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여러 부분에서 불평등이나 차별을 없애려는 정부의 노력의 하나로 국방부가 30개월 이상
복무하고 상병 제대를 한 71만병의 병장 특별진급을 추진 하기로 했다는 발표를 했다. 93년 이전에 제대한 사람들이게 해당된다고 하는데 최소 30년 이전에
제대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계급을 하나 올려준다고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아무 유익도 없는 일이지만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뉴스는 내가 45년 전에 병장이 아니라 상병으로 제대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했다. 국방부의 발표에 의하면 상병 제대가 많았던 이유는 월남전에 참전한 병사들이 거의 모두가 병장 진급을
했기 때문에 TO가 모자라서 국내에 있던 사병들이 상병제대를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러나 나는 특이하게 월남을 다녀 오고도 상병으로 제대를 했다. 사병들의 진급은 시간만 흐르면
저절로 진급이 되는 것으로 간혹 처벌을 받거나 해서 진급이 안 되는 경우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내
경우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파월 장병들은 봉급을 미군이 주기 때문에 기간에 따라 자동적으로 진급이 되어 월남을 다녀오면 무조건 병장이었다. 그런데 서무계가 진급을 하면 한 달치 봉급을 부관부 사병계에게 주어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 내가 그렇게 못 하겠다고 했더니 서무계는 "너 그러면 끝까지 진급 못해." 라고 했다. 설마 그럴 수가 있을까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돈 때문이었다. 군대에서 뇌물을 뜻하는 ‘짜웅’이라는 말은 월남어 “안녕하세요?”에서
유래한 말이다. 월남전은 한국군에게 돈 맛을 알게 만들었다. 그
전에도 군대에 부패가 만연되어 있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는데 월남전에 참전 함으로써 먹을 것이 많아진 것이다.
한국에서 군대 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가 가기 때문에 주월 한국군에는 거의 일병이 없었다. 모두가
상병이나 병장뿐이어서 나도 상병 계급장을 달고 다녔기 때문에 실생활에는 불편이 없었지만 계급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는 월급은 오르지 않았다. 나는 비록 경제적 손해를 볼지언정 불의 앞에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싶지는 않았다. 귀국 후 육군 본부 중앙경리단에 월급을 수령하러 갔더니 담당자가 “뭐? 일병!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돌아오다니 천연기념물이네”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진급을 하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신청을 해야 한다지만 나는 신청을 하지 않기로 했다. 만일에 71 만병 중에 나를 제외한 전원이 모두 진급신청을 한다면 다시 한 번 대한민국 육군 역사에 유일하게 상병 제대로
한 천연기념물로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있는 것은 성질뿐인 내가 부당함을 참고 있었던 것은 딴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월 유신이 선포되는 것을 보고 돌아갈 일이 없다고 판단되어 탈출을 생각했었다. 월남에 있던 한국군 중에서 사고를 내고 간혹 캄보디아로 도망을 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캄보디아는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일단 그 곳을 가면 제3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경리 장교가 상급 부대에서 월급을 수령해 오다가 운전병과 경계병을
살해하고 캄보디아로 튀었던 일도 있었다.
캄보디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헬기로 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피터슨이라는 미군 헬기
조종사가 저녁 마다 조깅을 하다가 내가 근무하는 사단 교회가 있는 언덕에서 돌아갔다. 나는 계획적으로
피터슨과 친해져서 탈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피터슨이 2 주 후에 한국군 업무가 아니고 미군의 업무로 나트랑 공항에 단독으로 갈 일이 있다고 했다. 나트랑까지는 헬기로 30분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30분 안에 결판을 내야 해서 국경 너머 아무 마을에나 내려달라고
사정을 하고 안되면 피터슨을 총으로 위협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단히 무모하고 서툰 계획이었다. 만일에 내 계획대로 헬기를 탔더라도 피터슨이 국경을 넘었다며
월남 땅 아무 곳에나 내려놓으면 나는 도로 잡혀 올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국경이 없기 때문에 항공
지리를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갑자기 철수
명령이 떨어져서 귀국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현실에 절망하거나 막다른 길에 부딪치면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꿈은
야무져야 하는 것이지 엉성하면 꿈이 깨지는 것을 넘어 자신이 깨질 수가 있는 법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생각을 많이 했었다. 최근에 내가 소속해 있는 월남참전 전우회 회원
몇 명이 모인 술자리에서 내가 안주감이 되어 성토대회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유는 내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하여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전혀
불쾌하지도 않았고 아내는 전우회를 탈퇴해 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나는 비주류로
사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을 목회자의 세계에서도 비주류로 살아왔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에 의해서 씹힌다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될 수 없다. 인류역사에서
제일 많이 씹히는 사람은 아마도 다른 사람이 아닌 빌라도일 것이다. 2,000 년 동안 주일마다 수
억의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하면서
허구한 날 빌라도를 씹어 대고 있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단지 로마의 관리로서 정당한 공무집행을 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서 빌라도가 너무 억울해서 하나님께 제발 자기 이름을 좀 빼달라고 제발 호소를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듣기 싫더라도 네가
좀 참으렴. 인간들은 원래 누구를 씹지 않으면 심심해서 지내지를 못하느니라.”했다고 한다.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속한 집단과 '다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기가 속한 집단과 정서를 같이 하지 못하는 일을 형벌일 수 있다. 그러나 소외의 결과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내적 동기가 더 강화될 수도 있고 왜곡되어 나타날 수도
있는데 나는 전자 편이었다. 미운 오리 새끼는 오리가 아니라 백조였기 때문에 오리 사이에서 고독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을 편하게 살려면 물길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데로 살아야 하는 법이다. 조금이라도 역류를
한다고 하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이란 것은 어찌나 무서운 것인지 조금이라도 자기를
거스르는 것에는 용서를 하지 않는 법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이것이
세상이다’라는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