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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선다큐6부작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일 것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1942년 6월 독일 히틀러의 지시에 의해서 건립되어 1945년1월까지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 된 곳이다. 4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인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이 되었다. 이 곳에서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은 단지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에서 였다. 히틀러가 왜 그렇게 유대인을 싫어하고 학살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중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기 위해서 인종차별 정책과 독일인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정책을 펼쳤다. 당시 상당한 경제력을 지녀 정치. 경제 분야에 큰 영향력을 미치던 유대인들이 바로 인종차별 정책의 공격대상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도망치거나 숨어 살아야 했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이들을 샅샅이 찾아냈고, 이렇게 잡힌 유대인들은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가스실에서 소리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소련군이 수용소를 해방시켰을 때 그 안에는 죽은 자들이 남긴 안경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머리카락도 7,000kg이나 쌓여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이 끔찍한 죽음의 흔적이 극히 일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우슈비츠에 있는 다른 수용소들은 독일군들이 후퇴하면서 파괴하고 갔기 때문이다.
제1부 - '비극의 시작'. 폴란드 정치범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가 어떻게 유태인 수용소로 바뀌게 되었으며 나치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유태인 학살을 계획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제2부 - '명령과 복종'. 1941년 가을부터 1942년 봄에 걸쳐 나치의 유태인 학살 정책이 상부의 명령과 장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3부 - '죽음의 공장'. 1942년 나치가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수많은 유태인들을 한꺼번에 살해할 수 있는 죽음의 공장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제4부 - '부패'에서는 1943년 대규모 학살준비를 마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만연했던 부정부패와 그곳에 수용된 유태인들의 재산을 탈취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혈안이 되었던 나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5부 - '살인과 음모'. 1944년까지 아우슈비츠에서만 55만 명이 살해된 가운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압박해오는 연합국과 나치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다루고 있다.
제6부 - '해방과 복수(Liberation & Revenge)'. 1945년 1월 패배를 예감한 나치가 아우슈비츠의 내막을 은폐하기 위해서 어떤 시도를 했으며 종전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4년 반 동안 약 130만 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110만 명이 사망했다. 그 중 10만 명은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소수민족, 소련군 포로, 집시, 폴란드 정치범 등이었다. 그리고 100만 명의 유태인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 20만 명은 아이들이었다고 한다.
악이란 무엇인가? 영화 뉘른베르그에선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 악이 무엇인줄 알고 있습니까? 악이란 동정이 없는 것,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이해하지못하는것입니다. 모두가 느끼는 그런 감정을 전혀느끼는 못합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것 그것이 악입니다." 110만명이란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혹은 잔혹행위로 숨져간 곳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는 6부작으로 아우슈비츠의 생성과 생존자들의 그이후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아우슈비츠는 인간학살의 수많은 기술이 집약되어 만들어진 "살인공장"인데 그실험의 시작은 의외로 독일안에서 벌어진 장애자들에 대한 학살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단지 그들을 위해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이다. 지금의 가치론 이해할수없지만 당시만 해도 장애자는 제거 대상이었다고 한다. 영국에서 마져 처칠의 지시로 장애인에 대한 불임시술과 안락사(말이 안락사지 학살이다.)가 행해진적이 있다고 한다. 두번째 실험은 아우슈비츠내의 소련군포로를 대상으로 벌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진행된 살인공정은 42-43년동안 많은때는 하루 1만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아이들과 노약자, 부녀자들이 주대상이었으며 가장 많이는 유태인, 소련군포로, 집시, 반체제인사, 유색인종등등이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해방후엔 더욱더 이해할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생존자들은 대부분 집과 재산을 잃었으며 돌아가서도 냉대받고 살인과 성폭행등 수많은 범죄에 노출되어 죽어 갔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나치친위대 8천명중 검거된사람은 단 200여명 그중에 기소된사람은 17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대부분 전후 독일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했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치친위대인 사람에게 물었다. " 어떻게 이런일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수 있습니까?" " 당시는 전쟁때였고 그때는 모든것이 혼란스러웠다. 이전에 했던일에 대한 죄책감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말을한 사람도 최소한의 죄책감은 있었는지 나이가 드니 모든걸 이야기 하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죄책감은 추호도 없다. 역시 악이란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다른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전혀 이해못하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일본을 이야기할때마다 느끼는것도 바로 그런것이리라. "그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것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인류가 저지른 광기의 역사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는 문명을 배반한 야만의 극치이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행위의 흔적이다.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인 강제수용소로 잘 알려져 있는 아우슈비츠는 원래 인구 5만 명의
이 도시의 외곽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지옥을 만나게 된다.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유대인들을 실어 나른 철로, 고문실 등이 끔찍했던 광기의 역사를 전해 준다.
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 1940년 봄,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그 해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었으며, 1942년부터 대학살을 시작하였다. 열차로 실려온 사람들 중 쇠약한 사람이나 노인, 어린이들은 곧바로 공동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로 보내 살해되었다. 이처럼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4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3분의 2가 유대인이다.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다.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까지 썼으니 사람의 몸뚱이 중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우슈비츠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1945년 1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수용소 건물과 막사의 일부가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폴란드의회에서는 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희생자를 위로하는 거대한 국제위령비를 비르케나우에 세웠으며, 수용소 터에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나치의 잔학 행위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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