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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정민호
예전엔 그저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 때문에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를 읊었던 것 같은데요. 2014년 이후로 4월은 우리 모두에게 정말 잔인한 달이 되어 버렸습니다. 야속한 10년이 그렇게 지났습니다. 복음과상황에서 4월호에는 세월호 가족분들 이야기를 실어보자고 했습니다. 어떤 분께 인터뷰를 부탁드릴지 고민하다가 생명안전공원예배와 세월호기억관 앞 목요기도회에서 항상 음향을 담당해주시는 시찬 군 아버님, 박요섭 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님과는 예배와 기도회 때 인사드리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말씀을 나눠본 적은 없었는데요. 그래도 반갑게 맞아주신 시찬 아버님과 안산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소회의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단원고 2학년 8반 박시찬 아빠 박요섭이라고 합니다. 우리 시찬이는 예명을 꽁꽁맨으로 했어요. 12월생인데 얘가 겨울 아이라 자기 스스로 게임 아이디를 꽁꽁맨으로 적었더라고요. 전에 그 노래를 같이 부른 적이 있어요. “손이 시려워 꽁” 하는 동요를요. 거기서 따와서 스스로 자기 별명을 지었더라고요. 그래서 미스터 꽁꽁맨 아빠 박요섭입니다.
- 아버님께서는 어렸을 때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전에는 한 번도 교회 밖으로 나가서 생활한 적이 없던 사람이었어요. 모든 생활의 중심이 교회였고요. 교회를 떠나서 사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죠. 학교 다닐 때도 주말에는 무조건 교회에 와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고요. 성인이 돼서도, 직장생활을 할 때도 1순위가 교회였습니다. 교회 활동에 지장을 주는 직장이라면, 직장을 바꿨을 정도였으니까요.
- 저보다 형님이시지만 대충 저희 세대가 공유하는 어렸을 때의 신앙생활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성가대나 찬양팀에서 하는 활동이 낙이었는데요. 아버님도 찬양팀 활동을 좀 하셨죠?
1990년도부터 찬양팀으로 활동했어요. 찬양팀과는 연결이 끊어진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가족들과 고향을 떠나서 경기도 쪽으로 이사를 와서 교회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도 찬양팀을 만들고 그랬거든요. 찬양을 직접 못 할 때 옆에서 서포트를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하다가 음향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음향으로 친구들을 뒤에서 도와주는 일이 더 보람 있더라고요.
사진: 4·16 기억저장소 제공
- 시찬 군 이름도 ‘시와 찬미’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드셨다는 대목을 4·16기억저장소 글에서 읽었습니다.
제가 시편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젊었을 때는 시편을 많이 외우고 다니기도 했어요. 그래서 우리 아들 이름을 뭘로 지을까 하다가 시편을 묵상해보니까 ‘시와 찬미로 여호와를 찬양하라’ 하는 대목이 확 들어왔어요. 나중에 내가 찬양을 못 하는 순간이 올 때 우리 아들이 이걸 이어갈 수 있겠구나, 소망을 품고 시찬이 이름을 지었어요.
- 가만 보면 이 시절의 신앙이 묻어나는 이름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시찬이 이름은 흔한 이름은 아니네요. 이름이 진짜 예쁩니다.
우리 큰딸 이름을 예은이라고 지었어요. 나중에 딸이 너무 싫어하는 거예요. 학교에 들어갔는데 예은아, 라고 부르면 한 반에 네다섯 명이 돌아보니까요.(웃음) 그래서 시찬이는 좀 흔하지 않은 이름으로 지으려고 하긴 했습니다.
이하 사진: 4·16기억저장소 제공
- 시찬이도 찬양을 좋아했나요?
시찬이는 노래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대신 주일학교 교사인 엄마 따라가서 빔 프로젝터나 컴퓨터로 해야 할 일을 해주면서 엄마를 도왔어요. 시찬이도 교회를 떠나서 생활해본 적이 없었죠.
- 아버님 영향으로 기계도 굉장히 잘 만졌다고 하던데요.
좋아했어요. 손으로 만지는 것을 엄청 좋아했어요.
- 파일럿을 꿈꾸다가 나중에는 항공 정비 쪽으로 관심을 많이 가졌다고요.
왜 너는 비행사나 항공 정비 일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나중에 엄마, 아빠 태워주려고.” 그러더라고요. 시찬이는 이렇게 해준다고 하는 것들이 되게 많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어디 가서 먹을 게 생기면 꼭 주머니에 누나 거를 챙겨왔어요. 또 어떤 날에는 갑자기 저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아빠, 나는 아빠가 아프면 내 안에 있는 모든 걸 다 줄 수 있어.” 이런 이야기도 해줬어요. 다가와서 껴안고 뽀뽀하고 그래요. 사랑스럽고 정이 많은 친구예요.
- 저의 중고등학교 시절만 생각해봐도 아빠와 껴안고 뽀뽀한다…? 도저히 상상이 안 되거든요.
보통은 사춘기라는 걸 겪잖아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반항한 적도 없어요. 사춘기가 있나 싶을 정도로요. 수학여행 가기 얼마 전에도 와서 아빠 껴안고 뽀뽀해주던 아들이예요. “야, 남자애가 아빠한테 뽀뽀한다는 게 쉽지 않다” 그랬더니 “뭐 어때, 가족인데” 그러더라고요.
- 시찬이는 정말 가족에 대한 사랑이 정말 깊이 새겨져있던 친구네요.
시찬이는 항상 엄마 편이었어요. 저희도 여느 부부처럼 가끔 다툼이 있기 마련이었는데요. 아내와 말다툼을 하고 있으면 시찬이가 와서 “아빠가 참아” 그래요. 그러면 엄마도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 아빠가 얘기하는 거라고 하면 “그래도 아빠니까 참아, 엄마잖아” 이랬거든요. 엄마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늘 엄마 편이었고, 엄마가 퇴근 시간에 들어올 때 현관문 앞에 와서 딱 팔 벌리고 서있던 아들이었어요. 그런 아이였으니까… 엄마가 더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 4·16기억저장소에 시찬 군이 쓴 미래 일기가 있더라고요. 2027년에 아들을 낳았다고 상상하여 썼던 대목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습니다.
저희가 좀 대가족이거든요. 친척 아이들이 많은데 시찬이가 정이 많아서 되게 잘 챙기고 아이들을 너무 예뻐했어요. 아마 그런 영향도 있었겠죠. 시찬이는 여자친구도 사귀고 싶어 하고, 할 수 있다면 일찍 결혼해서 예쁜 가정을 가지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 이제 10년이 지나고 나니 시찬이 미래 일기 속 2027년이 오히려 더 가까운 시점이 되어버렸네요. 10년이라는 세월… 실감이 잘 안 되실 것 같습니다.
저희 부모들한테는 2014년 4월 16일 이후로 시간이 멈춰있습니다. 그 후에 사회적으로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런저런 변화는 많이 있었던 것 같지만, 저희들 마음은 아직도 거기에 묶여있는 것 같아요.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이 아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아야 된다는 저희 요구들이 좀 받아들여져야 하고요. 이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에 대한 진상 규명과 답이 주어진다면 저희도 조금씩이라도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을 텐데, 저희 마음은 여전히 10년 전에 묶여있습니다. 그 끈이 풀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 말씀드리고 싶네요.
- 초기에는 그래도 다들 애도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대형교회 중심으로 참사를 왜곡하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하면서 부모님들의 마음도 정말 많이 아프셨을 텐데요. 특히 아버님께서는 교회를 떠나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간을 사셨던 분이잖아요. 참사 이후로 신앙에 있어서도 회의와 실망은 이루 말하기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월호 참사가 저에게는 기독교, 특히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필터를 제공해준 것 같아요. 전에는 교회의 안 좋은 모습을 봐도 ‘그래도 하나님의 교회인데’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면, 참사 이후에는 필터가 하나 끼워지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혹은 하나님이 바라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게 된 것 같아요. 어떤 교회들을 보면, 그냥 보여주기 위한 활동만을 하거나 성도들에게 위안만 주려는 설교를 하는데요. 정말 시대의 아픔과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서 하는 설교는 좀 다르게 들리더라고요.
참사가 터진 때가 사순절 기간이었어요. 그다음 주가 부활주일이었는데 현장에 있다 보니까 교회를 못 가잖아요. 이게 오랫동안 몸에 배어있던 습관 때문인지, 예배를 못 드리니까 몸부터 반응해요. 전신이 너무 힘들고 못 버티겠더라고요. 그렇지만 그 현장을 어떻게 떠나겠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 그다음 주엔가 진도에 있는 한 교회를 찾아가서 예배를 드렸어요. 그냥 맨 뒤에서 엎드려 울다가만 나왔습니다. 어떻게 갔다 왔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절실했어요.
제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도 요청드렸는데요. 교회가 좀 복잡해지긴 하겠지만 예배가 너무 드리고 싶다, 와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주시면 안 되겠냐 했는데 결국 안 해 주시더라고요. 정말 이게 뭐지? 나는 지금 예배가 정말 필요한데, 예배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교회는 왜 99마리 양만 보려 하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해서는 이렇게 무심할 수 있지? 정말 힘든 시간들을 보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게 저를 성장시킨 것 같아요. 교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를 잘 안 나가게 되더라고요. 저희 부모님이나 가족분들도 다 걱정하시죠. 안 나가면 어떡하냐고요. 다들 교회를 떠나면 큰일 날 줄 아는 분들이시거든요. 그분들께 제가 안 나가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어요. 일단 어디를 정해서 교회를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신 이거 하나만은 알아주라. 예배를 안 드린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세월호 참사 이전이나 이후에도 전혀 이상이 생긴 것이 없다. 그대로다. 하지만 한국교회와 나 사이의 관계는 180도로 변했다. 교회를 떠났다고 해서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니까 이해를 하시더라고요.
이하 사진: 성서한국 제공
- 아버님께서는 매월 첫째 주 주일 오후 5시에 안산 생명안전공원 부지에서 드리는 예배와 매월 셋째 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에 세월호기억관 앞에서 드리는 목요기도회에 항상 음향으로 섬기시고 있으신데요. 묵묵히 예배 현장을 섬기고 지키는 요즘의 마음은 어떠신지요?
대형교회는 물질로는 저희를 도와주려고 한 적이 있지만 실제적으로 저희가 진짜 원했던 진상 규명과 저희들의 아픔에 동행하는 일은 거의 외면했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한국의 대형교회들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걸어놨지만 사실은 십자가가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지 않나요? 앞에서는 그럴싸한 설교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장로가 되고 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교회들이 또 사회적으로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바닷물이 썩지 않는 것은 3%의 소금 때문이라고요. 3%가 굉장히 미미한 것 같지만 바닷물 먹어보면 되게 짭니다. 저는 한국교회도 이런 구성이 아닌가 싶어요. 97%가 썩어서 냄새가 나도 나머지 3%가 생명력을 발휘해서 한국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현장에서나 길거리에서 경험해보면 진짜 소금 같은 분들은 힘이 없어요. 어디 가서 내밀 백도 없고요. 그분들은 그냥 하나님께 기도드려줄 뿐이고 우리 옆에 그냥 앉아계실 뿐인데, 사실은 제일 든든하거든요. 그분들이 옆에서 마음을 나눠주는 게 너무 소중합니다. 저희는 그것 때문에 버틸 수 있고 또 앞으로 걸어갈 수 있거든요.
그런 소중한 분들 때문에 이 예배를 계속 이어가고 있어요. 그래도 예배를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요. 초기에 유가족들 중에 교회를 못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예은 어머님(박은희 전도사)이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면 우리끼리라도 예배를 드리자고 해서 컨테이너 예배가 시작됐습니다. 컨테이너가 철수되면서는 생명안전공원 부지에서 예배드리게 됐고요. 매주는 못 드리지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참 소중한 것 같아요.
- 생명안전공원 부지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어떤 은혜를 경험하고 계실까요?
생명안전공원 부지에서 자연의 사계절을 느끼면서 예배를 드리다 보면, 그곳에서 자연의 모습을 보는 게 꼭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보는 것 같더라고요.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춥든 덥든, 어느 날은 또 화창하고 좋기도 하고 너무 따뜻하기도 하고요. 또 어떤 날은 날씨가 안 좋을 때도 있지만 좋은 날도 되게 많은데요. 그런 변화하는 모습들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어요. 너의 상황에 맞게 내가 널 바라보고 있어,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듭니다. 위로를 많이 받아요.
건물 안에서의 형식적인 예배와 설교 속에 갇혀서 그냥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그냥 누가 뭐라고 안 해도 자연스럽게 스스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그런 예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그런데 이 생명안전공원이 아직 첫 삽도 못 뜨고 있는 상황이라 무척 안타깝습니다. 여전히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현재 생명안전공원 건립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처음에는 정부에서 안산시 공원묘지 옆에다 만들자는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들 입장에서 그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전까지 다른 참사 때도 보면 사람들이 잘 찾아가지 않는 외진 곳에 추모비 같은 것을 짓곤 했는데요. 그게 용납이 안 됐어요. 우리 아이들이 살던 곳, 우리 단원고 아이들이 가장 많이 뛰놀던 장소에 아이들이 오면 좋겠다고 해서 정해진 곳이 지금의 부지입니다. 아름다운 공원으로 지어서 누구나 와서 편히 쉬고, 같이 웃고 떠들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세월호에 대해서도 알게 해주자는 것이 저희 가족들 뜻이었어요.
그런데 반대가 되게 심했어요. 주민분들 반대도 컸지만, 특히 박근혜 정부의 방해도 많았고 추진 자체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우리 엄마들이 싸우고 싸워서 겨우 지금까지 진행시켰어요. 반대하는 주민들 다 만나서 설득하고 온갖 싫은 소리는 다 들으면서 진짜 엄마들이 피눈물 흘리면서 추진했어요. 원래는 10주기 때 완공해서 들어가기로 되었던 계획이었는데요. 문재인 정부 때도 분명히 약속한 부분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진행된 것이 없었어요. 예산 문제 때문에 갑자기 정부 타당성 심사를 받고 하면서 계속 미뤄져왔어요.
정말 수많은 일이 있었는데요. 올해 초에 드디어 기재부 승인은 났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건립을 반대하던 안산시장도 찾아와서는 6월 정도면 예산에 맞는 설계를 다시 하고 10월쯤이면 착공 첫 삽을 뜰 수 있지 않겠냐고는 했는데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잘될 것 같다가도 미뤄진 적이 너무 많아서요.
- 정말 이번에는 꼭 착공이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많은 곳에 흩어져있어요. 어떤 아이는 집에 있기도 하고요. 전국에 흩어져있어요. 주로 3개의 추모시설에 많이 있거든요. 그 아이들도 얼마나 친구들을 서로 보고 싶어 할까, 서로 만나고 싶어 할까 싶어요. 아이들이 한곳에 모이고, 또 그곳에서 부모들이 함께 아이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빨리 만들어지기를 저희는 소망하고 있습니다.
- 요즘은 어떤 기도를 가장 많이 하시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특별하게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아요. 그래도 한 번씩 기도할 때는 있어요. 나를 위한 기도는 안 되는데, 주변에 누가 아프다거나 같이 활동해주시는 분들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또 하나님을 찾게 되더라고요. 우리에게 힘이 되는 분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좀 그렇긴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조금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세월호 배 안에서 기도했잖아요. 같이 모여서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잘 도착하게 해달라고, 여행 잘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그 생생한 영상이 있잖아요. 정말 아무것도 다른 뜻 없이 순수하게 드렸던 우리 아이들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으셨잖아요. 그 아이들이 다 돌아오지 못했고, 그러면서 제가 드리는 기도의 의미를 찾으려다 보니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응답이 없었는데 내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과연 응답하실까, 라는 회의감이 들어서 이제는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에 대한 기도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저 주변에 누가 아프고 힘들다고 하면 그분들을 위한 기도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라도 이렇게 한 스푼 더 얹고 싶은 마음에서 드리는 것이지, 다른 기도는 없어요.
- 마지막으로 복상 독자분들과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 한마디를 부탁드립니다.
기독교는 기억의 종교잖아요. 예수님을 2천 년 동안 기억하면서 그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영원한 생명 천국을 소망하면서 모이는 게 교회잖아요. 저는 우리가 세월호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되는 이유도 같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기를 중단한다면 참사의 당사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진도체육관에 있을 때 2013년에 일어난 공주사대부고 병영체험학습 참사의 부모님들이 오셨어요. 그분들이 무릎 꿇고 막 우시면서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당신들이 간절하게 싸우지 못해서 이런 참사가 또 벌어진 것 같아 너무 죄송하다고요. 그분들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처절하게 싸워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버텨왔는데 2022년 10월에 이태원 참사가 터지면서 저희 부모들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싸워왔던 의미가 무엇이었나, 그동안 이루어낸 것이 뭐였나 하는 회의감이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또 반복되지 않도록 조금만 더 관심 가져주시고 마음을 모아주시면 좋겠습니다. 특별한 것이 아니더라도 노란리본이나 팔찌를 달아주시는 작은 행동으로도 저희는 큰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지금 생명안전기본법을 만들기 위해 추진 중에 있거든요. 그런 법들이 제정돼서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가 법 조항에 들어갈 수 있게끔 하려고 합니다. 다음 세대는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질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우리가 더 노력하면 좋겠어요.
- 생명안전기본법 추진은 좀 진전이 있나요?
국회까지 올라갔다가도 또 여야 합의 불발로 계속 분산되고 있어요. 항상 한쪽에서 너무 강하게 반대하기 때문에 국회에 올라가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듭니다. 저희가 특별법 추진할 때도 보면 계속 그랬잖아요. 상정했다가 조항 하나 때문에 계속 미뤄지고요. 좀처럼 합의가 안 되니까 이것저것 양보하다 보니 결국은 누더기법이 됐는데요. 생명안전기본법은 제발 누더기법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만들기 위한 투쟁도 너무 힘들잖아요. 저희가 그 현장을 다시 목격하니까 정말 예전의 트라우마가 그대로 몰려왔거든요. 자신들의 유익과 입장 때문에 이 법이 좀 눈에 거슬린다고 하더라도, 만들어지면 결국은 그 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지켜줄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런 마음으로 그분들도 협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인터뷰를 마치고 혹시 더 추가하실 말씀 없으신지 시찬 아버님께 여쭈었습니다. 저에게 해주신 말씀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깁니다.
“무슨 말을 정리해서 해야 될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어요. 미련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해줄 말이 있거든요. 미련이 없으면 관심도 없고 해줄 말도 없거든요. 제가 한국교회에 해줄 말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미련이 없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한없이 아득하게 느껴졌습니다. 늘 쓰던 내비게이션 앱을 켜고 운전했지만 길을 잃은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을 외면하고 배척하는 것이 이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진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많은 교회가 여전히 그 선봉에 당당하게 서있는 것 같아서 더 착잡합니다. 그래도, 그래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다시 확인해야겠죠. 길이 보이지 않아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결국엔 길이 될 것입니다.
진행 송지훈 성서한국 사무국장
첫댓글 생명안전기본법이 꼭 만들어지길~
한국교회에 해줄 말도 없고, 관심도 없고 미련도 없다는 말~너무 아프고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한국교회가 정말 변화되어야 하는데 어쩌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