, "카이로선언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근현대사연구(제71호, 2014)
조덕천, "카이로회담의 교섭과 진행에 관한 연구", 한국근현대사연구(제70호, 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