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꽃처럼
신금철
‘그리도 좋을까?’ 홍안이다. 곁눈질로 슬쩍 본 그의 얼굴엔 행복이 곱게 물들었다. 퇴직 후 사진에 빠진 지 17년, 지치지도 않는 그의 열정은 아직도 청년이다. 출사를 나갈 때마다 그는 소년처럼 들떠있다. 사진 동아리 회원들과 어울리던 그가 언제부터인지 나와 동행하기를 원했고, 나도 열심히 따라다녔다. 사진기를 손에 쥘 때 그는 가장 행복해 보인다. 나도 덩달아 행복하다. 나는 그가 조종하는 로봇처럼 모델 흉내를 낸다. 어쩜 나 자신도 피사체로 함께 행복한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출사를 나가는 날이면 전날부터 커피와 간식을 준비하고, 고운 옷과 모자를 챙겼다. 이제 그의 나이 산수傘壽에 접어들고, 나 또한 종심從心을 훨씬 넘어섰으니 그를 따라나서는 게 마냥 즐겁지는 않다. 그날도 전날 저녁때부터 몸이 찌뿌듯하고 다리가 아파 동행할 마음이 없었지만, 혼자 출사를 싫어하는 그를 위해 따라나선지라 달뜨지도, 즐겁지도 않고 동행을 애원한 그가 야속했다.
늘 차창 밖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고, 늘 음악을 차에 싣고 다니며 흥얼거렸다. 그런데 초록의 푸른 칠월도, 초록 사이에 핀 야생화에도 무관심인 채 나는 눈을 감았다. 눈치를 챈 남편도 말 수를 줄이고 행복을 숨겼다.
우리 집 거실엔 하목정의 배롱나무꽃을 배경으로, 하얀 모자에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인의 사진이 명화名畫처럼 걸려있다. 그가 찍은 내 모습이다. 그는 해마다 7월이면 하목정의 배롱나무가 언제 꽃을 피울지 기다리느라 휴대폰을 손에 들고 산다. 내 안목으로는 해마다 똑같은 장소의 똑같은 배롱나무꽃인데 왜 굳이 먼 길을 달려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가 가자니 군소리 없이 따라나선다.
하목정은 익숙한 장소라 주차도 편하게 하고 친정집에 들어서듯 한다. 기와지붕과 돌담이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가 고풍스럽다. 연분홍 상사화가 수줍게 꽃대를 밀어 올리고, 새색시 볼처럼 붉은 석류가 조롱조롱 매달렸다. 친정집 울안에도 석류나무가 있었다. 과일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으니 보석처럼 알알이 박혀있던 석류는 귀한 대접을 받았고, 아끼느라 한 톨씩 따먹으며 새콤달콤한 맛에 빠졌던 기억에 침이 고였다.
지난해와 다름없이 배롱나무꽃의 환한 웃음은 찌뿌듯했던 나의 몸과 마음을 곧추세우고 친정어머니처럼 반겨준다. 나도 배롱나무꽃처럼 환히 웃었다. 내 기분에 맞추느라 감추어두었던 그의 표정이 배롱나무꽃처럼 환하다.
‘그래, 당신이 이렇게 행복한데, 나도 배롱나무꽃보다 환하게 웃어야겠지….’
그가 원하는 몸짓으로 카메라 앞에서 잇몸이 드러나도록 웃어 보였다. 하목정의 모습을 샅샅이 뒤지듯 사진에 몰두한 그의 곁을 벗어나 배롱나무꽃 그늘에 앉아 그곳에 머물렀던 분들의 역사를 더듬는다.
하목정은 보물 제2053으로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개인 사저이다. 조선 선조 때 의병장 이종문이 만든 주택이다. 조선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잠시 머문 적이 있어 하목정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안채가 없어지고 사랑채인 이곳은 정자로 사용된 곳이다. 전형적인 대청마루를 연상케 하고 북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아기자기한 꽃송이를 매단 배롱나무의 모습은 한 폭의 정물화로 사진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잠시 사람들의 인적이 멈추어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에 올라 창문에 기대어 배롱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한 컷을 남겼다. 임금이 앉았던 자리라고 생각하니 더 귀한 장소로 여겨졌다. 마루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하목정 뒤뜰에는 해묵은 배롱나무가 즐비하게 서서 몸단장을 하고 촬영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내가 사는 고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배롱나무꽃을 마음껏 볼 수 있음에 꽃에 흠뻑 취했다. 붉은색의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의 꽃말은 충직과 부귀이다. 그래서인지 주로 사찰이나 서원, 사대부의 집안에 많이 심겨 있다. 꽃말의 의미를 겹쳐놓으니 더 귀하게 여겨졌다.
‘화무십일홍’이라는데, 배롱나무는 꽃도 예쁘지만, 오랫동안 피어서 여름에 지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7월에 피기 시작하여 9월까지 거의 100일 동안 핀다고 하여 백일홍이라는 별명도 있다니 그 끈질김에도 감탄하게 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말이 생각나서 꽃가지를 부여잡고 꽃숭어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귀엽기 짝이 없다.
그는 배경 좋은 배롱나무를 발견했는지 나를 부른다. 꽃에 머물던 바람이 희끗희끗한 그의 머리칼에 부채질을 해준다. 상기된 그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피곤함이 배었는데도 그의 표정은 밝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그인데도 아직 사진찍기에 지침이 없다.
‘혼란할 시 폐문할 수도 있음’ 질서와 정숙을 요하는 관리자의 공지가 마음에 걸린다. 소중한 문화재가 훼손될까 고심하는 문구였다. 관람객들의 철저한 주의와 세심한 관리로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라며 하목정을 나섰다.
하목정을 뒤로하고 칠곡 가실성당으로 향한다. 이곳 역시 배롱나무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우리 부부 모두 천주교 신자이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해마다 찾는 곳이다. 사진을 찍는 데 의미를 두기도 하지만, 그가 열심히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성당 안에서 성체조배를 하며 그와 가족을 위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아직 그는 동년배보다 건강하고 의지도 강하다. 그러나 무거운 사진기를 등에 멘 그의 어깨가 걱정스럽다. 언제까지 그 무게를 견디고 사진을 찍으러 다닐지 모르지만, 그의 유일한 낙을 말리고 싶지 않다. 사진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그가 애잔하기도 하지만 그의 애정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해주고 싶다. 그가 배롱나무꽃처럼 가족들에게 귀한 대접을 받는 가장이기를 바란다. 사진기를 둘러메고 나설 때처럼 환한 웃음을 잃지 않고, 배롱나무꽃처럼 건강하게 오래 피어 있기를 기도한다.
그가 원하면 해마다 배롱나무가 반겨주는 대구 달성의 하목정과 칠곡의 가시리 성당을 찾으리라.
첫댓글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 무척 부럽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이 느껴져 매일 남편과 토닥이는 저를 반성하게 합니다. 편안한 글 잘 읽었습니다.^^
배롱나무를 두고 사진찍고, 찍히는 두분의 모습이 마치 멋진 음악이 깔린 영상 장면처럼 상상이 됩니다.
이쁜 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 행복한 두분에게 눈 살짝 흘키고 나갑니다
선생님의 내조로 부군이 건강하신것 아닐까요?
진정 이 시대의 모범 가정이십니다.
선생님 내외분께서 배롱나무꽃처럼 건강하게 오래 피어 있기를 기도할게요.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살다보면 어찌 좋은 일만 있겠어요.
저희 부부도 다를 바 없지요.
글이나마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어 쓰다보니 자랑처럼 느껴져 송구스럽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편분은 꽃을,
선생님은 행복을 찍으셨군요.
저에게 행복은 대단한 게 아니고,불편없이 걸을 수 있고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는 것이면 만족해요.
베롱나무꽃은 보기는 좋아도 예쁘게 사진 찍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진달래나 베롱나무꽃처럼 색깔이 요란스럽지는 않지만
무더기로 모여 있을 때는 그 아름다움이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사진을 잘 모르지만
장미처럼 색이 짙으면 사진도 잘 나오는데
베롱나무는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두 분이 베롱나무꽃을 찾아 그 색깔 연한 꽃을 아름답게 찍어내시듯이
사시는 모습도 닮아서 볼 때마다 가슴 뭉클하게 합니다.
답글이 늦었네요.
늘 게을러 제 때 감사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힘 입어 더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잔잔한 일상이 선생님처럼 참 곱습니다.
꽃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계속 수놓으세요.
민선생님,
고운꽃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