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는 무엇이고 본능이란 또 무엇인가?
이제는 내게서 흘러내려간 단어들일 뿐이다.
언제부터 나는 이리도 온순한 화초처럼 살기 시작했을까?
나를 관찰해보면 참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나의 주관은 어디에서부터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랴?
글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내 안에서 나를 간추리려고 안달하는 ‘내 안의 나’와 되는대로 흩트리려는 ‘밖의 나’가 싸움질을 시작했다.
내가 흔들려 보일 때에는 밖에서 마구잡이로 흔들어대는 내가 한 힘을 단단히 썼던 것이고 다소곳하게 처녀 같은 몸 매무새를 하고 있을 때에는 안에서 정중히 나를 보듬고 있는 내가 나를 잘 보좌했음이다.
글쓰기.
오랫동안 머금었던 생각이니만큼 내게 숱한 매력을 안겨준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나는 점점 글에 끌려 다니는 것이 확실해지고 있다.
무엇을 얻기 위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내게서 뿜어내질 글속에 어떠한 자양분이 숨겨진 것이랴.
가끔은 중요한 무엇이라도 얻은 듯이 휘둘러서 찾은 종이에다가 흐려 쓴 글귀가 특허라도 따낸 듯 우쭐하게 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그만큼 하잘 것 없는 것도 없다.
여기에서부터 내 지지리도 못난 겸손은 시작되는 것이고 그러한 것들이 산재되다보니 나는 어느새 겸손을 가장한 비굴한 글쓰기 꿈을 안고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늘 똑 같은 모양의 글들을 조각하며 내 일상이 그렇듯 나는 내게서마저 질려가고 있다.
점점 내 안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무의 살을 꿰뚫으며 새 순이 돋아나는 것과 같이 내가 내안의 무언가를 쓰러뜨려야만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가치관이 달라진다는 것은 삶의 좌표를 바꾸는 것과 같음이다.
평범하고 소리 나지 않는 일상을 깨어 부술 수는 없는 일이고 내 안에 점차적으로 들여지는 현란한 유혹들을 어쩌면 용해 시켜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것이 삶의 원리이겠지만 내게 속한 그 어느 것도 버릴 수 없는 지경이니 품고서 살아갈 방도밖에 없음이다.
말하자면 내킬 때 글도 쓰고 짬짬이 책도 보고 더 한가하게 집안일도 해야만 한다.
조금 있으면 부모님 수발까지 들어야하는 입장이니 일복 타고났다고 하던 어느 역술가의 말이 딱 들어맞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면 휘청대며 어지럼증이 일어난다.
내가 내 생활에서 깨어 부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안에는 내재(內在)된 무수한 울림이 있다.
차분하게 정돈된 듯하던 세계를 송두리째 흔들려는 회오리 같은 힘.
안으로만 품고 있기에 현기증이는 황홀한 유혹이다.
그들을 밖으로 내어 놓아야 함이다.
조용하던 내 일상을 망가뜨리려는 그 세계를 밖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표현하기에 두려움 일던 그런 나이도 지났고 내어 놓기에 망설임도 없는 것들이다.
보이는 세계를 표현하는 글은 한계가 분명히 있음이다.
진부하고 발전도 없어 보이고.
진정한 글쓰기를 원한다면 파괴력 동반한 글을 씀도 좋을 듯 하다.
“당신이 쓰는 글이 도대체 무슨 의미 있는 글이기에 매일 그렇게 매이냐?”
남편은 지금껏 내가 썼던 단정한 글 두 편만을 읽었을 뿐이다.
그 글을 읽고 하릴없이 바깥나들이 하지 말고 집에 들어앉아서 글 쓰라고 위로를 해 주었던 적도 있다.
가장 가까이 머무는 남편의 동조도 얻지 않은 채 깨트리는 글을 쓰려함은 망설임을 안겨준다.
이 여린 마음조차 나이를 의식하는 것이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어디에서 가져지는 느낌일까?
얼굴에 늘어나는 잔주름.
머릿속에 슬쩍 섞여진 새치.
그도 아니면 밤마다 섹스를 하며 힘이 부대낄 때.
불행히도 나의 나이 의식은 그런데서 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것은
내가 사치스럽게 나를 치장할 때 나는 내게서 초라한 나를 의식하게 되고
속에서 늘 솟구치던 도전적인 생각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한없이 우울하다.
그러나 더 솔직히 내가 내게서 나이 들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나보다 나이가 적은 여성에게서 느끼는 탄력이다.
나에게서 늘 빠트려지지 않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떠한 일에도 굴절되지 않고 용수철이 솟구치듯, 오뚝이가 발딱 일어나듯, 좌절치 않던 나의 의식이다.
그러했던 것이 어느 날 인가부터 흐리멍덩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어떠한 일이 발생했을 때에 조목조목 따지기를 좋아했고 무슨 일이든지 이가 맞아야만 만족했던 나였다.
가족들 중에서 내가 한 일을 따지려고 했던 이는 없었다.
수식의 해답처럼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그러했던 내가 점점 이가 빠진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해 놓고도 헷갈리는 것이 너무 많은 요즘.
단지 나이가 늘어 뇌세포가 줄어든 까닭이라는 변명을 내어 놓고 싶지는 않다.
변명이라고 꺼냈다가 나는 얼마나 더 많은 말을 되받을 것인가?
무조건 다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게 익숙해진 생각이니 더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러한 무조건으로 헤아리려 했던 의식이 점점 더 나를 나른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궁금하지 않다는 것은 더 이상의 발전된 생각을 기대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당신을 향한 궁금함이 없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같은 이치이랴?
어떠한 일에 시시콜콜 캐물어지지 않는다는 것.
허나, 궁금해 하지 않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가려 있다.
주위 가족들 사이로 얻었던 파장들 틈에서 어느 정도 역한 상황은 짐작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통수로 지레짐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여 남편과 두 아이를 둔 어미가 되었지만 나는 한번의 결혼을 더 하여야 할지 모르겠다.
글을 쓰기위하여 치러야할 웨딩.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의 이웃이었고 조금 더 지나서는 친구처럼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나의 많은 부분을 원하고 있어 이제는 글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그의 배우자가 되려하고 있다.
밥을 먹으면서도 그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고 내게 주어질 모든 희로(喜怒)애락(哀樂) 속에서 나와 공존될 글.
내가 잠들지 못하는 시각에도 그와 뒹굴며 사랑하여야 할 것이니 그는 내게 무한(無限)의 세계를 안겨줄 이 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한없이 울려대는 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있다.
그 음은 나를 진동하여 산산조각으로 내 몸을 터트릴 파장을 담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또한 내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니.
첫댓글음...이글에 대해선 좀 길게 쓰고 싶은데..시간이 좀....공감합니다..이런 거,당면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이해 못하거든요..늦은 밤이면 글을 써야 한다고 각방 쓰기를 종용하다가 이혼의 사유가 된다해서 이혼당할뻔 했던 여자 소문 아직 못들으셔쪄....ㅇㅎㅎㅎ..할수있나요 뭐...결혼 두번 해야쥐...^^
첫댓글 음...이글에 대해선 좀 길게 쓰고 싶은데..시간이 좀....공감합니다..이런 거,당면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이해 못하거든요..늦은 밤이면 글을 써야 한다고 각방 쓰기를 종용하다가 이혼의 사유가 된다해서 이혼당할뻔 했던 여자 소문 아직 못들으셔쪄....ㅇㅎㅎㅎ..할수있나요 뭐...결혼 두번 해야쥐...^^